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림군(羽林軍): 당나라 궁중정변의 결정적 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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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2020. 5. 4.

글: 엽서도(獵書徒)

 

우림군은 중국고대에 가장 유명하고 역사가 오래된 황제의 금군(禁軍)이다. 처음 나타난 것은 서한(西漢)시기이다. '우림'이라는 것은 "위국우익(爲國羽翼), 여림지성(如林之盛)"(나라를 위한 날개가 되어, 숲처럼 무성하라)의 의미라고 한다.

 

당고조때 당나라는 궁성의 이북에 주둔하며 황제와 황실을 보위하는 것을 주요 직책으로 하는 황제의 사병을 창설했다. 즉, 북위금군(北衛禁軍)인데, 국가의 군대인 남아부병(南衙府兵)에 상대되는 것이다. 그후 당태종, 당고종 양대에 걸쳐 계속 변화하며, 최종적으로 '북위금군'에서 정예부대가 독립하게 되는데, '좌우우림군'이라 명명된다.

 

우림군은 황제의 개인적 호위부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황실과 궁정의 안전을 보장하는 마지막 보루인 것이다. 또한 황제와 그의 내정이 권력을 발휘하는 보장하여 제국의 핵심을 장악한다. 이 두 가지 직능으로 인하여 우림군의 입장은 궁중정변때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정변성공여부를 가름짓는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아래에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기로 한다.

 

당태종 이세민이 '현무문사변'을 일으키기 전에, 먼저 당고조 이연에게 태자 이건성과 제왕 이원길이 후궁에서 음란한 짓을 했다고 무고한다. 그리하여 당고조는 명을 내려 조사를 하게 하고, 이건성과 이원길 둘은 황급히 궁으로 들어가 해명하려 한다. 그 결과 현무문에서 이세민등의 습격을 받았고, 그 자리에서 피살되는 것이다.

 

현무문은 바로 대당의 국도 장안성 태국궁의 북궁문이다. 당고조 이연이 황궁이며, 이곳의 수비를 책임지는 것은 북위금군인데, 지휘관은 상하(常何)였다. 그는 원래 태자 이건성의 심복이다. 이건성과 이원길이 군대를 데리고 오지 않은 것은 바로 그에 대한 신임때문이었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상하는 일찌감치 이세민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먼저 금군을 철수시켜 이세민이 순조롭게 매복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하여 현무문사변이 성공할 수 있었다.

 

705년, 즉 신룡원년 무측천의 병이 위중해진다. 재상 장간지(張柬之)는 최현위(崔玄暐), 경휘(敬暉)등과 함께 500명의 이미 설득된 우림군을 이끌고 동궁으로 진입한다. 그리고 협박과 회유를 통해 당중종 이현을 동궁에서 데려나오고 군대를 이끌고 현무문으로 진입한다. 그리고 무측천의 면수인 장역지와 장창종 형제를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고, 그후 무측천을 핍박하여 양위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당중종이 복위하고, 천하는 다시 이씨가족의 수중으로 되돌아간다.

 

무측천은 실제로 중국을 반세기동안 통치했다.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여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일단 우림군이 입장을 바꾸자, 하야는 순식간의 일이다.

 

당중종 이현은 유약하고 무능했다. 조정은 오랫동안 음탕한 위황후와 그녀의 면수인 무삼사(武三思)의 손에 장악된다. 이 두 사람은 온갖 머리를 짜내 안락공주를 후계자(황태녀)로 함으려 한다. 이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최종적으로 황권을 탈취하는 목적을 이루려 한 것이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황태자 이중준(李重俊)은 707년 가을, 좌우림대장 이다조(李多祚) 휘하의 300여명의 우림군을 이끌고 정변을 일으킨다. 먼저 무삼사의 사저로 쳐들어가서 그와 아들 무숭훈(武崇訓) 및 10여명의 일당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그후에 황궁으로 진격한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당중종 이현과 위황후, 안락공주, 상관첩여(上官婕妤)는 함게 현무문의 문루로 올라가 화를 피한다. 동시에 우림장군 유인경(劉仁景)을 보내 우림 비기(飛騎) 일백여명을 이끌고 문루의 아래를 막아서 반군의 진입을 저지하려 한다.

 

만일 이중준과 이다조가 과감하게 공격을 감행했다면, 아마도 승산이 있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두 사람은 망설이다가 기회를 놓쳐 버린다. 그 결과 중종은 성문의 문루에서 우림군에게 고함친다. 우림군병사들에게 관직을 주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우림군병사들이 오히려 이다조를 공격하여 이다조가 참살되고 나머지는 궤멸되어 흩어진다. 정변은 실패로 끝난다. 우림군의 입장이 다시 한번 반란자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710년, 당중종 이현이 위황후 모녀에게 독살된다. 그후 그의 15살된 아들 이중무(李重茂)가 황위에 오른다. 위황후는 이런 조치를 통해, 무측천과 마찬가지로 임조칭제하고, 최종적으로 군림천하하려 한다.

 

미래의 당현종 이융기와 태평공주는 같이 모의한 후, 성공적으로 현무문을 지키는 우림군의 지지를 받아내고 정변을 일으킨다. 부대를 이끌고 황궁으로 쳐들어갔으며 우림군이 호응한다. 위황후는 황급히 도망쳐서 우림군 비기영으로 찾아가서 비호를 구한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참수당하고 만다. 그렇게 하여 정변은 성공을 거둔다. 당예종은 다시 등극하고, 이융기는 당연하게 황태자에 오른다.

 

당현종 이융기가 개원성세를 개창하고나서 점점 오만하고 자만에 빠진다. 그리하여 향락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게 된다. 이전의 근검절약과 여정도치의 정신과 기풍은 사라지고, 간신을 기용한다. 간신 이임보, 양국충등이 사사로이 당파를 만들어, 조정이 혼란에 빠진다. 그리하여 '안사의 난'이 일어나게 된다.

 

756년 6월, 반군이 장거리를 쳐들어와서 수도 장안을 함락시킨다. 안사의 난이 최고조에 달한 것이다. 이융기는 장안이 함락되기 전에, 황급히 도망친다. 그러나 마외파(지금의 섬서성 흥평 서쪽)에 도착했을 때, 따르던 우림군장병이 정변을 일으킨다. 먼저 권신 양국충을 죽이고, 다시 이융기로 하여금 양귀비를 사사하도록 요구한다.

 

위에서 열거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림군은 다른 군대와 다르다. 선명한 정치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입장이 정치의 방향을 결정했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우림군의 특수한 출신과 황제와의 개인적 관계가 작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첫째, 우림군의 사병은 주로 사회상층의 관료귀족자제중에서 선발되었다. 그리하여 조정 및 황실과 여러가지로 관련이 있었고, 정치투쟁에서 자신이 수수방관할 수 없었다.

 

둘째, 황제와 그 가족구성원과 아침저녁으로 함께 하다보니 복잡한 인간적 관계가 나타난다. 그리하여 친소와 원근이 있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