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함(吳晗): 한 역사학자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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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2020. 10. 17.

글: 왕우군(王友群)

 

오함은 <주원장전>에 이렇게 썼다: "그물이 다 펼쳐졌다. 포위망은 점점 줄어들었다. 창응(蒼鷹)은 하늘을 맴돌고, 사냥개(獵犬)는 땅위에서 추격한다. 호각소리가 들리고, 고함소리가 들리고, 매를 부르고 개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이미 그물에 걸려든 문인(文人)들은 하나하나 목이 잘리고, 가슴이 깨져 핏물 속에서 신음한다." 이 내용은 1949년 중공이 정권을 탈취한 후 문인들을 대하는 생생한 모습이기도 하다.

 

오함은 스승을 버리고 중공에 투신한다.

 

오함은 절강 금화 의오(義烏) 사람이다. 1928년 가을, 상해중국공학(上海中國公學)에 입학하여 호적(胡適)의 제자가 된다. 얼마 후, 호적은 상해를 떠나 북경대학 교장이 된다. 오함도 그를 따라 북상한다. 그러나 북경대학에는 불합격하고, 청화대학에 입학한다. 대학때 생활이나 학업에서 모두 호적이 도와주고 이끌어 주었다. 오함은 이렇게 말했다: "빛이 닿는 곳은 사면팔방이 모두 평탄한 길이었다." 이를 보면 호적이 그에게 얼마나 크고 깊게 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 1934년, 오함은 졸업후 대학에 남아 교편을 잡는다. 1937년부터 운남대학, 서남연합대학, 청화대학 교수를 지낸다.

 

1943년, 오함은 중국민주동맹에 가입한 후, 점점 역사학자에서 사회활동가로 변신한다. 중공의 지지하에 적극적으로 각종 반정부활동에 가담했다. 국민정부에 대한 비판도 날이 갈수록 격렬해 진다. 오함의 저작연표를 살펴보면, 이때부터 그는 더 이상 역사학 저작을 쓰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946년, 오함이 상해에 있을 때, 마침 호적도 거기에 있었다. 오함은 서신을 보내 만나고 싶다고 전했으나, 호적은 무시해 버린다. 북평으로 돌아온 후, 오함이 다시 호적을 방문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뜻이 맞지 않았고, 좋지 않게 헤어진다. 오함은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다: "서남연대가 곤명에서 북평으로 옮겨온 후, 나는 호적을 설득하는 공작을 했다. 그러나 그는 완고해서 설득되지 않았다. 나의 발길은 더 이상 그의 집 거실에 들어가지 못했다." 호적은 오함이 중공에 투신한 것을 알고난 후, 장탄식을 한다: "오함은 아깝게 되었다. 길을 잘못 들었다."

 

1949년 1월, 중공군대가 북평에 진입한 후, 오함은 북경대학, 청화대학을 접수하는 업무를 맡는다. 그는 청화대학 교무위원회 부주임, 문학원 원장, 역사학과 주임등을 맡았다. 동시에 민맹 북경지부의 주임위원도 된다. 1949년 11월 그는 북경시 부시장에 임명된다.

 

오함은 중공을 도와 사람들을 숙청한다.

 

1949년 10월 1일 중공정권이 건립된 후, 모택동은 수십차례의 피비린내나는 잔혹한 정치운동을 벌인다. 매번 오함은 적극적으로 따랐다. 1957년 3월 오함은 공개적으로 중공에 가입핝다. 1957년 6월, 모택동은 반우파운동을 일으킨다. 장백균(章伯鈞)은 모택동이 직접 지목한 "전국제1대우파"였다. 나융기(羅隆基)는 제2대우파, 저안평(儲安平)은 제3대우파였다. 

 

모택동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민맹중앙 부주석이자 <광명일보> 사장인 장백균, 민맹중앙 부주석인 나융기, 민맹 맹원이며 <광명일보> 총편집인 저안평은 심하게 비판을 받게 된다. 1957년 6월 11일, 오함은 <광명일보>의 저안평을 비판하는 회의에서 이렇게 말한다: "과거 국민당은 확실히 '당천하(黨天下)'였다. 저안평이 현재 공산당의 '당천하'라고 말한 것은 사실을 왜곡했을 뿐아니라, 의도가 악독하다." 그리고 저안평이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뒤에 누군가 지지해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광명일보>의 민맹 맹원은 모두 반드시 저안평과 선을 확실히 그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1957년 7월 7일, 오함은 중공 제1기 전인데 4차회의에서 <나는 분노한다. 나는 고발한다(我憤恨, 我控訴)>라는 장편연설에서 소위 '장라연맹(章羅聯盟)'을 맹렬히 비판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장백균, 나융기의 반당반사회주의활동은 일관되었다. 조직적이고, 배치도 하고, 계획도 있고, 책략도 있으며, 최종목적도 있었다. 그리고 각 방면의 반동분자들과 협조하여, 서로 다른 방식으로 상호 호응했다......그들 일당은 인민의 흉악한 적이다."

