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인방"의 상해잔당에 대한 재판: 마천수(馬天水), 서경현(徐景賢), 왕수진(王秀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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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후)

2020. 10. 11.

글: 왕문정(王文正), 심국범(沈國凡)

 

마천수

 

강청반혁명집단의 상해잔당중 핵심분자로 당시에 이름이 열거된 사람은 모두 사십여명이다. 그중 제1차로 재판을 받게 된 사람은 모두 9명이다. 그들은 전중공상해시위서기, 시혁명위원회부주임 마천수, 서경현, 왕수진(여), 그리고 진아대(陳阿大), 섭창명(葉昌明), 황금해(黃金海), 대립청(戴立淸), 마진룡(馬振龍), 주영가(朱永嘉)이다.

이들은 '문화대혁명'때 상해에서 앞장선 인물들이다. 마천수가 원래 상해시위에서 지도자의 직위에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조반파로 관직에 올랐다.

그런데, 당시 재판후의 판결문에는 오직 8명밖에 없고, 이들 잔당중 우두머리인 마천수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왜그럴까?

 

마천수에 대하여 왜 재판이 진행되지 않았는지를 말하기 전에, 먼저 법원이 설립한 8개의 심판조의 상황을 얘기해보자, 이를 통해서 이 재판이 얼마나 엄격하게 법률에 따라 처리되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서경현, 왕수진은 10년동란기간도안 적극적으로 '사인방'의 반혁명운동에 가담하였고, 상해시의 당정영도권을 탈취하였으므로, 죄행이 엄중하고, 사건이 복잡했다. 전체 상해시와 전국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리하여 <형사소송법> 제16조의 규정에 따라 상해시고급법원을 1심법원으로 하여 재판을 진행한다. 진아대, 섭창명, 황금해, 대립청, 마진룡과 주용가의 6명 피고인은 중급인민법원을 1심법원으로 하여 재판을 진행한다.

 

서경현의 심판조는 책임자가 장증상(張增祥)이다. 장증상은 북경 진성감옥에서 장춘교(張春橋)의 재판에도 참가한다. 그후 1980년 상해로 돌아와서 서경현사건의 재판을 맡는다. 장증상 외에 이해경(李海慶), 이지휘(李志輝), 포여성(包如星)과 왕리(王犁)등이 있다.

왕수진의 심판조는 곽춘화(郭椿和), 범내정(范乃廷), 조여덕(曹餘德)과 장려진(蔣麗珍)등으로 구성되었다. 곽춘화와 장려진은 여자이다. 곽춘화는 나중에 상해시고급법원으로 가서 인사처장이 되고, 장려진은 나중에 재판때 서기원이 된다. 1982년 6월 상해시고급법원 형사심판정에서 왕수진을 재판할 때, 필자는 이미 특별법정에서 상해로 돌아와서, 형사심판정장이 되고 왕수진사건 1심의 재판장이 된다. 심판원은 범내정, 조여덕이고, 인민배심원은 마기(馬驥), 장영문(莊詠文), 오취선(吳翠嬋), 진명산(陳銘珊)이다.

 

마천수에게 의외의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필자의 생가에 분명히 우리 고급인민법원에서 재판을 했을 것이다.

마천수가 재판대상에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그에 대하여 전문적인 심판조도 설립되지 않았다.

당시 강청반혁명집단의 상해에서의 핵심분자는 모두 사십여명이다. 재판을 받고 형을 받은 사람은 삼십여명이다. 앞에 언급한 8명은 제1차로 재판받은 사람들이다. 그후 시중급인민법원은 별도의 재판정을 조직하여 강청반혁명집단의 상해에서의 핵심문자인 시상영(施尙英), 왕지상(王知常), 왕일초(王日初), 소목(蕭木), 요조강(廖祖康), 종정동(鍾定棟), 유설도(遊雪濤), 왕상군(王湘君), 설간청(薛干靑), 서성호(徐成虎), 왕명룡(王明龍), 장국권(張國權), 유화덕(劉和德), 구옥천(邱玉泉), 유호덕(劉浩德), 장진학(張振學), 진감봉(陳敢峰), 이위민(李偉民), 진학능(秦學能), 하운개(夏雲開), 하종가(夏宗珈), 이가진(李家振)과 당행남(唐行南)의 23명이다.

