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흔(奕訢)의 후손들은 어떻게 공왕부(共王府)를 팔아버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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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북경의 어제

2020. 7. 29.

글: 유강화(劉江華)

 

모두 알고 있다시피, 십찰해(什刹海) 부근의 공왕부는 원래 청나라때 공친왕(共親王) 혁흔의 저택이다. 지금 그것은 가장 잘 보존돈 청나때의 왕부건축군(王府建築群)이다. 공왕부는 역사적 가치와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일좌공왕부(一座共王府), 반부청대사(半部淸代史)" 공왕부 한채는 반권의 청나라역사이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청나라때, 공왕부는 건축이 정교하고 아름다울 뿐아니라, 그 안에는 많은 정교하고 아름다운 골동품과 진귀한 고서화가 보관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진당(晋唐)이래의 서화명작이 120종이상이다. 거기에는 왕희지(王羲之)의 <유목첩(遊目帖)>와 왕헌지(王獻之)의 <아군첩(鵝群帖)등이 포함되어 있다. 심지어 서진(西晋) 육기(陸機)의 <평복첩(平復帖)>도 있었다.

 

청나라가 멸망한 후, 공왕부의 운명은 급전직하한다. 진귀한 서화골동품이 마구잡이로 처분되었을 뿐아니라, 공왕부까지도 혁흔의 후인에 의해 팔려버리고 만다. 공왕부에서 당시 유실된 문화재만 약 2000건에 이른다. 지금까지도 공왕부의 문화재가 각 경매장에 나타났다는 뉴스가 수시로 전해지고 있다. 작년말, 공왕부에서 유출된 백옥향로(白玉香爐)가 파리에 나타나서 시장을 들썩이게 하였다.

 

왕부의 쇠퇴는 시국이 변화한 때문이다. 다만 청나라때 이들 왕공귀족의 사치와 부패도 '조추(助推)'작용을 했을 것이다.

 

화신부(和珅府)에서 공왕부로

 

1936년 10월 10일 56세된 마지막 공친왕 부위(溥偉)는 고적하게 장춘(長春)의 신화여사(新華旅舍)에서 사망했다. 그때 8.7만평방미터에 이르는 공왕부는 경성의 여러 왕부들 중에서 가장 큰 것이었는데, 이미 그에 의해 다 팔려버렸다. 왕부안의 수천에 이르는 엄청난 가치의 골동 진귀한 서화는 일찌감치 다른 사람들의 손에 넘어갔다. 그 자신은 1912년 청도(靑島)로 피난간 후, 거의 경성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그가 꿈에도 그리던 청실복벽은 여전히 머나먼 꿈이었다.

 

이것은 80여년전 그의 할아버지인 혁흔이 이 왕부로 들어갔을 떄의 상황과 비교하면, 천양지차가 있다.

 

1850년, 도광제(道光帝)가 사망한다. 도광제 생전의 비밀입저(秘密立儲)에 의해 혁저(奕詝)가 황위에 오르니 그가 함풍제(咸豊帝)이다. 같은 해 2월, 혁흔은 공친왕에 봉해진다. 함풍제는 또한 "경왕부(慶王府)"를 그에게 하사하여, 황궁에서 분부(分府)하여 나간 후의 저택으로 삼게 한다. 이렇게 하여 옛날 화신(和珅)의 저택은 '공왕부'로 바뀌게 되었다.

 

공왕부의 전신은 화신의 저택이었다. 1769년 화신은 부친의 작위인 삼등경거도위(三等輕車都尉)를 승계한다. 7년후, 그는 호부시랑(戶部侍郞), 군기대신(軍機大臣) 겸 내무부대신(內務府大臣) 겸 보군통령(步軍統領)에 오른다. 그리고 숭문문세무감독(崇文門稅務監督), 총리행영사무(總理行營事務)가 된다. 그리고 바로 이 해에 화신은 십찰해의 북안에 저택을 짓기 시작한다. 1799년, 화신은 처벌을 받아 사사된다. 그후 그의 저택과 거액의 재산은 국고에 환수된다. 같은 해 화신의 저택은 가경제(嘉慶帝)에 의해 그의 동생이자 건륭제(乾隆帝)의 제17황자인 경군왕(慶郡王) 영린(永璘)에게 하사되고, 경왕부로 개칭된다. 1820년 이월 영린의 병이 위중해지자 가경제가 친히 그의 집으로 가서 위문하고, 경친왕(慶親王)에 봉한다. 얼마후인 삼월십삼일 사망한다. 함풍제 초기 내무부는 경왕부를 영린의 후손에게서 회수한다. 그리고 함풍2년(1852년) 함풍제는 혁흔에게 이를 하사한 것이다.

