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기병은 어떻게 천하무적이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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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원)

2016. 8. 27.

글: Q선삼Q(Q先森Q)


13세기 징기스칸과 그의 자손이 동정서토(東征西討)할 때, 40여개국가를 멸망시키고, 사상 가장 방대한 제국을 건립한다. 흉노, 돌궐, 회흘등 유목민족과 마찬가지로, 몽골은 우수한 초원기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몽골의 패업은 사상유례가 없다. 그것은 비교적 다른 유라시아정권과 비교하여 군사적으로 우세를 점하였기 때문이다. 전술운용과 집행, 무기장비에서 정보수집, 전쟁계획과 준비등에서 몽골인들은 모두 아무도 따를 수 없는 전쟁의 천부와 선진적인 전쟁사고를 갖고 있었다. 몽골제국은 군사영역에서의 우세는 두 번의 서정(西征)에서 명확히 보여주었다.



징기스칸시기의 확장



무기와 장비


몽골기병의 기동성은 거세무쌍이다. 한편으로 작전을 벌이면서 한편으로 행군한다. 매일 80킬로미터를 갈 수 있다; 유럽의 기사는 단순히 행군망 해서도 절반의 거리밖에 가지 못한다; 전마는 몽골군대가 파죽지세인 핵심요소중 하나이다. 키가 큰 유럽말과 비교하면 몽골말은 왜소하고 튼튼하다. 피부는 두텁고 털을 굵으며 참을성이 강하다. 그리고 영하40도의 혹한도 견뎌낸다. 그래서 몽골의 제2차 서정에서 동류업의 겨울에 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몽골마는 눈밭에서도 먹이를 찾을 수 있었고, 사병은 암말의 마유로 허기를 채울 수 있었다. 이는 양초보급의 부담을 많이 줄여준다. 몽골의 행군, 우회, 돌격, 거짓패배등 전술은 전마에 많이 의존하게 된다. 더더구나 참을성이 강한 몽골마도 견뎌내기 힘들어 매 기병은 통상  4,5필의 말을 예비로 끌고 간다.


유렵의 말은 안장이 높고 단단하다. 안장의 뒷쪽은 기사의 엉덩이를 완전히 감싸고, 안장에는 얇은 금속을 덮어서 기사의 배부분을 보호한다. 이런 설계는 기사로 하여금 말 위에서 아주 안정적이게 만든다. 장창을 들고 돌격할 때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다만 기사의 몸놀림과 이동을 제한한다. 몽골마의 안장은 완전히 다르다. 안장뒤쪽은 말 등에 깔아버리고, 기병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특히 후퇴시 '파티야회마사(回馬射)"로 적을 사격할 수 있다.


전형적인 몽골군대에 중기병은 약 40%를 점하고, 경기병이 60%를 점한다. 중기병은 주로 돌격하는데 쓰인다. 필요할 때는 근접전투도 벌이낟. 제2차서정(1235-1242)때 몽골 중기병의 가장 통상적인 갑옷은 철갑편(lamellar armor)이다. 쇄자갑과 가죽을 끼워서 만든 갑옷이다. 철갑편은 원래 칼로 내려치는 것을 막거나 화살과 가타 투척무기가 뚫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다만, 도검으로 쉽게 철갑편을 고정시키는 가죽끝을 잘라버릴 수 있고, 여러번 내려치면 철갑편이 갈라지게 된다. 동시기의 유럽 중장비기사는 일반적으로 전신(두부 포함)을 쇄자갑으로 덮는다. 도검으로 내려쳐도 쇄자갑은 손괴되지 않는다. 다만 화살이나 장창으로는 뚫을 수 있다. 그리고 쇄자갑은 무겁다. 그래서 기병의 속도와 민첩성을 약화시킨다.



경기병(좌)과 중기병(우)



경기병은 몽골 전술체계에서 아주 중요하다. 원거리사격, 적군유인, 경계, 우회포위 심지어 근접전까지 주요한 타격수단은 밀집화살사격이다. 경기병은 일반적으로 원형의 투구만 쓴다. 몸과 마필의 호갑은 아주 적다. 경기병이 사용하는 몽골복합반곡궁(궁배는 목재, 우각과 기건을 복합하여 만든다)의 성능은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영국장궁(유목 혹은 자삼목으로 만듬)보다 우월했다; 몽골궁의 인장력은 166파운드이고, 유효사거리는 320미터였다. 영국장궁은 각각 80파운드, 230미터였다.


