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무제는 왜 유불릉(劉弗陵)을 후계자로 삼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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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한무제)

2020. 10. 8.

글: 구어정(九魚亭)

 

유불릉의 생모는 조첩여(趙婕妤)이다. 구익부인(鉤弋夫人)이라고도 불리고, 권부인(拳夫人)이라고도 불린다. 한번은 한무제가 사냥을 갔는데, 하간국(河澗國)을 지나게 되었다. 그때 한무제의 곁에 있던 방사가 현지에 기녀자(奇女子)가 있다고 말한다. 한무제는 미신을 믿어, 사람을 보내어 찾게 했더니, 금방 한 여자를 찾아낸다.

 

그 여자가 바로 구익부인이다. 여자는 아주 기괴했다. 두 손을 꽉 쥐고 있는데, 곁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펴고자 해도 펴지지 않았다. 한무제는 호기심이 발작하여, 직접 말에서 내려, 그 여자의 주먹을 폈다. 이 이야기는 마치 <대화서유>의 자하선자가 자청보검을 뽑는 사람은 하늘이 골라준 사람이라 생각하는데, 마침 지존보가 자청보검을 뽑아서, 그 후에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가 펼쳐지게 되는 것과 같다.

 

한무제는 한편으로 오히김에서 이 기녀자를 후궁으로 들인다. 그리고 이 여자는 용모가 아주 출중했다. 그래서 한무제가 그녀를 총애하게 된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권부인은 입궁한 후 첩여가 된다. 구익궁에 거주한다. 크게 총애를 받았고, 태시3년 소제(昭帝)를 낳는데, 구익자(鉤弋子)라 한다. 임신 14개월만에 태어났다. 황상이 말하기를 '듣기로 요임금이 14개월만에 태어났다고 했는데, 구익도 그러하구나" 그리고 그가 태어난 문을 요모문(堯母門)이라 부르게 한다.

 

유불릉이 한무제의 친아들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하는 이유중 하나는 바로 구익부인의 임신기간이 너무 길다는 것이다. 14개월이나 된다는 것이다. 정사적인 임신기간이라면 10개월이다. 그러나 회임기간이 길다고 하여 무엇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개인의 체질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기 대문이다.

 

태시3년(기원전94년)에 한무제는 개략 63세이다. 이 나이가 되면 신체의 모든 방면이 약해진다. 성적인 생육능력을 포함해서. 다만 그렇다고 하여 이때의 한무제에게 생육능력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것만으로 유불릉이 한무제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하물며 한무제는 정명하다. 어찌 쉽게 남에게 속아넘어가겠는가. 만일 약간의 의심만 있었다면 구익부인이 살아남지 못했을 뿐아니라, 유불릉도 비명에 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무제가 유불릉을 후계자로 세운 것은 무슨 이유때문이었을까?

 

첫째, 한무제는 의심병이 심했다.

 

무릇 웅주(雄主)도 말련이 되면 여러 가지 문제가 드러나게 된다. 한편으로, 사람은 완벽하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 사람이 늙으면 흐리멍텅해지는 경우가 있다.

 

권력욕이 컸던 한무제도 늙어가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는 말년이 되어 의심병이 심해지고 예민했다. 승상 공손하(公孫賀)는 위황후(衛皇后)의 언니인 위군유(衛君孺)와 결혼하면서 위씨집안의 힘을 빌어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그의 불초한 아들로 인하여 결국 부자 두 사람이 피살되게 된다.

 

공손하의 아들 공손경성(公孫敬聲)은 고발을 당해 감옥에 갇힌다. 아들을 구하기 위하여, 공손하는 공을 세워 죄인인 아들을 구할 생각에 스스로 나서서 도적 주안세(朱安世)를 체포하는 임무를 맡겠다고 나선다. 비록 주안세를 성공적으로 붙잡았지만, 주안세는 옥중에서 공손하를 고발한다. 공손경성이 양석공주(陽石公主)와 사통했을 뿐아니라, 공손하는 나무인형을 매장하여 황제를 저주하기도 했다고 말한 것이다.

 

한무제는 그 소식을 듣고 대노하여,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바로 공손하 부자를 참살해 버린다. 여러 문제를 처리할 때, 한무제는 자주 기분내키는대로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태자 유거(劉據)의 반란문제를 처리하는데 있어서도, 유거는 강충(江充)에게 모함당해서 어쩔 수 없이 병력을 일으켜 강충을 주살하고 도망치게 된다. 이때도 한무제는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사람을 보내어 유거를 붙잡아 오게 했고, 결국 유거는 자살한다. 