 

<청궁공왕부당안총회:혁흔비당>(이하 "혁흔비당"이라 함)의 기록에 따르면, 공왕부는 역사상 2번의 대수리를 거친다. 한번은 혁흔이 입주하기 전이다. 혁흔은 1852년 6월 9일에 공왕부로 들어갔다. 당시 저택의 동, 중, 서 삼로의 국면은 일찌감치 형성되어 있었지만, 어쨌든 화신이 지은 후로 이미 70여년이 흘렀다. 그리고 친왕부의 규제(規制)는 화신, 경왕부보다 높아야 했다. 그리하여 내무부는 건물을 수리한다. 이번 수리는 1850년 12월에 시작하여, 1852년초에 완성한다. 비용은 모두 6.85만냥가량이 들었다. 다음으로, 혁흔이 입주한 후 여전히 계속 개조한다. 동치연간(1862-1874)에 기본적으로 완성한다. 당시는 혁흔의 권력과 지위가 정점에 이른 때였다. 그래서 많은 뛰어난 장인들을 모아서 공사를 완성할 수 있었다. 수리결과, 현재의 공왕부의 모습 전왕부(前王府) 후화원(後花園) 면모가 완성된다. 혁흔의 <췌금음(萃錦吟)>권7에는 "동치연간저원탁성(邸園落成)"이라고 적혀 있다. 지금의 국가도서관에서 소장한 공왕부수리설계도도 이를 확인해준다. 현재의 공왕부건축배치는 그때 고정된 것이다.

 

마지막 공친왕 부위의 아들이자 혁흔의 증손자인 육군고(毓君固, 원래 이름은 육첨(毓嶦))는 <공왕부와 공왕부 가옥, 토지전매의 경과>라는 글에서 이렇게 소개했다. 민국초기, 공왕부를 저당잡히기 위하여 가족은 사람을 시켜 공친왕부의 도면을 그리게 했다. 도면을 그리면서 측정한 공왕부의 부지면적은 130여무였고, 건물은 1000여간이었다. 공왕부의 뒤에는 아주 아름다운 화원이 있었는데, 인공호와 가산(假山)이 있고, 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었다. 청궁당안을 보면, 1850년 내무부에서 수리전에 측량한 바에 따르면, 왕부에는 581간의 건물이 있었다. 이를 보면 2차례에 걸친 수리를 통해 건물이 500여간 늘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혁흔은 분부때 적지 않은 "응득지물(應得之物)"과 "황제상사지물(皇帝賞賜之物)"이 있었다. 이들 골동가구로 공왕부를 채운다. 왕부로 이사들어간 후, 혁흔은 다시 적지 않은 골동과 명화를 모은다. 혁흔의 손자인 부유(溥儒, 다른 이름은 부심여(溥心畬)이다)는 민국시기의 저명한 화가이고, 장대천과 나란히 "남장북부(南張北溥"로 불릴 정도였다. 부유는 일찌기 소장한 서화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명적(名迹) 방면에서는 저명한 서진 육기의 <평복첩>, 당나라 안진경(安眞卿)의 <자서고신첩(自書告身帖)>, 당나라 회소(懷素)의 <고순첩(苦筍帖)>, 남송이 대서예가 장즉지(張卽之)의 <화엄경(華嚴經)> 그리고 왕희지의 <유목첩>과 왕헌지의 <아군첩>이 있고, 명화방면으로는 당나라 한간(韓幹)의 <조야백도(照夜白圖)>, 북송 휘종 조길(趙佶)의 <오색앵무도(五色鸚鵡圖)>권, 북송 이원길(易元吉)의 <취원도(聚猿圖)>, 남송 미우인(米友仁)의 <초산추제도(楚山秋霽圖)> 그리고 송나라 무명씨의 <군우산목도(群牛散牧圖)>등이 있었다. 그중 적지 않은 작품은 <석거보급(石渠寶笈)>에 수록되어 있다. 이는 이것들이 일찌기 황궁에 소장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부위는 <평복업>의 미제발(尾題跋)에 "(부)위가 소장한 진당이래 명적 백이십종"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공왕부가 소장한 진당이래 서화명작은 120종이 넘으며, 수장의 풍부함과 품질의 높음을 알 수 있다.

