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비부인묘를 둘러싼 수백년 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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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악비)

2020. 9. 25.

글: 황징(黃澄)

 

쥬장시(九江市) 차이쌍구(柴桑區) 스쯔진(獅子鎭)(옛 九江府 德化縣 白鶴鄕) 싼챠오촌(三橋村)(이 명칭은 山口橋가 와전된 것임) 태양산(太陽山)에는 악비(岳飛)의 부인 이왜(李娃)의 묘가 있다. 그 땅은 '환봉면일(環峰面日, 산봉우리로 둘러싸여 태양을 향하고)' '산을 뒤로 하고 강물을 앞에 두어(依山臨水), 풍수가들이 "비연투하(飛燕投河)"의 명당자리라고 부르는 곳이다. 그러나, 송나라황제가 악비에게 무목(武穆)이라는 시호는 내리고 악왕(岳王)에 추봉하였고, 그후 원, 명, 청의 각 왕조황제도 계속 추증하여 인의충효의 모범이라고 받들었지만, 초국부인의 귀한 몸이 된 악비의 부인 묘지는 엄청난 소송에 시달리게 된다.

 

묘지쟁송 악씨패소

 

송나라황실이 남으로 내려온 후, 악비는 구강(九江)에 정착한다. 모친과 부인이 사망한 후, 송고종, 송효종은 각각 이곳의 땅을 하사하여 장례하게 한다. 그의 후손은 대대로 구강에 거주했고, 묘를 지키며 제사를 지냈다. 명나라 정덕14년(1519)에 영왕(寧王) 주신호(朱宸濠)는 정덕제가 황음무도하다는 것을 이유로 강서에서 10만을 모아 반란을 일으킨다. 순무와 안찰부사를 죽이고, 구강을 공략한다. 전설에 따르면, 혼란의 와중에 악씨후예들은 강북(江北, 장강이북)으로 피난갔다고 한다. 구강의 조상묘지는 이로 인하여 무주고분(無主孤墳)이 된다. 110년후, 숭정2년(1629년) 악련소(岳聯霄)등이 강을 넘어 성묘를 하러 온다. 주령산(株嶺山)의 악비모친의 묘는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태양산의 악비부인묘는 보이지 않았다. 그 묘지에는 진애수(陳崖叟)의 묘가 있었다. 그리하여 관청에 소송을 낸다. 진씨가 자신들의 조상의 산을 점거하여, 조상의 묘를 훼손했다는 것이다. 진씨후예는 상당히 놀란다. 왜냐하면, 진애수는 가정10년(1531)에 매장되었고, 이미 백년이 지났는데, 돌연 악씨후예가 찾아와서 자기 조상이 남의 묘지를 침점했다고 말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보더라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비록 악씨가 족보를 증거로 내밀었자먼, 가정6년(1527) 병비부사 하비(何棐, 자는 輔之, 泰興사람)와 천계4년(1624) 병비부사 육몽룡(陸夢龍, 자는 君啓, 會稽사람)가 편찬한 <구강부지(九江府誌)에도 모두 악부인의 묘는 악비모친의 묘에 부장(袝葬)되어 있다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악부인의 묘는 악비묘친묘가 있는 주령산에 있다는 말이다. 진유순(陳幼循)을 우두머리로 하는 진씨후손들은 <구강부지>를 찾아와서 증거로 내민다. 그리고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고, 세대도 많이 흘렀다고 하면서 악련소등이 악비의 가짜후손이라고 몰아세웠다. 당시의 지현(知縣)은 윤기봉(尹奇逢, 嘉魚사람)인데, 진씨후손의 항변을 받아들여 이렇게 판결한다. "구강부지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악부인의 묘는 분명 주령산에 있을 것이다. 주령산과 태양산은 거리가 상당히 멀고, 전혀 관련이 없다. 악련소등은 곤궁하게 되자 함부로 쟁송을 일으켰으나, 아무런 증거가 없다. 그저 충신의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집안의 백년된 묘를 없애려고 하는 것이다. 악련소등은 충신의 후예이니 당연히 주령산의 조상의 땅을 잘 지키고, 진씨의 재산을 넘보지 말라."

