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장(黍)은 왜 주식의 지위를 보리, 쌀에 빼앗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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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농민

2020. 7. 20.

글: 장금(張嶔)

 

현대인의 식탁에서 "기장(黍)"은 이미 아주 드물게 되었다. 그러나 고대의 여러 전적(典籍)이나 시사(詩詞)를 보면, "기장"은 일찌가 가장 익숙한 작물이었다. 당나라때의 맹호연(孟浩然)의 "고인구계서(故人具鷄黍), 요아지전가(邀我至田家)"라는 구절을 남겼다. 그리고 주나라때 탄생한 <시경(詩經)>에도 모두 농작물이 100여번 등장하는데, 그중 21번 등장하는 것이 '기장'이다. 3천년전의 중국인의 식단에서 가장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것이 바로 '기장'이었다.

 

기장은 황미(黃米)라고도 부르며, 중국본토의 농작물 가운데, 원로의 자격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중국경내에 동으로 흑룡강에서 서로는 신강에 이르기까지 여러 석기시대의 유적지에는 '기장을 심은'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중국본토에서의 재배역사는 보수적으로 잡아도 8천년이상이다. 중국전통농업에서의 "오곡(五穀)" 가운데 '기장'은 오랫동안 1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상, 주시대의 식탁 심지어 연회에서 '기장'은 주인공이었다. 주식으로 쓰였을 뿐아니라, 양조의 주요원료이기도 했다. <시경>의 유명한 구절인 "풍년다서사도(豊年多黍多稌), 역유고름(亦有高廩), 만억급자(萬億及秭)" 이를 보면 기장이 당시 농작물중 '큰형'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장'은 '큰형'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문제점도 적지 않았다. 비록 '기장'은 가뭄을 잘 견디고, 생장기도 짧아서 기르기 쉽고 수확하기 쉬운 농작물이만, 맛으로 말하자면 정말 '조(粟)'만 못했다. 단위당 생산량도 높지 않았다. 그리고 반드시 황무지에 길러야 했다. 중국의 인구증가와 경지조건이 변화하면서, '기장'은 '큰형'의 지위를 잃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전국시대의 <여씨춘추>를 보면, '기장'의 지위는 상당히 하락해서, 농작물 중에서 2위를 차지한다. 그후 수천년간 재배면적은 더욱 적어지고, 오늘날의 '기장'은 학자 리건판(李根蟠)에 따르면, "잡곡 중에서도 중요성이 떨어진다" 

 

기장이 '큰형'의 지위를 잃고 '조'에게 그 지위를 넘겨준 춘추전국시대에 또 다른 농작물이 나타나서 후래거상(後來居上)한다. 바로 보리(小麥)이다. 비록 지금으로부터 3,800년전의 신장 공작하묘구 유적에서 보리의 유적이 발견되지만, 중국인이 보리를 재배한 역사는 서아시아국가들보다 훨씬 짧다. 보리는 처음에 "래(來)"라고 불리웠다. 전국시대에 이르러, 보리는 아직 황하중하류이 하남, 산동 및 하북의 동남부 등지에서만 재배되었다. 심지어 양식창고격인 관중평원에서는 한무제때까지도 여전히 "관중의 풍속은 보리를 심기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바로 춘추전국시대부터 중국인들은 갈수록 보리의 '좋은 점'을 발견하게 된다. 보리의 가뭄을 견디는 힘은 조보다 못했지만, 추위를 견디는 능력은 훨씬 나았다. 특히 '겨울보리'를 심어서 성숙시키는 것은 이전에 중국인들이 기장, 조를 심을 때 '봄에 심어 가을에 거두는' 고유의 모델을 바꿔버리게 된다. 이는 농업생산에서 부족한 부분이 보완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비록 농작물 중에서 '비주류'이기는 하지만, 전국연간의 중국인들은 보리를 갈수록 중시하게 된다. <여씨춘추>에서는 '맹하지석(孟夏之昔), 살삼엽이수대맥(殺三葉而收大麥)"이라고 적게 된다. 전국시대 보리의 재배지역은 급속히 확대된다. 낙양(洛陽)등지는 "백성들이 모두 보리를 심었다"

 

중국고대의 강력한 경작기술로 '젋고' '외래종'인 보리는 계속하여 수토불복(水土不服)의 약점을 극복하기 시작한다. 중국북방의 여러 선진적인 관개공사로 여러 신종 보리가 계속해서 나타나게 된다. "누차(耬車)" "철리(鐵犁)"등 새로운 농기구가 사용되며, '구전법(區田法)'등 선진적인 경작기술이 보급되면서 보리의 생산량은 증가하게 된다. 한나라때, 중국 보리의 무당 생산량은 이미 120근을 넘어선다. 13세기 영국에서의 보리의 무당 생산량보다 근 3배나 되었다. 그리고 한나라때 농작물의 '큰형'격인 조보다도 더욱 높았다. '풍속이 보리를 심기 좋아하지 않던' 관중등 지구에서도 위진남북조시대가 되면 이미 보리를 많이 심게 된다.