 

일본골동상이 대량의 골동품을 사가다.

 

1898년 혁흔이 사망하고, 청황실이 쇠락하고, 게다가 혁흔의 후손들은 고난을 겪는데, 공왕부의 운명도 변화하기 시작한다.

 

혁흔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남 재징(載澂), 차남 재형(載瀅), 삼남 재준(載濬), 사남 재황(載潢). 그중 삼남 재준과 사남 재황은 어려서 요절한다.

 

장남 재징은 1885년 병사하고, 자식을 두지 못했다. 서태후는 의지(懿旨)를 내려, 재형의 장남 부위(차남은 부유)를 재징의 양자로 삼아 대를 잇게 한다. 혁흔이 사망한 후, 적장자승계제에 의해, 재형의 아들 부위가 재징의 양자가 된 후, 장손의 자격으로 공친왕의 왕위를 승계한다. 동시에 이 왕부도 물려받았다.

 

1912년초, 부의는 청제퇴위조서(淸帝退位詔書)를 반포하여, 청왕조는 끝난다. 이때 부위, 양필(良弼)등은 종사당(宗社黨)을 만들어 대청의 황제제도로 복귀할 것을 기도한다. 민국이 성립된 후, 부위는 청도로 도망쳐서 숙친왕(肅親王) 선기(善耆), 일본낭인 가와시마 나니와(川島浪速)는 함께 병마를 모아 '만몽독립운동(滿蒙獨立運動)'을 기획한다. 복벽경비를 모으기 위해, 이 마지막 공친왕은 공왕부의 문화재, 저택과 토지를 팔기 시작한다. 부위가 처음 발기 시작한 것은 공친왕부의 서화를 제외한 문화재들이다. 부위는 <양국어전회의일기(讓國御前會議日記)>에 이렇게 썼다. 1911년 12월경, 그는 석대인후통(石大人胡同, 지금의 외교부가)의 영빈관으로 가서 원세개(袁世凱)를 만난다. 원세계는 청실을 지지할 생각이 없음을 확인한 후, 부의는 집으로 돌아와서 모친과 상의한 후 가산을 팔기로 한다.

 

이 결정은 직접적으로 일본의 골동품상 야마나카 사다지로(山中定次郞)에 의한 공친왕부 문화재 대량구매가 일어나게 된다. 그는 공친왕부 문화재의 최대구매자였다.

 

<야마나카사다지로전>에 그가 처음 공왕부로 가서 골동품을 본 광경을 기술하고 있다: "저택은 상당히 컸다. 예를 들어, 창고에도 여의를 넣어두는 여의창고, 서화를 넣어두는 서화창고, 고동기를 넣어두는 동기창고, 이렇게 수십동이 있었다." 야마나카는 이렇게 기억한다. 공왕부의 대관가(大管家)는 콩이나 쌀을 집는 것처럼 두 손으로 주보를 한무더기 쥐고서 그에게 물었다: "이건 얼마 주겠는가?"

 

야마나카 사다지로의 방문은 공왕부의 대량매각의 서막이었다. 1913년 2월 27일, 28일 그리고 3월 1일의 3일동안 야마나카상회는 뉴욕에서 '공왕부소장품경매회'를 개최한다. 지금까지도 보존되어 있는 당시 경매도록을 보면, 이번에 경매된 것은 모두 536건의 문물이었다. 그중 옥기가 250여건, 청동기가 110여건, 자기가 130여건이다. 모든 경매물품은 유찰된 것이 하나도 없었고, 경매총액은 27.6만여달러에 달했다. 당시 경매거래금액으로 최고기록을 세운다. 같은 해, 야마나카상황는 런던에서 공왕무분물 210건을 경매한다. 두번에 걸쳐 이미 근 천건에 이른다. 게다가 경매전에 야마나카는 일본국내에서도 판매한 바 있다. 그러므로, 보수적으로 추산하더라도, 그가 공왕부에서 매수한 문물골동품은 2000여건가량은 되었을 것이다.