 

그러나, 악씨는 계속 소송을 제기한다. 후임 지현(知縣)인 오상손(伍常遜, 全州사람)은 거꾸로 악씨의 주장을 인정하여, 묘산(墓山)을 악씨집안의 것으로 판결한다. 물론 진씨집안은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아마도 악씨, 진씨 두 집안의 소송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청나라 순치18년(1661)에 구강부추관(九江府推官) 호종우(胡宗虞, 常州사람)가 편찬한 <구강부지>에는 명나라때 하, 손 두 사람이 만든 부지의 내용을 고쳐서 명확하게 악부인은 백학향 태양산의 산록에 묻혀 있으며 구강부성에서 남쪽 50리에 있다고 적는다. 그러나, 근거가 무엇인지는 적지를 않았기 때문에, "증거가 없고" 사람들이 그대로 믿기는 어려웠다. 예를 들어, 강희12년(1673) 지부(知府) 강은도(江殷道, 자는 九同, 漢陽 사람)이 편찬한 <구강부지>는 호종우가 편찬한 <구강부지>의 내용이 '증거를 검토하지 않았다'고 적었다. 그리하여 양설병존의 방법을 채택한다. 

 

옹정연간의 <강서통지(江西通誌)>에는 아예 애매모호하게 쓴다. 먼저 악비모친 요태부인묘(姚太夫人墓)는 덕화현 백학향 주령산의 산록에 있다고 적ㄱ고, 악비가 구강을 지킬 때 송고종이 이 땅을 하사해서 매장하였다고 적었다. 나중에 부인 이씨가 사망하는데, 송효종이 태양산 아래 주령산에서 15리(기실 단지 6,7리밖에 되지 않는다) 떨어진 곳을 하사하여 매장하였다고 적는다. 그리고 그 뒤에 보충하여 <명승지>및 구강의 하,육의 옛 부지에는 모두 부인이씨를 주령산 악비모친묘의 곁에 매장하였다고 적혀 있다. 현재 부지는 태양산에 매장되었다고 적었는데, 어느 설이 맞는지 알 수가 없다. 지방지는 지방의 가장 권위있는 역사자료이다. 이렇게 혼란한 기재는 오직 악가 진가 두 집안의 소송을 더더욱 계속되게 만들었다. 

 

강희12년, 31년, 59년 두 집안은 세차례 소송을 제기한다. 강희12년에 지부 강은도는 진애수의 자손들은 모두 지방의 선비로 향현(鄕賢)에 이름을 올렸으니, 부친을 매장할 땅이 없어서, 남의 묘를 파냈을 리 없다고 본다. 그리하여 악씨후손들이 악의를 가지고 소송을 제기했다고 인정한다. 강희59년에는 지현 장근광(張近光, 자는 殿颺, 正藍旗 사람)은 악모사(岳母祠)내에 기록된 <묘전비기(墓田碑記)>에는 악부인이씨묘는 명나라 정덕, 가정연간에 이미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고 적혀 있다는 것을 찾아낸다. 그리하여, 악가가 어찌 수백년후에 거꾸로 태양산에 묻혀있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느냐고 하였다. 호종우의 부지는 하비, 육몽룡의 이후에 쓴 것이니 믿을 것이 못된다고 하였다. 옹정연간까지도 여전히 소송이 계속되었으나 모두 악씨가 패소하게 된다.

