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위(康有爲)의 죽음: 칠규유혈(七竅流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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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강유위)

2013. 11. 24.

글: 동도(同道)

 

- 선생은 오늘날 온 나라사람들이 질시를 받고 있다; 만일 언젠가 20세기 신중국사를 쓴다면, 나는 그 첫페이지에 반드시 선생의 정신,사업을 기술할 것이다. 사회원동력이 시작된 것이다. 선생은 과연 중국에서 시대를 앞서간 인물중 하나이다.(양계초)

 

- 남해 강유위 선생은 우리나라 근대선각자의 한 명이다. 천하에서 인정하는 것은....우리들이 오늘날 약간의 세계지식을 가진 것은 그 원천이 강유위, 양계초 두 선생의 덕분이다. 두 선생의 유신각세의 공로는 우리나라 근대문명사에게 크게 쓰여져야 한다. (진독수)

 

- (강유위)는 진화와 진보의 사상이 전세계에서 바람처럼 구름처럼 일어날 때, 중국의 고전전통과 결합하여, 앞장서서 현대의 한 돌파구를 열었다. (비정청)

 

생졸년: 1858-1927

향년: 69세

사인: 식중독

최후의 말: "중국에는 내가 입추(立錐)할 곳조차 없다. 그러나 나는 외국에서 죽을 수는 없다.

주요사상: 미래세계는 공유제가 사유제를 대체하고 천하위공(天下爲公), 세계대동(世界大同)한다.

인생이상: 군주입헌제 추진, 세계대동 전망

주요저작: <대동서>, <강자편>, <신학위경고>, <춘추동씨학>, <공자개제고>, <일본변정고>, <구주십일국유기>, <광예주쌍즙>등

 

1927년 3월 18일, 강유위는 상해에서 배를 타고 청도로 간다. 파도가 치는 바다를 보면서, 그는 십일전 일흔살 생일을 생각한다. 수연이 열리기 전날, 부의는 사람을 보내어 친히 쓴 "악치연청(岳峙淵淸)" 편액과 옥여의(玉如意)를 선물로 보내왔다. 이것은 강유위로 하여금 은총에 몸둘 바를 모르게 만들었다. 전청의 관복을 차려입고 천은에 감사했다. 대청제국이 이미 사라진지 16년이 되었다는 것은 신경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절을 마치고, 다시 붓을 들어, "사은절(謝恩折)"을 한편 쓰는데 손으로 소해(小楷)로 썼다. 천부를 인쇄하여 하객으로 온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이것은 그가 일생중 마지막으로 제국현신의 명의로 '황상'에게 올린 '주절'이다.

 

수연 당일, 친구들과 제자들은 상해의 '유존려(遊存廬)"에 몰려들어 강유위의 생일을 축하한다. 강유의의 득의문생 양계초도 수련(壽聯)을 써서 보낸다:

 

술성현지현의(述聖賢之玄義), 정백가지부제(整百家之不齊). 입차세래년칠십의(入此歲來年七十矣);

봉상두어국수(奉觴豆於國叟), 지환흔어춘주(至歡忻於春酒), 친수업자개삼천언(親受業者蓋三千焉).

 

전체 글은 <사기>, <한서> 및 <정강성집>의 문구로 만들었다. 자연스럽고 적절했다. 강유위를 공자

에 비유하니 스스로 '강성인'으로 자처하던 강유위로서는 기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때 북벌군은 보무당당하게 상해로 진군했고, 손전방(孫傳芳)은 연전연패하고 있었다. 강유위는 아주 당황하여, 온가족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서 북벌군의 봉망(鋒芒)을 피했다. 그래서 청도로 가게 된 것이다.

 

청도에 도착한 후, 강유위는 이전에 사두었던 천유원(天遊園) 별장에 거주한다. 3월 29일, 그는 중산로의 광동요리집 영기주루(英記酒樓)로 가서, 고향사람들의 연회에 참석한다. 오렌지쥬스를 한 잔 마신 후, 그는 돌연 참기힘든 복통이 왔다. 급히 집으로 돌아갔으나, 그날 밤에 구토가 멈추지 않았다. 두 명의 의사를 불렀는데, 그중 한 일본의사는 식중독으로 진단한다.

 

30일, 하룻밤동안 구토를 한 강유위는 독이 이미 빠져나갔다고 생각하여, 저녁에 평상시처럼 밤에 천상(天象)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보기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돌연 혼자서 소리친다: "끝났다. 끝났다."

 

31일 새벽 2시, 그는 돌연 곁에 있는 사람에게 말한다: "중국에는 내가 입추(立錐)할 곳조차 없다. 그러나 나는 외국에서 죽을 수는 없다." 마치 후사를 부탁하는 것같았다. 5시경, 강유위는 "칠규에 피를 흘리고 죽었다."