 

왕부는 먼저 저당잡히고 그 후에 매각된다.

 

부위가 판매한 소득은 다른 기록을 보면 그중 한둘을 엿볼 수 있다. 종사당의 활동경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1913년 5월, 청도에 피난해 있던 부위는 일본낭인 무네카타 고타로(宗方小太郞)를 시켜 북경의 요코하마쇼킨은행(橫濱正金銀行)과 교섭하게 하여, 베이징 왕부토지를 저당잡히고 50만냥을 대출받는다. 쇼킨은행의 경리가 보낸 회신에는 "공친왕이 이전에 서화골동소장품을 팔아서 얻은 금액이 약 40만냥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부위의 아들 육첨이 소개한 바에 따르면, 당시 공친왕부는 직예성 100여현내에 토지 약 7천여경을 보유하고 있었고, 관외에 4개의 대장두(大莊頭)가 있었는데, 장두 1개당 천경이상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모두 합치면 근 만경의 토지이다. 광서말, 선통초기 매년 수입으로 들어오는 지조(地租)가 개략 12만현양(現洋)이었다.

 

이들 토지는 처음에 공친왕에 봉해졌을 때, 황제가 하사한 것이다. 그리고 공왕부가 매년 사들인 것도 있다. 토재매매과정에서는 수수료가 있고, 또한 어떤 관사(管事)를 통하여 구매한 토지는 그로 하여금 지조를 거두게 했기 때문에 여러 관사들은 토지매매를 아주 중시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관리들이 토지를 매매하는 경우가 여러가지이다. 어떤 경관(京官)이 나이가 들어 고향으로 돌아갈 때, 만일 고향이 강남이면, 토지를 팔고 다시 강남으로 가서 토지를 산다; 어떤 경우는 급히 돈이 필요하거나, '관직'을 얻으려 작업하거나 혹은 미봉처분등의 이유로 토지를 판다. 그리고 북경의 일부 관리가 사망한 후, 가족이 지조를 받을 때 지방관리의 협조를 받지 못해 지조를 거두기 어렵게 되면 토지는 오히려 부담이 된다. 차라리 팔아버리고 북경의 토지를 사는 것이 낫다.

 

당시 일본낭인 무네카타 코타로에게 소식을 전하는 책임을 졌던 왕종림(汪鍾霖)은 공왕부 토지의 가치를 이렇게 소개한다: "공친왕부는 북경부근에 가치가 약 2백만냥백은에 이르는 토지가 있다. 그중 120만냥의 토지는 황제가 하사한 것이고, 나머지 80만냥의 토지는 공친왕이 스스로 사들인 것이다. 현재 모든 토지를 저당잡히고자 하니 3년을 기한으로 50만냥을 대출해달라." 그러나, 민국정부가 그의 자산을 보호해주지 않고, 게다가 시국이 불투명하다고 하여 쇼킨은행은 결국 부위에게 대출해주지 않는다.

 

토지저당을 할 수 없게 되자, 부위는 공왕부를 저당잡히게 된다.

 

원래, 공왕부의 매년 지조수입이 12만현양인잘 관리하면 비용을 대는데 충분할 수도 있었다. 부위가 복벽을 기도하다가 원세개가 응락하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청도로 도망친다. 그러나, 그는 먹고 마시는 모든 것들 심지어 거위, 오리, 물고기, 고기와 염장야채까지도 북경에서 가져왔다. 그리고 특정 점포를 지정해서 사도록 했다. 예를 들어, 천복호(天福號)의 장육(醬肉), 천원장원(天源醬園)의 함채(鹹菜), 치미재(致美齋)의 점심(點心)등등. 그러니 씀씀이가 컸다. 그외에 매월 현금 3,5천원도 필요했는데, 부족하면 북경에 전보를 보내 송금하게 했다.

