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유(王國維) 자살의 수수께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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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초기)

2015. 1. 19.

글: 양혜왕(梁惠王)

 

 

 

 

1927년 6월(음력 오월 초사흘), 저명한 학자 왕국유는 이화원의 곤명호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나이 겨우 51살이었는데, 장년이라고 할 만한 나이였다. 그의 죽음은 중국학술계에 큰 손실이었다. 그래서 저명한 역사학자 고힐강이 쓴 기념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너는 학술적으로 중대한 부담을 지고 있으므로, 너의 생명은 너의 개인의 것이 아니다. 이미 학술계가 공유하는 것이다; 네가 평범한 사람이라면 너의 죽음은 그저 너의 죽음이고 다른 사람과 관련이 없지만, 현재 너의 죽음은 학술계에 손해를 끼쳤다. 너는 학술계에 죄를 지은 것이다!"

 

이 말을 겉으로는 질책이지만, 실제로는 깊은 애통이다. 그의 죽음에 관하여 여러가지 추측이 있다. 어떤 학자는 아래의 몇 가지로 정리했다:

 

(1) 순청설(殉淸說)

(2) 자망학술설(自亡學術說)

(3) 비관애시설(悲觀哀時說)

(4) "기유장자지상(旣有長子之喪), 우조지우지절(又遭摯友之絶)"
(5) 나진옥핍채설(羅振玉逼債說)

 

대다수의 학자들은 제5종 나진옥핍채설은 근거가 약하다고 본다. 그리고 앞의 4가지 주장은 모두 믿는 사람이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 한 사람의 자살에는 일반적으로 여러가지 요소가 섞이게 된다. 다만 그중에 반드시 한 가지 가장 주요한 요소가 있기 마련이다. 개인적으로, 왕국유 자살의 가장 주요한 요소는 '순청'이라고 본다. 아래에서 자세히 우의 각종 설들을 검토해보기로 하자.

 

양계초는 왕국유의 자살은 고대 사대부 절개의 표현이라고 했다. 주나라 곡물은 먹지 않겠다는 백이,숙제와 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존경할만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의 환경하에서, 그는 왕국유의 청왕조에 대한 우충(愚忠)의 일면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행간에서는 그가 기본적으로 왕국유는 청나라를 위하여 순국하기 위하여 죽은 것이라고 보았고, 그를 굴원에 비유했다.

 

왕국유의 죽음을 굴원이 물에 몸을 던진 것과 비교한 사람은 그의 친구들 중에서 아주 많다. 그가 자살한 날과 굴원이 자살한 날짜가 아주 가까우며, 겨우 이틀 차이밖에 나지 않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런 연상을 하는 것이다. 오복(吳宓)은 만련(挽聯)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궁유시전조(離宮猶是前朝), 주욕신우(主辱臣憂), 멱라이대침굴자(汨羅異代沉屈子); 호겁정봉차일(浩劫正逢此日), 인망국췌(人亡國瘁), 해우동성곡정군(海宇同聲哭鄭君)"

 

양계초, 오복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은 많이 있었다. 예를 들어 진인각(陳寅恪)의 만시(挽詩)는 다음과 같다: "월갑미응공독치(越甲未應公獨恥), 상루녕여속동진(湘累寧與俗同塵)". <한서.양웅전>에는 이런 말이 있다: "흠조초지상루(欽弔楚之湘累)", 주석에는 이인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했다: "제불이죄사왈루(諸不以罪死曰累)....굴원부상사(屈原赴湘死), 고왈상루야(故曰湘累也)" 그외에 왕력(王力)의 만시도 같은 의견이다: "경파곤명당멱라(竟把昆明當汨羅), 장사친우부청파(長辭親友赴淸波)"

 