 

순응성의(順應聖意) 안정반전(案情反轉)

 

청나라 건륭5년(1740), 이 사건은 중대한 전기를 맞이한다. 당시 악비의 후손 악사선(岳思先)이 재차 소송을 제기한다. 이근운(李根雲, 저는 仙蟠, 趙州사람)은 광요구남도(廣饒九南道) 겸 관구강초관(管九江鈔關)으로써 구강지부 시정한(施廷翰, 施琅의 후손, 晋江사람), 덕화지현(德化知縣) 경사의(景師毅, 安邑사람)와 함께 자세히 사건기록을 검토한다. 그리고 진씨의 주장을 하나하나 반박한다. 첫째, 홍치9년(1496) 지부 동조(童潮, 자는 信之, 慈溪사람)가 편찬한 <구강부지>를 찾아내는데, 거기에는 명확하게 "악비처의 묘는 백향향 태양산에 있다. 그 장소는 환봉면일하다. 그래서 그곳에 매장했다" 동조의 부지는 하비, 육몽룡의 부지보다 빠른데, 직접적으로 소위 악비모친의 묘에 부장했다는 주장을 부정한다. 지현 경사의는 이에 의문을 제기했다. 가정은 홍치로부터 그리 시간이 많이 흐르지 않았는데, 왜 하비의 부지에는 이전의 동조의 부지를 근거로 하지 않고(육몽룡의 부지는 그저 하비의 부지를 그대로 쓴 것이라고 봐야 한다). 악비부인의 묘는 악비모친의 묘에 부장되어 있다고 날조하였는지, 거기에 분명히 무슨 내막이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렇다면, 진씨집안 사람들이 직접 하비의 부지편찬에 참여하지는 않았을까? 하비가 편찬한 <구강부지>를 살펴보니, 편찬에 참여한 사람의 이름을 열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에 총편집인 이신(李汛, 자는 彦夫, 祁門사람)이 쓴 <후기>에서 당시 편찬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는 거인(擧人) 유방걸(柳邦傑), 진수인(陳守仁), 하관(何貫), 진필승(陳必昇), 진수신(陳守信)등이 있었다. 진애수의 두 아들인 진수인, 진수신이 나란히 거기에 참여한 것이다. 고의로 부지를 고쳤을 가능성이 크다. 가정원년 진수인, 진수의는 거인이 되고, 가정4년 진수신이 거인이 된다. 형제3명이 모두 거인이 된 것이다. 이때 진씨집안은 그 일대에서 잘나가는 집안이었다. 그후 진수인의 관직은 사현지현에 이르고, 진수의는 가흥부통판을 거쳐 금화동지가 된다. 부친 진사호(陳仕滸, 호는 崖叟)는 차남 진수의로 인하여 승덕랑, 가흥부통판에 추증된다. 그래서 지부 시정한은 직접적으로 의심했다. 진씨집안은 '일찌감치 묘를 차지할 생각'을 하고 구강부지의 편찬에 참여할 때 미리 고쳐놓은 것이다. "구강부지는 가정6년이고, 매장은 가정10년이다." 진씨집안이 태양산을 차지하기 위해 이부인의 묘를 없앤 것이니, 충효의 마음이 전혀 없고, 이는 양심을 저버린 일이다. 비록 진씨집안의 매장이 풍수를 위한 것이나, 몇대가 흐른 후 적손이 끊겼으니, 지리(地理)가 천리(天理)를 이길 수 없는 것이다. 둘째, 악비모친의 묘는 지금까지 건재하다. 만일 악비부인의 묘를 이곳에 부장하였다면, 왜 숭정때 아무런 형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단 말인가? 셋째, 진씨후예인 진천이(陳天彛)는 이 산의 이름은 책령산(柵嶺山)이고 태양산이 아니고, 태양산은 강의 동쪽에 있다고 했다(기실 책령산은 태양산의 서북에 있다. 지금도 산아래에 있는 마을의 이름은 책령요(柵嶺凹)이다). 경사의는 현지조사후 강의 동쪽에 있는 산은 남쪽에서 북향이어서, 태양산의 '환봉면일'이라는 뜻과 맞이 않는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진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진씨후예가 태양산을 가리켜 책령산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바로 그들은 자신의 주장에 자신이 없어하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넷째, 진씨는 또한 악비모친의 묘비를 베껴와서 악비묘에서 4리쯤 떨어진 곳에 장군와(將軍洼)라는 곳이 있는데, 토분(土墳)이 이미 평탄해졌는데, 현재의 사람들은 <구강부지>에 악부인이 악비모친묘에 부장되어 있다고 하였으므로 이 장군와가 바로 악부인의 묘가 아닌가 추측한다고 했다. 경사의는 그러나 이건 앞뒤가 모순된다고 보았다. 또한 가정연간에 새로 쓴 비문이르모 고의로 내용을 섞어넣은 혐의가 있다고 보았다. 진씨일가는 <구강부지>를 쓰는데 참여하였으므로, 악비모친묘를 중수하는데도 참여했을 것이고, 가정시기의 비문은 오히려 진씨들이 고의로 이를 숨기려한 혐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외에 또 하나의 역사적 요소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때는 건륭제가 재위하고 있을 때이다. 건륭제는 악비를 존경했다. 등극하기 전에 이미 <악무목론>을 써서 악비는 '문무겸비(文武兼備, 인지병시(仁智幷施), 정충무이(精忠無二)"하다고 극찬한다. 고대의 그 어느 명장도 그에 비견할 수 없다고 했다. "임금이 있는 것만 알았지, 자신은 몰랐다. 임금의 명이 있는 것만 알았지 자신의 목숨은 아끼지 않았다." 그는 충효인용의 화신이다. 구강분순도 이근운은 판결문에서 직접 건륭제가 악비를 칭찬한 문구를 인용한다. "공의 정성은 비록 진회의 손에 죽임을 당했으나, 천하의 후세인들이 앙망하니 실로 해와 달과 빛을 다툴만하다." 그리고 악비의 일가는 천고의 충열이며, 사후에 묻힐 땅조차 보존하지 못한다면, 천하의 인인지사들이 통실질수할 일이 아닌가.