사인방의 상해잔당에 대한 재판은 법률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 이는 민심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다만 마천수에 대하여 재판을 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고 있다.

 

마천수는 이들 상해잔당의 우두머리이다. 그를 심판하지 않으면 인민들이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다만 법률은 엄숙하고 공정해야 한다. 누구에 대하여도 평등하게 취급해야 한다. 우리는 이들에 대한 원한으로 인하여 법률에 위반되는 일을 할 수는 없었다. 법정재판을 거치지 않고는 어떤 죄명도 그에게 뒤집어 씌울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역사의 검증을 견뎌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천수는 바로 이런 상황에 속한다.

나는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이 마천수는 그의 옛전우가 중앙의 모모부문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상해에 연락해서 재판을 받지 않게 된 것이라고. 이것은 완전히 유언비어이다.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당시 전국의 상하는 모두 '사인방'과 그 잔당의 죄행을 성토하고 있었다. 마천수에게 그런 '노전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런 말을 했더라도, 법정은 전혀 그 말을 듣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천수는 무슨 이유로 재판을 받지 않게 된 것일까?

내가 있던 법정에서 아는 바로는 사인방이 분쇄된 다음 날, 마천수는 중앙으로부터 북경에 와서 '회의참석'하라는 통지를 받는다. 그후로 상해에 돌아오지 않는다. '사인방'의 상해에서의 잔당중에서 그 혼자만 북경에서 체포된다. 이는 마천수가 꿈에도 생각지못했던 상화일 것이다.

구금기간중에, 중앙이 파견한 사람이 '사인방'은 분쇄되었다는 소식을 그에게 전했다. 그는 들은 후 얼굴에서 즉시 이상반응이 나타난다. 두 둔은 멍해지고, 거기에 서서 오랫동안 꼼짝하지 않았다. 그후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괴이한 소리를 냈다. 이를 보면 이 소식이 그의 정신세계를 완전히 붕괴시켜버린 것같았다.

구금기간도안의 여러 원인으로 마천수는 반응성 정신병을 앓았다. 자주 혼자서 멍하게 있고, 진술을 전혀 할 수 없었다.

 

나는 어떤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이는 마천수가 자신의 마지막이 온 것이라 여기고 미친 척한 것이라고 한다. 목적은 법정에서 재판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당연히, 여러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이렇게 여러 해가 지났지만, 현재까지도 어떤 사람은 이렇게 나에게 묻는다. 이건 이상한 게 아니다. 어쨌든 마천수에 대하여는 재판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까. 사람들은 항상 이 재판이 완벽하지 못하다고 여긴다. 인민군중의 이런 허전한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법률에 따라 처리했다. 마천수에게 정신병이 있었는지 아닌지는 누가 권위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가 미친 척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엄격하게 과학적으로 검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상해시정싱병치료원으로 하여금 여러번 검사를 진행하게 했다. 결론은 확실히 미쳤다는 것이다. 관련법률규정에 따라, 정신병으로 진술능력이 없는 피고인에 대하여는 법정이 재판을 진행할 수 없었다. 나중에 우리는 법률규정에 따라, 시위에 사실대로 보고했고, 시위는 <기소서>에 그의 죄행을 명시하고, 그에 대한 기소와 재판은 보류하도록 비준바닸다.

 

서경현

 

1982년 7월 13일, 서경현은 법정에 끌려온다.

49살의 서경현은 머리카락이 좀 헝클어져 있었다. 눈썹까지 내려왔다. 그에게는 예전 시위서기를 맡았을 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얼굴은 약간 우울해 보였고, 머리는 아래로 숙여져 있었다. 이번에 마천수에 대한 재판을 진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서경현은 이들 잔당의 우두머리의 위치에 놓였다. 그는 약간 긴장한 듯했다.

재판을 맡은 재판관은 모두 4명이다. 장증상이 재판장을 맡고, 이해경, 이지현이 심판원을 맡았으며 4명의 인민배심원이 있었다. 그들은 각각 옹서관(翁曙冠), 마과(馬科), 이가경(李家耿)과 장우단(張友端)이다.