당연히 이런 비유를 자세히 살펴보면 약간 말이 안되는 점이 있다. 굴원의 자살은 충신이 암약혼외(暗弱昏聵)한 군주를 만났기 때문이다. 충성심을 인정받지 못했을 뿐아니라, 오히려 유배되었고 결국 절망하여 물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다만 왕궁유는 그렇지 않았다.최소한 그의 마음 속에, 폐제 부의는 암약혼외하지 않앗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부의가 그에 대하여 잘 대해주었다는 것이다. 황마괘를 하사하였을 뿐아니라, 자금성에서 말을 타도록 허락했으며, 남서방행주(南書房行走)로도 발탁했다. 그리고 오품의 관급과 5품의 녹봉을 내렸다. 왕국유처럼 단지 출신이 수재인 선비에게 이는 아주 높은 예우이다. 왕국유가 굴원처럼 물에 몸을 던져 자살할 이유는 없었다. 비록 굴원을 자살로 이끈 마지막 역량은 진나라군대가 초나라의 수도 영도를 친 것이었다. 부의가 풍옥상의 병마에 의하여 자금성에서 쫓겨난 것과 유사하긴 하다. 다만 이것만으로는 왕국유를 굴원에 비교하기에 부족하다. 굴원의 시편에는 시시때때로 스스로를 한탄하고 있었다: "충이견의(忠而見疑), 신이피방(信而被謗)"

 

아마도 이러한 모순을 간파하였는지, 왕국유의 친구인 진인각은 그의 견해를 수정한다. 왕국유는 순청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그의 심신이 침윤(浸潤)된 문화를 위하여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말했다: "무릇 일종의 문화는 그것이 쇠락할 때, 이 문화로 개화된 사람은 반드시 고통을 느낀다. 그 표현은 문화의 무게가 무거울수록 그가 받는 고통은 더욱 크다. 그것이 극도에 달하면, 자살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의리를 다하려 하게 된다."

 

이렇게 수정해도 역시 이치에 그다지 맞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당시 만청의 유로(遺老)는 아주 많았다. 일부 물러나서 집에서 칩거하는 외에 일부는 나서서 고관을 맡았다. 예를 들어, 채원배는 청나라 한림출신이고, 문화소양에서이건 출신에서이건 모두 왕국유보다 구문화에 대한 정이 더욱 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채원배는 북경대학 교장을 맡았을 뿐아니라, 일생동안 힘을 다하여 신문화를 선전한다. 다른 청나라의 유로들 나진옥, 진보침은 그 근본을 따져보면, 어느 누구도 구문화를 그리워하는 유로이고, 어느 누구도 진정으로 부의에 죽으믕로 충성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왕국유만이 구문화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는 것은 정리에 맞지 않는다. 이는 설명한다. 왕국유의 자살은 그 자신의 사상이 원인이 되었다. 구문화를 위하여 죽는다는 것처럼 간단하게 개괄할 수 없다. 당연히, 진인각이 이렇게 말한 것은 아마도 왕국유의 자살을 높이 평가하려는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 점은 이해가 된다.

 

왕국유 자살 2년후, 진인각은 부탁을 받고 왕국유기념비를 쓴다. 다시 왕국유의 자살을 한단계 더 끌어올린다. 그의 자살은 '자유의 의지, 독립의 사상"을 위한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 두 마디 말은 나중에 한때 널리 알려졌고, 지식인들이 권세를 추종하지 않고, 학술자유를 추종한다는 하나의 구호가 되었다. 다만 왕국유의 자살을 놓고 평가하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

 

고힐강은 왕국유의 자살을 대하는 태도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그는 왕국유가 원래 유로가 되려 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그가 어려서 생활이 곤란하여 부득불 나진옥에 의탁할 수밖에 없었고, 나진옥의 영향에서 그가 벗어날 수 없고, 그리하여, "유이불로(遺而不老)"의 유로가 되었다. 유로가 되는 것은 이제 호랑이 등에 탄 격이다. 그래서 자신의 체면을 생각하여 부득이 끝까지 억지로 간 것이다." 고힐강이 왕국유가 원래 유로로 남지 않고 싶어했다는 이유로 얘기한 것은 "소년때 외국의 서적을 보았고, 세계조류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 그러니 어찌 충군의 낡은 생각을 미신할 수 있었겠는가?"였다. 그러나 이는 사실 논리적이지 못하다. 어려서 외국서적을 보았기 때문에 만년에 충군사상을 미신할 수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서방문자를 읽을 능력이 되는 것으로 따진다면, 고홍명은 왕국유보다 낫다. 그러나 청나라조정이 무너진 후, 고홍명은 평생 체두변발을 남기지 않았던가?

