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길 중의 청해로(靑海路): 왜 힘들게 고원길을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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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대외관계

2020. 10. 11.

글: 고산둔정위(靠山屯政委)

 

비단길은 유라시아대륙을 연결시키는 주간도(主幹道)이다. 또한 중서방 경제와 문화교류의 대통도(大通道)이다. 다만 비단길은 하나가 아니었고, 3개가 있었다. 각각 주간도, 초원도(草原道)와 청해도이다. 서로 비교하자면, 청해도는 고원을 지나 가장 힘들었다. 그런데, 왜 이런 비단길을 열어야 했을까?

 

1. 청해도

중국에서 서역으로 가는 도로중 사람들이 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은 두 개의 길이다. 하나는 장안에서 서북으로 출발하여, 육반산 북부를 지나, 고원, 정변을 거쳐, 하서주랑으로 신강에 들어간 후, 다시 타림분지의 가로 파미르고원을 넘어 서역으로 가는 것이다. 이 길이 주간도이다. 또 다른 길은 중원지구에서 직접 북상하여, 음산산맥을 지나 거연해(居延海)로 가고 그후에 천산남북록을 지나 서역에 도달하는 것이다.

 

나중에 고고학자들은 청해지구의 또 다른 비단길을 찾아낸다. 최근 수십년동안, 고고학자들은 여러차례에 걸쳐 청해지구에서 서아시아의 동전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1956년 시닝시(西寧市) 황묘가(隍廟街)에서 출토된 사산조 페르시아의 은화가 있고, 1999년 청해 우란현(烏蘭縣)에서 출토된 로마 유스티니아누스1세의 금화가 출토되었다. 동시에 여러 서방에서 온 진귀한 물건들도 있었다. 이들 금화가 출토된 지방은 모두 무역의 대도시 혹은 주요 교통간선도로로 볼 수 있다. 

 

그리하여, 학자들은 추가로 탐색을 시작한다. 그들은 <사기>, <한서>에서 "강중도(羌中道)"라는 말을 찾아낸다; 위진남북조, 수당시기의 사서에서는 '토곡혼도(吐谷渾道)"라는 말이 나온다. 양송시기에는 "회흘도(回紇道)", "청당도(靑唐道)"라는 말이 나온다. 이렇게 하여 이 길의 신비로운 면사가 걷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청해도"이다.

 

청해도는 '시닝'을 중심으로 동으로 하황곡지(河湟谷地)를 지나, 난주(蘭州)로 가서 비단길의 주간도와 만난다. 남부노선은 지금의 감남(깐수 남부)과 연결되어 오늘의 천북(사천 북부)로 통한다(이 선은 일반적으로 청해도의 노선에 진입한다), 북으로는 기련산록에서 직접 장액(張掖)에 통한다; 서로는 시달목(柴達木)분지와 연결돠고, 그후 덕령합(德令哈)을 지나, 마지막으로 신장에서 비단길의 주간도와 만난다.

2. 토곡혼과 토곡혼도

 

청해도의 형성은 두 단계가 있다. 제1단계는 대체로 4000년전의 청해 사전(史前)문화, 즉 제가채도문화(齊家彩陶文化)대부터 서한(西漢)에 이르기까지로 이 시기에 이 길은 이미 형성된다. 그리고 동서교통에서 일정한 기능을 담당했으나 아직은 동서상업무역주요도로가 되지는 못했다.

 

청해도가 주목을 받게 된 것은 한무제때부터이다. 장건(張騫)의 제1차서역행때, 서한경외의 길에 대해 이해가 깊지 못했고, 단지 서역으로 가려면 흉토가 지배하는 하서주랑을 통하는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흉노에 포로로 잡히고, 도망친 후에 천신만고끝에 서역에 도착한다. 그는 현지인들에게서 또 다른 길인 '강중도'가 있다는 말을 듣는다. 그 길은 흉노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청해도이다. 그는 귀국시에는 이 청해도를 이용한다.

 

다만, 당시의 강족(羌族)은 흉노와 관계가 밀접했다. 그래서 장건은 다시 붙잡혀 흉노로 끌려간다. 장건은 흉노의 내란을 틈타 도망쳐서 장안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한무제에게 그가 지나온 몇 개의 길을 얘기한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이 길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한나라때는 흉노를 격파한 후, 하서주랑으로 통하는 길이 순조로워지면서, 서한의 사람들은 청해로를 중시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호강교위(護羌校尉)를 설치하면서, 이 길은 크게 건설되고 발전된다.