3명의 심판원은 모두 상해고급법원에서 수준있는 법관이었고, 그들은 사법업무에 여러 해동안 종사해왔다. 경험이 많았다. 이전에 그들은 이들 잔당의 예심에 참가했고, 상황을 비교적 전면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검찰원이 공소를 제기하며, 서경현은 '인민민주독재의 정권을 전복할 목적으로, 적극적으로 강청반혁명집단의 정부전복음모에 참가하였다. 그는 강청반혁명집단의 상해에서 반혁명활동에 종사하는 조직기획자였고, 죄행이 아주 엄중하다. <중화인민공화국형법>제9조의 법률을 적용하여, 서경현은 반혁명집단죄, 정부전복음모죄, 무장반란책동죄, 반혁명선선선동죄와 무고죄에 적극참가한 죄를 저질렀다."

피고는 공소기관이 기소한 죄행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서경현은 이들 피고인들 중 심계가 뛰어난 자였다. 예심때, 그는 일부 부차적인 죄행은 빠르게 인정했다. 그러나 일부 주요 범죄에 대하여는 계속하여 각종 이유를 대며 회피했다. 우리 법관들 말로는 범죄인정이 안정적이지 못했다. 

 

서경현의 죄행중 가장 엄중한 것은 무장반란책동이다.

예심때, 그는 주요사실에 대하여는 진술을 한다. 진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모두 진술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말에서 수시로 어떤 정서가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그렇게 한 것이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시 진상을 잘 모르는 상황하에서, '일망타진'을 피하기 위해 취한 피동적인 방어조치라는 것이다. 동시에 그는 재삼 강조했다. 무장반란은 미수에 그쳤다고.

법정에서 법관의 질문에, 그는 역시 이렇게 강조한다. 그 자신은 "무장반란책동에 대하여 1976년 10월 10일 북경에 도착했을 때, 개인의 행동은 이미 중단했다. 그리고 10월 12일 서면으로 중앙지도자에게 '자수보고서'를 제출했다."

말을 마친 후 서경현은 고개를 들어, 법대위의 법관들을 보았다.

법관들은 그가 뒤에 말한 중앙지도자에게 '자수'하였다는데 대하여 아무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무장반란책동을 부정하는 주장에 대하여는 여러 당사자들의 진술을 읽어주었고, 법정에서 물증을 제시한다.

 

그는 그 진술이 그들 일당의 당사자들이 한 말이라는 것을 알고,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다시 물증까지 보고서는 더 이상 부인하지 못한다. 그는 '사실입니다'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가 진비현(陳丕顯), 조획추(曹獲秋)등을 박해했는지에 대하여 질문받았을 때, 그는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듣고, 재판을 책임지는 장증상은 서경현을 본다. 그리고 묻는다: "피고인 서경현, 묻겠습니다. 이 사정은 도대체 당신과 관련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서경현은 장증상이 강력하게 추궁하자, 여전히 사정을 객관적인 원인으로 떠밀고자 했다.

서경현은 이렇게 말한다: 자신은 진, 조 두 사람에게 모욕한 적이 있고, 그들을 타도하고자 한 바 있다. 다만 자신은 모함한 자료의 출처는 잘 모른다. 이 자료는 모두 전안조에서 보고하고 제공한 것이다. 자신은 큰 책임이 없다. 서경현은 아주 심계가 뛰어났다. 이는 겉으로는 인정한 것이지만, 구체적으로는 부인한 것이다. 

장증상은 나와 함께 베이징 진성감옥에서 '사인방'에 대한 예심에 참가한 바 있다. 그러므로 많은 상황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들 피고인의 심리활동도 철두철미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이들이 쉽게 죄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반드시 사실을 드러내놓고 그들이 사실앞에 고개를 숙이고 죄를 인정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장증상은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당시 시위(市委)의 주요 책임자중 하나이다. 전안조의 자료를 어떻게 모를 수 있는가. 당시는 반드시 진술을 해야만 한다."

법관의 말을 들은 후, 그는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대답한다: "전안조는 제가 관장하지 않습니다. 왕소용(王少庸), 왕승룡(王承龍)이 관장합니다."

