송교인식의 정치가는 중국을 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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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송교인)

2013. 11. 16.

글: 정만군(程萬軍)

 

 

 

송교인암살100주년을 맞이하여 무수한 찬양의 글을 볼 수 있다. 다시 한번 중국인의 오래된 고질을 느낄 수 있었다. 누가 좋다고 하면 무한히 끌어올린다. '호인'의 과실과 반성을 얘기하는 글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신해혁명후의 중국제일정당의 실제창시자로서 송교인이 대단한 인물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담화일현(曇花一現)의 중국헌정과 의회제에서 그의 공로는 거대하다. 다만 송교인의 공헌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주로 승리후의 건설에 있다. 중국의 운명을 바꾼 것을 얘기하자면, 이 "지필정치가(紙筆政治家)"의 공헌은 혁명을 위하여 생사를 넘나든 손중산(孫中山)과 황흥(黃興)에는 훨씬 미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송교인이 대만국민당사에서 오늘날 대륙학계의 평가처럼 높게 평가받지 못하는 원인이다. 그가 손중산과 사이가 나빠서가 아니라, 그의 정치이상과 수단은 모두 '헌정성공후'에 건립되었다. 그렇다면 성공전의 일은 누가 한단 말인가? 모두 손중산이 '대포(大炮)'라고 말한다. 다만 손중산이 없으면 청왕조가 무너졌겠는가? 송교인, 장태염이 백명이 있고, 글을 만편을 썼다고 하더라도, 만청을 어찌할 수 있었겠는가

 

오늘 대력의 기념자가 하는 말을 들었다. 송교인과 같은 이런 정치가는 다시 없을 것이다. 내 생각에 이것은 토양문제이다. 재능문제가 아니라. 헌정의 토양이 있어야, 송교인과 같은 '문인정치가'가 우후죽순처럼 나타날 것이다. 중국에 어느 시대이든 '순수문인'이 부족한 적이 있었던가? 보기드문 것은 손중산, 황흥처럼 '동구우동수(動口又動手, 입도 쓰고 주먹도 쓰는)" 투필종융자(投筆從戎者, 붓을 집어던지고 군에 들어가는 사람)이다.

 

역사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중국의 왕조교체, 독제종식의 유일한 효과적인 수단은 폭력혁명이었다. 이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었다. 백성들이 온화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중국통치자의 양심이 발현된 적이 없고, 지치지도 않고 계속하여 군대로 통치를 유지했기 대문이다. '이폭제폭(以暴制暴, 폭력으로 폭력을 제압하다)'의 능력이 없으면, 수재(秀才)의 반란으로는 삼백년이 흘러도 완성할 수가 없다.그래서 오래되었고, 재난이 침중했던 중화대지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칼과 총을 들고 일어서서 피를 흘리며 싸울 줄 아는 손중산과 황흥이었다.

 

만청통치를 무너뜨리는 혈로에서, 손중산,황흥이 피를 흘리며 싸울 때, 송교인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주로 후방에서 장태염과 함께, 손중산등이 모아온 자금으로 신문을 만들었다. 그 어떤 의거도 그가 일으킨 것은 없다. 심지어 무창의거때 그에게 대국을 주재하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가지 않았다. 그래서 구관료 여원홍이 그 빈틈을 차지한 것이다. 신해혁명승리후, 그는 손중산보다 한 걸음 앞서서 도착하여, 손중산을 모셔와서 정국을 주재하는 것을 거절하며, "나에게 병력이 있다(我有兵力)"고 말한다.'과실을 따먹기(摘桃子)" 위하여, 하마터면 혁명진영내에 내분을 일으킬 뻔했다. 실의퇴당(失意頹唐), 득지창광(得志猖狂). 그래서 사람들은 송교인을 "영이불웅(英而不雄)"이라고 평하는데, 아마도 답안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동맹회와 국민당에서 송교인의 지위는 왜 손중산, 황흥보다 뒤인가? 왜냐하면 동지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창의거와 손중산이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연중의 필연이다. 손중산이 십여년을 하루같이 무장의거를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무창에서 이 날을 맞이할 수 있었겠는가? 손중산이 세대의 위인인 이유는 그가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완고한 통치자를 상대할지 알았기 때문이다. 말로 새기는 것보다는 행동으로 새기는 것이 낫다.

