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한 민족의 영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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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이론

2015. 2. 10.

글: 부국용(傅國涌)


1. "역사는 아무나 마음대로 꾸밀 수 있는 어린 계집아이이다"


"역사는 아무나 마음대로 꾸밀 수 있는 어린 계집아이이다". 지금까지 이미 60여년간 유행한 이 말은 아직도 전혀 수그러들 기미가 없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호적(胡適)이 정말 이 말을 했다고 믿고 있다. 이는 당대사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판본의 "삼인성호(三人成虎)"이다. 비록 일찌기 2003년, 사영(謝泳)은 <신민주간>에 <호적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글을 써서, 호적은 이 말을 한 적이 없고, 이는 1950년대 호적을 비판할 때 많은 사람들이 또 다른 말을 곡해, 개작한 것이고, 호적의 원래 뜻과는 상반되는 말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1919년, 호적은 <실험주의>라는 글에서 제임스의 실재론(리얼리즘_철학사상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실재는 아주 말 잘듣는 계집아이이다. 그녀는 우리가 그녀에게 화장하고, 꾸미는대로 그대로 따른다. '실재라는 것은 하나의 대리석이 우리의 손에 들어오고,우리가 그것을 조각으로 깍는 것'과 같다"(<신청년>1919년 제6웍 4호 <호적문집>2, 북대출판사 1998년,212페이지). 그는 역사에 대하여 말한 것이 아니다. 1955년 삼련서점이 출판한 <호적사상비판> 제6집에는 풍우란의 <철학사와 정치 - 호적철학사공작과 그의 반동의 정치노선과의 관계를 논함>이라는 글에서 사영은 이런 말을 본다: "실용주의자인 호적은 원래 역사는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역사는 '말잘듣는 계집아이'처럼 마음대로 화장하고 꾸밀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역사는 아무나 마음대로 꾸밀 수 있는 어린 계집아이이다"라는 말이 유행한 것은 이것과 아마도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본다.(사영 <잡서과안록>, 중국공인출판사 2004년), 풍우란의 위 글은 처음에 <철학연구> 1955년 제1기에 발표되었다.


몇년후 호문휘(胡文輝)는 추가로 발견한다. 일찌기 1952년 송사를 연구하는 칠협(漆俠)이 <호적의 실험주의와 그 역사학의 반동본질>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호적은 '진리'를 '사람이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므로, 호적은 역사는 사람의 주관적이 수의성으로 만들어낼수 있다고 생각했다. 호적은 '실험주의'라는 글에서 일찌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실재는 아주 말 잘듣는 계집아이이다. 그녀는 우리가 그녀에게 화장하고, 꾸미는대로 그대로 따른다....." 이는 즉, 역사는 마음대로 덧칠하고 마음대로 날조하여도 당신의 주관의지에만 부합하면 성공리라고 하는 것이다."(<칠협전집>제12권, 하북대학출판사, 2008년)


마르크스주의관점에서 중국사를 연구하는 상월(尙鉞)은 <역사교학> 1953년 제5기에서 <우리는 왜 역사를 배워야 하는가>에서 이화접목의 수단으로 '실재'의 그 말에 '역사'라는 단어를 추가한다:


"이는 바로 호적이 그의 저서 <실험주의>라는 글에서 역사"실재는 아주 말 잘듣는 계집아이이다. 그녀는 우리가 그녀에게 화장하고, 꾸미는대로 그대로 따른다....."고 하였다(<상월사학논문선집>, 인민출판사 1984년판)


이런 발견들은 사영의 견해를 보완해준다. (호문휘 <명언의 장관이대와 이화접목>, <수필> 2007년 제5기에 실림; <'역사실재는 아주 말잘듣는 계집아이이다"에 관하여>, <동방조보>2010년 6월 20일에 실림; <역사실재는 아주 말잘듣는 계집아이이다' 보담(補談)> , <동방조보> 2010년 6월 27일 실림)


그들의 노력을 통하여, 우리는 대체로 하나의 궤적을 그릴 수 있다. 바로 1952년에서 1955년 사이에 호적비판의 정치운동과정에서 칠혁, 상월, 풍우란등이 함게 소위 호적이 "역사는 아무나 꾸밀 수 있는 어린 계집아이이다"라는 말을 유행시켰고, 와전되면서 지금까지 전해졌고 영향이 아직도 해소되지 않았다. 많은 학자들은 역사를 얘기할 때마다 이 말을 옮겨와서 하곤 한다.