하나의 새로운 문제가 법관의 앞에 놓였다. 서경현은 정말 전안조의 일을 관여하지 않았단 말인가?

이런 상황에 직면하여 검찰관은 법정에 당사자로 하여금 증언하도록 할 것을 요구했다.

장증상도 검찰관의 의견에 동의해서 당사자를 법정에 출석시켜 증언하도록 결정한다.

 

그후 한 사람이 법원경찰의 배동하에 법정으로 걸어나온다.

서경현은 고개를 살짝 돌려 쳐다보더니 얼굴에 놀라는 기색이 떠오른다.

법정에 출석하여 증언할 증인의 이름은 성룡도(盛龍濤)였다. 그는 전 시위혁명위원회 전안판공실 조획추전안조의 부조장이었다.

서경현은 잘 아는 사람을 보자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서, 얼굴표정이 일그러진다.

성룡도는 증언석에 서서 서경현을 쳐다본다. 과거 그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하던 사람이다. 성룡도는 그의 앞에서 한번도 이견을 말한 적이 없고, 그가 시키는 일이면 그대로 처리했다. 그렇지 않으면 생각지 못한 재난이 닥칠 것이기 때무니다. 왜냐하면 그때 눈앞의 이 사람은 상해탄에서 대표하는 것은 권력이고 '법률'이었기 때문이다.

성룡도는 말한다. 서경현등이 상해시 당정영도대권을 장악한 후, 고심을 하여 진비현, 조획추를 사지로 몰아넣는다. 그들은 전체시에서 여러번 비투대회를 조직하여, 진비현, 조획추가 고개를 숙이고 죄를 인정하게 한다. 만일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체벌을 가했다. 어떤 때는 주먹으로 마구 때리기도 했다. 두 사람의 신심은 심각한 상해를 입었고, 조획추는 결국 박해받아 사망한다.

 

법저은 서경현을 추궁한다: "증인이 말한 것이 사실인가?"

서경현이 대답한다: "기본적으로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서경현과 다른 피고인이 다른 점이다. 그리고 그의 직무와 관련이 있다. 그의 사건은 다른 몇몇보다 훨씬 복잡하다.

법정에서 그는 특별법정에서재판한 요문원과 마찬가지로, 문자상으로 비교적 주의했다. 그러나 왕수진등 몇명의 피고인은 법정에서 그런 현상을 보이지 않았다. 죄를 인정하는 태도가 좋았다. 자신이 범한 죄행은 모두 인정했고, 이런 식의 말은 사용하지 않거나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법률은 '기본적으로'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사실이면 사실이고, 사실이 아니면 사실이 아니다. 모호하게 할 수는 없다.

 

검찰관이 이때 증인에게 묻는다. "조획추는 자신의 문제에 대하여 중앙에 신소서를 쓴 바 있는데, 이들 신소서는 나중에 어디로 갔는가?"

증인이 대답한다: "이들 서신은 나중에 모두 압수되었습니다."

검찰관: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조획추를 반도로 규정했는가? 근거가 있는가?"

증인: "그것은 왕홍문, 서경현등이 압박해서, 우리 전안조에서 쓴 것입니다. 그후 당시의 시위와 시혁명위원회에 보고했습니다."

검찰관: "구체적으로 사실을 얘기해보라."

증인은 이때 그곳에 서 있는 서경현을 쳐다본다.

서경현은 그곳에 서 있었고, 머리를 살짝 들어서, 머리카락이 그의 눈썹에 걸렸다. 보기에 그는 아주 진지하게 듣고 있는 것같았다.

 

증인은 이어서 말한다: "전안조는 몇년의 조사를 거쳐 조획추가 반도라고 인정할 근거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1972년 7월 17일 '조획추체포후 감옥에서 가짜진술서를 작성하고,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았으며, 동지를 팔아먹지 않았고, 조직을 팔아먹지 않았다. 반도로 규정하는 것은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상황을 보고서에 기재하였습니다."

이때, 검찰관은 법정에 그 보고서를 제시한다. 

법정에서 이 자료는 공개된다.

그후, 법원경찰이 나서서 이 보고서를 서경현에게 보여주며 그에게 확인해보도록 한다.

서경현은 읽어보고 "확실히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라고 인정한다.

