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진정한 흉노(匈奴)의 후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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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기록

2017. 8. 19.

글: 하필(何必), 양풍(凉風)


최근 고고학계에 큰 뉴스가 하나 나왔다. 몽골국 고비성 더리거르 항아이쑤무 경내에서, 중국몽골 연합고고팀은 한문(漢文) 마애석각(摩崖石刻)을 현지조사했으며, 그것이 동한 영원원년(89년) 반고(班固)가 쓴 <봉연연산명(封燕然山銘)>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이 명문이 최초로 나타나는 곳은 남조 범엽이 쓴 <후한서.두헌전>이며, 그리고 <소명문선>에서도 수록해서 후세에 전해졌다; 그러나 오랫동안 진적(眞迹)을 찾지 못하여, 반고가 상상으로 쓴 것이라고 여겨왔다. 이번의 발견으로 마침내 고고유적으로 문헌기록을 증명하게 되었으니, 사랃들이 흥분하게 되었다.


이 명문은 거기장군 두헌이 한나라군대를 이끌고 북흉노를 격하한 후, 연연산 남록에 올라 돌에 그 공적을 새긴 것이다. 그후 2년이 지나 북흉노는 다시 한나라장수 경기에게 패하면서 더 이상 한나라군대와 싸울 수가 없어 부득이 서쪽으로 멀리 이주하게 된다.


몽골국의 몽골사학계에서 보기에, 고대의 흉노족과 몽골족은 관계가 밀접했고 전자는 바로 후자의 조상이다. 몽골국가의 정통적인 역사서술은 이 기초 위에서 쓰여져 있다. 그러나, 중국의 대부분 몽골사학자들은 다른 견해를 지니고 있다. 몽골족의 원류를 대흥안령의 동호(東胡)족으로 소급한다.  


흉노 후예의 향방에 관하여 중국사학계의 주요견해는 몽골사학자들과 크게 다르다. 흉노는 한나라군대에 패배하여 서쪽으로 이주하여 최종적으로 유럽으로 갔고, 민족대이동을 불러왔고, 간접적으로 서로마를 멸망시킨다. 이것이 바로 유럽문헌에 나오는 "훈족"이다. 나중에 헝가리인이 된다. 


서로 다른 역사기술에서 흉노인의 후예는 서로 만리나 떨어져 있다. 심지어 인종도 황인종 백인종으로 다르다. 진정한 흉노의 후예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흉노의 후예를 찾으려면 먼저 "흉노가 누구인가?"에 답해야 한다.


<후한서.남흉노열전>에 따르면, 흉노정권의 핵심은 선우(單于)가족 연제씨(攣鞮氏), 호연씨(呼延氏), 수복씨(須卜氏), 난씨(蘭氏), 구림씨(丘林氏)등 씨족이다. 그들은 서로 혼인을 했고, 공동으로 전체 초원을 지배했다.


이 핵심씨족연맹을 제외하고 흉노정권이 지배하는 초원에는, 다른 흉노씨족과 다른 부족도 생활했다. 모돈선우는 동으로 동호(東胡)를 격파하고, 서로는 월지(月氏)를 격파했다. 이렇게 초원을 통일한 후, 동호, 월지의 부족도 받아들인다. 강성기의 흉노는 정령(丁零), 강(羌), 서역호인 내지 중원인까지 포함했다


초원정권연맹의 성분은 이렇게 복잡하고, 많은 부족은 모두 아마도 주동적으로 혹은 피동적으로 "흉노"로 기록된다.


48년 흉노가 분열된 후, 납흉노는 중원왕조에 귀순한다. 역사기록이 비교적 명확하다. 그러나 북흉노의 행적은 훨씬 불명확하다.


소위 "흉노서천"이 가리키는 것은 바로 북흉노이다. <후한서>의 기록에 따르면, 북흉노는 영화연간 연속적으로 격패당한 후, 막북에서 오손(烏孫, 지금의 천산북록 이리하계곡에서 바르카스호 일대)으로 도망친다. 그리고 막북서부, 오손 동북에서 수십년간 거주한다. 그동안 북흉노는 두번 동한에 사신을 보냈고, 한 때는 한왕조와 서역제국을 놓고 쟁패했다.