2. 호적의 진화론사관


호적은 역사를 어떻게 보았는가? 간단히 말하면, 그의 역사관은 진화론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그는 <실험주의> 장편강연원고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이런 진화의 관념은 다윈 이래로, 각종 학문에서 모두 그의 영향을 받아들였다...진화관념을 철학상에 응용한 결과는 일종의 '역사의 태도'(The geneti, method)를 탄생시킨다. 왜 '역사의 태도'라고 하는가? 이는 바로 일이 어떻게 발생했고, 어떻게 왔고, 어떻게 변해서 현재의 모습이 되었는지를 연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태도'이다."


진화론은 그의 생명에서 낙인이 너무나 깊이 찍혀 있었다. 소년 호적은 상해에서 처음 엄복의 <천연론(天演論)>을 읽고 깊이 빠진다. 그의 이름마저도, "물경천택(物竟天擇), 적자생존(適者生存)"이라는 명구에서 따온다. 미국에서 유학한 7년동안 신사상, 신지식을 접한 것도 모두 진화론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1916년 1월 31일, 그는 일기에서 이렇게 스스로의 포부(원문은 영어로 되어 있음)를 적는다:


나는 혁명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믿고 있다. 이는 인류진화의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나는 조숙한 혁명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통상 헛수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 것도 이루지를 못한다. 중국에 이런 말이 있다. "과숙체락(瓜熟蒂落)"(과일은 익으면 떨어진다). 과일이 아직 성숙되지 않았을 때 억지로 따게 되면, 그것은 과일을 망칠 뿐이다. 이 이유에 기하여, 나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중국의 혁명에 그다지 희망을 걸지 않고 있다. 당연히 나는 이들 혁명자에 대하여는 깊은 동정을 표한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차라리 기초건설에서부터 시작할 것이다. 나는 일관되게 믿는다. 개명으로 향하는 유효한 정치에는 지름길이 없다. ....나 개인의 태도는 바로 "어떡하든지간에, 민중을 교육하는 것을 위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다음 세대를 위하여 튼튼한 기초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이것은 아주 완만한 과정이고, 아주 필요한 과정이다.그러나, 사람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인내심이다. 본인의 우견으로, 이 완만한 과정은 유일하게 필수적인 것이다: :그것은 혁명에 필수적일뿐아니라, 인류진화에 필수적이다."(<호적일기전집>2, 안휘교육출판사 2001년, 335-336쪽)


여기에서, 그의 진화론사관은 분명하다. 그의 현실에 대한 판단에 영향을 줄 뿐아니라, 마찬가지로 그의 역사에 대한 견해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이로 인하여 항상 낙관적으로 나중에는 다 잘될 것이며, 그저 한걸음 한걸음 나가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박사논문제목도 <중국고대철학방법의 진화사>이다. 그중 제4편은 "진화론과 명학"을 토론하는 것이다.


그가 미국에서 백화문학을 창도할 초기에, 그와 함께 미국에서 유학하던 친한 친구 매광적(梅光迪)은 그와 견해가 달랐다. 그와 여러 해동안 사귀면서, 서신왕래가 계속되었다. 매광적은 그가 진화론을 지나치게 신봉하는데 불만이 많았다. 1916년 7월 19일, 그에게 쓴 서신에서는 직접적으로 지적한다:
 

"족하(足下)가 금세기를 너무 숭배하는 것은 하나의 큰 병이다. 인류의 일체문명은 모두 진화라고 생각하는 것인데, 이 동생은 그렇지 않다고 본다. 과학과 사회에서 실용지식(예를 들어 politics, economics)는 진화할 수 있다. 그러나 미술, 문예, 도덕은 그렇지 않다. 만일 Imagist Poetry 및 각종 미술상의 '신조류'를 새로 나온 것이 반드시 옛날 것보다 낫다라고 한다든지 혹은 적이라고 한다면, 약감만 미술, 문학을 아는 자라면 듣고서 아연실색할 것이기 때문이다."(540쪽)


그 이틀전인 7월 17일 호적에 보낸 서신에서 '문학혁명'을 토론한다. 호적이 소위 '20세기의 활자'를 제창하는데 깜짝 놀란다. 왜냐하면, '20세기의 활자'는 20세기사람들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수천년이래의 조상들이 창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자는 사상을 대표하는 물건일 뿐이고, 20세기인들의 사상은 대체로 옛사람들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대는 문학철학의 여러 과를 공부하는데, 어찌 역사관념이 이정도인가" 그는 말한다. "족하의 언문학혁명은 원래 찬성하지만, 말이 지나치게 과격하여, 우리나라 문학의 본체와 유폐를 섞어서 말하고 있다. 그래서 찬동할 수가 없다."(539-540쪽) 그는 여기에서 직접적으로 호적은 역사관념이 결핍되어 있고, 너무 진화론을 믿고 있다고 지적한다.