 

강유위의 사망은 공자의 "지천명(知天命)"의 뜻을 얻은 것처럼 보인다. 강유위의 딸인 강동벽(康同璧)은 <남해강선생연보속편>에서 이렇게 기재했다. 강유위는 70세생일을 마친 후 상해를 떠나기 전에, 친히 유고를 점검하고, 예복을 휴대해서, 떠나기 전에 집안을 여러번 돌아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상해와의 인연이 끝났다. 그후 그의 사진을 친구들에게 나누어주고 기념으로 삼았다. 마치 자신이 영원히 이별하게 되는 것을 아는 것처럼.

 

청도에 도착한 후, 사수사은절을 쓸 때, 몇 줄을 쓰기도 전에 통곡을 했다. 글을 다 쓴 후 가족들에게 말한다: "내 일은  끝났다. 내 일을 끝났다. 너희는 이 글을 귀중하게 여겨라." 강유위가 말년에 청도에서 교분을 맺은 후배 이가량(李可良)이 <나의 인상속에서의 강유위>라는 글에서 이렇게 기술한다; 죽기전에 강유위는 가족들에게 개별적으로 안배와 당부를 남긴다. 오로지 구꾸냥(九姑娘)에게만은 말을 남기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그에게 묻자, "그녀는 나와 함께 갈 것이다. 너희가 신경쓸 것없다." 과연 강유위가 죽은지 며칠 후에 구꾸냥도 따라 죽는다. 죽을 날을 예견한 것을 보면 강유위의 죽음은 평범하지 않다. 그리고 신성한 의미도 지닌다. 강유위가 죽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자들이 부의에게 "인충(仁忠)"이라는 시호를 내려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거절당한다. 그리고, 그의 영구를 청서릉 광서제능침의 옆에 묻어서 군신이 함께 하도록 하려 했으나, 경비가 부족하여 못하고 만다.

 

10여일후 영구는 청도 이촌 조아산(棗兒山, 어떤 사람은 '象耳山'이라고 씀)에 매장한다. 이곳은 생전에 강유위가 남방에서 풍수선생을 모셔서 3일동안 비를 맞으면서 찾아낸 곳이다. 강유위의 장례를 목도한 황인명에 따르면, 당시의 장례식은 아주 거창했다고 한다. 원래 두 필의 말이 끄는 마차로 관목을 조아산의 위로 끌어올리려고 했는데, 산세가 험준하여, 마차로는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사람들이 들어서 올린다. 마차의 앞에 "조(罩)"라는 장식이 있는데, 큰 꽃을 묶었다. 그리고 강유위의 자녀들은 모두 소복을 입고 짚신을 신었는데, 매장후에는 자녀들이 짚신을 버리고 맨발로 돌아가서 효성을 표시했다.

 

강유위가 죽을 때, 처첩자녀들은 그의 곁에 있지 않았다. 제자들도 각지에 흩어져 있었다. 양계초는 북경에서 사망소식을 듣고, 실성통곡한다. 그해 4월 17일 강유위의 제자를 선무문 성남쪽 기포선철사에 소집하여 공제(公祭)를 지낸다. 제자들은 눈물콧물을 흘리고, 양계초는 오열하며 제문을 읽는다: "오사시중국여명(吾師視中國如命),...사탁고이개제(思托古而改制), 작신민이매진(作新民而邁進)...계백일지설시(繫百日之設施), 실굉원이주상(實宏遠而周詳)....후유작신중국사자(後有作新中國史者), 종부득불이무술위제일장(終不得不以戊戌爲第一章)"

 

윗글에서 강유위가 죽기전 며칠의 상황은 주로 강유위의 고향사람이며 제자이고 전청왕조때 거인(擧人)인 여진문(呂振文)과 강유위의 외조카 이운광(李雲光)의 기록에 쓰인 내용이다. 두 사람의 기술은 약속이나 한 듯이 똑같이 "칠규에 피를 흘리며 죽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비정상사망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다수인은 중독과 관련있다고 본다. 다만 고의로 독을 넣은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여러가지 추측이 나타났다.

 

