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릉의 허실(5): 묘장을 만드는데는 반드시 지하수를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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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진시황릉의 허실

2018. 2. 7.

글: 진경원(陳景元)


인류가 나타난 이래, 각 시대의 사회생활과 생산은 모두 물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다만 이런 관계는 반드시 일종이 균형을 이루고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즉, 만일 이용할 물이 충분하지 않다면, 넓은 삼림이 존재할 수 없고, 매년 풍성하게 수확하는 농지가 있을 수 없고, 도시의 아름다운 환경이 마련될 수 없다. 다만, 수량이 한계를 넘어버리면, 삼림을 훼손하고, 농지와 집을 물에 잠기게 한다. 나아가 생태에 위기를 불러온다. 구석기새대부터, 원시인들은 사는 장소는 "임수(臨水), 고항(高亢), 건조(乾燥)"한 곳이라는 이치를 알았다. <관자.승마편>에는 이렇게 말한다: "무릇 국가의 수도를 세우려면, 큰 산의 아래가 아니라, 넓은 강의 위에 반드시 세워야 한다; 너무 높이 올라가서 가물고 물이 부족하지는 않아야 하고, 너무 물에서 가까워서 물을 막는 공사를 해야해서도 안된다." 물을 사용하고 물의 혜택을 누리면서도, 각종 수해를 방지해서 인류의 거주지를 보호해야 한다. <순자.왕제>에서 말하는 것처럼,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 '사람과 물'의 모순을 잘 해결하여야만 진정으로 '안거낙업(安居樂業)할 수 있는 것이다.


물과 묘장도 이렇게 밀접한 관계가 있을까? 답은 그렇다는 것이다. 고대인의 이념중에 "죽음"은 "삶"의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연장이다. 생전에 '사람과 물'에 관한 각종 금기는 마찬가지로 지하묘장에서도 각종 금기로 된다 제왕의 생전 궁전건축에서도 먼저 풍수를 본다. 그 후에 부지를 선정한다. 사후의 능묘도 먼저 풍수를 보고 뒤에 부지를 선택하여 건설을 한다; 제왕은 생전에 고파(高坡)에 살지만, 죽은 후에도 고항(高亢)에 묻혀야 한다. 제왕은 생전에 궁전이 수해를 입어 물에 잠기는 것을 두려워했지만, 사후에도 능묘가 수해를 입어 물에 잠기는 것을 두려워했다. 제왕의 생전의 침전은 양택(陽宅)이라 부르고, 사후의 분묘는 음택(陰宅)이라 부른다. 그들은 규격, 배치, 방향, 진설등 방면에서 최대한 일치시킨다. 심종문의 <상행산기.상자암>을 보면, 관목을 절벽에 두는 것에 대하여 "상불점천(上不霑天), 하불급천(下不及泉)"이라고 묘사한다. 이는 서남지구의 절벽에 사는 민거(民居)와 극히 유사하다.이는 대재문(戴梓文)의 <사절구> 가운데 "애현고사백운외(崖懸古寺白雲隈), 송청용음수청뢰(松聽龍吟水聽雷)"의 의미와 들어맞는다.


만일 진정 '입토위안'하려면 어떤 사람의 묘장이든 반드시 온갖 방법을 써서 각종 물로부터의 침해를 막는 믿을만하고 효과적인 대비조치를 취해야 한다. 여기에는 지상의 홍수, 지하의 지하수등도 포함한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물'이 계속하여 묘실로 들어와서, 묘장이 의미를 잃어버리게 될 수 있다. 수천년동안 중국은 묘장과 '물'과의 격리문제에 대하여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아주 중시했다고 할 수 있다. 묘장과 '물'의 관계에 대하여 여러가지가 있지만 종합하면 '하불급천'이라는 네 글자이다. 그 뜻은 누가 묘를 만들든지간에, 묘의 라랫부분이 지하수물과 닿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설사 현지의 최고수위선을 넘어서게 된다면 반드시 방수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리하여 물이 묘실로 들어올 수 없게 해야 한다. 이는 절대로 어길 수 없는 공사의 원칙이다. '하불급천'이라는 이 네 글자를 절대 무시해서는 안된다. 이 네 글자는 고대사료에서 아주 많이 등장하는 글자이다.