3. 역사는 인류가 불변가치를 추구하는 기록이 되어야 한다.


도대체 역사는 무엇인가? 몇년전 필자는 처음으로 낙대운(樂黛雲)의 <매광적문선>의 서언에서 이런 말을 보았다: "호적은 진화론에서 출발하여, 인류의 역사는 바로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추구하는 역사라고 생각했다. 매광적은 그러나 역사는 인류가 불변가치를 추구하는 기록이라고 하였다." 필자는 여기에서 느낀 바가 있었다. 1917년 매광적은 영문의 <중국학생>월간에 <우리 이 세대의 임무>를 발표하면서, 그의 역사에 대한 견해를 진술했다. 원문은 비록 이미 <매광적문서>(매출산, 매걸등이 편찬한 <매광적문서>, 화중사범대학출판사 2011년), 지금까지 중문으로 번역되지 않았었다. 그래서 나는 친구에게 부탁하여 전문을 번역했다. 시작부분에서 그는 직접 진화론이 가져다준 부정적 영향을 언급한다.


중국의 그 아름다운 옛날, "사람의 일평생, 출생, 순명은 돌연 없어졌다." 과거의 이천여년이 이러하다. 사람에 있어서, 생명은 더 이상 간단할 수 없는 일이다. 전혀 과장하지 않고 말하자면, 한 사람은 모든 선배의 후예이다. 그는 확실히 조상을 절대적으로 믿을만하고, 모든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다고 확신했다.

진화론은 이 모든 것을 바꾸어 버린다.사람은 더 이상 그 흘러간 골목길을 되돌아보지 않는다. 눈길은 산꼭대기로 향한다. 그는 그 두뇌가 간단한 조상들이 전혀 그리워하지 않았던 영역을 탐색하고, 점점 멀어진다.

이 부흥의 시대에, 절대다수의 볼테르식의 주장은 불가피하다. 또한 필요하다. 전통의 질곡은 너무 완고하다. 화산폭발식의 역량과 광망이 있어야 비로소 빠져나올 수 있다. 절제으 미덕은 쉽게 사람들에게 무시된다. 동탕과 열광의 가운데서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일시적인 충동으로 일을 처리하고, 쉽게 하나의 극단에서 또 다른 극단으로 옮겨간다. 과거에는 모든 것을 이어받았다. 현재는 모든 전통과 습속을 파괴한다. 이런 인간성안에 숨어 있는 파괴욕이 전혀 구속받지 않는다면, 마음대로 모든 것을 훼멸시켜버릴 것이다.

어떻게 현실과 역사를 대하여야 하는가. 그는 자신의 생각을 제시한다:

만일 현재 혹은 미래의 생활을 먼저 대면할 능력이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시간의 시험을 통하여 진,선,미의 물건을 이해하고 보유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야, 역사는 비로소 활발한 생명력을 지닌다. 그리고 이렇게 하여야만, 우리는 명확한 표준을 기대할 수 있다. 인류의 가치를 형량함으로써 진실과 거짓을 판단하고, 필연과 우연을 판결해야 한다.

그러므로, 생명에 대한 해석은 우리 자신의 것이건 서방의 것이건, 모두 건전한 역사적 기초 위에서 건립되어야 한다. 역사의 각도에서 두 가지 문명의 장점과 단점을 해석해야 한다. 그후에 우리는 비로소 받아들일지 말지를 선택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슨 사룸릐 가치는 일시의 성패로 판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양맹의 번역)