영국장궁은 유럽대륙에서는 널리 사용되지 않았다. 몽골과 교전한 중동유럽의 군대가 쓰는 것은 아마도 십자노(十字弩)였을 것이다. 비록 사정거리와 위력은 장궁과 비슷하지만, 반사빈도는 장궁이나 몽골궁에 훨씬 떨어진다. 유럽기사들은 궁전을 사용하는 것을 멸시했다. 그저 조연 역할을 하는 보병이나 궁노를 쓴다고 생각했다. 몽골경기병이 사용하는 화살은 최소한 3가지이다. 하나는 화살촉이 무겁고 좁아서 원거리사격에 쓴다. 쇄자갑을 뚫을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화살촉이 크고 넓다. 근거리사격에 쓴다. 말을 쏘는데 특히 효과적이다; 세번째는 신호용 화살 혹은 불을 놓는데 쓰는 것이다.


몽골중기병과 경기병이 사용하는 근접전 무기는 모두 만도(彎刀)이다. 아랍만도를 기초로 개량해서 만든 것이다. 도신은 작고 가볍다. 그리고 잘 굽어 있어서 역학이론에 부합한다. "만도는 적의 신체에 접촉했을 때 칼날의 곡면이 미끄러진다." 몸에 박혀서 뽑기 어렵지 않다. 철갑을 내려쳤을 때도 진동으로 날아가지 않는다. 그리하여 여러번 칠 수가 있다. 유럽기병의 직검은 힘이 강하고 무겁다. 만일 제대로 맞으면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무겁기 때문에속도가 느리다. 그리고 쉽게 진동이 나고 부러진다. 경기병은 또한 고리를 가진 창을 휴대한다. 고리로 적을 말에서 끌어내릴 수 있다. 창끝에 고리가 있으므로, 적의 신체에 찌르고 들어가더라도 깊이 들어가지는 않는다. 그래서 쉽게 뽑아낼 수 있다. 유럽기병의 주요무기는 장창(Lance)이다. 길고 무겁다. 보병과 기사에게 치명적이다. 민첩하게 기동성있는 몽골기병에게는 그다지 실용적이지 않다. 13세기 중엽, 몽골기병의 무기장비는 이미 유럽보다 뛰어났다. 탁월한 지휘하의 기병전술은 더더욱 유럽인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전술운용과 집행


알렉산더대제가 창조하고 한니발이 완성시킨 "양익포초(兩翼包抄)"의 경전적인 기병전술은 아펜니노반도에서 연이어 성공을 거둔다. 십여년동안 로마공화국의 거의 모든 장수들은 감히 한니발과 정면으로 싸우지 못했다. 중세기 중전기에 이르러, 유럽의 기사문화는 광명정대한 전투를 강조했고, 개인영웅주의가 범람한다. 전술은 융통성이 없다. 유럽중시기는 완전히 군사전술사의 암흑시대라 할 수 있다. 몽골이 채용한 여러 기병전술(전우타격(箭雨打擊), 양익포초, 거짓후퇴, 개구(開口)등)은 기실 오리지날은 아니다. 돌궐과 회흘등 초원부락이 모두 써왔던 것이다. 다만 엄격한 전술훈련을 거친 몽골군대는 신축성있게 운용하여 완벽하게 발휘했다.


만일 만난 적군의 병력이 많지 않거나, 진형이 정비되어 있지 않으면, 몽골기병은 중기병대열 사이의 공간으로 적군에 일제사격을 가한다. 이런 사격은 구체적인 조준목표가 없다. 그저 빈도높게 대량의 지속사격으로 적군에 타격을 가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혼란을 조성할 수 있다. 경기병이 임무를 완성하고 중기병의 뒤로 돌아오면, 중기병이 그 기세를 틈타 돌격한다. 동시에 양날개의 경기병(왕왕 연무와 흙먼지로 엄호한다)이 적군의 측면내지 후면을 포위한다. 그리고 중기병과 함께 포위망을 형성한다.