 

주작인(周作人)의 견해도 독특하다. 그는 왕국유의 자살원인을 "사상의 충돌과 정신의 고민"으로 보았다. 어떤 측면에서 그는 고힐강의 견해와 전혀 다르다. 예를 들어, 고힐강은 왕국유가 35살이전에는 무슨 그럴 듯한 학술적업적이 없다고 보았다. 그의 모든 성취는 35살이후의 짧은 십여년간에 이룬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주작인은 "왕군은 국학자이다. 다만 그도 서양의 학문을 연구했었다. 문학철학의 의미를 알았고, 고인의 도제를 지낸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십년전, 우리는 그에 대하여 존경과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왕군은 '정군(征君)'자격을 버리고, 돌연 유로가 되었다. 그후에 '폐제'의 사부의 직을 맡았다. 한편으로 학문적으로 '박학가'의 껍질 속으로 파고 들었고, 완전히 철학,문학으로 경사를 공부하는 것을 버린다. 이는 <정암문집>과 <관당집림>에서 그 변화를 엿볼 수 있다.(예를 들어, <문집>에서는 홍루몽을 다루는 글이 있는데, 그의 연문학에 대한 이해를 엿볼 수 있다. 비록 연구사색방면에서 혹은 <집립>의 논문이 더욱 성숙되었다). 왕군처럼 이성이 발달할 사람이 자신의 생활에서의 모순과 업무의 편파를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다. 혹은 아예 이것이 그의 취며경향과 상반되는데서 오는 고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약간의 심미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변발을 남겨두지 않았다. 그저 정세에 연루되어 빠져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진퇴유곡이 되고, 모든 것을 파멸시키는 길로 접어든 것이다."

 

주작인이 보기에, 왕국유 후기의 경사소학에서의 성취는 그다지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는 왕국유에 대한 가장 높은 기대는 원래 문학,철학이라고 한다. 그는 이로 인하여, 왕국유는 나진옥의 영향하에, 고통스럽게 경사소학을 한 것이라고 본다. 취미와 업무가 상반되는데 따른 고민이 있었다. 이런 관점은 실제로 그러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세상에는 취미가 다양한 천재들이 많다. 여러 관련분야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경우도 많다. 왕국유는 16세에 항주에서 시험을 치고, 전사사를 사서 공부했고, 그는 이를 그의 평생독서의 시작으로 여겼다. 이를 보면, 그는 어려서부터 사학을 좋아했다. 그가 외 경사소학을 연구했는지에 대하여 그의 친구인 마형(馬衡)의 말이 이치에 들어맞는다: "그가 고고학을 연구한 원인은 완전해 자료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고, 그의 연구흥취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학자가 자료를 많이 보게 되면 가슴 속에서 점차 말하고 싶은 견해가 생기게 된다. 이렇게 연구해나가면, 그것이 아마도 학문의 최종원인이 될 것이다. 호적이 청나라때 건가시대의 박학대사를 얘기하면서, 그들이 연구한 박학(朴學)은 문자옥이 심했기 때문에 부득이 문구를 따지는 학문에 심취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학술이 발달한 시대에 태어나서 진위를 감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약간의 기율의 상식을 훈련하여, 증거로 어떤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방식을 건립한 것이다."

 

그래서, 상술한 왕국유의 자살원인에 대한 견해는 모두 성립되기 어렵다. 모두 약간은 잘못 이해한 측면이 있는 것이다. 어쨌든 청나라의 멸망은 역사의 진보이고, 한 썩어빠진 나라를 위하여 순장하는 것은 어떻게 보더라도 그렇게 똑똑한 일은 아니다. 다만 왕국유의 자살은 확실히 청나라를 위하여 순장한 것이다. 이에 관한 증거는 충분하다. 첫째, 1924년 11월, 풍옥상이 이끄는 군대가 부의를 자금성에서 몰아낸다. 그리고 신해혁명후에 체결한 '청실우대조건'을 수정한다고 선포한다.왕국유는 하마터면 신무문의 물에 뛰어들어 자살할 뻔한다. 다행히 누군가 말려서 이루지 못했다. 집에돌아온 후 가족은 밤낮으로 그를 지켜서 자살을 막았다. 둘째, 이 해 말, 북경대학 고고학회에서 '망청여얼(亡淸餘孼)'을 질책하는 일로 분기탱천하여 북경대학 국학들에게 통신지도교수직무를 사임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원래 북경대학 <국학계간>에 실을 논문원고를 철회한다. 셋째, 부의가 천진으로 이사간 후, 왕국유는 자주 천진으로 가서 배알한다. 이런 것은 모두 표먼적인 것이고, 왕국유의 청나라조정에 대한 감정은 일반적인 수준이 아니었다.