만일 호적이 그의 스승인 듀이등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면, 매광적의 이런 견해는 마찬가지로 그의 스승인 어빙 배빗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여러해 이후, 그는 지난 일을 회고하면서, <인문주의와 현대중국>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중국은 지금 사상유례없는 문화혁명을 겪고 있다. 현대 중국인은 최소한 그중 엄숙하고 진지한 일부분의 사람들은, 현재 일종의 사상공백과  정신영역의 난감한 상황이 가져다주는 고통을 견디고 있다. 이런 고통은 세계의 다른 나라 사람이라면 느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중국에서, 이런 돌연한 인생관의 변화는 전대미문의 걱이다. 또한 범상치 많은 비극적인 색채를 안고 있다. 이전에, 중국은 우수하고 보수적인 국가였다. 중국은 고인을 존중하고, 국가정권과 가정구조에서 법정의 권위와 중심에 의지했는데, 이는 일종의 종교의 신앙에 가까울 정도였다. 이 국가의 인민은 낯선 돌발상황에 처하여 반드시 급속한 변혁과 조정을 이루어야 했고, 그 때 항상 준비부족과 망연함으로 어찌해야할 바를 몰랐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서방에서 광명과 향도를 찾으려 했다. 왜냐하면 서방인들이 그들을 조상의 유훈에서 벗어나게 만들고 돌연한 변혁을 맞게 하였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돌변의 시대에, 그는 하버드대학의 강당에서 어빙 배빗을 만난다. 그는 이렇게 개괄했다: "어빙 배빗의 이념과 가치관은 개활한 역사적인 안목을 갖고 있었다. 아주 잘 사람의 사상을 해방시킬 수 있었다. 그는 당신을 현대사회의 편협한 속박에서 해탈시켜줄 수 있었다. 그는 단지 근대만 중시하고 서방문화사에서 마음대로 구분하던 방법을 벗어나게 해주었다. 그의 세계에서 단지 몇몇의 드물게 각 역사시기에 분포했던 위대한 인물들이 있다. 그중에는 당대인물도 있고, 다른 시기도 있었다. 현대인이 '진보'라는 이 단어의 의미를 확정할 때, 위대한 인물의 표준은 영원하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보'하지 않는다. 이런 관념은 '위대한 인물은 시대. 장소의 한계를 초월할 수 없다'는 현대사회학의 주장에 배치된다."


문명의 직선적인 '진보관'에 대하여, 그는 일관되계 경계심을 유지했다. 1937년 10월, 그는 <국명> 창간호에 항전의 역사적 의의를 밝히는 글을 써서 이렇게 말한다: "고인이 현재를 알고자 하면 당연히 먼저 과거를 알아야 한다. 현재는 과거의 산물이다. 즉 과거의 화신이다."(<매광적문존>, 186-188, 211쪽)

 

그는 호적과 의견이 달랐다. 그가 참여한 <학형>잡지에서, 그의 역사관에서 원천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대체로 같은 시기에 미국에 유학하고, '5.4"운동의 시대를 거치며, 각각 서로 다른 방법으로 그 시대를 살아갔다. 호적은 파도 위에 서서, 그 시대 조류를 대표하는 인물이 된다. 그러나 파도가 지나가고 나서, 호적은 파도에 휩쓸려 가지 않았다. 매광적과 같은 인물도 휩쓸려 가지 않았다. 그들의 견해는 그들의 행위는 그들의 견지는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들은 방향을 잃지 않았고,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한다고 뭐라고 하지 않았다. 비록 호적은 20세기 진화사관을 끼고 있었지만 역사를 만들어 낸 바 있다. 파도가 가라앉은 후에 우리는 놀랍게도 발견한다. 그들의 당시 의견차이는 의견차이이고 역사는 종래 일시의 성패를 중시하지 않았다. 역사는 스스로의 논리가 있다.

 

4. 역사는 한 민족의 영혼이다.

 

역사는 무엇인가? 하루는, 내가 고대로마 아우구스투스의 명저 <참회록>에서 이런 말을 보고 다시 한번 마음이 열렸다: "기괴한 것은 기억이 바로 영혼 자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 사람에게 어떤 사건을 기억하게 할 때 그에게 말한다: "마음에 남겨라. 마음 속에 기억하라."  만일 우리가 어떤 일을 잊어버리면 이렇게 말한다: "마음 속으로 생각나지 않는다." 혹은 "마음 속에서 잃어버렸다. 기억을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는 계속하여 말한다. 인류의 바램, 쾌락, 공포, 우수...이런 개념은 육체의 문호로 나의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 영혼 자체가 이런 감정을 체험한 후, 기억에서 자동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기억의 역량은 정말 위대하다. 그것의 오묘함, 그것의 천변만화는 정말 사람으로 하여금 놀라서 바라만 보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나의 영혼이다. 바로 나 자신이다."