 

그리하여, 광요구남도, 구강부, 덕화현이 3급관리는 황제의 뜻을 받들어 진씨일가가 도장(盜葬)하였다고 결론내린다. "태양산은 여전히 악씨소유이다"라고 판결한다. 동시에 진애수의 묘가 이미 이백년동안 있었던 점을 고려하여, '이장하지 않아도 된다'고 결정한다. 그러나, 악비부인 이씨의 묘는 일찌감치 사라졌다. 흔적도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할 수 없이, 진애수의 묘에서 위로 삼장이내에 다시 신단을 쌓고 묘비를 세우게 한다. 그렇게 하여 악씨일가의 충혼이 의지할 곳을 갖게 해준다. 이후 악, 진 두 집안은 더 이상 이곳에 묘를 만들 수 없고, 수목을 함부로 자르지도 못하게 한다. 그리고, 곁에는 "성서비(聲敍碑)"를 세워서, 도, 부, 현의 3급관리가 판결한 상세한 연유를 기록하여 후손들이 볼 수 있게 했고, 다시는 판결을 뒤집지 못하게 한다. 

 

건륭5년의 판결은 악부인의 '충혼도 의탁할 곳이 생기고' 진애수의 묘도 오래 되었다는 이유로 이장하지 않아도 되니, 겉으로 보기에는 악씨, 진씨 쌍방을 완전히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판결은 겉으로 보기에는 상세하고 이치에 맞지만, 모두 일련의 추측을 기초로 작성되었다. 견실한 근거는 없었다. 진씨집안은 비록 조상묘를 이전하지 않아도 되긴 했지만, 산을 잃었다. 그리고 충열의 묘를 훼손하고, 악비부인의 묘를 훔쳤다는 악명을 얻었다. 이는 당연히 엄청난 치욕이다. "성서비"를 세웠다는 것은 진씨조상들을 영원히 치욕의 기둥에 묶어두는 셈이다. 

