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륭제의 총신(寵臣) 화신(和珅)이 꺼렸던 3명의 대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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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화신)

2020. 7. 4.

글: 반호노주반지연(半壺老酒半支煙)

 

"가난한 자는 부자와 싸울 수 없다(窮不與富鬪)" "부자는 관리와 싸울 수 없다(富不與官鬪)" 이 말에 청나라 건륭연간에는 다시 하나를 덧붙여야 한다: "한족은 만주족과 싸울 수 없다(漢不與滿鬪)" 소위 '관장투(官場鬪)' 혹은 '만한투(滿漢鬪)는 그저 평서나 상성에서나 볼 수 있을 뿐이다. 유용(劉鏞)에게 담(膽)을 몇 개 더 빌려주더라도 감히 화신과 싸울 수 없다. 그가 만일 화신을 본다면 바로 무릎꿇고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화신의 눈에 그가 꺼려야할 공작이하의 문무대신들은 오직 3명뿐이다. 거기에는 당연히 유용이나 기효람(紀曉嵐)은 포함되지 않는다. 사실상 정사의 기록을 보면, 화신은 근본적으로 유용과 기효람을 눈아래 두지 않았었다.

 

건륭제때 유용의 최고관직은 공부상서(工部尙書) 서리직예총독(署理直隸總督), 협판대학사(協辦大學士)였다. 가정2년이 되어 체인각대학사(體仁閣大學士)가 된다. 유용은 일생동안 군기대신(軍機大臣)이 되지 못했다. 옹정제이후 "대학사이면서 군기처에 들어가지 못했으면 진정한 재상이 아니다"는 관례에 따르면, 유용은 무슨 "재상유꼽추(宰相劉羅鍋)"라고 불릴 자격이 없는 것이다.

 

기효람도 유명하기는 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가짜재상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평생동안 대학사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정10년이 되어 기효람은 임종전에 비로소 협판대학사의 칭호를 받는다. 하루도 '중당(中堂)'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청나라때 대학사는 '중당'이라고 칭해진다. 이는 전고(典故)가 있다. 청나라는 황제직할의 육부제(六部制)를 실행했고, 이호예병형공의 육부는 부마다 만주족 1명 한족 1명의 두 명의 상서(尙書)가 있었다. 만주족상서는 지위는 높으나 능력이 떨어졌고, 한족상서는 지위는 낮으나 능력은 뛰어났다. 그래서 서로 평기평좌(平起平坐)하는 대등한 관계가 된다. 두 상서는 자주 의견이 틀어지고 부내에서 싸웠다. 그리하여 부의 낭중이나 원외랑들이 어떻게 해야좋을지 모르는 경우도 발생했다.

 

각 부의 만주족, 한족 상서가 서로 싸우는 것을 막기 위하여, 황제는 대학사로 하여금 1개부씩을 관리감독하게 했다. 부에서 회의를 할 때면 대학사가 중간에 앉고 만주족상서와 한족상서가 좌우에 앉아, 서로 싸우지 못하게 한다. 대학사는 가운데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중당'이라고 부르게 된다.

 

청나라의 대학사는 같은 시기에 가장 많을 때는 6명이다(중화전대학사, 보화전대학사, 문화전대학사, 무영전대학사, 문연각대학사, 동각대학사. 건륭연간에는 중화전대학사를 없애고 체인각대학사를 두었다. 이럴게 삼전삼각제가 된다) 가장 적을 때는 1-2명이다. 만주족상서와 한족상서간의 조정을 하는 닐은 화석친왕, 다라군왕, 다라패륵, 고산패자도 맡았다. 예를 들어, 윤진(胤禛, 나중의 옹정제)과 윤상(胤祥)도 모두 1개 부를 관리했었다.

 

화신은 혼자서 여러 부를 관리하는 문화전대학사(건륭51년부터 가경4년까지)였을 뿐아니라, 건륭48년에 1등남작(男爵)이 되고, 53년에는 삼등충양백(三等忠襄伯)으로 승급하며, 가경3년에는 1등충양공(一等忠襄公)이 된다.