사정은 이제 분명해 진 것이다.

 

법정에서 심리한 것은 서경현이 진비현, 조획추등을 박해한 것인지에 대한 것이고, 이것만으로는 문제를 설명하지 않는다. 반드시 서경현이 이 일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무엇을 했는지를 밝혀야 한다. 즉, 반드시 하나는 하나, 둘은 둘이다. 사실은 확실하게 해야 한다. 인정하려면 인정하는 것이고 죄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부정하는 것이다. 만일 이렇게 해놓지 않으면 그는 나중에 다시 '기본적으로'같은 소리를 할 것이다.

검찰관이 증인에게 계속 발언하라고 말한다.

증인은 이렇게 말한다: "왕홍문, 서경현이 보고서를 본 후에 크게 불만이었다. 왕홍문이 말한다: '너희의 견해대로라면, 조획추는 풀어줘야 겠다. 시위서기를 해야 겠다. 장춘교가 그를 하야시켜야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서경현은 말했다; '삼개(조획추를 모함한 반도, 특무, 반혁명분자라는 것)가 제대로 쓰여져 있지 않다. 문제가 있다. 조획추는 적에게 체포된 후, 신분을 폭로하고, 동지를 팔아먹고, 조직을 팔아먹었어야 한다.' 왕수진은 이렇게 말했다: "그가 반도가 아니라면 누가 반도인가.' 그들은 전안조가 그들의 방침에 따르도록 강요했고, 새로 보고서를 쓰도록 했다."

 

증인이 말을 마친 후, 심판원은 서경현에게 묻는다. "증인이 말한 것이 사실인가 아닌가?"

서경현은 증인과 물증을 모두 내놓게 되자 더 이상 떠넘기지 못하고 할 수 없이 인정한다: "사실입니다."

서경현은 이어서 말한다. 법정에서 기소된 자신의 범죄사실은 모두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사실에 부합한다. 사실의 앞에서 자신은 죄를 인정한다. 조획추를 모함한 그 심사보고서는 "완전히 우리가 위력으로 핍박하여 쓴 것이다."

장엄한 법정에서 서경현은 말을 할 때 목소리가 떨렸다. 전체 방청석의 사람들이 모두 들었을 것이다.

서경현은 유기징역 18년형, 정치권리박탈 4년형을 받는다.

 

왕수진

 

주영가, 진아대, 섭창명등은 예심을 거친 후, 법정에서 자신이 범한 죄행을 모두 인정했다.

그 가운데 태도가 비교적 좋았던 사람은 왕수진이다.

비록 강청반혁명집단의 골간분자이지만, 왕수진은 서경현과 달랐다. 서경현은 처음에 시위기관에서 일했고, 상층에서 활동하여 나중에 수중에 대권을 장악하여, 상층활동을 잘 알았다. 그는 왕승룡과 함께 위문백(魏文伯)을 모함한다. 이것은 서경현의 죄행이다. 다만 왕수진이 위문백의 박해에 참가한 것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정평(鄭平), 유신지(劉愼之), 황요남(黃耀南)이 '문화대혁명'초기에 타격을 받고, 박해받아 죽음에 이른 것은 더더욱 왕수진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이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그녀가 나중에 대권을 장악했다고 하여, 뭉뚱그려서 그녀와 서경현을 함께 묶어 책임추궁할 수는 없었다.

 

이 점에서, 왕수진은 우리의 사건처리에서 실사구시적으로 처리되었다.

"사인방"이 상해에서의 주요 핵심분자로서 또한 여성으로서 왕수진은 분명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

나는 왕수진사건의 재판장이었다 .재판에 참여한 심판원은 범내정, 조여덕이 있고, 인민배심원은 마기, 장영문, 오취선, 진각산이 있고 ,서기원은 장려진이다.

 

7월 14일, 상해시고급법원은 왕수진에 대하여 재판을 진행한다. 그녀는 피고인석에 끌려온다.

이 47살된 여성은 동그란 얼굴형에 귀까지 내려오는 단발머리였다. 그녀는 거기에 서서 고개를 들고 법관을 쳐다본다. 약간 긴장해 보였다. 

검찰관의 진술을 마친 후,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왕수진, 검찰관의 발언을 들었는가?"