 

이런 붐으로, 보리의 지위는 급상승하여, 초당때에는 이미 '큰형' 조의 바로 다음가는 중국제2대농작물로 성장한다. 왜 이 시기에 아직은 '큰형'이 되지 못하였을까? 왜냐하면 생산량이 늘어난 보리는 문제점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첫째는 수확이 쉽지 않았다. 이런 말이 있다. "보리를 수확하는 것은 불을 끄는 것과 같다" 보리는 빨리 익지만 빨리 마른다. 특히 보리의 수확은 왕왕 여름에 이루어진다. 혹은 혹서기이거나 혹은 폭우가 퍼붓는 때이다. 수확에 조금만 시기를 놓치면 1년농사가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저장도 큰 문제였다. 장기간 저장하기 좋은 조와는 달리, 보리는 적시에 가공해놓지 않으면 쉽게 습기차고 벌레가 생긴다. 시간이 오래되면 그냥 하얗게 썩어버린다. 그래서 당나라때, 식량의 최우선은 조였고, 관청에서 거두는 세금도 조를 거두었다. 보리의 역할은 아직은 보조적이었다.

 

다만, '수토불복'의 난제가 하나하나 해결되었다. 그런 난제가 어떤 것들이었을까? 바로 당나라때부터 중국의 보리수확기술과 가공저장기술이 고속발전을 이루게 된다. 당나라때는 장겸도(長鎌刀) "맥삼(麥釤)"이 발명된다. 맥삼 하나로 소확하는데 힘은 적게 들이고 효과는 배로 내게 된다. 송,원연간에는 "맥작(麥綽)", "맥롱(麥籠)"이 나타나서 수확효율이 당나라이전보다 10배나 늘어난다. 이는 직접적으로 대규모재배의 병목현상을 해결해 주었다. "수마(水磨, 물레방아)", "석마(石磨, 돌절구)"등 신형 양식가공기계도 보급된다. "소맥을 밀가루로 만드는" 속도가 더욱 가속화된다. "햇볕을 쬐고" "약물로 벌레를 막는"등 새로운 방법이 널리 응용된다.

 

이렇게 되니 당나라 중후기부터 중국의 보리재배는 철저히 빗장이 풀린다. 송나라때 보리재배는 북방에 보편적으로 퍼졌을 뿐아니라, 남방에도 대규모로 보급되었다. 보리를 심기에 부족하다고 공인되어 있던 광동도 보리를 심게 된다. 호광, 사천, 회남등지에도 모두 대면적에서 보리를 심는다. 명청시기에 이르면, 보리의 재배면적은 남북각성으로 모두 보급된다. <천공개물>에서는 이렇게 결론내린다. 당시 백성들의 음식은 이미 "보리가 절반이다" 일찌기 '조', '기장'의 뒤에서 조용히 있던 보리가, 이때는 이미 화려하게 변신하여 중국인의 주식이 된 것이다.

 

보리보급이 가져온 직접적인 결과는 바로 중국양식생산량의 증가이다. 명나라를 예로 들면, 보리의 보급과 재배로 명초의 농업세수입은 송, 원보다 두배이상 많아진다. 명나라 중후기에 이르러, 보리의 보급재배로 명나라북방의 여러 지역에서 "이년삼숙제(二年三熟制)"의 윤작제가 시행된다. 즉, "보리 - 콩 - 면화"를 차례로 심는 것이다. 남방에서는 "쌀,보리 1일년이숙제(一年二熟制)" 즉 하나의 토지에 쌀과 보리를 계절에 따라 차례로 심는 방식이 시작된다. 경작지가 10억무를 돌파한 명나라는 1무당 생산량이 송나라때보다 50%가 늘어난다. 농업생산량이 상당한 수준에 이른 것이다.

 

이런 점을 보면 왜 명,청시대에 중국의 인구가 급속히 증가했는지 알 수 있다. 면화, 감자, 오동나무, 옻나무, 찻잎, 뽕나무와 삼등 경제작물도 명청시기에 대량 보급된다. 바로 이 고속성장중인 농업생산량은 경제작물의 수확증가를 불러왔고, 더더욱 명청시기 상품경제의 발달기초를 이룬다. 아말감처럼 한때 세계의 돈을 벌어들이는 번영산업에는 배후에 '무명영웅'이 있다. 바로 보리등 농작물이 그것이다.

 

명,청만이 아니다. 만일 진한부터 명청까지의 2천년역사를 살펴보면, 그 파란만장한 세월동안 마찬가지로 보리의 '역습'역사가 있다. 중국역사상 여러번의 '태평성세'와 '중흥'이 있었는데 이는 모두 보리의 도움때문이다. 보리를 알면, 중화민족을 알 수 있다. 한그루 보리는 바로 한 민족의 장성불쇠(長盛不衰)의 동력원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