 

왜 이렇게 총명한 한 학자가 정치적으로 이렇게 수구적이었을까? 아마도 민국의 사회동란에 그가 너무 실망한 때문이 아닐까? 이런 것들은 일부 학자들이 일찌기 언급한 바 있다. 청나라말기, 비록 국가는 피폐하고 백성들은 곤궁했지만, 사회적으로는 그래도 신선한 기운이 있었다. 변법이 성공만 하면 영국미국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민국이후, 군벌혼전으로 나라는 혼란에 빠진다. 그래서 이택후는 이런말을 한 적이 있다. 만일 서태후가 5년만 늦게 죽었더라면, 청나라조정은 입헌에 성공했을 것이라고. 아마도 평화적으로 헌정을 실시하고 군벌혼전은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 시대에 태어나고 자란 왕국유는 이에 대하여 더욱 깊이 느꼈을 것이다. 그의 장편가행체시 <이화원사>를 보면, 그는 서태후에 대하여 존경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는 말한다: "원묘단청엄약신(原廟丹靑儼若神), 경렴유물상여신(鏡奩遺物尙如新), 나지차일신조주(那知此日新朝主), 편시당시고명신(便是當時顧命臣)" 그 뜻은 분명하다. 만일 서태후가 죽지 않았더라면, 원세개는 찬위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화원은 서태후가 말년에 거처하던 곳이다. 그가 이화원을 선택하여 자살한 것은 바로 이렇게 청나라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국유의 마음 속에는 이화원이 구왕조의 번화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이화원사>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시시조야다풍예(是時朝野多豊豫), 년년삼월영란어(年年三月迎鸞御), 장락심엄고폐신(長樂深嚴苦弊神), 감천개상의청서(甘泉塏爽宜淸曙)" 그것은 일대 구왕조의 마지막 그림자였다. 이 위대한 천재의 마음 속에 살아서 움직이는. "제휴유자부황도(提携猶子付黃圖), 구고환여동치초(劬苦還如同治初)". "단간요각금유건(但看腰脚今猶健), 막도삼심적이진(莫道傷心迹已陳)" 이는 모두 그의 서태후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것들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왕국유자살에 관심을 가지는 학자들이 모두 한 가지 일을 빠트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몸을 던진 곳이다.

 

이화원관리인의 회고에 따르면, 왕국유는 그날 10시경 이화원에 들어가서, 처음에는 석방(石舫)의 앞에 한참을 앉아 있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겨서 어조헌(魚藻軒), 흡지연(吸紙煙)으로 걸어간 후 곧 호수에 몸을 던졌다는 것이다.

 

이화원의 석방은 서태후가 중수할 때 '청안방(淸晏舫)"이라고 불렀다. '청안'은바로 "하청해연(河淸海晏)"이다. 이는 봉건왕조가 천하의 태평과 부유를 기원하는 말이다. 이를 보면 왕국유가 석방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는 것은 아마도 아주 고통스러운 느낌이었을 것이다. 이 하청해연의 시대는 이미 가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가 몸을 던진 '어조헌'은 바로 <시경.소아.어조>에서 따왔다.

 

어재재조(魚在在藻), 유반기수(有頒其首), 왕재재호(王在在鎬), 기락음주(豈樂飮酒)

어재재조(魚在在藻), 유신기미(有莘其尾), 왕재재호(王在在鎬), 음주낙기(飮酒樂豈)

어재재조(魚在在藻), 의어기포(依於其蒲), 왕재재호(王在在鎬), 유나기거(有那其居)

 