강동벽은 부친이 "누군가에 의해 음식에 독을 넣었고, 그 중독으로 죽었다"고 생각한다. 강동벽의 딸인 나의봉(羅依鳳)의 자료에 쓰여있는 바에 따르면, 강유위는 국민당에 의하여 독살당했다고 한다. 다만 이 주장은 지금까지 그 어느 사료에도 기록이 되어 있지 않다. 다만 강유위 후손의 자술이므로 중시해서 이후 사가의 고증을 기다려 봐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서태후가 생전에 보낸 살수가 쓴 독에 죽었다고 한다. 무술변법이 실패한 후, 서태후는 일찌기 4명의 자객을 보내어 강유위를 암살하고자 한다. 그중 1명은 무방(巫仿)이다. 서태후는 그에게 백은 10만냥을 주었고, 그에게 비밀리에 북경을 빠져나가 강유위를 암살하라고 지시했다. 강유위를 죽이면 별도로 금은재물을 하사하고 작위를 봉하겠다고 하였다. 그후 2,3십년간, 그는 계속 강유위를 암살할 기회를 노린다. 마침내 청도에서 성공하였다. 1904년, 서태후 칠십세 생일에 조서를 내려 무술변법때 죄를 받은 인원을 대거 사면하였는데, 강유위, 양계초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를 보면 강유위는 서태후가 끝까지 용서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강유위는 만년에 청황실의 복벽을 지지하고, 무술변법때의 은원은 이미 변화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강유위의 또 다른 딸인 강동환(康同環)은 이상의 두 가지 주장에 찬동하지 않는다. 그녀는 <선부의 묘비>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강유위는 죽기 전에 아주 고통스러워하며 칠규에 모두 혈지(血漬)가 있었다. 당연히 중독의 현상이다. 그러나 소위 식중독은 아마도 영기주루의 음식이 불결한 때문일 것이다. 반드시 희생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최근 들어, 네번째 견해가 나타났다. 청도의 인문에 종사하는 강무삼(姜茂森)은 여진문의 아들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강유위는 일본인에 의하여 독살되었다고. 여씨후손에 따르면, 당시 영기주루의 고향사람 연회에 여진문도 참석했다. 강유위는 오렌지쥬스를 먹은 후에 복통을 호소했고, 여진문이 마차로 그를 집까지 바래다 주었다. 몇십년후, 여진문은 아들에게 실상을 토로한다: 그가 일본천황의 신변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얻은 확실한 소식에 의하면 강유위는 일본인에게 독살당한 것이다. 강유위는 시종 부의가 일본인을 따르는데 반대하였고, 한때 부의와 함께 천황에 대항하였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마음 속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찌기 강유위를 위하여 묘지명을 써준 바 있는 이 여진문은 1938년 부귀영화를 찾아 변절하여 매국노가 된다. 일본점령당국의 통제하에 있는 청도치안유지회 9명 위원중 1명이 된다. 나중에 전후로 청도특별시 재정국장, 토지정리위원회 위원장을 맡는다. 여진문의 절개는 사람들의 욕을 얻어먹을 정도였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그가 '일본인이 독살했다'고 하는 말은 오히려 신뢰성이 있다.

 

이상의 여러가지 추측 이외에, 강유위의 죽음에 대하여, 또 다른 기이한 주장도 있다. <만상> 6권 9기에서는 모단(毛丹) 선생의 <강유위만년>이라는 글이 실린 적이 있다. 거기서 대만의 나이든 신문계종사자는 강유위가 독일의사에게 부탁하여 원숭이의 '청춘선(靑春腺)'을 자신의 몸에 이식했다고 한다. 이 글에서는 당시 강유위는 우연히 글을 하나 읽는데, 러시아의 외과의사인 보로노프가 여러해동안 반로환동술(返老還童術)을 연구했는데, 이미 성공을 거두었다고 했다. 그는 유인원의 고환을 노인남성의 몸에 이식시키는데 성공했는데, 그는 명백하게 젊어지고, 기억력과 성기능등도 좋아졌다고 한다. 80세의 노인이 말을 타고 달릴 정도였다고 한다. 강유위는 이 내용을 읽고, 책상을 치며 일어섰다. 그리고 소리높여 외친다; "대청은 구할 수 있겠구나." 그리고 사람의 이목을 피하기 위하여, 강유위는 암중으로 가까운 친구이자 상해의 명의인 강봉치(江逢治)를 보내어 큰 돈을 주고 이 기술에 뛰어난 독일의 유명의사 폰 시타일러를 모셔와 고환이식수술을 한다. 수술하는 날, 강유위는 종을 한 명 데리고 진료소로 간다. 독일의사는 젊은 숫놈 원숭이의 고환을 그에게 이식해준다.

 

수술이 성공한 후, 강유위는 느낌이 아주 좋았다. 체력이 확실히 증강된 것같았고, 발걸음도 가벼웠다. 글을 읽고 글를 쓰는데 피로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식욕도 크게 늘어난다. 그러나, 좋은 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1달도 되지 않아, 건강상황은 급전직하한다. 정신이 날로 희미해지고, 신체는 계속 나빠졌다. 시타일러는 그 소식을 듣고 도망친다. 강유위는 분노한 나머지, 법원에 시타일러를 "요술기세(妖術欺世)"로 제고한다. 그러나 법정이 개정되기도 전에 1927년초 세상을 떠난다. 이 주장은 비교적 황당하고 아무런 방증도 없다. 다만 여기에서 우리는 강유위의 대청왕조에 대한 '충성'은 확실히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