왕수진이 대답한다: "들었습니다."

나는 물었다: "피고인 왕수진, 법정이 묻는다. 너는 '문화대혁명'때 어떤 사람들을 박해했는가?"

왕수진은 생각하더니, 이어서 그녀에게 박해받은 사람들의 이름을 줄줄이 열거했다.

이들 이름의 명단은 길었을 뿐아니라, 전체 시의 각 부문이 관련되어 있었다. 방청하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에, 왕수진은 이들 그녀에게 박해받은 사람들의 이름을 아주 잘 알았고, 빠르게 말했다. 그러나 말을 할 수록 속도가 느려졌고, 한편으로 생각하며 한편으로 말했다. 마지막에는 멈추었다. 그리고 법정에 말한다: "그외에 더 많은 이름이 있는데, 제가 모두 부르지 못하겠습니다.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나는 추궁해서 물었다: "너 자신이 한 일인데 왜 생각나지 않는가?"

왕수진은 얼굴에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말한다: "나에게 박해를 받은 사람이 실로 너무 많습니다. 저는 정말 모두 기억할 수 없습니다."

방청석에서는 즉시 탄식이 흘러나온다.

 

그 당시 이들은 마치 미친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박해했다. 방처석의 탄성을 듣고는 왕수진이 약간 긴장한 듯했다. 그녀는 자신의 좌우를 보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나는 법정에서 왕수진에게 왜 그렇게 미친 듯이 다른 사람을 박해했는지 동기와 목적을 얘기하라고 추궁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너는 왜 이렇게 아무런 이유없이 다른 사람을 박해했는가?"

왕수진이 대답한다: "진비현, 조획추 및 그들의 상부와 수하를 타도하지 않으면, 장춘교, 요문원, 좡홍문과 우리같은 사람들이 올라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목적으로 피고인 왕수진은 1968년 서경현과 함께 전체시TV대회 등 회의상에서 중공상해시위제1서기 진비현, 상해시시장 조획추등을 '반혁명분자'로 모함했고 ,그들에 대하여 인신박해와 불법감금을 진행한다. 1972년부터 1973년까지, 왕수진은 마천수, 서경현등과 다시 진비현이 '반혁명'이고, 조획추는 '반도'라고 모함한다. 그리하여 진비현은 장기간 박해를 받고, 조획추는 장기간의 박해로 사망에 이른다.

 

1969년 11월 상해시가스회사 조리기술원이던 상웨이촨(桑偉川)은 글을 써서 서경현이 소설 <상해의 아침>을 모욕했다고 반박한다. 왕수진과 마천수 서경현은 상웨이촨을 '현행반혁명'으로 모함하여, 7년형을 받게 한다. 상웨이촨은 잔혹한 박해를 당한다.

왕수진같은 사람들에게 법제관념은 없었다. 그들의 말이 법이었다.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처벌했다.

이렇게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긴다. 왕수진은 강청반혁명집단을 따르면서, 1976년 2월부터 4월까지, 장춘교, 왕홍문의 지시하에 전후로 전체시 만인대회에서 새로 나와서 일을 하던 간부를 '조직환향단'이고 '반격'을 꾀한다고 무고하고, 중공중앙부주석, 국무원부총리 등소평이 '환향단단당' '반도,특무,반혁명분자의 총대표'이고, 천안문광장 '반혁명사건의 총배후'라고 모함한다.

 

이런 것들을 제외하고, 법정에서 왕수진을 재판할 때 또 어떤 것을 물었을까?

그것은 바로 무장반란에 관한 것이다.

1973년부터 1976년까지, 왕수진은 왕홍문의 지시에 따라, 조직대권을 절취하고, 전후로 주굉보(周宏寶), 시상영, 인보천(印寶泉)등을 시민병지휘부 책임자로 앉히고, 민병무장의 지휘권을 장악하게 한다.

1976년 10월 8일, 서경현, 왕수진은 강청, 장춘교, 요문원, 왕홍문이 구금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무장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정하다. 서경현, 왕수진이 총지휘가된다. 중앙에서 강력한 조치를 취하고 상해군민이 격렬히 반대하여, 그들의 무장반란을 성공하지 못한다. 법정은 이러한 것에 대하여 왕수진 본인을 추궁할 뿐아니라, 법정에서 관련 물증등을 내놓았고, 증인의 진술도 읽어주었다. 관건적인 것은 증인을 출석시켜 증언하게 했다.