한순제 때(134년)에 이르러, 반용(班勇)이 다시 서역을 경영하며 철저히 북흉노의 영향을 제거한다. 그후 수십년간 선비(鮮卑)세력이 막북으로 확장한다. 고립된 흉노족은 부득이 서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삼세기중엽, <북사.서역전>에 따르면, 북흉노는 오손을 거쳐 강거(康居, 지금의 카자흐스탄 시르강 하류 및 이북)로 이동한다. 그리하여 강거왕이 남으로 이주한다. 얼마 후, 북흉노는 다시 서쪽으로 가서 아랄해서안, 카스피해의 엄채국(奄蔡國)으로 들어가서, 그 왕을 죽이고 나라를 차지한다. 


그 이후, 중국어사료에는 더 이상 북흉노의 종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아랄해 부근으로 이주하여 거주하던 흉노에 대하여 고대 페르시아와 인도에서도 주목을 한다.


페르시아인의 기록에 따르면, 4세기 중엽, 중앙아시아지역은 한 갈래의 유목민족이 카자흐초원으로부터 남침하기 시작한다. 페르시아인은 "Xiyon(Xinites, 匈尼特人)"으로 불렀다.인도인은 그들을 "Huna"라고 불렀다. 여러 나라의 단어버역의 표준으로 보자면 이는 "흉노"의 한어 고음(슝나)와 일치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당시의 소그드인은이 민족을 Hwn(소그드문자에서 알파벳으로 적으면)이 된다. 이전에 유요가 서진 낙양성을 불태우는 것을 목격한 바 있는 소그드상인의 전한떄 흉노에 대한 칭호도 똑같았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유목민족의 연맹성격은 비록 중국사학자, 소그드상인이 모두 흉노라고 봤지만, 서천한 흉노정권은 많은 정도에서 중앙아시아초원에서 살던 이란계 스키타이 유목민족이 주도했는지 판단하기 실로 어렵다. 


흉노를 구성하는 민족 중에 동이란언어를 사용하는 기다라인(Kidarites, 홍Huna인이라고도 부름)도 있고, 한때를 질타앴던 알타이어를 사용했을 옌다인(Hephthalites, 백Huna인이라고도 부름)도 있다.


중앙아시아 역사기록도 여기까지이다. 이와 동시에 남러시아초원에 카자흐초원에서 온 부족이 나타난다. 그리하여 동류업 민족대이동이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로마 기독교도들이 하느님의 채찍이라고 부르는 훈족(Hun)이다.


서방세계에서 가장 먼저 훈족을 기록한 저작은 4세기 로마제국후기의 사학자 Ammainus의 <역사>이다. 거기에는 훈족이 아란족을 멸망시킨 과정을 기록했다. 5세기의 사학자 Priscus는 로마사절단의 아틸라왕정방문에 참가한다. 돌아온 후에 그리스어로 보고서를 쓴다. 우리는 이 보고서의 잔존본에서 훈족의 생활중 일부를 알 수 있다.


로마인의 기록에 따르면, 막 유럽에 출현한 훈족은 철기를 사용할 줄 몰랐고, 카페트도 없으며 음식을 익혀서 먹을 줄도 몰랐다. 훈족의 물질문화와 사회조직은 모두 극히 낙후되어 있었다. 수백년전 몽골초원상의 흉노선우국에도 미치지 못했다.


중원, 페르시아,로마는 모두 유라시아초원의 강대한 역량을 기록하고 있고, 이들 기재간에는 서로 끊겨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흉노족인 서쪽으로 이주하여 유럽의 헝가리가 되었다'는 주장은 십여세기를 기다려야 비로소 출현한다.


