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삼편(老三編) 1: "위인민복무(爲人民服務)", 장사덕(張思德)은 어떻게 죽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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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

2020. 10. 7.

글: 대기원(大紀元)

 

베이징 중남해의 남문은 신화문(新華門)이라고 불린다. 십리 장안가를 동서로 오가는 차량과 행인들은 모두 총을 들고 문앞을 지키는 위병을 볼 수 있고, 또한 문안의 홍색 영배(影背)와 그 위에 5자의 금칠이 된 "위인민복무(爲人民服務)"를 볼 수 있다. 이 다섯 글자는 모택동이 연안에 칩거하고 있을 때, 사고로 사망한 경위병 장사덕을 위해 쓴 추도문의 제목이다. 1949년 정권을 차지한 후, 이 5글자는 중공의 통치지위를 공고히 하는데 사용되었고, 중국인민을 70년간 우롱해왔다.

 

황탄주의(荒誕主義) 대가로 불리는 대륙작가 얜롄커(閻連科)가 쓴 소설이 있는데, 제목이 <위인민복무>이다. 내용은 모주석이 같은 제목의 연설에서 한 "우리는 인민을 위하여 복무한다"는 말을 풍자한 것이다. 어떻게 풍자했는지는 결말에 다시 애기하겠다. 비극적인 것은 일대 일대의 중국인이 부득이 중공의 세뇌를 받아야 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모택동의 <위인민복무>가 초등학교 교과서에 들어가고, 수십년을 하루같이 중국인이 어릴 때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기망해왔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얘기할 것은 '문혁' 10년호겁에서 모택동의 <위인민복무>는 '노삼편'중 으뜸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나머지 두 편은 <기념백구은(記念白求恩)>과 <우공이산(愚公移山)>이다. 그중 중국인민들이 외워야 했던 문구는 바로 이것이다: "인민의 이익을 위하여 죽는 것은 태산보다 무겁다. 파시스트를 위하여 일하는 것은 인민을 착취하고 인민을 압박하는 사람들를 위하여 죽는 것이니, 홍모(鴻毛)보다도 가볍다. 장사덕은 인민의 이익을 위하여 죽었으니, 그의 죽음은 태산보다도 무겁다."

 

이 중공의 눈에 태산보다 무겁게 죽었다는 장사덕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그는 인민을 위하여 어떤 대단한 일을 했을까?

 

우리는 함께 공산당이 만든 이 거짓 이야기를 살펴보기로 하자.

 

공식자료에 따르면, 장사덕은 1915년 사천성 의롱현 한가만에서 태어났다. 전농(佃農)출신이다. 1933년 홍군에 참가했고, 나중에 중공청년단에 가입한다. 국군의 포위공격후 북으로 도망치는 '장정'에도 참가했었다. 1935년, 잔여홍군이 섬북에 도착한 후, 장사덕은 군위경위영에서 통신반장을 맡는다. 1937년에 중공에 가입한다. 1942년 중앙경비단에 들어간다. 1943년 모택동의 경위원이 된다. 1944년 '대생산운동(大生産運動)'에 참가하여, 안새현(安塞縣)에서 목탄(木炭)을 만든다. 9월 5일 요동(窯洞)이 무너지면서 장사덕은 요동에서 깔려죽는다.

 

장사덕의 이력만 보면 무슨 대단한 일을 한 것같지는 않다. 그리고 위병 1명이 죽은 것이니 무슨 추도회를 거창하게 열만한 일은 아닌 것같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중공중앙 직속기관은 장사덕을 위하여 추도회를 열어주었을 뿐아니라, 모투적이 직접 추도말을 한다. 더욱 의문이 드는 점은 그후에는 더 이상 이 정도로 거창하게 전사를 추도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비록 모주석이 당당하게 "이후 누가 죽든지 간에 그것이 취사병이건, 전사이건, 그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기만 하면 우리는 그를 위해 추도회를 열어줄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상식에 반하는 일이 벌어지면 뭔가 있다." 중공의 등급이 삼엄한 법도중에서 주석이 하급전사에게 경례하는 일은 말도 되지 않을 뿐아니라,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런 상식에 반하는 일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장사덕의 사인(死因)이다. 대륙학자 장요걸(張耀杰)의 연구에 따르면, 장사덕은 목탄을 굽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아편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모택동과 중공이 감추려는 원인일 것이다. 