 

사실의 앞에서 왕수진은 모두 인정한다.

법정에서, 내가 물으면 그녀는 대답했다. 인정태도가 아주 좋았다.

왕수진을 재판할 때, 법정에서 우려되는 일이 있었다. 즉 그녀가 여러번 당시 군대의 일보 지도자동지들과 교류했는데, 그들에게 어떤 방면에서의 도움과 지지를 요청한 것이다. 그리고 일부 사정이 있었다. 직접 당시의 중앙지도자와 연결되었다. 만일 법정에서 이들의 이름을 얘기하게 되면, 반드시 재판에 영향을 줄 것이었다.

당연히 법정은 사실을 존중한다. 만일 그녀가 굳이 법정에서 말하겠다고 하면, 관계없었다. 우리는 그 방면의 준비도 했다.

 

왕수진의 재판은 순조로웠다. 그녀의 태도가 좋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한 일이라면 빠져나갈려고 책임을 떠밀지 않았다. 실사구시적으로 인정했다. 무릇 묻지 않는 일은 중앙지도자와 군대방면의 일도 그녀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왜 왕수진은 법정에서 이렇게 좋은 태도를 보였을까?

이건 주로 우리가 집법할 때 한편으로 엄격하게 법에 따라 처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인간적으로 집법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사인방'시기에는 없었던 일이었다.

그게 무슨 말일까?

 

처음에, 왕수진은 이제 자신은 끝났다고 여긴다. 모든 나쁜 짓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그래서 그녀는 기운이 빠져 있었다.

특별법정이 개정되기 전에, 왕수진은 증인으로 북경에 불려간다. 진성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녀는 자기가 왜 북경으로 왔는지 몰랐다. 그래서 약간 긴장해 있었다.

개정전에, 진성감옥 3동의 한 방에서 나와 또 다른 왕홍문에심조의 예심원이 그녀를 만나 얘기를 나누었다. 그녀에게 상해무장반란의 일을 알고 싶었다.

 

왕수진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녀는 그곳에 서 있었다. 놀라는 눈으로 이 방을 보고 있었다. 안에는 범인을 심문하는 나무탁자나 나무의자는 없었다. 벽에도 무슨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가볍게 처벌하고, 항거하면 무겁게 처벌한다'는 것같은 표어도 없었다. 방안에는 사무용탁자와 물컵이 놓여 있었고, 창쪽으로는 작은 탁자에 물병이 놓여 있었다. 몇 개의 쇼파도 방안에 놓여 있었다. 창문은 모두 열려 있었다. 맑은 바람이 계속 불어들어왔다. 죄수실을 벗어난 왕수진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나는 손으로 곁에 놓인 1인용 소파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했다.

그녀는 앉지 못하고 그냥 서 있었다. 의심스런 눈초리로 나를 보았다.

 

그녀는 믿기 어려운 것같았다. 왜냐하면 그녀가 통치하던 그 시대에 죄인을 확인된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얘기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앉은 후, 나는 그녀에게 따스한 물을 따라 그녀의 앞에 놓았다.

그녀는 물잔을 보기만 하고, 받아들지 못했다. 결국 마시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다는 눈초리로 나를 볼 뿐이었다. 그녀의 내심에서 약간의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나는 편안하게 그녀와 상해무장반란에 관한 문제를 얘기했다.

 

"문화대혁명'전에 왕수진은 상해면방공장의 기술자였다. 일을 잘 했다. 그때는 무장반란은 고사하고 총도 만져본 적이 없었다. 나중에 그녀가 무장반란을 기획하게 된 것은 그녀 자신의 날로 팽창한 개인적 욕심과 관련이 있다.

당시 특별법정은 개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왕홍문, 장춘교의 죄행중 하나의 중요한 죄상은 바로 상해무장반란을 기획한 것이다. 다만 이 일을 법정에 가져가려면 증인과 물증이 필요했다.

