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부사령관 도용(陶勇) '투정자살(投井自殺)'의 수수께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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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2020. 10. 14.

글: 왕우군(王友群)

 

중공 원수 진의(陳毅)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 머리를 자른다고 해도, 나는 도용이 자살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중공 대장 속유(粟裕)는 이런 말을 했다. 그의 일생에서 가장 유감스러운 일은 살아 있을 때 도용이 살해당한 진상을 밝혀내지 못한 것이라고. 진의와 속유는 모두 도용의 옛 상사들이다. 

 

도용 "투정자살"

 

1967년 1월 21일, 당시 남경군구 부사령원, 해군 부사령원, 동해함대 사령원으로 있던 중장 도용은 '투정자살'한다. 장소는 상해시 동해함대 제4초대소 후화원의 우물 안이다.

 

그날 오전 도용은 상해경비구사령원 요정국(廖政國)과 함께 타도당한 전 상해시위제1서기 진비현(陳丕顯)을 구해내는 일을 얘기했다. 정오에 도용은 요정국과 함께 식사를 하고, 마오타이주도 마셨다. 그날 오후, '도용자살'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제4초대소 소장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꽃에 물을 주면서 우물가로 걸어가, 안을 내려다보고는 깜짝 놀랐다. "누군가 우물에 빠졌다!" 그가 이렇게 소리치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급히 달려왔다. 우물 안에는 한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군모를 쓰고 우물물위에 떠 있었다. 누군가 몸을 굽혀 힘주어 끌어내보니, 바로 도용 사령원이었다. 그는 즉시 도용을 105호실로 들고 갔고, 해군411병원의 응급구조팀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비록 여러가지 조치를 취했지만(가슴을 열고 응급조치까지 함), 소용이 없었다.

 

전쟁터에서 수십년간 굴러오면서 몸이 7곳에 총탄에 맞은 상처를 입고도 죽지 않았던 중공상장이, 큰 바다에서 작전을 지휘하던 해군고위장군이 이렇게 작은 우물물에 빠져서 죽어버린 것이다!

 

현장에서 응급구조에 참여했던 사람의 회고에 따르면, 도용의 뒷머리에 큰 혈종(血腫)이 있었다. 마치 단단한 물건으로 때려서 상처를 입힌 듯했다. 아마도 먼저 맞아서 정신을 잃고, 그후에 우물에 버려진 것같다는 것이다. 도용자살현장을 만들려면 적어도 서너명이 같이 행동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왜냐하면 우물의 입구는 겨우 50센티미터정도여서 겨우 1사람이 들어갈 정도이기 때문이다. 물도 깊지 않다. 사람이 그 안에 서있어도 머리가 위로 나올 정도이고, 수면도 지면에서 1미터도 되지 않는다. 자살하려고 뛰어들더라도, 익사할 수가 없는 곳이다.

 

현장에서 응급구조에 참여했던 다른 한 사람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두번에 걸쳐 동해함대의 정위(政委) 유호천(劉浩天)에게 보고했다: "도사령관이 응급조치에도 효과가 없어 이미 사망했습니다. 정위께서 현장을 한번 보시시요." 유호천은 조금도 놀라지 않은 듯이 보였다. "죽었으면 죽었지. 상부에 보고하고나서 보자." 도용에게 응급조치를 하는 모든 과정에서 유호천과 평소에 겉으로 도용 사령관을 그렇게 존중했던 부사령원 고지영(高志榮)은 끝까지 현장에 얼굴을 나타내지 않는다.

 

도용의 유체는 비투를 당한다.