 

부위가 청도로 옮겨간 후, 부유와 모친등은 원세개를 피해 공왕부에서 나온다. 서산(西山) 문두구(門頭溝)의 계대사(戒臺寺)에 머물렀다. 그곳은 현금을 쓸 필요가 없는 곳이지만, 매일 먹고 마시는 것을 북경성에서 나귀에 실어서 가져왔다. 매일 운송비만 수십원이었다. 게다가 공왕부에 남아 있는 부혜(溥僡)등이 쓰는 것도 있었다. 공왕부는 수입보다 지출이 많았던 것이다.

 

처음에 공왕부는 돈이 모자라면 잘 아는 은행에서 빌리곤 했다. 시간이 흐르니, 은행도 대출을 거절한다. 어쩔 수 없이, 부위는 공왕부의 도면을 담보로 잡히고, 북경 천주교회 서십교교당에서 대양 35,000원을 빌린다. 일찌감치 공왕부를 노리고 있던 서십교교당은 부위등이 겉으로 강해 보이지만 실은 허약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연말 결재때 이자를 추가하여 목록을 내민다. 원래 빌린 금액은 35,000원인데, 500원의 이자를 더해서 35,500원을 청구한다. 부위는 당연히 갚을 방법이 없었다. 그때 서십교성당은 상환을 요구하지 않을 뿐아니라, 앞장서서 4,500원ㅇ르 더 빌려준다. 그렇게 하여 4만원을 채운다. 다음 해에도 부위는 갚지 못한다. 교당은 다시 그에게 수천원을 추가해서 5만원을 만든다. 교당의 고리대는 5만원부터 시작되었다.

 

몇년 후, 원리금을 합쳐서 20여만원이 된다. 이때 교당에서는 공왕부를 법원에 제소한다. 즉시 상환할 것을 요구한다. 재판은 3년을 끌었고, 채무는 이미 24만원에서 28만원으로 늘어났다. 육첨의 통계에 따르면, 공왕부가 서십교교당에서 빌린 돈은 다 합쳐도 14만원에 미치지 못한다. 어쩔 수 없이, 부위는 공왕부를 둘로 나누어, 앞의 집을 서십교성당에 저당잡혀 채무상환용으로 쓴다. 후화원의 모든 건물은 두 동생 부유와 부혜가 쓰도록 한다. 1932년 보인대학(輔仁大學)이 108개의 금조(金條, 금괴)를 채무대리상환하는 댓가로 공왕부 저택의 재산권을 획득한다.

 

부유, 부혜가 후화원을 매각한 소득은 당시 약 15만은원이었다. 형제 둘은 이 돈을 먼저 은행에 예금한다. 원래는 집을 살 생각이었다. 자신들도 살면서, 임대도 해서 비용을 충당하려 한 것이다. 그들은 먼저 아아후통(鴉兒胡同)에서 100여간의 집을 보았으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후 다시 본 것들도 가격이 비싸거나, 집이 형편없었다. 그래서 몇년동안 마음에 드는 것을 찾지 못한다. 은행에 예금한 돈은 비록 이자가 붙었지만, 매월의 지출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몇년이 가기도 전에 다 써버린다. 부위가 왕부를 저당잡힌 돈도 마찬가지로 이미 다 써버렸다. 이렇게 하여 방대한 공왕부 저택은 부위, 부유와 부혜 삼형제에 의해 다 팔려버리게 된다.

 

공왕부를 판 것에 관하여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계공(啓功)은 학술논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1924년 부위는 공왕부를 서양교회에 전당잡힌다. 부유는 교회와 소송을 걸어 후화원부분을 돌려받는다. 그리고 거기에 들어가 거주했다. 항전이후에 그는 비로소 거기에서 이사나온다.

 

1931년 부심여를 스승으로 모신 임희(林熙)는 <공왕부에서 구왕존을 얘기하다>라는 글을 통해, 부위는 1926년 공왕부를 보인대학에 판다. 그러나 아직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부유는 그래서 빌려서 거주하다가 1937년에 이사나와 이화원(頤和園)으로 옮긴다.

