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正史)기록상 관우가 죽인 장수는 단 두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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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관우)

2020. 6. 30.

글: 정회역사(情懷歷史)

 

유명소설 <삼국연의>에서 작자 나관중(羅貫中)은 관우를 충의인용(忠義仁勇)의 청룡언월도를 든 무장의 이미지로 그렸다. 고대위맹(高大威猛)하며 무예가 비범하다. 첫부분에 유비, 장비와 도원결의를 하고, 병기를 만든 후 황건적의 난을 평정하는 전쟁에 참가한다. 18로제후가 동탁을 토벌할 때, 관우는 온주화참웅(溫酒斬華雄)하고, 삼영전여포(三英戰呂布)한다. 유비가 서주에서 패전하고나서는 세 가지 일을 약속받고 항한불항조(降漢不降曹)한다. 조조를 위하여 백마의 포위를 해결해주고, 안량, 문추를 참한다. 유비의 행방을 알고난 후에는 천리주단기(千里走單騎)로 과오관참육장(過五關斬六將)한다. 채양(蔡陽)을 죽이고, 고성에서 삼형제가 다시 만난다. 적벽대전때는 화용도(華容道)에서 차마 조조를 죽이지 못하고 그를 보내준다. 관우는 나관중의 <삼국연의>에서 여러 명의 대장을 죽인 것으로 나온다.

 

이에 대하여 어떤 네티즌은 통계를 내본 적이 있다. <삼국연의>에서 관우는 모두 16명의 대장을 참살한다. 채양, 맹탄(孟坦), 관해(管亥), 순정(荀正), 한복(韓福), 공수(孔秀), 변희(卞喜)등의 보통장수도 있지만, 화웅(華雄), 안량(顔良), 문추(文醜)와 같은 명장도 있다. 당연히 이것은 <삼국연의>의 과장이다. 예를 들어, 화웅은 정사에서 분명히 손견(孫堅)에게 피살당했다. 그런데 이화접목(移花接木)으로 관우가 온주참화웅한 것으로 묘사했다. 그렇다면, 문제가 나타났다. <삼국지>등 정사에서는 관우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대장을 죽였다고 쓰여 있을까? 기실 단지 2명 뿐이다.

 

먼저, <삼국지>등 정사에서 관우가 참살한 명장은 오직 안량과 방덕(龐德) 두 사람이다. 한편으로 안량에 대하여 얘기하자면, 199년, 원술(袁術)은 북상하여 원소(袁紹)에 의탁한다. 유비는 조조의 명을 받아 서주에서 원술을 막는다. 유비는 그 기회를 잡아 서주자사 차주(車胄)를 죽이고, 관우로 하여금 하비(下邳, 지금의 강소성 수녕현 고비진)를 지키며 태수를 대행토록 한다. 유비는 되돌아 소패(小沛, 지금의 강소성 패현)로 돌아간다. 건안5년(200년), 조조는 유대, 왕충을 파견하여 유비를 공격하게 한다. 그러나 유비에게 패퇴한다. 조조는 그리하여 친히 대군을 이끌고 출정하며, 유비는 패퇴하여 원소에 의탁한다. 관우는 패전하여 생포된다. 그래서 부득이 항복하고, 조조는 후하게 그를 대하며, 편장군(偏將軍)에 임명한다.

 

<삼국지. 관우전>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원소가 대장 안량을 보내어 동군태수 유연(劉延)을 백마에서 공격하게 한다. 조조는 장료와 관우를 선봉장으로 보내어 격퇴한다. 관우는 안량의 휘개(麾蓋)를 보자, 말을 몰아 안량을 많은 사람들 속에서 찌르고, 그의 수급을 베어 돌아온다. 원소의 여러 장수들 중에서 그를 당해낼 자가 없었다. 그리하여 백마의 포위를 풀어주게 된다. 조조는 관우를 한수정후(漢壽亭侯)에 봉한다.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200년 원소와 조조의 양대세력간에 관도지전이 발발한다. 관도지전에서 원소는 대장 안량, 순우경, 곽도등을 파견하여 동군태수 유연을 백마에서 공격하게 한다. 원소대군의 진격을 맞이하여 조조 휘하의 모사인 순유는 성동격서의 전략을 내놓는다. 경병(輕兵)으로 백마를 기습하는 작전인 것이다. 조조는 순유의 건의를 받아들이고, 친히 군대를 이끌고 지원간다. 조조대군이 도착한 후, 안량은 크게 놀라, 황급히 응전한다. 조조는 장료와 관우로 하여금 선봉이 되어 싸우게 명한다. 이 전투에서 관우는 안량의 휘개를 보고, 말을 달려 돌진해서 안량을 만군지중에서 죽인다. 그리고 패도를 빼서 안량의 수급을 베고 돌아온다. 원소군의 장수들 중에서 아무도 당해낼 자가 없었다. 백마의 포위는 풀리고, 관우는 한수정후에 봉해진다.