 

당시, 도용의 가슴은 절개구를 아직 봉합도 못한 상태였다. 동해함대 체공대(體工隊), 문공단(文工團), 호교(護校)의 조반파 4,5십명이 제4초대소로 몰려와서 소리높여 외친다: "대반도 도용을 타도하자! 도용의 죄는 극악무도하다!" 도용이 입고 있던 면의(棉衣)에는 핏자국이 많이 있었고, 오른쪽 어깨의 면의는 우물물에 잠겨 있었다. 초대소 관리처의 심처장(沈處長)은 새 면의를 가져다 갈아입혀주었다. 그것을 조반파가 보았다. 즉시 심처장을 붙잡아 마당에서 유투(遊鬪)를 했다. 그에게 강제로 세숫대야를 치면서 걸어가며 소리치게 했다: "나는 도용의 벌레이다" 조반파는 도용의 유체를 잔디밭 위로 끌고가서, 미리 준비한 패를 걸고, 모자를 씌웠다. 한손에는 술병을 다른 한손에는 지푸라기를 잡게 한다. 모자에는 "죄대악극도용(罪大惡極陶勇)"이라고 쓰고, 패에는 '타도대반도도용(打倒大叛徒陶勇)"이라고 적었다. 그들은 먹으로 도용의 얼굴에는 X자를 크게 그리고, 자세를 잡게 한 후에 계속 사진을 찍었다. 일부는 도용에게 침을 뱉고, 발길질을 했다...

 

사건발생후 2시간도 지나지 않아, 동해함대 정위 유호천이 이렇게 선언한다: "도용은 일관되게 성격이 강하고 호승심이 강했다. 최근 며칠 그는 자신이 소진화(蘇振華), 나서경(羅瑞卿)의 일당으로 들어간 것을 겁냈다. 그래서 이렇게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간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는 죄를 겁내서 자살한 것이다(畏罪自殺). 이는 운동에 항거하는 것이고, 반도행위이다." 이어서, 유호천이 결재한 <도용자살의 경과와 초보분석>이라는 급전을 북경으로 발송한다. 해군정위 이작붕(李作鵬)에게 간다. 사건발생후 4시간도 되지 않아, 이작붕은 해군당위의 명의로 통보를 보낸다: "반도 도용은 죄를 겁내서 자살했다(叛徒陶勇, 畏罪自殺)"

 

도용의 처도 투신자살당한다.

 

도용이 죽은지 3일후, 그의 집은 반복하여 수색,압수를 당한다. 천정까지 들춰진다. 그의 처 주람(朱嵐)도 끌려가서 심문을 받는다. 여러번 구타도 당했다. 1967년 1월 24일 저녁, 트럭 한대에 조반파를 가득 싣고 기세등등하게 도용의 집으로 쳐들어 온다. 잠을 자고 있던 아이들을 침대에서 끌고나온다. 거실은 사람으로 가득찼다. 한가운데 차탁을 놓는다. 그후 몇몇 험악하게 생긴 사내들이 주람을 끌고 들어온다. 그리고 그녀를 묶어서 차탁에 세운다음 그녀에게 무릎꿇으라고 명령을 내린다. 주람은 이미 3일내내 밥한톨 먹지 못했다. 게다가 극도의 분노와 비통으로 몸이 아주 허약해져 있었다. 정신도 오락가락한다. 다만 그녀는 그 말을 듣자 즉시 대노한다: "나는 죄가 없다. 왜 무릎을 꿇어야 하는가. 무릎꿇어야할 사람은 네놈들이다. 살인자들같으니라고." 조반파는 화를 내며 몰려가 그녀에게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댄다.

 

남경군구 사령원 허세우(許世友)는 사람을 보내어 주람에게 빨리 시비의 장소인 상해를 떠나 남경으로 옮겨와서 살도록 권했다. 그러나 그녀는 거절했다. 주람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용의 문제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나는 상해를 떠나지 않겠다." 그후 주람은 도처에 편지를 쓰고, 편지를 부치고, 고발하고, 남편이 억울하다고 호소했다. 그렇게 되니 더욱 큰 타격이 가해진 것이다. 1967년 8월의 어느 날, 주람은 돌연 체포된다. 그리고 비밀리에 감금된다. 전안조는 밤을 세워 돌아가며 그녀를 고문하고 그녀에게 '일본특무'라고 자백하라고 하고, 그녀에게 남편 도용이 '일본과 내통한 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강요한다. 거기에는 일본군에 '가도(借道, 길을 빌린 것)'도 포함된다. 주람은 얻어맞아 온몸이 상처투성이이고, 뼈도 부러졌다. 1967년 10월, 주람은 정신이상이 되어 감금되어 있던 건물에서 뛰어내려 사망하고 만다.