기병기본전술



진형을 갖추고 있는 강대한 적군을 만나면, 몽골은 자주 거짓패배로 적을 유인하는 전술을 취한다. 그래서 적군을 미리 생각한 장소까지 끌고온 다음, 매복하고 있던 군대와 포위공격하여 섬멸하는 것이다. 제1차서정(1219-1224)후기의 할하(Khalkha)강전투(1223년 5월)에 제베와 수부타이가 이끄는 3만이 되지 않는 인원으로 오로스와 킵차크의 10만연합군을 만난다. 몽골군은 연속하여 9일간 철수하면서 유리한 장소인 할하강변까지 물러난다. 9일간 추격하던 연합군은 대형이 흩어진다. 몽골기병은 돌격을 개시하고, 양날개도 금방 포위망을 형성한다. 그리고 일거에 적군을 섬멸시킨다. 이 전투에서 70명의 귀족이 사망하고, 6명의 오로스왕공이 처형되며, 게다가 나중에 포위공성전에서는 연합군의 사망자가 5만에 이른다. 그러나 몽골인의 사망자는 얼마되지 않는다.


제2차서정의 레그니카(Legnica)전투(1241년 4월 9일)에서 실레지아의 공작 헨리2세가 이끄는 4만의 폴란드연합군은 몽골기방의 거짓패배에 속아서 계속 추격한다. 독일보병과 전방의 기병이 서로 떨어지게 된다. 매복하고 있던 몽골 중기병이 돌연 정면에서 연합군에 화살을 날린다. 거젓으로 패퇴하고 있던 경기병은 양날개로 가서 포위한다. 그리고 적군의 전마를 주로 쏜다. 몽골 중기병은 돌격을 하고, 낙마한 기사는 갑옷이 무거워 행동이 곤란했고, 결국 몽골인들에게 살해당한다. 헨리2세와 여러 명의 폴란드귀족이 전사한다.  프랑스 성전기사단은 참전한 기사가 전원 전사하고, 튜튼기사단(독일기사단)의 우두머리도 중상을 입는다. 연합군은 합계 25,000명의 사망자를 낸다.


막다른 골목에 몰려도 끝까지 저항한다는 이치를 몽골인들도 잘 알고 있었다. 레그니카전투가 끝난 이틀 후의 사요강(지금의 티서강)전투에서 제2차서정의 총사령관인 바투는 사요강 건너편의 헝가리 교량수비군을 맹공하고, 수부타이가 이끄는 부대는 몰래 결빙된 강을 건너 헝가리군영의 측방과 후방으로 간다. 이렇게 하여 바투와 포위망을 형성한다. 군영내에 갇힌 적군이 어떤 심리상태로 싸우느냐에 따라 몽골은 승리를 거두더라도 비교적 큰 댓가를 치러야 했다. 그래서 몽골군은 포위망의 서쪽에 하나의 출구를 열어둔다. 헝가라군대는 도망갈 희망을 발견하자 싸움에 연연하지 않고, 앞다투어 서쪽으로 도망치게 된다. 많은 사병은 심지어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다. 그러나 몽골인은 일찌감치 길에 함정을 설치해 두었다. 그리고 후방에서 추격해서 살해했다. 이것이 바로 몽골인의 개구전술이다. 수일동안의 추격살인과정에서 헝가리군대는 7만명이 사망한다. 그러나 몽골인은 겨우 1000명가량만 사망한다.



사조강전투



몽골장수는 양익우회, 거짓패퇴, 유인전술, 개구전술을 신축성있게 운용하여 핵심전투에서 연전연승한다. 승전후에는 통상적으로 피비린내나는 도성(屠城)을 벌인다. 유럽인들은 타타르인(Tartars)로 강대하고 공포스러운 몽골전사를 부른다. 왜냐하면 Tartars는 어원이 Tartarus인데, 그리스신화에서 지옥을 의미한다. 그들은 로마제국후기에 동방에서 온 흉노인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세계를 징벌하는 하느님의 채찍이었다.