 

그러나 부유의 조카인 민환(敏峘)은 이렇게 말한다. 부유와 부혜가 모르는 상황하에서 부위는 공왕부의 췌금원(萃錦園)을 천주교회에 팔았다. 그후에 소송이 벌어졌고, 절반만 이긴다. 즉 땅은 교회에 귀속되고, 부유, 부혜형제는 지상물권만 잠시 보유하고, 몇년후 교회에 팔아야 했다. 나중에 8만대양으로 교회에 매각한다. 그리하여 보인대학의 학교용지가 된다. 비록 약간씩 말이 다르기는 하지만, 공왕부는 이미 공친왕 후손의 손을 떠났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유출된 명화는 모두 진품이다.

 

부위는 공왕부를 저당, 매각하는 동시에, 동생 부유도 공왕부의 서화를 팔기 시작한다. 그의 손에서 유출된 고화는 모두 어마어마한 진품이었다. 그중 북송 이원길의 <취원도>는 엄청난 가치를 지닌 보물이다. 1927년 부유는 일본의 초빙으로 교토제국대학에서 교수로 있을 때, 이 그림을 가져간다. 유감스럽게도, 일본에서 부유는 <취원도>를 일본인에게 팔아버린다. 그후 오사카시립미술관이 이를 보관하고 있다.

 

또 하나의 송나라때 무명씨의 산수도권이 있다. 계공이 어렸을 때, 고서가판대에서 "청소주인(淸素主人)" 즉 부유의 부친 재형이 선정하고 필사한 당시선집 <운림일가집>을 구매해서, 부유에게 보냈다. 부유는 기쁜 나머지, 이 그림을 계공에게 빌려주어 임모(臨摹)할 수 있게 해준다. 계공의 기억에 따르면, 이 그림의 '제관(題款)'은 "북송인산수명화, 부심여진장(北宋人山水名畵, 溥心畬珍藏)>이었다. 그는 투명한 종이를 대고 그림을 배껴서 1달의 시간을 들여, 종이, 비단으로 각각 1본씩 임모한다. 계공이 돌여준 후, 1935년, 부유는 이 그림을 북경에 상주하며 활동하던 미국 넬슨미술관 관장 식맨에게 매각한다.

 

그리고 송휘종의 <오색앵무도>는 원래 황궁소장품이다. 나중에 공친왕 혁흔에게 하사한 것이다. "공친왕장(共親王章)"이라고 찍혀 있었다. 기것은 1911년에 유실된다. 나중에 시중에 나타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골동품상 장윤중(張允中)이 구매한 후 일본인 야마모토 데이지로(山本悌二郞)에게 팔았고, 1933년에는 미국 보스턴미술관이 소장하게 된다.

 

다시 당나라때 말을 잘 그렸던 한간이 그린 <조야백도>권은 먼저 남당의 이후주가 소장했다가, 대화가, 서예가 미불(米芾)과 가사도(賈似道)의 '제관'이 있다. 1935년을 전후하여, 영국소장가 데이비드가 중국골동품상 섭숙중(葉叔重)에게 위탁하여 찾아보게 한다. 섭중숙은 유리창의 박온재(博韞齋)의 경리 소호신(蕭虎臣)이 부유에게 팔아달라고 요청한다. 당시 부유의 집에서는 급전이 필요한 때였다. 그래서 1만은원으로 매각한다. 이 일은 당시 골동품계, 소장계를 깜짝 놀라게 했고, 대소장가 장백구(張伯駒)가 그 소식을 듣고, 북평을 다스리고 있던 송철원(宋哲元)에게 막아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후, 이 중국 당나라때 명화는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최종적으로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하마터면 부유에 의해 외국에 팔릴 뻔했으나 중국이 현재 보존하고 있는 최초의 서예명적은 서진 육기의 <평복첩>이다. 이 작품은 서성 왕희지의 서예작품보다 7,80년 앞선다. 건륭연간, <평복첩>이 대내로 돌아오고, 나중에 성친왕(成親王) 영성(永瑆)에게 하사한다. 1880년에는 혁흔이 소장하게 된다. 1937년, 부유는 모친상으로 급전이 필요했고, 20만은원으로 매각하려 한다. 장백구가 그 소식을 듣고, 여러번 노력한 끝에 결국 4만은원으로 구매한다. 그리하여 이 보물은 해외로 나가지 않을 수 있었다. 1956년 장백구는 <평복첩>을 북경고궁박물원에 기증한다.