 

도용의 '자살'의 두 가지 원인

 

근인(近因)은 문혁의 권력투쟁때 줄을 잘못 선 것이다. 타도당한 상해의 최고 '주자파' 진비현을 보호하려고 했던 것이다.

 

문혁때, 중공군대 고위층의 투쟁은 아주 격렬했다. 그리고 서로 다른 파벌로 나뉜다. 좌파가 가장 잘나갔다. 그러나 도용은 중우파에 선다. 여러번 고위층군사회의때 좌파를 공격했다. 1966년말, 중공원수 섭검영(葉劍英)이 상해시위제1서기 진비현에게 전화를 건다. 그리고 그에게 도용에게 전해달라고 말한다. "해군의 바람이 바뀌고 있다." 이렇게 도용에게 경계하라고 알린 것이다. 남경군구 사령원 허세우도 일부러 상해까지 와서 위장병을 앓고 있던 도용을 만나 이렇게 권한다: "해군의 일은 신경쓰지 말고, 남경으로 와서 요양해라!" 그러나 도용은 고집한다: "나는 여기에서 버티겠습니다. 그들이 나를 어떻게 하는지 보겠습니다."

 

1967년초, 모택동의 지지하에, 상해조반파가 탈권행동을 개시한다. 1월 4일, <문회보>를 빼앗는다. 5일, <해방일보>를 빼앗는다. 6일, 중앙문혁소조 부조장 장춘교(張春橋)등이 전체상해시조반파의 명의로 '타도시위대회'를 개최한다. 그리고 시위서기 진비현을 비롯해 시위, 시정부의 지도자들을 비투한다. 당시 진비현은 시위상임위원회 회의를 개최하고자 했으나 장소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도용에게 장소를 빌려달라고 한다. 도용을 즉시 동해함대사령부의 강당을 그에게 빌려준다. 이 일은 금방 중앙에 보고되었고, 도용은 엄한 비판을 받는다. 중앙군위는 전보를 보내어, "군대는 지방 주자파의 비호소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하루는 진비현이 조반파에게 감금된다. 도용이 그 소식을 듣자, 즉시 차를 몰고 찾으러 간다. 조반파가 점령한 시위건물로 쳐들어가서, 모택동의 상해에서의 대리인인 장춘교를 찾는다. 그러나 장춘교를 만나지 못하고, 사령부로 되돌아 온다. 그후 도용은 동해함대 공항책임자 대운지(戴雲池)에게 전화를 걸어 "진비현이 체포되었다. 너는 몇개의 방을 준비해달라. 나는 그를 빼내서, 너있는 곳으로 보내겠다. 네가 보호해주어라." 바로 죽는 그날, 도용은 상해경비구사령원 요정원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계획을 세웠다. 내가 직접 경위부대를 데리고 몰래 진비현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서, 그를 등에 업고 나오겠다. 그후에 비밀리에 보호해주겠다."

 

모택동이 문혁을 일으키고, 중앙에서 국가주석 유소기, 중공중앙총서기 등소평을 타도한 후, 지방에서도 유소기, 등소평의 대리인을 타도한다. 상해시위제1서기 진비현은 유소기, 등소평의 상해대리인으로 보았다. 모택동은 상해조반파가 앞장서서, 시위, 시정부를 빼앗고, 그후 전국적으로 권력탈취행동을 전개하고자 했다. 도용이 모택동이 타도하려는 상해의 최고 주자파를 보호하려 했으니, 그의 최후가 좋을 수 있었겠는가.

