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匡章): 변법후에 진나라의 함곡관을 격파시킨 불세의 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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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선진)

2019. 1. 3.

글: 일조심진기(一條尋秦記)


춘추전국시기의 명장을 꼽자면 귀에 익숙한 사람으로는 병성(兵聖) 손무(孫武), 아성(亞聖) 오기(吳起), 그리고 사대명장 기전파목(起翦頗牧, 백기 왕전 염파 이목), 그리고 악의(樂毅), 전단(田單), 조사(趙奢)등이 떠오르고 이들은 모두 사마천이 <사기>에 전을 만들어 기록을 해놓았다. 그러나 사마천이 전을 따로 만들지 않아서, 후세인들이 잘 모르는 명장이 한 사람 있다. 그는 바로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제나라의 광세명장(曠世名將) 광장이다.


광장은 장자(章子), 광자(匡子), 전장(田章)이라고도 불리며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맹자(孟子)의 제자라고 한다. 제위왕(齊威王) 말기부터 제나라의 장수였고, 진나라가 상앙변법후 국력이 날로 강해지고 있을 때인 진혜문왕(秦惠文王)시기에 진나라는 일찌기 한(韓), 위(魏)에게 통로를 빌려 제나라에 대한 진격을 감행한 바 있다. 제위왕은 광장을 장수로 내세운다. 제위왕은 사람을 적재적소에 잘 기용해서, 광장이 군사적 재능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전국책.제책. 진가도한위이공제(秦假道韓魏以攻齊)>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바로 제나라군대가 대승을 거두고, 진군이 대패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하여 진왕은 '서번지신(西藩之臣)'으로 제위왕에게 사죄한다." 이 전투는 진나라가 변법후에 맞은 첫번째 패배였다.


제선왕(齊宣王) 육년(기원전314년), 연나라에 '자지(子之)의 난'이 일어난다. 광장은 그 기회를 노려 오도의 병력을 이끌고 연나라를 공략한다. 50일만에 연나라의 수도 계(薊)를 점령했다. 연나라는 거의 멸망상태에 이른다. 광장이 군기를 제대로 단속하지 않는 바람에, 원래 제나라군대를 환영하던 연나라백성이 속속 무기를 들고 제나라군대의 폭정에 반항하고, 게다가 열국이 간섭하면서, 제나라군대는 어쩔 수 없이 연나라에서 퇴각해야 했다. 이 전투는 전국시대 한 만승지국이 다른 만승지국을 멸망시킨 선례가 된다. 광장이 승전후 제대로 경영하지 못하여 제나라는 실질적인 이익을 얻지는 못하고 오히려 연나라와 원한만 맺는다. 그래서 나중에 오국벌제(五國伐齊)의 화근이 된다. 그러나 광장의 군사적 재능은 여실히 드러났다.


제선왕 19년(기원전301년), 제나라는 한,위와 연합하여 초(楚)를 공격한다. 쌍방은 수사(垂沙)에서 격전을 벌이는데 결국 초군이 대패하고 2만명이 전사한다. 초나라장수 당매(唐昧)도 전사한다. 초나라는 영토를 많이 빼앗겨서 할 수 없이 태자횡(太子橫, 나중의 초경양왕)을 인질로 보내며 제나라에 화의를 청한다. 초나라는 기원전313년에는 단양, 남전에서 패배하고, 이번에는 수사에서 패배하면서, 국력이 크게 쇠락하고 옛날의 전성기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 나중에 백기가 초나라를 공격할 때 순조로웠던 이유는 수사의 전투에서 패배하며 국력이 크게 쇠약해진 것과 관련이 있다.