 

1948년 전목은 <호상한사록>에서 이렇게 생각한다. 동물은 그저 지각만 가지고 있다.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인류만이 '마음'을 지니고 있다. 마음은 기억에서 나오고, 언어, 문자를 통하여 확정된다. "생리상의 마음은 그저 혈액의 집산처이다. 생리상의 뇌는 그저 지각기억의 중추이다. 모두 여기에서 말하는 마음이 아니다." 그가 지적한 마음은 개체를 초월한다. 그가 말하는 것은 비물질의 것이다. "인류의 마음의 능력은 이미 그들의 두뇌를 초월했다. 육체를 초월하는 외면에 붙어 있다. 이 마음은 광대하고 유구하다. 개체를 초월하여 존재한다. 일체의 인문발전은 모두 이 마음이 근원이다.

 

1천5백여년전을 사이에 두고, 이 유가문화를 신봉하는 동방역사학자는 무의식중에  고대로마 신학가와 비슷한 결론을 냈다. 이는 우연이 겹친 것이 아니고 실재는 역사의 본모습을 말해준다. 나는 이를 통하여 생각한다. 역사는  바로 민족의 영혼이 아닌가. 즉 인류의 영혼이 아닌가. 그것이 담고 있는 것은 서로 다른 민족이 기억이다. 나아가 인류의 공동기억이 되고, 인류의 영혼으로 응집된다.

 

역사는 지금까지 추상적인 개념들이 아니었다. 더더구나 이리저리 놓여잇는 재료도 아니다. 인류의 생명은 대대로 시간에서 연속되어 있고 이어진다. 그래서 역사가 된다. 바로 역사는 인류의 영혼을 구성한다. 이 점은 중국에서 일찌감치 사람들이 깨달았다. 문천상은 생사의 관건적인 순간에 목숨을 가볍게 여기고 역사를 중히 여겼다. 그는 '태사간(太史簡)' '동호필(董狐筆)'을 믿었기 때문이고, '유취단심조한청(留取丹心照汗靑)'을 믿었기 때문이다. 뇌진은 철창이 몸에 가해졌을 때, 가족들에게 이런 말ㅇ르 한다: 나는 중국역사를 만든 사람이다. 나 자신은 방향이 올다고 믿고 노력했다. 역사가 나를 위해 증명해줄 것이다."

 

고대그리스의 철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래된 속담이 맞다고 보았다: "시간은 모든 것을 삼킨다." 시간의 압박하에 모든 것은 늙는다. 시간의 흐름 속에 모든 것은 잊혀진다. 다만 그러나 어느 것도 시간을 통하여 새롭게 되거나 아름다워지지 않는다. 시간, 변화와 순간성은 모두 동의어이다. 그러나, 기억이 있고, 역사가 있으므로 인류는 무정하고 항거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초월할 수 있다. 역사에서 인류의 영혼은 남겨질 뿐아니라 항상 새롭고 아릅답게 유지한다. 물리적 시간외에 영혼의 시간이 있다. "한 민족의 생명이 수세기 내지 수천년 연속된다; 그래서 생명이 된다. 이는 당해 민족이 그의 모든 역사에서 동일성을 유지하였기 때문이다." 필자의 소년시대 친한 친구인 장명(張銘)은 이,삼십년전에 이런 시를 지은 바 있는데,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단잠(短暫)이 영원에서 걷는다. 이것이 사람의 광휘이다."

 

일단 기억이 우리의 영혼이라고 우리가 진실하게 깨달으면, 개체와 육체를 초월할 수 있다. 나아가 역사의 고귀함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민족의 영혼이다. 인류의 영혼이다. 우리는 더욱 정확하고 더욱 깊이있게 역사의 암흑시대를 이해할 수 있다. 역사를 읽을 때 더많은 동정의 이해를 가질 수 있다. 더 많은 이해의 통찰을 가질 수 있다. 역사의 서로 다른 측면을 볼 수 있을 뿐아니라, 더 많은 역사의 복잡성을 알아볼 수 있다. 역사에 대하여 말하자면 진상이 영원이 최우선이다. 역사의 진상에서 우리는 더욱 깊이있게 인류를 인식해야 하고, 자신을 인식해야 하고, 더욱 분명하게 진실의 토지 위를 걸어야 한다.

 

고금이래로, 역사는 직선으로 진화하지 않았다. 진실하고 복잡한 역사의 앞에서, 진화론사관은 확실히 너무 단순하고 너무 얄팍하다. 역사를 연구하는 매광적은 그러나 인류의 영구가치를 긍정하고 추구했다. 그리하여 역사의 문턱을 만지게 된다. 그는 역사의 진정한 가치는 진실한 기록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인류가 그 영구한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밝혔다. 이는 어빙 배빗이 그에게 끼친 영향이다. 또한 그가 장기간 사색하여 얻어낸 결론이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전목과도 일맥상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