 

기원전99년 이릉(李陵)은 5천보병을 이끌고 수만의 흉노기병을 맞아 싸운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투항했다. 도망쳐온 병사는 겨우 4백명이었다. 그러나, 이릉이 부대를 이끌고 천리를 종횡하며 5천의 보병으로 근 2만의 흉노기병을 죽였으니. 그 전적은 아주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한무제는 자세히 조사하지도 않고, 직접 이릉의 일가족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그리하여 이릉은 어쩔 수 없이 이국타향에서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한무제가 웅재대략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그는 의심이 아주 많은 황제였다. 상대방에게 약간만 의심스러운 행위가 발견되면, 상대방의 변명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칼을 들고 모조리 죽여버린다. 이는 한무제의 일처리에서의 하나의 원칙이다. 예를 들어, 구익부인이 정말 약간만이라도 황제를 배반할 생각을 했다면 그녀는 자식을 낳을 때까지 살아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혹시 자식을 낳았다고 하더라도 역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구익부인의 죽음은 그녀가 무슨 잘못을 범해서가 아니다. 한무제의 병이 심해졌을 때, 유불릉을 태자로 세운다. 그러나 한무제는 아들은 어리고 모친은 젊다는 것을 우려한다. 일단 여자가 정권을 장악하면, 한왕조에 위협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류의 일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한무제는 직접 구익부인을 죽이게 된다.

 

후계자를 결정하는 문제에서 한무제는 전혀 흐리멍텅하지 않았다. 구익부인을 죽였을 뿐아니라, 몇명의 고명대신까지 둔다. 예를 들어, 곽광, 상홍양, 김일제등이다. 이를 통해 정권이 순조롭게 과도기를 넘기도록 했다.

 

둘째, 다른 황자는 여러가지 문제로 대통을 이을 수가 없었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한무제 말기, 여태자(戾太子, 유거를 가리킴)는 패하고, 연왕 단(旦), 광릉왕 서(胥)는 행위가 교만했다. 후원2년 이월 황상은 병이 들었고, 소제를 태자로 세우니, 나이 8살이었다."

 

적장자인 위태자 유거는 무고지화(巫蠱之禍)로 거병하여 강충을 주살한 후, 자신은 장안을 도망친다. 그후 자살로 생을 마친다. 

 

차남 유굉(劉閎)은 기원전 110년 이미 사망했다. 자연히 태자의 자리와는 인연이 없었다.

 

삼남 유단(劉旦)는 원래 대통을 이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유거가 죽은 후, 그는 직접 나서서 모수자천(毛遂自薦)하여, 자신이 병력을 이끌고 장안을 숙위(宿衛)하겠다고 한다. 유단은 너무 조급했다. 그리하여 한무제의 반감을 산다. 그리하여 유단은 태자의 자리를 얻지 못했을 뿐아니라, 일부 봉지까지도 삭탈당하게 된다.

 

사남 유서(劉胥)는 신체가 건장하여, 맹수와도 싸울 수 있었다. 그는 향락을 즐기고, 오만했다. 한무제는 심사숙고끝에 그를 배제한다.

 

오남은 유박(劉髆)이다.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李廣利)는 승상 유굴리(劉屈㲠)와 결탁하여, 유박을 황제로 올릴 준비를 한다. 이 일을 나중에 한무제가 알게 되면서 유굴리는 피살당하고, 이광리는 흉노로 도망친다. 유박은 모반사건에 연루되다보니 태자의 자리와 인연이 없게 된다. 

 

이를 휼방상쟁(鷸蚌相爭) 어옹득리(漁翁得利)라 할 수 있다. 나이 어린 유불릉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결국 태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를 보면, 노력한다고 하여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운명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다.

 

셋째, 한무제는 안목이 있었다. 유불릉은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사료 기재에 따르면, "구익자(유불릉)는 나이 5,6세때, 몸집이 크고 많이 알았다. 황상은 항상 '나를 닯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남다르게 태어나서 더욱 그를 아꼈고, 그를 태자로 세우고자 했다."

 

고대인들은 미신을 믿었다. 그리고 요임금도 14개월의 임신기간을 거쳐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한무제는 병이 중해졌을 때, 유불릉을 태자로 세운다. 유불릉은 나이 겨우 8살때 즉위한다. 그래서 그를 보좌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런데, 고명대신중에서 곽광과 상홍양, 상관걸간에 갈등이 생기고, 기원전 80년, 상홍양, 상관걸이 반란을 일으킨다.

 

유불릉은 남이 하라고 해서 그대로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참언을 알아차렸고, 먼저 상홍양, 상관걸을 참한다. 그리하여 큰 화가 발생하지 않을 수 있었다. 비록 유불릉의 집권기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그는 곽광을 중용하여 개혁을 진행하였다. 이를 보면, 한무제가 유불릉을 고른 것은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