 

이렇게 보면 아주 분명한 점이 있다. 관우는 안량이라는 대장을 참살한 것으로 크게 이름을 떨친다. 안량을 참살하여 조조군이 백마에 포위된 것을 풀어준 것이다. 그래서 조조는 한헌제 유협에게 상소를 올려 관우를 한수정후에 봉한다. 한나라말기 삼국시기에 후작은 현후(縣侯), 향후(鄕侯), 정후(亭侯), 관내후(關內侯)의 네개 등급으로 구분된다. 비록 한수정후라는 작위가 가장 높은 것은 아니지만, 이는 한헌제 유협이 책봉한 것이다. 그래서 아주 큰 의미가 있다. 그리하여 이후 관우는 자신이 한수정후라는 것을 입에 달고 다니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한수정후라는 봉호를 듣게 되면 바로 관우가 안량을 참한 전적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떄, 비록 관우가 조조의 인정을 받았지만, 여전히 유명세는 적은 무장이었다. 안량은 이미 원소 휘하에서 혁혁한 무장이었다. 그래서 관우가 안량을 참살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백마의 포위를 풀어준 후, 관우는 계속하여 관도지전에 참가하지 않고, 조조를 떠났다는 것이다. 자신의 주공인 유비를 찾으러. 즉 관우는 몸은 조조의 군영에 있었지만, 마음은 유비에 가 있었다.

 

이에 대하여 적지 않은 역사학자들은 관우가 유비에게 돌아간 것에 대하여, 관우는 조조의 군영에 있었지만, 여전히 유비의 신하로 보았고, 유비에게 돌아간 거동은 의리에 부합하는 것이라 보았다. 나중에 민간문화는 관우의 이 행동을 '천리주단기'로 포장한다. 관도지전동안 유비는 다시 한번 조조에게 격패당한다. 그래서 관우, 장비, 조운을 데리고 남하하여 형주목 유표에게 의탁하게 된다. 유비는 손권과 연합하여 조조를 격하한 후, 조조는 조인등을 형주에 남겨서 방어하게 한다. 그리하여 유비는 다시 손권의 대장 주유와 협력하여 조인을 공격하고, 관우에게 북도를 막으라고 명한다.

 

나중에 유비는 다시 남으로 형주의 남부사군(장사, 영릉, 무릉, 계양)을 공격하여 취한다. 관우는 공신이 되어, 양양태수의 직을 받는다. 이 기초 위에서, 유비는 대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파촉을 차지하고, 다시 219년에는 조조를 격패시키고 한중의 땅을 차지한다. 같은 해, 유비는 한중왕이 된다. 그리고 관우를 전장군에 봉하여, 유비 진영의 장수들 중 으뜸이 된다. 유비가 한중왕이 된 후, 관우는 양번지전(襄樊之戰)을 일으킨다. 그리고 바로 이 전투에서 관우는 다시 한번 대장을 죽인다. 그것이 바로 방덕이다.

 

여기서 방덕에 대하여 알아보자. 방덕(?-219)의 자는 영명(令明)이고 남안군 훤도현(狟道縣, 지금의 감숙성 천수시 무산현 사문진) 사람이다. 동한말기, 방덕은 원래 마등(馬騰)의 휘하무장이었는데, 마등을 따라 사방에서 전투를 벌이며 전공을 쌓는데, 가장 용맹했다. 마등이 조조에 의해 위위(衛尉)에 임명된 후, 방덕은 마초의 휘하로 들어간다. 211년, 마초, 한수등이 거병하여 조조와 위남지전을 일으킨다. 이 전투에서 조조는 이간계를 써서, 성공적으로 마초와 한수의 사이를 이간한다. 마초가 패전한 후, 방덕은 그와 함께 한중의 장로(張魯)에 의탁한다. 나중에 마초는 유비에게 투항하고, 방덕은 장로의 휘하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조조가 한중을 평정한 후, 방덕은 조조의 휘하로 들어간다. 양번지전때, 방덕은 군대를 이끌고 번성의 조인을 지원간다. 관우와 전투하다가 화살 한 발을 관우의 이마에 맞춘다. 그 이후는 여러분이 잘아는 수엄칠군(水淹七軍)이다. 이 전투에서 관우는 기회를 틈타 수군을 이끌고 공격한다. 방덕은 우금과 함께 전군이 전멸한다. 패전후 생포된 후에 방덕은 죽어도 투항은 하지 않겠다고 한다. 그리하여 관우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에게는 장후(壯侯)라는 시호가 추서된다.

 

우금을 포로로 잡고, 방덕을 참살한 관우는 인생의 최고봉에 오른다. 다만 바로 성극이쇠(盛極而衰)하는 법이다. 관우가 양번을 격파하여 한황실을 부흥시키고자 할 때, 손권은 여몽을 파견하여 형주를 기습한다. 손권이 손류동맹을 배신한 행위는 관우에게 치명적이었다. 건안24년(219년) 십이월(양력으로 220년 1월 중하순과 2월상순), 맥성으로 패주하고, 관우는 십여기를 이끌고 포위망을 돌파한다. 익주에서 불과 일, 이십리 떨어진 임저(臨沮, 지금의 호북성 양번시 남장현)에서 반장(潘璋)의 부장 마충(馬忠)의 매복을 당해 생포된다. 그리고 장남 관평(關平)과 함께 임저에서 처형된다. 만일 여몽이 형주를 기습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정사 속의 관우는 더 많은 전적을 거두었을 것이다. 심지어 더 많은 명장을 죽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당연히 전체 한말 삼국시기에 관우가 안량, 방덕과 같은 두 명의 대장을 참살한 것만으로도 엄청난 전적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