 

송교인은 그저 일이 완성된 후의 일만 생각했다. 일을 성공시키는데 중요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혁명이 일단락된 후, 송교인의 마음은 "조각(組閣)"에 가 있었다. 꽃병총리가 되기를 원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이상은 좋다. 다만 당시의 정치세력 국면에서는 공중누각일 뿐이다. 당시 사람들이 송교인에게 붙여준 별명은 "의회미(議會迷)"이다. 찬양하는 것인지 놀리는 것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분명할 것이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신해혁명은 하나의 "종이상의 승리"이다. 북양군벌이 최대승리자이다. 그들은 수중에 정권을 확실히 잡았다. 많은 사람들은 손중산이 나중에 군대에 의존하여 반원세개조치를 취한 것이 잘못이라고 하지만, 만일 북벌군이 없었더라면 중국은 영원히 군정에서 헌정으로 넘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송교인의 비극은 바로 그 종이의 승리를 가지고 진정한 승리인줄 알았다는 것이다. 입을 놀려서 군사정부에게서 정권을 빼앗아 오겠다는 것은 손중산, 황흥은 반대하지 않겠지만, 구관료군벌인 원세개가 동의할 것인가> 그래서 죽는 것이 필연이었다.

 

송교인의 명석하지 못한 점은 토비의 굴에서 군자게임규칙을 건립하려 한 것이다. 문제는 군자게임규칙을 건립해야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자신에게 그런 실력이 있느냐 여부이다. 무슨 수단으로 이 토비굴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이다. 토비굴에서 군자가 주인이 되고, 토비두목이 장악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폭력혁명을 포기하고, 독재자의 양심이 발현되기를 기대하는 순수문인은 근대중국에 수도 없이 많이 나왔다. 무궁무진한 환상은 항상 통치자의 총탄에 머리가 뚫리며 끝났다. 자주혁명이 없이 진정한 해방은 있을 수 없다. 민주역량으로 정권을 탈취하지 않으면, 진정한 헌정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는가? 종이를 가지고 호랑이에게 가죽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은 결국 호랑이 아가리에 자신을 들이미는 꼴이다.

 

송교인의 암살을 '백년의 수수께끼'라고 하는 것은 필자의 생각으로 대부분이 '인조 수수께끼'라고 본다. 송교인을 죽일 동기는 '권력'이라는 두 글자로 충분히 설명된다. 어떤 사람은 원세개를 위하여 사건을 뒤집으려 하고, 혁명진영 내부인사가 송교인을 암살했다고 의심한다. 심지어 창끝을 손중산에게 돌리기도 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소인의 마음이다. 손중산은 원세개와도 다투지 않았다. 그런데 송교인과 다퉈서 뭐하겠는가? "의회미"가 일인천하에 뜻을 둔 "권력야수"를 만나면, 죽는 수밖에 없다. 흉수가 기이하게 사망하고, 원세개의 대내총관 조병균이 급사한 것에 이르기까지, 원세개가 송교인을 죽일 동기로서 부족하단 말인가? 사람들은 원세개가 송교인을 '조카로 대했다'고 말한다. 그러니 독수를 쓰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역대중국왕조의 '권력야수'의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권력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조카'도 신경쓰지 않는다. 누구든지 '가희진주(假戱眞做)'로 자신의 황위를 위협하면 친골육이라도 남겨두지 않는 법이다.

 

송교인이 암살당하여 죽기 전에, 유서를 남겨서 원세개에게 "포공도(布公道), 보민권(保民權)"을 당부했다. 이것은 서생의 마지막 순간 환상이다. 혹은 그때까지도 여전히 깨닫지 못한 것이다. 이년 후 이 원세개는 '중화제국황관'을 쓴다. 이렇게 다시 한번 황천에 이미 간 도원어부(桃源漁夫, 송교인을 말함 호가 어부이고, 고향이 도원임)를 역습한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송교인은 경험도 없고 실력도 없는 초보정치가이다. 그의 유일한 희망은 통치자의 양심이 발현되어, 스스로 정권을 백성에게 넘기기를 기대한 것이다. 그의 유일한 수단은 타협과 선거에 의존하여 단기간내에 정권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것은 서생형 정치가의 환상이다. 진정한 정권혁명이 완성되기 전에 영원히 성공할 수 없는 방식이다.

 

세계각국의 정치상의 여하한 변혁을 보더라도, 먼저 정권의 싸움이다. 중국의 무술변법과 신해혁명은 왜 모두 용두사미였을까? 그런데 일본의 명치유신은 한꺼번에 성공을 거두었을까? 원인은 전자가 진정한 정권교체를 이루지 못했기 대문이고, 후자는 먼저 무장혁명으로 보수관료정부를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그후에 유신역량이 정계에서 권력을 잡고 곧이어 정권개혁을 이룬 것이다. 그리하여 수도거성(水到渠成)할 수 있었다.

 

이런 각도에서 보자면, 송교인암살후, 손중산이 말한 "이차혁명"은 필요하고 필수적이었다. 그의 유지인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동지들이 계속 노력해야 한다"는 말의 요체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송교인은 생전에 손중산의 고심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에 기치를 높이 든 황호학생군, 중화대지의 '후황하강지사'들이 그의 영전에 위로를 바칠 수 있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