<후한서.왕충전>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고대에 매장할 때는 들판 가운데 매장했다. 봉토도 만들지 않고 나무도 심지 않았다. 후세에는 바꾸어서 관곽을 만들었는데, 아래로는 지하수에 닿지 않고(하불급천), 위로는 악취가 나오지 않게 하였다." <후한서.조자전>에는 이런 말이 있다: "요는 공지산(邛之山)에 묻었고, 순은 기시(紀市)에 묻었으며, 우는 회계에 묻었는데 모두 하불급천, 상무유취(上無遺臭)이다. 세 왕이 어째 돈이 부족했겠는가?" <오월춘추.월왕무여전>에는 이런 말이 있다: "우는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말하기를 내가 죽은 후에 회계의 산에 묻으라. 위곽동관(葦槨桐棺), 천광칠척(穿壙七尺), 하무급천, 분고삼척(墳高三尺), 토계삼등(土階三等)" <제왕세기>에는 이런 말이 있다. "우는 회계에 묻었는데, 하불급천, 상불통취(上不通臭)했다. 장례를 마치고 나머지 흙으로 언덕을 쌓았다." <십육국춘추.별전.에는 이런 말이 있다: "전욱이 고양을 매장하는데 하불급천했다. 성왕의 매장도 이러했다." <묵자.절용>에는 이렇게 말한다: "고대의 성왕들은 장례를 간소화하는 법을 만들었다. 구멍을 파는데 지하수에 닿지 않게 하고, 냄새가 흘러나오지 않을 정도까지만 팠다." <한사.양왕손전>에서는 "무덤을 파는데 아래로 지하수에 닿지 않게 하고, 위로는 냄새가 나오지 않게 한다." <전당문.제우묘문>에도 이런 말이 있다: "매장을 함에 있어서, 위로는 냄새가 올라오지 않게 하고, 아래로는 지하수에 닿지 않게 한다."


진시황의 재상 여불위는 이에 대하여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여씨춘추.절상>에서 그는 명확히 말한다: "장례는 하지 않을 수 없다. 너무 얕게 파면 호리(狐狸)가 파낼 것이고, 너무 깊으면 지하수에 닿는다. 그래서 반드시 높은 언덕의 위에 묻어야 하고, 호리의 환도 피하고 지하수의 습기도 피해야 한다" 그 뜻은 이러하다. 누구든지 묘장을 만들 때 지하에 매장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만일 너무 얕게 묻으면, 여우 삵쾡이 등이 냄새를 맡고 올 것이니 결국 묘가 파헤쳐질 것이다. 만일 너무 깊이 묻으면, 지하수에 닿아서, 물의 습기로 묘장의 심각하게 파괴될 것이다. 그래서 무릇 분묘를 만들려면, 너무 깊이 묻지도 말고, 너무 얕게 묻지도 말아야 한다. 고대인들이 음택을 선정하는데에는 모두 '물'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었다. 누가 자기가 죽은 후에 물 속에 잠기기를 원하겠는가. 왕윤은 <논형.박장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황천지하(黃泉之下)에 묻는 것ㅇ느 사람이 거처할 곳이 아니다...그래서 물이 새어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면 그 구멍을 모조리 막아서 물이 들어올 수 없게 해야 한다; 구멍을 다 막지 않으면 물이 새어 들어오고 물이 새면 물이 화를 일으킨다." 이는 충분히 설명한다. 만일 물이 묘장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심각할 것이라는 것을.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역대에 모두 '하불급천'을 기준으로 삼았다면 왜 소주 독서호(獨墅湖)의 호수바닥에 전국시대이 묘장이 있는 것인가? 왜 오왕합려의 묘는 호구산의 검지(劍池) 아래에 만들었는가? 만일 그들이 처음부터 물 속을 묘장장소로 삼았다면 그것이 그다지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다. '입토위안'하려면 흙에 묻히려고 한다면 물 속에 넣거나 못 속에 넣어서는 안된다. 현재 물이 가득찬 묘를 보게 되면 원래는 모두 육지 위에 있었다. 나중에 지표가 하강하거나, 혹은 하수가 역류하여 흘러든 곳이거나, 수위가 상승하여 물속이 된 것이다. 예를 들어 현재의 독서호 바닥에는 수백개의 옛우물터가 발견되고, 옛촌락유적지가 발견된다. 즉 이런 것들이 지표면변화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소주의 지하수위는 아주 높다. 합려는 묘를 호구산으로 정했는데, 출발점은 수환을 피하자는 것이었다. 진시황이 이곳에 이르러 묘를 파내서 철검을 얻었다. 그리고나서 외부공간을 메워두지 않아서 나중에 돌틈으로 물이 스며들었고 나중에 '검지'가 된 것이다.