이 시는 서주유왕시기를 풍자하는 노래이다. <시서>에 따르면, "만물이 그 본성을 잃었고, 왕이 호경에 거처하니, 스스로 즐거워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옛날의 무왕을 생각한다." 묘사한 것은 서주전성시기 주왕이 태평한 시기를 즐기며 편안하게 지내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어'와 '조'라는 것은 연결하여 칭송하는 것이다. 이런 물건은 고대 예악문명에서 특수한 지위를 지닌다. 고대의 예제에서 '조'는 제사에 쓰는 물품이다. 그래서 <시경>에는 "어이채조(於以採藻), 어피행료(於彼行潦)"라고 한다.그리고 '어'는 제사때의 중요물품이다. 조와 관계가 밀접하다. 모형(毛亨)은 그래서 이렇게 해석한다: "생용어(牲用魚), 모지이빈조(芼之以蘋藻)" 즉 조로 어(물고기)를 싸서 제사에 쓴다는 말이다. 그러나 왕조가 붕괴되니 예제가 완전히 무너졌다. 그래서 어조라는 아름다운 뜻은 자연히 다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히 왕국유의 마음을 마프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왕국유는 어조헌의 앞에서 한참 생각에 겨 있었다. 군벌혼전의 장면을 목격하면서 분명히 청나라의 태평성대의 안녕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그는 일찌기 진인각과 청화원내에서 얘기하면서, 밤에 잠도 자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으며 이야기에 빠진 적이 있다. "요사우야화명창(遙思雨夜話明昌), 독대남관억수항(獨對南冠憶數行)", 명창은 금장종의 연호이고, 사서에서는 금장종이 업적을 이룬 군주로 본다. 22년간 재위하며, "우내소강(宇內小康)", "전장문물찬연성일대치규(典章文物粲然成一代治規)"했다. 왕국유는 청나라의 조상인 금나라까지도 그리워했다. 그런데 어찌 멸망한지 얼마되지 않았고,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국조(청나라)'를 그리워하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그 순(殉) 문화, 자망(自亡) 학술, 비관애시(悲觀哀時)등의 견해는 모두 근거가 없다. 왕국유의 죽음은 그저 '순청'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청안방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앉아있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어조헌을 택하여 자살할 리도 없다. 이 두 개의 지명은 의미심장하고, 이 대가의 심정을 잘 나타내준다.

 

진인각의 소위 '순문화'는 절대로 일종의 곡위지식(曲爲之飾)이다. 혹은 자신의 구문화에 대한 감정을 나타내는 것이다. 왕국유의 사상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왕국유의 친구인 오복은 일찌기 그가 순청으로 죽었다는 것을 깊이 믿었다. 다만 나중에 진인각의 옇양으로 생각을 바꾼다. 이유는 "선통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 '순청실(殉淸室)"이라는 말을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기실 이 점은 이해하기 쉽다. 왕국유가 순(殉)한 것은 청나라정권이다. 청나라는 이미 망했다. 순청이라는 말이 왜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인가?

 

당연히 왕국유가 순청으로 죽었다고 하더라도, 기실 그의 품격의 고결함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그의 유언인 "오십지년(五十之年), 지흠일사(只欠一死), 경차세변(經此世變), 의무재욕(義無再辱)"은 이 점을 증명한다. 청왕조는 일찌기 태평성세가 있었고, 이는 그의 이상이다. 그는 시대의 조류로 자신의 신앙을 바꾸지 않았다. 이는 진인각이 말한 '독립의 의지, 자유의 사상'과 일맥상통한다. 다른 사람들이 유로가 되는 것은 아마도 명성을 낚으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유로를 하더라도 진지하게 했가 그래서 노신은 이렇게 말한다: "성실하기가 햄(火腿)과 같다" 이는 이해하고 동정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착실한 사람에게는 선진사인(先秦士人)의 품격이 있었다는 것이다. 남이 나에게 잘해주면 나는 생명으로 보답한다. 이 점은 기실 현대문명과 서로 통하는 점도 있다. 현대문명은 신의성실을 중시하고, 약속을 중시한다. 이것들은 법제로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일정한 도덕적 기초가 없으면 법제는 운영되기 힘들다. 소위 도덕적 기초로 필자가 생각하는 하나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잘하는 것은 대공무사가 아니고, 목적은 그저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만한 대우를 받기을 원하는 것이다. 만일 전사회의 사람들이 모두 이런 도더을 지킨다면, 사회는 조화로울 것이다.

 

당연히, 왕국유의 청나라에 대한 그리움은 적색풍조에 대하여 공포를 느끼는 요소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공포는 그러나 부대적인 것이다. 아마도 자살의 주요한 요인이 되지는 못해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