몽골인들은 전술설계에 뛰어났을 뿐아니라, 엄격한 군기로 탁월한 행동력을 보장했다. 1213년 9월의 양하곡(陽河谷) 전투가 있다. 징기스칸은 34,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요충지를 지키고 있던 10만의 금나라군대를 섬멸한다. 몽골의 전략은 중로의 인마가 직접 수비군을 공격하고; 동시에 양하곡 주위의 복잡한 지형을 엄호로 활용하여, 동,서 양로의 기병으로 하여금 산과 언덕을 넘어 금나라군대의 측면과 후방으로 우회하게 했다. 이 계획은 보기에는 간단하지만, 실로 각로군대가 집행하고 정확하게 협조하기는 아주 어렵다. 만일 중로의 진공이 너무 맹렬하면 금군은 아마도 후퇴를 할 것이고, 몽골은 포위할 가능성이 사라진다. 동서양로가 만일 지나치게 빨리 공격하면, 아마도 금나라군대는 의도를 파악하게 될 것이다(금나라군대는 이미 여러번 우회포위에 당한 교훈이 있다); 혹은 양로에서 공격을 하는 시간이 너무 차이나면, 사람수의 열세로 아마도 금나라군대에게 역공을 당할 수 있다.


위의 어느 상황이 나타나더라도, 금나라군대는 성공적으로 양하곡의 뒤에 있는 거용관으로 철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몽골군은 어려운 공성전을 치러야 한다. 실제 상황은 이렇다. 몽골 중로가 거짓공격으로 수비군의 주의력을 계속 끌면서, 포위하는 기병이 성공적으로 수비군의 양쪽과 뒷쪽으로 가고, 8만의 금나라군대는 도륙을 당하여 시신이 양하곡에 높이 쌓인다. 이 전투에서 몽골의 척후와 전령병(정찰, 연락과 명령전달을 책임지는)이 핵심역할을 한다. 행군과 진공의 정확한 시간을 확보하고,  협조가 잘 이루어지게 했다.


정보수집, 전쟁준비와 사병훈련


몽골의 정보수집도 아주 선진적이었다. 정보계통은 국가군사기기의 중요구성부분이다. 몽골의 정보연락과 상인이 맡는 간첩은 유라시아대륙에 널리 분포되어 있었다.  매번 대규모전쟁과 전투전에는 반드시 첩보가 선행되었고, 정보분석의 기초위에서 작전방안을 세운다.


1218년, 호라즘(花剌子模)의 하이르칸(海兒汗)은 몽골상인을 강탈한다. 호라즘의 국왕은 몽골에서 교섭하러간 사신을 죽인다. 같은 해 쿠릴타이대회에서 징기스칸은 제1차서정을 결정한다. 이번에 비단길을 통한 상인간첩들에 의해 몽골인들은 호라즘에 대하여 상당히 많은 이해를 하고 있었다. 서정의 전쟁계획은 주도면밀하고 완벽했으며, 전쟁준비도 충분했다. 큰 것과 작은 것 모두 다루었고, 심지어 지나치게 조심스럽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고위장수로 구성된 위원회는 전쟁계획을 작성하는 책임을 진다. 쌍방의 형세를 분석하고, 전략목표를 세우고, 공격노선을 선택하며, 군대수량과 구성, 매 부대의 목표와 임무, 군수조달방안들을 작성한다.


몽골인은 10만의 몽골신병을 모집하여 전쟁에 참전시킨다. 다만 그들은 신전경험이 부족했다. 징기스칸은 1209년 여름동안 신병을 강도높게 훈련시켜 전투부대의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몽골은 다시 포위공성전에 필요한 공사기술자와 사병 근 만명을 모집한다. 그리하여 대량의 파성추(破城), 투석기와 화약등을 제조한다. 군수운송방면에서, 3000여킬로미터의 행군노선에 군수물자창고를 두고 도로를 닦고 다리를 놓는다.


호라즘측을 보면, 거의 아무런 전쟁계획이 없었다. 그저 대부분의 병력을 중요도시에 분포시켜 '공격을 맞이한다' 전쟁의 주도권을 상대방에게 넘겨준 것이다. 첫번째 도시를 공격하고부터 호라즘의 수도인 사마르칸트를 점령하기까지(1220년 3월), 몽골군대는 겨우 6개월의 기간을 사용한다. 호르즘은 전쟁개시전에 몽골군대가 1년은 걸려야 본국까지 행군해올 것이라고 예상한다. 몽골군대는 가장 많았을 때 겨우 20만명이다. 그러나 호라즘은 40만의 장비를 잘 갖춘 군대가 있었다. 이는 13세기에 충분히 준비하여 소수로 다수를 이긴 전격전이다.