 

청해도가 진정으로 흥성하게 되는 것은 위진남북조시기이다. 당시 중원지구는 혼란의 도가니였다. 특히 북방이 그러했다. 각 민족이 연이어 정권을 수립하고, 피차간에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남조정권에 있어서 비단길은 기본적으로 적국의 손에 장악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때 청해지구에 하나의 정권이 들어선다. 바로 토곡혼이다.

 

토곡혼은 동진때 건립된다. 영토는 대체로 지금의 청해성이다. 당시 국력이 비교적 약소해서, 토곡혼은 중립을 취하며, 중상정책을 쓴다. 그들은 남조의 각정권에 조공을 바치고, 다시 북조의 각국과도 양호한 관계를 유지한다. 그리고 교통이 우세를 이용하여, 대형국제거래를 통해 이익을 얻는다. 그리하여 위진남북조 삼백년간, 청해도는 오히려 주간도보다 흥성하고, 비단길의 주요 무역중개로가 된다.

 

3. 구실루오(唃厮啰, Gusiluo)와 당번도(唐蕃道)

 

수당제국이 중원을 통일한 후, 비단길의 주간도는 다시 순조롭게 통한다. 토곡혼도 토번제국에 멸망되면서, 청장고원은 토번의 지배범위내로 들어간다. 그리하여 비단길로 서역을 연결하는 기능은 점점 소멸한다. 이 시기에, 청해도의 기능은 주로 한장(漢藏)교류로, 중원이 인도, 네팔등지와 연결하는 교통로로서의 역할을 했다.

 

당말 번진할거때, 당항족이 점점 서북에서 장대해진다. 북송 인종때, 당항족의 우두머리 이원호가 칭제하고 서하를 건립한다. 하서주랑은 서하의 지배범위내에 들어간다. 서하는 비록 도로를 막지는 않았지만, 길을 지나는 공사(貢使), 상인에 대한 착취가 아주 가혹했다. 그리고 화물의 10분의 1을 통행료로 거두어 갔다. 그리고 거두어가는 것은 가장 귀중한 물품이었다. 상인들은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청해도가 다시 중시된다.

 

바로 이 때, 청해지구는 소정권인 구실루오가 점거하게 된다. 구실루오는 토곡혼과 마찬가지로 중상정책을 썼고, 중개무역을 통해 이익을 얻었다.

 

구실루오는 여러 역참을 설치해서 지나가는 사절단과 상인단을 접대했다. 동시에 국민들에게 지나가는 상인단과 평화롭게 지내도록 요구했고, 그들에게 화잔(貨棧)을 개설하도록 격려하고 지원했다. 그리고 숙식가격을 지나치게 많이 받지 않도록 요구했다. 동시에 대량화물과 대형상인단이 지나갈 때 국가는 병력을 보내어 보호해주었다. 그들이 순조롭게 북송경내까지 도착할 수 있게 해준다. 동시에 세금비용에서도 우대해주었다. 그리하여 당시의 청당성(靑唐城, 지금의 시닝시)은 중국서부 최대의 무역도시가 된다. 무수한 공사와 상단이 속속 이곳으로 길을 바꾼다.

 

송나라조정이 남하한 후, 육상의 비단길은 기본적으로 단절된다. 남송은 바다에 면해 있다. 육상비단길을 해상비단길로 바꾼다. 이때부터 청해도는 육상비단길의 광환이 점점 퇴색된다. 원,명,청 삼대에 걸쳐, 육상비단길은 빛을 발휘하기는 하지만, 주요왕래객은 이미 상인이 아니라, 종교인이었다.

 

결론

 

청해도는 역사상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중원민족정권이 약소하고 통일왕국을 형성하지 못했을 때, 하서주랑을 강대한 정권이 점령했을 때, 청해도는 편리하고 안전한 상업무역로가 된다. 마침 역사는 이곳에 일부 소정권을 탄생시켰고, 자원이 부족하니, 그들은 무역중개업을 중시한다. 청해도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시닝시, 옛날의 청당성은 크게 발전할 수 있었고, 서부에서의 교통허브가 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