 

얼마 후, 교통부장 팽덕청(彭德淸)이 조반파에게 비투를 당하여 동해함대로 도피한다. 팽덕청은 27군 군장, 화동군구 해군부사령원, 동해함대 부사령원, 복건기지사령원을 지낸 바 있고, 도용의 옛 전우이다. 도용은 그 소식을 듣고, 바로 말하다: "너는 여기에 있어라. 어디에도 가지 말라." 이 일은 상부를 들쑤신 셈이 되었다. 그리하여 도용이 타격을 입게 되고, 팽덕청은 끌려간다.

 

원인(遠因)은 그가 항일전쟁때 일본군에게 '길을 빌려(借道)' 국민당군을 친 것이다. 

 

도용의 '혁명생애'를 회고한 글 <'반명삼랑(拌命三郞)' 도용 수하의 '고담영웅(孤膽英雄)'>을 보면, 항일전쟁시기, 신사군(新四軍)에 있던 도용은 강소중부 통해(通海)지구에 주둔해 있었다. 한번은 국민당군대를 공격하기 위해, 일본인이 점거한 지방을 지나가야 했다. 도용은 경위대장 모준웅(毛俊雄)을 시켜 일본인에게 서신을 쓴다. '길을 빌려달라고' 일본인은 기꺼이 두 호랑이가 싸우는 것을 구경하는 것을 택하고, 흔쾌히 동의한다. 그리하여, 도용은 일본인이 빌려준 길로 우회하여 국민당군의 측면을 쳐서 궤멸시킨다. 어떤 사람은 도용의 이 '차도'조치는 그가 문혁때 '반도'로 규정되는 화근이 되었다고 말한다.

 

문혁이 끝난 후, 중공의 대외선전에서 도용은 임표 일당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말한다. 다만, 1971년 9월 13일 임표가 몽골에서 죽은 후, 중공은 전안조를 구성했고, 임표와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조사하였다. 도용의 죽음에 직접지휘책임을 지고 있던 당시 동해함대 정위 유호천은 무사히 조사를 통과한다. 또 다른 중요책임자이고 임표의 '일당'으로 취급되는 해군정위 이작붕도 심문을 받을 때, 도용의 죽음에 대하여는 책임을 피해갔다. 

 

이런 해석도 있다: 당초 도용이 일본인에게 '차도'해서 국민당군을 친 것은 그 개인이 결정한 것이 아니라, 중공의 더욱 상층부에서 결정한 일이라는 것이다. 다만, 중공의 고위층은 아무도 이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았고, 할 수 없이 도용이 그 오명을 뒤집어 쓴 것이라고 한다.

 

결론

 

도용의 죽음은 중공 정치투쟁의 잔혹하고 야만적이고 사악함을 보여준다. 도용이 죽기 전의 언행으로 보면 그는 분명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다.

 

중공은 항일전쟁때, 소극적으로 항일했을 뿐아니라,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과 결탁하여 국민당군을 쳤다. 이는 중공이 정권을 타뤼한 후에 극력 은폐해야하는 사실이다. 중공의 명을 받아 일본군과 연락했던 중공의 고급특무 반한년(潘漢年)은 중공에 체포되어 형을 받고 결국 노동개조농장에서 사망하고 만다. 일찌기 명을 받아 일본인에게 '길을 빌려' 중국인을 친 도용은 결국 이로 인하여 '반도'로 규정되고, 목숨을 잃게 된다. 중공 고위층에서는 아무도 나서서 그를 위해 변명해주지 않았다. 중공을 위해 수십년간 목숨을 바쳐 싸웠는데, 마지막에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게 죽어버렸다 .이는 도용의 비극이다. 또한 오늘날 중공을 위해 목숨바쳐 일하는 사람의 전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