제2차서정을 개시하기 10년전에, 몽골인은 유럽의 정보를 수집한다. 그리하여 유럽의 군주, 왕후가 침입에 대하여 어느 정도 저항할지를 알아놓았다. 로마시대에 남겨놓은 도로를 그린 지도가 있었다. 제2차서정에서 러시아를 점령한 후, 몽골인은 2년의 기간을 들여 통치를 공고히 하면서 계속 정보를 수집한다. 이 과정에서, 몽골의 천재장수 수부타이는 '유럽통'이 된다. 그는 유럽의 정치환경, 각국의 병력부대배치, 군대의 우열에 대하여 모두 파악한다. 바투는 명목상의 서정총사령관이나, 수부타이야말로 동유럽을 무너뜨린 진정한 의사결정자이면서 지휘자이다. 이와 비교하면, 유럽인들은 몽골에 대하여 거의 알지 못했다.


군사입국의 몽골은 군대의 각유형 각등급 인재의 장기적인 배양을 아주 중시했다. 몽골아동은 4,5세때부터 고비의 학교로 보내어져 활쏘기와 기마술을 배우고, 15세가 되면 군대에 들어간다. 이때는 이미 두수한 기마사격능력을 지닌다. 몽골군대의 훈련방식은 근대군사의 실전연습과 비슷하다. 주요 목적은 실전중의 행군, 포진과 전술 그리고 근접전의 무기격투를 배운다. 훈련은 엄격하고 잔혹하다. 징기스칸은 겨우 13,000명의 군대를 가지고 있을 때 이런 훈련방식을 썼다. 군대가 5만명이상의 규모로 커졌을 때, 훈련에 필요한 부지가 너무 방대하고 관리가 복잡하여 징기스칸은 수렵활동으로 대체했다.


평화시기의 겨울에는 1달에서 3달까지 계속되는 대수렵(nerge)을 통하여 보통전사는 각종 전술을 능숙하게 익히고, 각급 지휘관(만호장, 천호장 및 백호장등)은 지휘, 통제, 협동배합등의 방면에서 충분한 단련을 거친다. 금나라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징기스칸은 다시 공성전의 중요성을 인식한다. 그리하여 전쟁학원을 설립하여, 중원에서 포로로 잡은 공장(工匠)으로 하여금 공성전에 필요한 기계와 화약을 제조하는 전문지식을 가르치게 한다. 몽골은 최종적으로 3만의 포병과 공병으로 구성된 공성부대를 만든다. 전쟁학원은 나중에 고급지휘관에 대한 훈련을 추가한다. 천호장이상은 반드시 전쟁학원에서 훈련을 받아야 했다.


몽골군은 군기가 엄정했다. 아무도 재물을 강탈하기 위하여 추격이나 전투를 포기하지 않았다. 명령을 어기도 진격하지 않는 자는 참수된다. 도망병에 대한 징벌을 더욱 엄격하다. 허가없이 철수하면 도망병으로 취급된다. 그리하여 연좌제의 처벌을 받는다. "십인대에 누군가 도망치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제지하지 않으면 전부대원을 사형시킨다. 만일 십인대가 모두 도망치면, 당해 십인대가 소속된 백인대는 모조리 처형한다."


제2차서정과 제3차서정(1253-1259)기간동안, 몽골제국에 두 번의 칸위쟁탈전이 일어나서 기독교문명과 무슬림문명을 구하게 된다. 제3차서정의 아인잘루트전투(1259년 9월)에서 이집트의 무슬림연합군은 패색이 짙다가 승리를 거둔다. 몽골의 군대확장은 이제 끝이 난다. 기병의 우세는 더 이상 없다. 아랍의 말은 크고, 속도도 빠르며, 참을성도 좋다. 다마스커스만도는 더욱 크다. 이집트강궁은 몽골복합궁보다 사정거리가 멀고, 맘루크기병은 종신훈련제이다. 수십년후의 오스만투르크제국이 굴기하며 일종의 몽골, 아랍, 비잔틴과 십자군특색을 혼합시킨 강대한 군사체제가 만들어진다. 14세기이후, 유럽에는 몇번의 군사혁명이 이렁나고, 냉병기시대는 점차 막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