 

일본 센다이시 도호쿠대학의 교수인 도미타 노보루(富田昇)는 청나라 황실문물이 어떻게 일본으로 흘러들어갔는지의 문제를 연구했고, <청조황실보물의 유출>과 <근대일본의 중국예술품유전과 감상>등의 책을 썼다. 그의 고증에 따르면, 신해혁명후, 명확한 증거로 나타나는 공친왕부에서 유출된 서화작품은 20여건이앋. 부유의 손에서 팔린 것이 최소 20건이다.

 

개략적인 통계에 따르면, 공앙부에서 당시에 유실된 문물은 약 2천건이다. 지금까지도 공왕부문물은 여러 경매장에 나타나고 있다.

 

공친왕의 일가만 이런 운명을 맞은 것은 아니다. 청나라가 멸망하면서, 청나라의 왕공은 봉록이 중단된다. 게다가 토지에서 지조를 징수하는 것이 갈수록 어려워진다. 전호(田戶), 장정(壯丁)의 항조탈지(抗租奪地)외에 정부도 계속 각 왕부의 토지를 회수한다. 이렇게 되니 옛날의 왕공귀족들은 생활에 쪼들리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이들 왕공들은 대부분 돈을 펑펑쓰는 습관은 지녔지만, 돈을 벌 줄은 몰랐다. 옛날의 호화사치를 유지하기 위하여 할 수 없이 조상이 물려준 주보, 골동, 서화를 팔고 조상의 능에 있는 수목, 기와, 벽돌, 석재등도 팔고, 마호(馬戶), 화원등 부속건축을 팔기도 하고 결국은 자신의 저택까지 파는 것이다.

 

부위외에 패륵(貝勒) 재윤(載潤)도 있다. 1928년 먼저 저택의 중부, 서부를 10만대양에 매각하고, 이 돈으로 포드, 닷지등 자동차도 사고, 도박빚도 갚았다. 10년후, 다시 생활이 곤궁해지자, 10만대양의 가격으로 저택의 동부를 판다. 그리고 경친왕 혁광(奕劻)의 둘째아들 재박(載搏)은 도박을 좋아하여 하룻밤만에 집을 잃기도 했다. 그리고 부유는 서화를 판 외에 사료기재에 따르면 그는 일찌기 학생을 시켜, 상하이, 홍콩일대에서 서태후가 차다가 나중에 공친왕 혁흔의 조모에게 하사한 조모녹보석(祖母綠寶石, 에메랄드)을 팔겠다고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 한 마디 덧붙일 것은 공왕부에서는 저택, 골동서화를 팔아버린 것 이외에 왕부토지도 회수되었다는 것이다. 공왕부의 창평, 문두구등지의 3곳 원침(園寢), 취화산원침(翠花山園寢), 남장원침(南莊園寢)과 서봉령원침(西峰嶺園寢)가지도 묘실까지도 모조리 도굴당했고, 원침의 토지, 수목등은 공왕부와 함께 팔려갔다. 일제가 북경을 점령했던 시기에 점점 팔려나가서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공왕부를 팔았지만, 부위등은 역사조류에 역행하여 복벽을 기도했다. '만몽독립운동'등은 결국 실패로 끝난다. 아이러니한 것은 부위가 대청에 충성을 다했지만, 한때 서태후는 부위를 태자로 삼으려 했었기 대문에, 부의는 계속 부위를 경계했다는 것이다. 만주국이 성립된 후, 부의는 시종 부위에게 관직을 내리지 않았다.

 

공왕부에서 가장 많은 문물을 구매한 야마모토 데이지로는 1936년에 사망한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미국은 대일선전포고를 한다. 그후 야마모토상회의 미국내 재산은 유엔재산관리국에 의하여 압류, 경매되고, 야마모토상회는 결국 쇠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