"연결"된 역사


유럽에서 최초로 위에 기재한 것을 관통시킨 것은 18세기 프랑스인 Joseph de Guignes이다. 그는 1756년-1758년에 연속으로 5권의 <흉토통사>를 출판한다. 그는 흉노족이 바로 훈족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어 사료에서의 흉노인이 엄채를 점령했다는 것은 바로 로마인이 기재한 훈족이 아란을 점령했다는 것이라고 한다. 그후 그들은 점차 서쪽으로 침곻ㅇ하여, 아틸라가 이끌고 훈족왕국을 건립했다고 보았다.


1900년, 독일학자 Friedrich Hirth는 <볼가강의 훈족과 흉노족>이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그는 중국사서를 이용하여 Joseph de Guignes의 견해를 보완한다.


그후 헝가리학자 Kalman Nemaeti는 <흉노가 훈족이라는 지리적 증명>을, 프랑스학자 Edouard Chavannes는 <칼만 네마에티의 흉노가 훈족이라는 것을 평함>을 발표한다. 여러 동방학자들의 논증하여 흉노족이 훈족이라는 것은 서방에서 이미 해결된 문제로 인식된다.


이견이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1969년 프랑스의 한학자 한백시(韓伯詩, Louis Hambis)는 <훈족과 흉노족>이라는 글에서 훈족과 흉노족은 같은 민족이 아니라고 보았다; 전자는 몽골인종(수염이 없고 코가 납작하다)이며 알타이어를 썼고; 후자는 시베리아인(큰 코와 많은 수염), 시베리아어를 썼다. 훈족은 아마도 흉노족이 서천하는 과정에서의 주변부족이었을 것이고, '흉노'라는 명칭을 사용했을 것이다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흉노족의 후예문제는 흉노족의 족속문제로 비화되었다. 만일 흉노족의 현대의 동족을 찾을 수 있다면, 문제는 거의 해결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문헌의 기록은 왕왕 부정확하다. 특히 흉노족과 훈족은 스스로 자신의 문자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후인들의 연구는 완전히 유라시아 각 문명의 역사문헌을 보아야 하고, 정확성이 높지가 않다. 


근대이래, 고고학과 언어학은 학자들의 연구시야를 넓혀주었다. 프랑스학자인 Pelliot는 역사언어학의 각도에서 흉노족의 족속문제를 고찰했고, 흉노는 돌궐어계 인종에 속한다고 보앗다. 일본학자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는 흉노족이 원시몽골어를 말했다고 보았다.


더욱 많은 성과는 분자인류학의 발전에서 왔다. 족속의 고찰은 문헌과 언어에서 유전학으로 방향을 바꾼다. DNA는 자조 '고칠 수 없는 역사기록"이라고 말하여진다.


DNA의 해석


2003년에서 2007년까지 프랑스 유전학자 Christine Keyser-Tracqui는 몽골국 북부에서 발견한 흉노귀족묘장에 대한 일련의 분석을 진행한다.


그녀는 묘장 소재지의 현재현지인, 현대몽골인, 현대야쿠트, 현대아나톨리아 터키인을 골라서, 그들과 고대흉노족의 Y염색체, 미토콘트리아, 상염색체의 DNA를 비교하여, 현재몽골인과 고대흉노족의 유사정도가 가장 높다고 보았다. 나아가 현대몽골인이 고대흉노족의 후예라고 보았다.


그러나, 크리스틴의 연구에서 46개의 흉노개체중 3개는 유럽유형이었다. 


이는 설명한다. 흉노는 단일한 민족실체가 아니었고, 초원부락의 연합체였다. 동서초원의 황인종, 백인종,이 모두 통합하여 강대한 흉노통치하에 있었다.


중국학자는 대폭 이 비교연구를 전개한다. 그들은 척발선비, 흉노, 다오르, 어룬춘, 어원커, 조선, 내몽골, 외몽골, 부르야트, 야쿠트, 남방한족, 북방한족, 카자흐, 우즈벡, 터키드 모두 15개 민족군의 DNA샘플을 비교했다. 





