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나라가 멸망한 후 수양제 딸들의 운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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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수양제)

2020. 6. 29.

글: 김명지(金明枝)

 

수양제 양광(楊廣)은 딸을 몇이나 두었을까? 아무도 정확하게 말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초기에 양광이 형인 태자 양용(楊勇)과 후계타툼을 벌일 때, 첩을 두는 것을 지극히 혐오하는 모친 독고황후에 잘보이기 위하여, 첩이 낳은 자식들은 모조리 버리고 기르지 않았었다. 그리고 양광이 등극한 후에는 장안에 상주하지 않았다. 생존한 딸들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일부는 그가 장안에 남겨두고 신경쓰지 않았었고, 일부는 그가 데리고 다녔다. 그중 일부분은 심지어 양광이 죽은 후 적모(嫡母)인 소황후(蕭皇后)를 따라 돌궐로 간다. 그러나 <수서(隋書)>에는 '공주전'이 없으므로 양광의 대부분의 딸들은 구체적인 봉호(封號), 성명, 생년등의 기록이 없다. 인원수도 자연히 정확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먼저 열녀인 남양공주(南陽公主)가 있다. 남양공주는 양광의 모든 공주들 중에서 유일하게 상세한 기록이 남은 경우이다. 그녀가 이렇게 특수한 대우를 받게 된 것은 그녀가 자신의 절개로 열녀전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역사에 매몰된 다른 자매들과는 다른 취급을 받는 것이다. 남양공주는 양광이 가장 총애한 딸이었다. 그녀가 출가할 때, 양광은 특별히 궁안에서 미모로 유명했던 마상궁(馬尙宮)을 그녀에게 보낸다. 출가후에도 양광은 자주 남양공주를 보았다. 강남으로 내려갈 때나 고구려를 정벌하러 갈 때도 그녀를 곁에 데리고 갔다. 그러나 남양공주는 부친의 자신에 대한 총애를 믿고 기고만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병든 시아버지 우문술(宇文述)을 지극정성으로 돌보았다. 남편인 우문사급(宇文士及)도 아주 사랑했다. 결혼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을 낳고, 이름을 선사(禪師)라 짓는다.

 

그러나 하늘은 언제 날씨가 바뀔지 모른다. 아침에 저녁에 무슨 화가 닥칠지 모르는 법이다. 양광은 황음무도했고, 백성들이 마침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깃발을 들었다. 그리고 양광이 계속 강도(江都)에 숨어서 취생몽사하고 있을 때, 우문화급(宇文化及)은 직접 황제를 죽이는 칼날을 들어 양광을 죽인다. 우문화급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남양공주의 남편인 우문사급의 친형이었다.

 

양광은 이 딸을 괜히 예뻐한 것이 아니었다. 가장 자신을 사랑하던 부친이 남편의 형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자, 남양공주는 비분하여 우문사급과의 관계를 단절한다. 그리고 눈물을 닦고 모친 소황후와 함께 부친의 시신을 겨우 수습하여 잠시 유주당(流珠堂)에 안치한다. 비록 우문사급과 관계는 끊었지만, 남양공주와 우문집안과의 인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두건덕(竇建德)이 우문화급을 죽인 후, 풀뿌리까지 없애기 위해 우문가의 나머지 남자들을 내놓으라고 한다. 거기에는 남양공주와 우문사급의 외동아들 우문선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비록 아들을 포기하기 어려웠지만, 우문가와 양가의 피의 원한을 생각하고, 예전에 같은 배게를 베었던 사람이 지금은 불공대천의 원수가 된 것을 생각하자, 남양공주는 결국 대의를 쫓아 우문선사를 내어준다.

 

나중에 당나라가 건립되고, 거기서 자리를 잡은 우문사급은 남양공주와 낙양성에서 우연히 만난다. 우문사급은 전처와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남양공주는 단연코 거절한다. 그러나 우문사급은 그녀를 잊지 못하여 계속 따라다녔다. 남양공주는 아주 분노하여 소리친다: 네가 죽고 싶으면  따라와라. 우문사급은 할 수 없이 그녀를 떠나야 했다.

 

남양공주는 비록 망국지군의 딸이고, 부친 양광이 좋은 명성을 남겨놓지도 않았고, 사후에는 딸로서 갖은 모욕을 당해야 했지만, 남양공주는 여자의 몸으로 남자에 못지 않은 기개를 지녔다. 이런 기개는 난세에 더욱 빛났다. 위징(魏徵)마저도 감탄할 정도였다. 그래서 그녀의 평생사적을 기록으로 남겨둔다.

 

그러나 정면이 있으면 반면도 있는 법이다. 남양공주와 같은 열녀형의 인물과 대비되는 것은 탕부같은 황음한 딸들이 있었다. 이들 공주들은 비록 봉호도 명확하지 않고, 평생사적을 상세히 기록해 두지도 않았지만, 완벽하게 부친 양광의 황음무도한 특질을 이어받았다. 그리하여 절개를 지킨 자매 남양공주가 더욱 두드러지게 된 것이다. 이들 황당한 공주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완전히 하나의 황당한 후궁음란사건때문이다.

