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위 황제묘에서 발견된 동로마제국의 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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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남북조)

2014. 5. 30.

글: 장이(張弛)

 

 

 

 

이번에 낙양박물관에 갔을 때,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은 동로마제국의 금화였는데, 아쉽게도 보지를 못했다.

 

그것은 2012년의 일이다. 건설부서에서 하서구 홍산향 장령촌의 동남쪽에서 도로공사를 하고 있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북위의 대묘(大墓)를 하나 발견하게 된다. 일차적으로 묘주인은 위절민제(魏節閔帝) 원공(元恭)으로 추정했다. 발굴상황을 보면, 이 묘는 역사적으로 관방의 파괴적인 도굴을 당했서 묘전(墓塼)까지도 모조리 뜯어가 버렸다. 충토된 유물은 비교적 적었고, 그것도 부서진 것이었다. 도기도 있고, 청자도 있고, 동기(銅器) 및 석조건축재도 있다. 그외에 무사용, 진묘수, 우차등의 잔여물도 있었다. 그외에 묘에서는 비잔틴제국시기 아나스타시우스1세의 금화가 발견된다. 주조기간은 491년-518년 사이이다. 이를 보면 묘에 매장된 연대가 북위가 낙양에 천도하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중국인들은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을 불름(佛), 보람(普嵐)이라고 불렀다. 또한 대진(大秦) 또는 서해국(西海國)이라고도 불렀다. 이 묘실의 형제, 출토된 자기등을 비교해서 고고학자들은 이 묘가 북위 효창연간에서 북위말년의 사이의 것이라고 추단했다. 이 동로마제국의 금화는 새것처럼 반짝였고, 어떤 전문가는 그것이 놀이용이고 유통용은 아니었을 것으로 결론내렸다.

 

이번에 낙양에서 동로마제국의 금화를 발견한 것이 처음있는 일은 아니다. 자료를 보면, 일찌기 1897년 신강 화전(和田)에서 콘스탄틴5세의 금화 1매가 발견되었다. 나중에 각지의 묘장에서 연이어 20여매가 발견된다. 그중에는 동위 여여족공주(茹茹族公主)묘에서 발견된 2개도 포함된다. 이것은 북위황제릉에서 금화를 발견한 경위와 같다. 2매의 금화는 모래흙을 고르는 과정에서 찾아낸 것이다. 금화의작용은 절대로 놀이용이 아니다. 죽은 사람의 손 안에 쥐어 있거나 혹은 입안(당연히 가슴에 놓여진 경우도 있다)에 물고 있었다. 이것은 그 시대의 장례습속과 들어맞는다.

 

이 묘의 주인공인 원공은 아주 재미있는 사람이다. 그는 젊어서는 단정하고 근신하며 지향도 있고 기도도 있었다. 어른이 되어서는 공부를 좋아하고, 조모, 적모를 효성을 다하여 모시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아주 인애의 마음을 지닌 인물이다. 서역의 사신이 그에게 사자를 바치자, 그는 차마 사자를 가두어 두지 못하고, 사자를 돌려보내라고 명한다. 사자는 사자를 돌려보내러 가다가 중간에 길은 너무 멀고 귀찮아서 사자를 아예 죽여버리고 돌아와서 보고한다. 이것은 죽을 죄이다. 관련기관에서는 명을 어긴 사자를 죽이라고 건의한다. 그러나 절민제는 "어찌 짐승때문에 사람을 죄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사람을 방면한다. 그는 일찌기 정상시 겸 영급사황문시랑을 지냈는데(황제의 근신으로 조서와 명령을 전달하는 역할이다), 경조윤 왕원차가 조정을 독단하자 병을 핑계로 직위를 맡지 않았다. 그리고 용화사(龍花寺)에서 8년간이나 살면서 귀머거리 벙어리 행세를 하며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 이 용화사는 분명 용화사(龍華寺)일 것이다. <낙양가람기>를 보면 용화사(龍花寺)는 없고, 용화사(龍華寺)는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성의 동쪽에 있어 숙위우림호분등이 세운 곳이며, 건춘문 밖, 양거의 남쪽이다. 절의 남쪽에는 조장(租場)이 있다. 다른 하나의 용화사는 성의 남쪽에 있었다. 광릉왕을 위하여 세운 것이다. 광릉왕은 바로 원공의 별칭이다.

 

영안3년, 효장제가 사망하고, 그의 형인 원엽(元曄)가 즉위한다. 이주씨(爾朱氏)는 원엽을 폐위시키고 원공을 황제에 올리려 한다. 다만 원공이 진짜 벙어리일까봐 걱정하여 심복을 보내어 의향을 전한다. 이전에 원공은 비록 귀머거리 벙어리행세를 하면서 8년을 보냈지만, 자신이 황제에 오를 수 있다는 말을 듣자, 크게 기뻐하며, 공자의 말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하늘이 어찌 말을 할 것인가(天何言哉)" 그리고 자신은 진짜 벙어리가 아니며 황제에 오르고 싶다고 말한다. 이 벙어리행세는 헛것으로 한 것이 아니다. 531년, 원공이 황제에 옹립되고, 이주씨가 북위의 군정대권을 장악한다. 531년, 고환은 원랑(元朗)을 황제로 모시고, 거병하여 이주씨에 반대한다. 그리고 1년후에 낙양으로 들어가고 이주씨는 무너진다. 6월 원공은 고환에 의하여 폐위된다. 6월 21일(음력 오월 삼일) 효무제에 의하여 독살된다. 당시 나이 35살이었다. 시호는 절민제이다. 원랑은 즉위한지 1년도 지나지 않아 효무제 원수(元修)에게 황위를 넘겨준다. 그후에 독주를 마셔 독살당한다. 북위역사상 저명한 비정삼형제는 비록 각자 나름대로 불행했지만, 등극방식과 죽는 방식은 똑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