 

사료에 따르면, 중공은 연안의 남니만(南泥灣)에서 '대생산운동'을 전개했다고 선전해 왔다. 기실 양식을 심은 것은 일부의 땅이고, 대부분의 땅에는 아편을 심었다. 장요걸에 따르면, 그는 직접 남니만의 현지를 살펴보았는데, "현지정부관리의 말에 따르면, 남니만은 원래 연안지역에서 유일한 원시삼림이었고, 왕진(王震)의 359펴단이 아주 야만적이고 낙후한 방식으로 벌채한 후에 대량의 아편을 심었다. 장사덕은 아편을 굽는 과정에서 요동의 안에 산채로 갇혀서 죽었다."

 

어떤 사람은 장사덕이 목탄을 지고 있는 사진을 들어 이런 주장에 반박한다. 기실 장사덕이 목탄을 등에 지고 있는 사진만으로 그가 아편을 제조하는 특수임무를 수행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모주석 자신도 추도글에서 목탄을 굽는데 대하여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은 모두 장사덕이 아편을 제조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주석도 은폐할 수가 없었고, 그저 이런 저런 말을 하면서 자신이 직접 추도하는 장사덕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말하지도 않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아편을 어떻게 만드는지 모른다. 아편은 통상 생아편과 숙아편으로 나뉜다. 숙아편은 바로 생아편을 끓이고 발효시킨 후에 막대기모양, 벽돌모양 혹은 덩어리모양으로 만든 것이다. 통상적으로 얇은 베나 비닐로 포장한다. 아편중독자가 흡입할 때, 숙아편은 강렬한 향을 내뿜는다. 최근 들어 어떤 매체는 누군가 스스로 아편을 짐어서 만들었다는 뉴스도 내보냈다. 그래서 장사덕이 요동에서 아편을 제조한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장요걸은 또한 이렇게 토로한다. 중공당사를 연구한 친구는 이런 말을 해주었다. 이 일은 중공내부문헌에도 기록이 남아 있다. 예를 들어, 1994년 11월에 출판된 <중공중앙서북국문건회집>의 <남니만조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만, 중공은 중국인민을 반세기동안 속여왔다. 남니만에 심은 양귀비의 꽃향기를 여가수는 '꽃바구니의 꽃향기"라고 불렀다. 아편을 심은 것을 농사짓고 소양을 키운 것으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아편을 만들던 장사덕은 목탄을 만들던 것으로 바꾸어 버렸다. 

 

공산군이 연안에서 아편을 심어 팔아서 돈을 벌었다는 역사는 소련 타스통신기자, 모스크바주연안특파원 페테르 블라디미로프의 <연안일기>, 진영발(陳永發) 교수의 <홍태양하의 앵속화 - 아편무역과 연안모델>, 미국학자 해리슨 솔츠베리의 <장정 - 사상유례없는 이야기>에 모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페테르의 <연안일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도처에 불법적인 아편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차릉, 멀리 후방에 있는 120사단사령부에서 방을 하나 내서 원료를 가공해, 아편으로 만든 후 이곳에서 시장으로 보낸다..." "정치국은 이미 임필시(任弼時)를 아편문제전문위원으로 임명했다..."

 

이에 대하여 페테르는 모택동에게 묻는다: "특구의 농민은 왕왕 아편불법거래로 처벌을 받았는데, 현재 심지어 공산당이 영도하는 군대와 기관에서도 공개적으로 아편을 생산한다.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모택동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곁에 있던 등발(鄧發)이 대신 대답한다: "이전에 특구는 소금과 소다를 국통구로 보냈었다. 우리는 트럭에 소금을 가득 실어서 보냈고, 가져온 것은 겨우 돈 한자루였다. 현재 우리가 아편 한자루를 보내면, 트럭 한 가득 돈을 받아온다. 우리는 이 돈으로 국민당에게 무기를 사고, 다시 이 무기로 그들을 이길 것이다..."