 

화신은 비록 대신들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있었지만, 그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인물도 있다. 예를 들어, 화석친왕(和碩親王) 홍주(弘晝)와 고산패자(固山貝子) 복강안(福康安)같은 인물이다.

 

홍주과 복강안은 건륭제와 친척이다. 홍주는 건륭제가 가장 좋아하는 친동생이고, 복강안은 건륭제가 가장 가깝게 여기던 조카뻘이다(조카보다도 가까웠다). 그런데, 홍주는 화신이 관직에 나가기도 전에 이미 죽었다(건륭35년 사망. 건륭37년에 화신은 시위가 된다). 화신이 몇등공작이라 하더라도, 친왕, 군왕, 패륵, 패자를 만나면 무릎꿇고 고개를 숙여야 한다.

 

청나라는 황실 외에 9등급의 작위가 있었다. 초일품(超一品)의 공(公), 후(侯), 백(伯), 정일품(正一品)의 자(子), 정이품(正二品)의 남(男), 삼품(三品)의 경거도위(輕車都尉), 사품(四品)의 기도위(騎都尉), 오품(五品)의 운기위(雲騎尉), 칠품(七品)의 은기위(恩騎尉).

 

화신은 관직에 나가자마자 삼품관(三品官)이었다. 그는 삼등경거도위를 세습받았다. 유용의 부친 유통훈(劉統勛)은 비록 건륭제에게 중용되었지만, 남작도 아니다. 유용도 자연히 무슨 세습작위는 없다. 그저 백정(白丁)일 뿐이다. 유일하게 누릴 수 있는 대우는 향시(鄕試)에 참가하지 않고, 직접 '은맹거인(恩萌擧人)'의 신분으로 회시(會試)에 참가할 수 있다는 것뿐이다.

 

유용도 이러한데, 기효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의 조상은 도대(道臺)를 지낸 사람도 없다. 그래서 과거성적이 유용과 비슷하지만(유용은 이갑제이(二甲第二), 기효람은 이갑제사(二甲第四)), 승진이 유용보다 훨씬 느렸던 것이다.

 

건륭이 집권한 기간동안 유용과 기효람은 모두 화신과 정면충돌한 적이 없다. 첫째는 둘 간의 지위차이가 현격하고, 둘째는 건륭이 누구와 사이가 좋은지 문무관리라면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에 총명하고 심지어 원만한 유용, 기효람이 굳이 손해볼 짓은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화신도 총명했다. 그는 일찌감치 백작의 지위를 누렸고, 마지막에는 이성대신(異姓大臣)으로 얻을 수 있는 최고작위(복강안은 제외. 복강안이 이성대신인지 여부는 건륭등 소수인만 알 것이다)를 얻는다. 다만 그는 절대로 진정한 팔기귀족에 대들지 못한다. 소위 화신이 왕자, 패륵을 혼내주었다는 것은 모두 소설가의 말이다. 화신을 그렇게 할 수가 없다.

 

화신의 집안에는 공작이 2명 나온다. 그의 동생 화림(和琳)도 일등공으로 추증되었기 때문이다. 이치대로라면 공작 아래의 사람은 모조리 그가 눈아래 두지 않는 것이 맞다. 그러나 우리가 <청사고>를 보면, 최소한 3명은 화신의 체면을 봐주지 않았다. 그리고 화신도 공개적으로 그들과 맞서지 못했다: "아계(阿桂)는 공신으로 수보(首輔)였다. 화신과 어울리지 않았다. 왕걸(王傑)은 올바른 신하이다. 항상 화신과 어긋났다. 주규(朱珪)는 청인종(顒琰)의 사부이다. 화신은 그를 꺼렸다"

 

이 세사람은 화신이 정면에서 대들지 못했고, 그저 배후에서 수작을 부렸을 뿐이다. 그러나 아무도 무너뜨리지 못한다. 이를 보면 이 세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아계는 대대로 장수이며 고관을 지낸 집안 출신이다. 건륭제와는 친척이고 배분이 위다. 아계의 딸이 윤록(允祿)의 아들 홍융(弘融)에게 시집갔다. 홍융은 건륭과 4촌이 된다. 화신은 가경3년에 비로소 1등충양공이 되었지만, 아계는 건륭41년에 이미 1등 성모영용공(誠謀英勇公)이 되었다. 청나라의 법도에 따르면, 4글자 봉호를 지닌 공작의 지위는 2글자 봉호를 지닌 공작보다 지위가 훨씬 높다.