 

여기서 알아야 할 점은 강서진씨일가는 대대로 명문집안이다. 진애수에게는 11명이 아들이 있었는데, 각각 진수인, 진수의, 진수례, 진수신, 진수우, 진수사, 진수지, 진수념, 진수성, 진수구, 진수심이다. 인의예지신에서 오직 지(智)만 빼놓았다. 이는 확실히 자손들이 유가의 사상윤리 속에서 살아가기를 바랐던 것이다. 도덕에 대한 추구가 지혜에 대한 추구보다 훨씬 컸다. 나중의 부지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차남 진수의의 관직은 금화동지에 올라, 융경2년(1568년) 향현사(鄕賢祠)에 들어간다. 향현사에 들어간다는 것은 중국고대사회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다. 품덕이 고상하고, 공적이 탁월해야 한다. 지방에서 존중을 받는 사람만이 영원히 제사를 누릴 수 있고, 만대에 이름을 남길 수 있다. 그러므로, 사후에 향현사에 들어간다는 것은 고대의 정인군자들이 시종 추구하는 지상의 영예이다. 조정은 향현사에 입사되는 자격을 엄격히 규정한다. 덕행이 탁월하지 않으면 입사될 수 없다. 향현사에 들어가려면 지방의 명인들이 연명으로 추천해야 하고, 다시 현에서 부, 부에서 성으로 각급 관리가 층층히 심사한다. 진수의가 사후에 향현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을 보면 그의 품행은 분명히 지방과 관청에서 모두 인정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사의, 시정한, 이근운은 하비의 부지와 동조의 부지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가지고, 진씨형제가 고의로 <부지>를 고쳐서 '도장'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보았는데, 사람들이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대대로 이곳에 살고 있는 진씨후예들은 소송으로 다투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다만 사건이 철저히 반전되었고, 게다가 건륭제의 뜻에 따라 결정된 것이므로, 청나라때는 고칠 수가 없었다. 가정, 도광, 함풍, 동치, 광서때도 진씨집안은 계속하여 소송을 제기했지만, 연전연패할 수밖에 없었다.

 

청나라가 멸망하고, 민국이 성립되었다. 진씨후예들은 다시 희망을 가진다. 민국15년(1926), 다시 소송을 제기한다. 남경고등법원까지 올라갔으나, 법원은 여전히 진씨집안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진씨일가가 소송을 남용하고, 이치에 맞지 않게 억지를 부린다고 보아 소송을 제기한 진씨를 감옥에 가두기까지 한다. 결국 한 노인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감옥안에서 사망한다.

 

백년소송 원만해결

 

신중국이 건립된 후, 특히 1959년, 강서성정부는 악비부인이씨묘를 문화재보호단위로 지정한다. 그리하여 국가재산이 된다. 진씨집안은 더 이상 다툴 수가 없게 된다. 할 수 없이 소송은 그만둔다. 다만 1990년대, 진씨들은 조상묘를 보수하여, 봉토를 높인다. 그리하여 악부인묘를 가려버린다. 악씨후손들은 다시 구강현정부에 고발한다. "문화재보호단위의 60미터이내에 장애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규정을 들어 반드시 진애수의 묘는 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정부는 검토를 거쳐 악비는 중화민족의 영웅이고, 악부인의 묘가 구강이 있는 것은 구강의 자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 유적을 적극 보호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업무팀을 구성하여, 진씨후손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진애수의 묘를 이장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진씨일가가 쉽게 설득당할 리 없다. 업무팀이 사자진 진가요촌에 갔을 떄 진씨집안은 난리가 난다. 조상이 수백년을 싸워왔는데, 심지어 목숨까지 잃었는데, 진씨자손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업무팀은 여러번 방문하여 인내심을 가지고 민족대의와 지방영예를 들어 설득한다. 동시에 악씨후손들도 나서서 이장비용을 모두 부담하겠다고 말한다. 2000년, 진씨후예는 마침내 진애수의 묘를 이장하는데 동의한다. 2001년 청명절, 악씨, 진씨후손은 함께 태양산에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낸다. 숭정2년부터 시작되어 370년을 끌어온 송사가 이렇게 해결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