 

일부 학자는 1945년 중공의 기로예변구(冀魯豫邊區) 제6전구가 관할하는 회태서현(淮太西縣)의 문건 <회태서현연토세(煙土稅)징수및관리잠행방법>에 따르면, 아편의 합법적인 경영을 허가하고, 아편연토세를 거두었다. 국민당은 아편의 재배와 거래를 금지했다. 그러나 중공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민중을 해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입으로는 '인민을 위하여 복무한다'고 하면서.

 

1936년 12월 장학량, 양호성이 서안사변을 일으킨다. 중공편에 서 있던 섬서수정공서 주감숙행서주임 등보산(鄧寶珊)는 장학량, 양호성을 지지했을 뿐아니라, 1937년 일본이 전면적으로 중국을 침략할 때, 국민정부에 의해 21군 군장에 인명된 후, 유림(楡林)에 주둔하는 틈을 타서 여러번 연안으로 가서 모택동, 주덕등과 만난다. 인터넷에 이런 얘기가 있다. 등보산은 아편을 피웠을 뿐아니라, 아편을 심었다. 연안과 서로 편의를 봐주었다. 연안에서 아편을 심은 후 국통구로 판매하도록 도왔다. 이는 중공에게 망와의 기쁨이었다. 모택동은 심지어 등보산을 '덕이 커서 잊을 수가 없다'고까지 감사한다. 등보산의 직속상사인 국민정부의 장개석은 전혀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경위단은 안전을 책임지는데 왜 아편을 만들겠느냐고. 잘 물었다. 어떻게 말하든 중국인민은 아편전쟁의 교훈을 알고 있다. 그래서 아편을 파는 것은 아무리 돈을 벌더라도 욕을 먹는 일이다. 중공도 자연히 이를 잘 안다. 그래서 숨어서 할 수밖에 없다. 모든 참여자들은 반드시 당이 맏을만한 사람들이어야 한다. 기밀도 유지하면서, 자신이 따로 돈을 챙기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당성이 강하고' '기율성이 강하여야' 한다. 중앙경비단이 최적의 후보인 것이다.

 

장사덕 말고, 경위단의 많은 장병이 돌아가며 아편을 만드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장사덕은 인민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중공자신의 이익을 도모한 것이다.

 

한탄스러운 일은 장사덕이 아편제조를 하다가 목숨을 잃었는데도, 그는 영웅이 되어 인민들이 수십년이나 진지하게 그의 사적을 배워야 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위인민복무>라는 같은 이름으로 불리지만,  얜롄커의 소설은 어떻게 모택동을 풍자했을까? 그가 쓴 것은 사단장의 집안에서 남자보모역할을 하고 있는 당번병인 오대왕(吳大旺)이 성에 굶주린 사단장부인 유연발(劉蓮發)과 사통하는 이야기이다. 현재의 말로 하자면, 이런 주제는 정치적으로 옳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이 소설은 <화성(花城)>에 발표되자마자 중앙선전부에 의해 금지당한다. 발행, 전재, 평론, 발췌, 보도가 금지되고, 기발행된 잡지는 회수했다. 죄명은 공산군과 모주석의 '위인민복무'의 뜻을 훼손했다는 것이다. 다만 아쉽게도, 결과는 거꾸로 이 소설의 명성이 크게 올라가게 된다.

 

노삼편 <위인민복무>가 탄생하고 장사덕이 묻혀 있는 곳은 원래 백성들이 "란니만(爛泥灣)"이라고 불렸다.(란은 엉망진창이라는 뜻임). 나중에 뜻이 좋지 않다고 하여 "남니만(南泥灣, 중국어로는 란니만과 발음이 같다)"으로 고쳤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