 

화신은 아계를 꺼렸고, 두 사람은 반평생을 경쟁한다. 그러나 누구도 상대방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다만 기세에 있어서는 아계가 계속 화신을 눌렀다. 화신은 먼저 호의를 나타내지만, 아계는 체면을 봐주지 않았다. "화신의 세가 점점 커졌다. 아계는 그를 만났을 때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함께 같은 방에서 일하지 않았고, 아침저녁으로 입직할 때면, 반드시 수십무(1무는 반보) 떨어져 있었다. 화신이 그에게 말을 걸어도 느릿하게 응대할 뿐, 한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화신은 주규(朱珪)가 득세하지 못하게 하려 했다. 이것은 이해하기 쉽다. 어쨌든 산 하나에 두 호랑이가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주규는 청인종(우염)의 스승이고, 그는 장래 조정의 일인자가 될 사람이었다.

 

그는 또한 왕걸을 아주 꺼렸다: "화신의 세력이 커지면서, 여러 일들은 그가 독단적으로 결정하곤 했다. 동료들 중에서 아무도 말하지 않았으나, 왕걸은 가끔 안된다고 하면서 그와 다투었다. 황상이 왕걸이 사람됨을 잘 알고 있어서, 화신은 그가 싫었지만 그를 내보낼 수가 없었다."

 

왕걸의 이력을 보면, 그에게는 2가지 방면의 우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화신과 맞설 수 있었던 것이다. 첫째, 왕걸은 건륭제가 친히 고른 장원(壯元)이다. 진정한 천자문생(天子門生)인 것이다. 청나라의 정통인재로서 건륭제의 인정을 받았다. 둘째, 그는 청렴결백했다.

 

우리는 청사(淸史)에서 유용과 기효람에 대한 기록을 보면, 이 두 사람은 비록 화신만큼 탐관오리는 아니지만, 절대로 깨끗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두 사람은 모두 부정부패하고, 탐관오리와 공모한 기록이 있다. 이로 인하여 처벌을 받기도 했다. 유용은 부하의 부정부패로(유용은 뇌물을 나눠먹지 않았다고 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지부의 직위에서 면직된 적이 있다(청사고.열전89), 그리고 대청률에 따르면 참형에 처해야 하지만, 건륭제가 유통훈의 체면을 봐서 죽이지 않았다. 기효람도 곁에 두소월(杜小月)만 있었던 게 아니라, 삼처사첩이 있었고, 하루에 5번이나 방사를 했다고 한다. 그는 노견증(盧見曾)과도 관계가 있었고, 건륭제도 잘 알았다. 그래서 그를 충군(充軍)시켜 유배보냈던 것이다.

 

만일 청나라에서 탐관오리를 진정으로 잡아들일 생각이었다면, 화신이 가장 먼저 잡혔겠지만, 유용과 기효람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왕걸은 유용, 기효람과 달랐다. "왕걸은 조정중추에 십여년간 있었지만, 일이 옳고 그름을 한번도 왜곡시켜 아뢴 적이 없다. 강정했고, 두 임금을 모시면서 그가 충직하다는 것을 황제는 다 알았다."

 

이제 왜 화신이 왕걸은 겁내고, 유용, 기효람은 겁내지 않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자고이래로 사불승정(邪不勝正)인 법이다. 왕걸은 건륭, 가경 두 황제때 보기 드문 정인군자였고, 그에게는 호연지기가 있었다. 그래서 화신도 그를 어떻게 하지 못했던 것이다. 유용, 기효람은 왕걸과 비교하자면, 확실히 부족하다. 무엇이 부족한지는 독자여러분이 더 잘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