<사기>에는 진시황릉에 대하여 "천삼천(穿三泉), 하동이치곽(下銅而致槨)"이라는 기재가 있다. 사람들은 진시황릉의 지궁에 대하여 사면팔방에서 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기 위하여, 당시에 방수콜타르가 없는 상황에서 묘의 바닥이든 천정이든 벽이건 문이건 모조리 벽돌을 쌓아서 막고, 틈이 있는 곳에는 구리를 부어넣어서 지궁을 완전히 봉쇄해서 물한방울 침범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한다. 듣기에 이런 주장은 이치에 맞는 것같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만성의 유승묘에서는 철로 돌틈을 막은 묘문이 발견된 바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사마천이 기록한 "이동위고(以銅爲固)"로 방수조치를 하였다느 설에 대하여 그다지 의심하지 않는 편이다. 만일 진시황릉 지궁이 정말 '삼중수천'의 아래에 있다면 지궁은 수시로 직접 물의 침해를 받는 상태에 놓여있을 것이다. 석벽을 쌓은 곳이나 빈틈의 사이로 물이 스며나올 것이다. 만일 큰 면적에서 고온으로 용화된 구리액을 붓는다면 두 가지 서로 다른 물질이 만났을 때 어떤 참극이 벌어질 것인가?


세상사람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중국이건 외국이건 고대이건 현대이건 용화된 상태의 금속액체는 쇳물이건 구릿물이건 알루미늄물이건 물기를 만나면, 반드시 폭발한다는 것을. 이것은 자연현상이다. 현대야금기술로 완전히 증명된다. 사람의 의지로 바꿀 수 없는 객관적인 현상이다. 예를 들어, 동북공학원의 <현대연철학>이라는 책을 보면, "유철(流鐵)과 물이 접촉한 후, 수소가 발생한다. 이런 기체는 철의 입구에서 분사되어 철입구가 폭발한다." 트루빈이 쓴 <강야금학>이라는 책에서도 이렇게 말한다: "강(鋼)이 나오기 전에, 강조(鋼槽)가 건조한지를 반드시 검사해야 한다. 완전히 건조되지 않은 강조이면 폭발이 발생하게 된다." 모스토비치가 쓴 <화법연강학>이라는 책에서도 사람들에게 이렇게 주의를 준다. "가장 심각한 위험은 구리를 용해하여 습한 곳에 두면 대폭발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런 폭발은 공장의 심각한 사고를 불러일으키고 사람의 생명을 위협한다." 이런 원인으로 일어난 대폭발의 경우 어떤 때는 버섯모양의 구름이 형성되어 상공으로 올라가기도 한다.


중국의 "대연강철(大煉鋼鐵)"연대에 어떤 사람은 급하게 서두르다가, 과학적인 법칙을 무시하고 이런 방면의 문제를 많이 일으킨 바 있다. 예를 들어, 하르빈의 한 공장에서 부주의로 쇳물이 수갱으로 흘러들어 공장이 폭발한 적이 있고, 호북 대야의 한 공장에서는 고온의 쇳물이 밖으로 흘러나가 습기가 있는 땅에 닿아서, 공장을 뒤집어놓은 적이 있다; 유주의 한 공장에서는 전기로에서 녹은 금속액체가 물을 만나서 대폭발을 일으킨 적이 있다. 이는 수천년이래 누구도 회피할 수 없었던 문제이다. 이는 사람의 기술적인 재난이고 기술적인 금기이다. 고대에도 기술자들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왕충의 <논형.뇌허편>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한 되의 물을 가지고 철을 주조하는 불에 넣어보면, 폐열(斃裂)한다. 그 소리는 우레와 같다. 가까이 있으면 사람 몸이 탄다." 소위 "폐열"이라는 것은 물을 주조하는 불에 넣었을 때 일어나는 거대한 폭발을 말한다. 그래서, 사마천이 쓴 <사기>의 그 말은 쓰기에는 아무런 힘이 들지 않지만, 단지 허구일 뿐이다.


설사 건축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현재에도, 사람들이 지하도시, 지하거리, 지하시설, 지하철도등 공사를 할 때는 모두 대량의 자금과 기술력을 들이게 되고, 온갖 방법을 써서 각 방향에서의 방수시설을 하게 된다. 이는 어떤 지하공사에서도 가장 중시하는 일이다. 지하공사의 성패가 걸린 일이다. 진시황의 권력이 아무리 컸다고 하더라도, 기술적으로 미치지 못하는 지하능묘를 만들려고 한다면 그가 '장생불사약'을 얻으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이룰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이들 과장된 문자를 역사학의 전문서적에 넣어서, 논증하는 고고학자의 학술논문중에는 역사를 오도하고 진상을 호도하는 외에 근본적으로 취할 것이 하나도 없다. 진시황릉공사에 대해서 진행된 허구, 과장과 곡해는 수천년이래로 진상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을 속였다. 이 방면에서 사마천은 주요 책임을 져야 한다. 당연히 현대의 일부 고고학자들이 진위를 따지지 않고 그대로 따르는 것도 자신의 전문적인 직책을 위배한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