기원전298년, 맹상군(孟嘗君)은 진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된다. 한 식객이 개소리를 내며 궁중으로 잡입해 들어가서 호백구(狐白裘)를 훔쳐내 진소왕의 첩에게 바치며 맹상군을 석방하도록 말해달라고 부탁한다. 함곡관까지 도망쳤을 때 진소왕은 다시 체포하라고 명을 내린다. 또 다른 식객은 닭소리를 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닭이 울었으니 날이 밝았다고 여기게 하여 성문을 열게 만든다. 그리하여 제나라로 도망쳐 올 수 있었다. 제나라로 돌아온 후 맹상군은 분노하여 한,위와 연합하여 진을 공격한다. 광장은 삼국연합군을 이끌고 3년간의 고전끝에 기원전296년 함국관을 돌파한다. 함국관이 무너지면 진나라는 문호가 개방된 것과 같다. 제나라군대가 일단 위하평원으로 들어가자 그 후는 일마평천(一馬平川)이다. 진나라는 방어할 험준한 지형이 없다. 만일 연합군이 계속 관중으로 진격한다면 진나라를 멸망시키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진나라를 멸망시키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진나라의 처지는 전단이 복국한 후의 제나라와 비교해도 더 나을 것이 없을 정도였다. 최소한 동방육국과 맞상대할 실력은 아니게 될 것이다.


진소양왕은 대경실색하여, 급히 제나라에 영토흘 할양하는 것을 조건으로 화의를 구한다. 동시에 동주국의 대신인 한경(韓慶)이 중간에서 알선하여, 제, 한, 위 삼국의 서로 이웃한 나라끼리 상호 견제하는 이해관계를 들어 맹상군으로 하여금 '연합군이 직접 진나라에 군사적 타격을 가하는' 것을 포기하게 만든다. 그 결과 진나라는 원래 한나라에 속했던 서하(西河)외에, 무수(武遂)를 한나라에 떼어주고, 봉릉(封陵)을 위나라에 반환한다. 제민왕(齊閔王)은 근시안적인 생각에 맹상군의 공로가 너무 커서 공고진주(功高震主)할 것을 우려하여, 진나라의 화의요청을 받아들인다. 이 전투는 진나라를 철저하게 관중으로 다시 되돌아가게 만들었다. 직접 100년전의 춘추시대로 되돌아간 셈이다. 진나라에 상상할 수 없을 상처를 입힌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진나라의 승상 누완(樓緩)은 재임한지 3년만에 면직되고, 그 후에 위염(魏冉)이 그 자리에 오른다. 진나라로부터 할양받은 토지를 보면 지도를 대조할 때, 이번에 진나라는 확실히 황하 서쪽으로 쫓겨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앙변법후 여러해에 걸친 성과가 이번 전투로 물거품이 된다. 이 사건은 진소양왕 재위시기의 가장 큰 치욕이다.


이전투는 광장의 전성기였다. 동시에 제나라의 패업을 새로운 전성기로 이끈 때였다. 광장이후에 그 누구도 함곡관을 돌파하지 못했고, 진나라에 효과적인 타격을 입히지 못한다. 천종영재(天縱英才)의 신릉군(信陵君)도 그랬고, 조나라이 후기 노기복력(老驥伏櫪)의 방난(龐煖)이 그러했다(이 사람은 함곡관을 우회하여 진나라를 공격한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포전인옥하고자 한다. 광장은 기원전296년 함곡관을 돌파했고, 이때 육국에 위명을 떨친 백기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을까? 병력을 이끌고 출전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사기>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백기는 미(郿)의 사람이다. 용병에 능했고, 진소왕을 보필했다. 진소왕13년, 백기는 좌서장이 되고, 한나라의 신성을 공격했다." 진소왕13년은 바로 기원전294년이다. 광장이 함곡관을 함락시킨 것과 2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알 수가 있다. 광장이 진나라를 공격할 때, 백기도 진나라에 있었다는 것을. 백기는 2년만에 평민에서 로켓처럼 좌서장으로 승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가능하다고 하려면 그가 불세의 공을 세워야 하는데, 그렇다면 사기에 분명 기록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진나라가 위급존망지추에 처해 있는데, 그는 왜 가만히 있으면서 나서지 않았을까? 광장에게 겁을 먹어서 간이 떨어졌던가?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