이 유전거리표를 보면, 15개 민족중에서 흉노족과 유전거리가 가장 가까운 것은 북방한족(0.0156)이고 내몽골(0.0178)과 외몽골(0.0186)

이 2위 3위이다. 그리고 모두 다른 민족들과 흉노와의 유전거리보다 현저히 가까웠다. 그러나, 북방한족과 내몽골(0.0029), 외몽골(0.0053)은 다시 그들 각자와 흉노와의 유전거리보다 가까웠다.


이것은 바로 "흉노족의 서천"이 잘못된 역사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북흉노의 유전후예는 북아시아초원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날의 몽골인이 되었을까?


민족의 신화


답안은 당연히 아니라는 것이다.


분자인류학이 오랫동안 직면한 문제는 단일지구 묘장의 DNA연구가 전체 민족을 대표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프랑스학자가 채택한 Egyin Gol지구의 흉노묘장에서 소량의 유럽형 존재가 나타났다는 것은 흉노의 구성이 하나의 순수한 혈연민족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현대몽골인은 확실히 이렇게 다양화된 민족구성을 승계하기 어렵다.





위의 연구에서 알 수 있듯이, 고대 흉노족과 척발선비의 유전거리는 외몽골인보다 가깝다. 역사기록이나 실제정권충돌이나 모두 흉노와 척발선비는 같은 민족이 아니라고 한다.


14개 비교민족군 중에서, 고대 흉노족과 유전거리가 가장 가까운 것은 심지어 북방한족이다. 그러나 화북의 역사도 흉노제국까지 소급되지는 않는다.


이것은 바로 분자인류학연구성과를 역사해석으로 하는데 가장 큰 문제이다. 유전의 관련성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것의 선후인과관계이다.


정통사회의 조직기초는 친족제도이다. 순 생물적인 혈연제도가 아니다. 미국인류학자 사린스의 연구는 보여준다. 인류의 친족관계는 본질적으로 유사혈연의 문화현상이다. 입양, 연종(連宗), 모명(冒名)은 모두 친족중에 서로 다른 혈통의 사람이 섞여 들어갈 수 있게 해준다. 그리허게 하여 하나의 종족단체를 이룬다. 초원의 부락사회는 같은 조직논리를 따른다.


옥타비아누스의 모친은 카이사르의 외조카딸이다. 그 본인은 카이사르의 양자이다. 카이사르의 정치사업과 가산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들 두 사람의 유전관계는 거리가 멀다.


농민출신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장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 源氏가 아니면 장군이 될 수 없다)가 양자로 들어가고 싶다고 시도해 봤는데, 거절당한 후 다시 후지하라가문의 전 관백(關白) 고노에 사키히사(白近衛前久)의 도움을 요청하여 양자로 받아들여진 후에 '관백'이 된다(단지 '오섭가(五攝家)'만이 관백을 맡을 수 있었다). 분자인류학으로는 고노에 가문의 후세중에서 토요토미와의 유전관계는 알아낼 수가 없을 것이다.


민족을 순수혈연, 언어 혹은 문화공동체라고 상상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상당히 근대의 일이다. 독일의 각 국가가 나폴레옹제국에서 분리되고, 이탈리아가 통일되고, 발칸이 오스만투르크제국에서 독립하고 여기에 1차대전후에 '민족자결'의 바람이 분 후에 민족의 순결성과 혈연으로 전승되는 역사서술이 국가독립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된 것일 뿐이다.


지금, '민족'은 단지 '상상의 공동체'라는 것에 이미 컨센서스를 이루었다. 사람들이 민족의 구성원이 되려면 반드시 2천여년전의 선조와 혈연관계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마크 트웨인의 단편소설 <주지사에 입후보하다>에서 피부색이 다른 아이가 주인공의 다리를 끌어안고 그를 아빠라고 부르는 장면은 황당하기는 하지만, 천년을 이어온 인류의 민족에서 피부색이 서로 다른 후예가 같은 조상을 가지는 것도 지극히 정상적인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