물증은 당시에 이미 많이 수집해 놓았다. 다만 증인은? 기획에 참여한 서경현, 왕수진, 시상영등이 나서서 사건의 진상을 얘기해 주어야 한다. 법정에서 증언을 해야 왕홍문, 장춘교가 고개를 숙이고 죄를 인정할 터였다.

 

왕수진이 옛날의 직접 상사들 앞에서 대질하려 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려하던 점이었다. 그리하여 예심조는 상해에서온 내가 그녀와 만나서 죄를 인정하도록 설득하게 한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그녀를 만나러온 이유를 얘기했다. 그녀가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고, 이번에 죄를 인정할 기회를 붙잡으라고 얘기했다.

왕수진은 1인용 소파에 앉아서, 다 들은 후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깊은 생각에 잠긴 것같았다.

이때 왕수진은 내심에서 격렬한 투쟁을 벌이는 것같았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내가 이번에 온 것은 순수하게 얘기를 한번 하려는 것이고 심문이 아니다. 너 스스로 잘 생각해보라. 원하는지 아닌지 스스로 결정하라.

내가 생각지 못했던 것은 금방 침묵하며 아무 말이 없던 왕수진이 그 말을 들은 후, 즉시 왕홍문, 장춘교와 법정에서 대질하고, 상해무장반란을 책동한 범죄사실을 인정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1980년 12월 13일 오전, 특별법정 제1심판정에서 왕홍문을 재판할 때, 왕수진이 법정에 나와 증언한다. 그녀는 무장반란의 전후경과를 얘기했다. 근 반시간도안. 그리하여 왕홍문이 법정에서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이번 상해 '이왕(二王)'의 특별법정에서의 대질은 CCTV에서 그날 저녁에 방송된다. 이는 특별법정에서 증언한 것중 유일하게 모두 방송된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특별법정에서의 대질은 왕수진에게 법제교육수업이 되었다. 그녀는 인민법정이 사실을 존중한다는 것을 보았고, 법에 따라 처리한다는 원칙도 보았다. 그리하여 이후 상해에서의 재판때 그녀는 철저하게 자신의 죄행을 인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상의 원인 이외에, 우리는 그들이 배웠던 방식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범죄에 대하여 인도주의로 대했다. 그리하여 그녀가 감동한 것이다.

왕수진은 고혈압과 부인병을 앓고 있었다. 감옥에서 필요한 도움을 주었고, 그녀는 감사를 표했다.

왕수진에게는 두 딸이 있었다. 그녀가 구금되어 있는 몇년동안,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구해야 하는 때였다. 아이들의 마음은 비관적이었다. 이런 모친을 두었으니, 어느 기관에서 자신을 원할 것인가. 범죄자인 모친으로서 왕수진은 옥중에서 한편으로 자신의 죄를 반성하면, 다른 한편으로 딸들의 앞날을 걱정했다. 모친으로서 이런 생각에 고통스러워했다. 그녀는 자신이 국가와 인민의 앞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행을 저지른 것을 한탄스러워 했고, 이로 인하여 자신의 자식들까지 연루된 것이 한스러웠다.  자신은 모친으로서 불합격이다. 그녀는 국가와 인민에 미안할 뿐아니라, 자신의 아이들에게도 미안했다. 아이들의 미래에 대하여, 그녀는 모친으로서 도움을 줄 수없어 절망하고 있었다.

 

바로 이 때, 감옥에서 생각지도 못한 소식이 그녀에게 전해진다. 그녀의 딸 하나가 국유단위에 취직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딸은 기술학교에 합격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당시의 젊은이들이 선망하던 일이다.

그 소식을 듣고 왕수진은 놀라서 멍해진다. 딸이 자신의 사건에 연루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그녀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사인방'이 통치하던 시대를 되돌아보면, 상해에서 권력을 장악했던 자신이 이런 조치를 취해준 적이 있었던가? 범죄자의 아이들에게 이런 기회를 베풀어 주었던가?

그녀는 죄수실에 서서, 철창밖의 햇볕을 보며, 두 아이의 모친으로서 그녀의 내심은 아마도 참회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왕수진은 상소도 하지 않는다. 1심판결대로 집행되었다. 유기징역 17년형에 정치권리박탈4년형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