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선(劉禪): 그는 기백이 큰 황제였다.

댓글 5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 역사인물 (유선)

2015. 3. 5.

글: 유아독존(惟我獨尊)

 

성명: 유선

별명: 자 공사(公嗣), 아명 아두(阿斗), 촉후주(蜀後主)

성별: 남

연대: 삼국시대

종년: 64세

어록: 차간락(此間樂), 불사촉야(不思蜀也).

평가: 도와줘도 안되는(扶不起來)

 

촉의 유비가 죽기 전에 유선을 제갈공명에게 탁고(托孤)하였고, 유선은 촉후주가 된다. 유선은 41년간 재위했으며, 내안외평(內安外平)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화해(和諧)황제라고 불러도 될 정도이다. 국가동란과 인민도탄을 막기 위하여, 황제의 체면ㄷ 불구하고 그는 백성의 현실적 이익을 중시하여, 생명과 재산의 의미없는 희생을 감소시키는 결정을 택한다.

 

1. 유선은 군사 제갈량과 평화공존한다. 이는 후세인들로투터 칭찬을 받은 일이다. 봉건사회의 가장 이상적이고 가장 완벽한 군신관계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후임자로서, 유선이 부친으로부터 완벽하게 이렇게 조화롭고 미묘한 군신관계를 이어받고, 이런 관계를 '황금파트너쉽'로 발전시킨다. 이는 유선의 '통이 크다'는 점을 충분히 보여준다.

 

유선은 부친 유비가 임종시에 제갈량을 부친처럼 모시라는 유언을 잊지 않고 그대로 해낸다. 제갈량의 대권독점에 대하여 유선은 모든 일에서 양보하고, '부친으로 모신다' 통상적인 이치대로라면 제갈량은 유선에게 국사를 반환해야 했다. 북벌 전날, 제갈량은 여전히 22살된 유선을 어린아이 취급하며, 특별히 심복을 파견하여 '관리감독'하게 한다. 청년천자 유선은 대국을 고려하여 이를 모두 받아들인다.

 

2. 유선은 싸우지 않고 투항한다. 왕은(王隱)은 <촉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유선이 오명을 뒤집어쓰면서 변명하지 않은 것은 "천하를 중시하여 결정했기 때문"이다. 유선은 이렇게 나라와 인민의 현실이익을 중시하는 정치가였다. "얼굴을 때려서 붓게 만들어 뚱보인척 하는" 체면정치가들과 같은 반열에 두고 평가할 수 없다. 이것은 국계민생(國計民生)의 책략이었다.

 

3. 유선은 망국이후, 망국지군으로서 스스로의 생명뿐아니라, 촉지방의 백성들의 행복도 모조리 남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자신의 대우는 직접적으로 진나라의 촉지역 백성에 대한 정책이 관대하고 느슨하게 만드는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유선은 반드시 멍청한체 해야 했고, 시시때때로 자신의 재능을 숨겨야 했다. 그래야 만천과해(瞞天過海)할 수 있었고,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다. 표면적인 유약함과 무신경의 배후에는 뛰어난 교활함과 기지가 숨어 있었다. 이는 실로 '도광양회'라고 할 수 있다. 후주 유선은 '통명지달(通明智達)"의 일대군주였다.

 

5. 제갈량의 황제를 무시하고, 독단전횡하는데 대하여 유선은 신경쓰지 않고 여전히 그를 부친으로 모신다. 유선은 일처리에서 사람의 마음을 얻고, 민의를 돌보며, 이를 통하여 정국의 장기적인 안정을 도모한다. 유선은 '군신이 불화하면 반드시 변고가 일어난다'는 이치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일시적으로 흥분을 참지 못한다면, 반드시 야만적인 노선투쟁이 일어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청년제왕 유선은 장기적인 안목으로 모든 것을 보았고, 이렇게 권신을 처리하는 문제를 잘 다루었다. 이는 금고미유(古未有)라 할 수 있다.

 

5.후주 유선은 도량이 있을 뿐아니라, 두뇌도 있었다. 제갈량이 급히 북벌을 하고자 할 때, 청년제왕 유선의 두뇌는 아주 분명했다. 그래서 이렇게 권한다: "상부남정(相父南征), 원섭간난(遠涉艱難); 방시회도(方始回都), 좌미안석(坐未安席); 금우욕북정(今又欲北征), 공로신사(恐勞神思)" 비록 제갈량은 유선의 권유를 따르지 않았고, 북벌의 결의가 일단 형성되자, 유선은 전력으로 제갈량의 북벌을 지지한다. 제갈량의 사후, 유선은 즉시 헛되이 국력을 낭비하고, 백성과 재물을 축내는 북벌을 중지한다. 아쉽게도 대장군 강유는 계속하여 외부에서 장기간 용병하고 조위를 토벌하고자 한다. 촉국의 국력재력은 계속하여 전쟁에 대거 소모된다. 사마의가 대군을 이끌고 요동의 공손연을 토벌할 때, 유선은 장완이 제갈량의 옛실수를 되풀이할까봐, 장완에게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수오거동(須吳擧動), 동서기각(東西掎角), 이승기흔(以乘其釁)" 위연이 반란을 일으키고, 양의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글을 올리자, 후주는 위연의 상소문을 다 읽고나서 즉시 의문을 제기한다: "위연은 용장이고, 양의등의 무리를 막아낼 수 있다. 그런데 왜 잔도를 다 불태워없앴는가?" 권신의 권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유선은 비위를 상서령과 대장군으로 삼아 정무를 주재하게 하고, 장완을 대사마로 삼아 군사를 담당하게 한다.  두사람의 권력은 서로 교차하고, 상호 견제하며, 각각 치중하는 바가 있었다. 장완이 죽은 후에는 유선이 '국사를 스스로 처리한다" 대권을 독점하여 촉국의 여러 해동안의 문제점인 "일이 크고 작고를 떠나, 모조리 승상이 결정한다"는 정치체제의 결함을 해결한다.

 

정치가의 각도에서 보자면, 후주 유선은 국군으로서 ,기백이 큰 정치가이고, 화해황제일 뿐아니라, 역사상 보기 드물게 춘추오패중 최초의 패자인 제환공과 비견할 만한 위대한 황제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유선의 명예를 회복시켜 후인들에게 알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