 

이 후궁음란사건의 남자주인공은 우문정(宇文晶)과 소거(蕭鉅)인데 이들도 대단한 인물이다. 당연히 모든 잘못이 우문정과 소거에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어쨌든 황제가 행동을 바르게 하였더라면, 신하들도 절대 그렇게 터무니없는 짓을 하지는 않았을테니까. 양광이 황제가 된 후 여색에 빠져 있었고, 하루종일 향락만 즐겼다. 조회를 마친 후이건 외지를 순유할 때이건 자주 숲속의 정자에서 대형 연회를 열곤 했다. 곁에는 후궁, 비빈들이 함께 했다. 심지어 부친 수문제가 죽은 후 원래는 절이나 도관으로 들어가서 수행을 하여야할 비빈들까지 데리고 와서 함께 놀았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이다. 황제가 저렇게 모범을 보이니, 그런 악취미를 지닌 양광이 총애하는 신하들도 그를 따라하게 된다. 우문정, 소거는 바로 그 중의 두 사람이다. 양광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궁중을 드나드는데 제한이 없었다. 그리하여 우문정 소거 두 사람은 자주 궁중에서 양광의 비빈들과 음란하게 놀았다. 심지어 기회를 봐서 적지 않은 공주들과도 놀아났다. 이런 황당한 소행이 소황후의 귀에 들어간다. 소황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를 양광에 얘기한다. 그러나, 양광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전혀 벌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양광이 묵인해주니 우문정, 소거와 대담하게 간통하던 공주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을 뿐아니라, 또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었다. 나중에 소황후를 따라 돌궐로 간 후, 이들 공주들은 돌궐에서 유행하던 형종제급(兄終弟及)의 풍속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양광이 죽으면서 나라가 망하자, 예전에 편안하게 잘 지내던 공주들은 하룻밤만에 철저히 망국녀로 전락한다. 그저 적모 소황후를 따라 우문화급, 두건덕 등의 수중을 전전했고, 마지막에는 돌궐로 끌려간다. 대당 정관4년, 이정(李靖)이 돌궐을 대파하고, 소황후는 적손 양정도(楊政道)를 데리고 장안으로 돌아온다. 돌궐로 갈 때 소황후는 손자와 딸들을 데려갔었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손자뿐이고 딸들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북송이 멸망한 후, 비빈과 공주들이 금나라로 끌려가서 여러 종실과 장수들에게 유린당한 후, 많은 경우는 그 후에 소식이 끊겼던 것을 떠올린다.

 

그런, 양광이 곁에 데리고 다니던 공주들은 품행이 방정하지는 못했고, 방탕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양광이 장안에 버려둔 공주들에 비하면 이들은 행복한 편이었다.

 

잠중면(岑仲勉) 선생이 통계를 내본 적이 있다. 양광이 등극한 후 14년간 재위했는데, 장안에 머물렀던 기간은 186일이다. 적장자인 양소(楊昭)를 태자로 책봉할 때도 장안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사신을 파견하여 조서를 내려 봉했을 뿐이다. 그러나 양소는 다행히 태자이므로, 부친이 그를 만나러 오지 않더라도, 그가 부친을 만나러 낙양에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장안에 버려진 공주들은 처량했다. 생모가 총애를 받지 못하니, 자신들도 부친을 만날 수가 없는 것이다. 적모 소황후는 양광의 앞에서 말을 하지 못했고, 또한 남편이 하는 일에 관여할 수 없었다. 자기 놀기도 바쁜 양광이 장안에 남겨진 딸들을 기억해낸다는 것은 하늘에 오르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연이 장안에서 황제를 칭한 후, 이들 장안에 버려져 있던 수나라 공주들을 전리품처럼 끌어모아서 수문제가 진(陳)을 멸망시켰을 때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들 수나라공주들을 대거 공신들과 자신의 아들들에게 첩으로 보내주게 된다. 그리고 몇몇은 남겨서 자신을 섬기게 한다.

 

이들 공주들은 망국녀로 전락한다. 예전에는 그래도 황궁의 준주인은 었는데, 지금은 그저 황궁의 새 주인에게 삼궤구고를 하고 고개를 숙이고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운명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신세인 것이다. 심지어 정실부인도 되지 못하고 첩이 된다. 예를 들어, 이세민의 진왕부에 이런 수양제의 딸이었던 첩이 있었다. 이 공주의 전반생은 비록 부친의 총애를 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금지옥엽출신이다. 원래는 조정의 어느 대신의 자제에게 정실부인으로 가야 했다. 그러나 양광이 죽으면서 망국녀의 신분으로 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궁전은 그 궁전인데, 신분은 하룻밤만에 천지가 뒤집히는 변화를 겪는다. 양비는 내심 괴로웠을 것이다. 힘들어도 했을 것이고, 운며의 장난을 원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알 수는 없다. 예전에는 황궁의 여주인인데 이제는 그저 새로운 여주인에게 무릎꿇고 문안인사를 올려야하는 신세가 되었다. 마음 속으로 불만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인지상정이다. 잔혹한 현실앞에 양비는 그저 첩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 후에는 아들을 낳아서 한번 기록된 것 외에는 더 이상 아무런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그렇다고 양비에게 남양공주와 같은 기개가 없다고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양비는 당시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선택했을 일을 한 것이다. 역사의 거대한 흐름 앞에서, 작은 인물은 그저 흘러가는대로 살아가는 것이 할 수 있는 선택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