 

1957년 8월 10일, 민맹중앙은 북경정협문화구락부에서 나융기비판대회를 개최한다. 오함은 첫 발언자로 나선다. 그는 발언대에 서자마자 나융기가 "거짓말대가", "썩어빠진 영미자산계급에게서 배운 거짓말학과 궤변술로 후안무치하기가 극치에 다달았다."고 욕한다. 이어서 그는 나융기의 '반공'바탕을 많은 분량을 들어 들춰내고, 나융기가 "일찌감치 20년전에 일본제국주의에 계책을 내서 연합하여 반공할 것을 기도했었다."고 말한다.

 

오함은 이렇게 폭로한다. 1949년 그가 상해에서 중공통치지역으로 왔을 때, 나융기는 그에게 심균유(沈鈞儒, 반우때의 민맹주석)에게 보내는 서신을 전해달라고 부탁받은 적이 있는데, 그는 심균유에게 "민맹을 대표하여 중공중앙에 아래의 몇가지 조건을 제출해달라고 했다: (1) 소련에 일방적으로 기울지 말고 협화외교를 실행해달라; (2) 민맹성원과 중공당원이 서로 교차하지 않게 해달라; (3) 민맹은 자신의 정치강령이 있고, 이를 가지고 중공과 합의를 체결한다. 만일 중공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민맹은 연합정부에서 퇴출하여 재야당이 될 수 있다." 오함은 이렇게 말한다: "아는 자로 서신의 주장이 아주 황당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서신을 내놓지 않았다." 

 

오함은 또한 이런 폭로도 한다. 1949년 정협개최전날, 나융기가 북평으로 온다. 주은래가 당시 그를 접견할 때 이런 말을 했다. 민주당파는 민족자산계급과 소자산계급을 대표하고, 중공은 무산계급을 대표한다. 나융기는 즉석에서 동의하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너는 남개대학출신이고, 모택동은 북경대학출신이며, 나는 청화대학출신이다. 왜 너희는 무산계급을 대표할 수있는데. 우리는 자산계급과 소자산계급을 대표해야 하는가? 우리가 인민전선을 성립하는데, 너희는 일부분 인민을 대표하고, 우리는 다른 일부분 인민을 대표하는 것이다. 그래야 공동으로 협상하여 연합정부를 조직할 수 있는 것이아닌가."

 

오함은 말했다: "나융기의 이 말은 아주 노골적이다. 그는 중국공산당의 영도를 받지않겠다는 것이다. 광망하게도 스스로일부분 인민을 대표한다고 했다. 공산당과 직접적으로 가격을 협상하겠다는 말이다." 일찌기 <문회보>의 고급기자를 지낸 바 있는 황상(黃裳)은 이렇게 말한다: "이 고발은 나융기에게 심각한 타격이 되었다. 인민들은 오함이 사람을 숙정하는 수단이 악독하다고 생각하게 된 사례이다."

 

모택동의 지시와 오함등의 맹렬한 비판하에 "장라연뱅"은 전국우파조직의 '총사령관'이 된다. 민맹중앙은 우파의 '본거지'가 된다. 6천여명이 우파로 규정되고, 이때부터 수십년간 갖은 고초를 겪게 만든다. 나융기는 1965년에 죽고, 장백균은 1969년에 죽는다. 저안평은 지금까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죽었으면 시신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중공당원 오함은 민맹의 두 부주석을 타도한 후, 민맹중앙 부주석에 오른다.

 

오함의 일가족 3명이 중공에 죽임을 당한다.

 

1959년 4월, 모택동은 명나라때 저명한 청백리 해서(海瑞)의 '강정불아(剛正不阿), 직언감간(直言敢諫)'의 정신을 배워야 한다고 제기한다. 오함은 즉시 그 말을 듣자 움직인다. <해서매황제(海瑞罵皇帝, 해서가 황제를 욕하다)>등 글을 발표한다. 모주석은 이들 작품을 크게 칭찬한다. 그리고 친필로 서명한 <모택동선집>을 오함에게 선물한다. 경극배우인 마련량(馬連良)은 오함의 <논해서(論海瑞, 해서를 논하다)>를 읽은 후, 그에게 해서에 관한 극본을 하나 써달라고 부탁한다. 근1년에 걸쳐 오함은 극본을 완성한다. 1961년 11월, 경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이 공연되고, 호평을 받는다. 모택동은 해서역을 맡았던 마련량을 집으로 불러 같이 식사를 하면서, 연기가 좋았다고 칭찬한다.

 

1957년 모택동은 반우파운동을 일으켜, 전국의 지식인들을 모조리 쓰러뜨린다. 1959년 모택동은 '팽덕회반당집단'을 타도한다. 1962년 중공8기10중전회에서 모택동은 계급투쟁은 반드시 매년 해야 하고, 매달 해야 하고, 매일 해야 한다고말하며, '습중훈반당집단'을 타도한다. 1965년에 이르러, 모택동은 중공의 2인자 유소기를 타도할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더욱 큰 규모의 광풍폭우같은 계급투쟁이 벌어진다. 바로 문화대혁명이다.

 

당시 모택동은 북경시위에 불만이 컸다. "바늘로 찔러도 들어갈 곳이 없고, 물 한방울 스며들 수 없는" 독립왕국이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북경시위와 북경시정부를 '들어내겠다'고 결정한다. 모택동이 선정한 돌파구는 당시 북경시 부시장을 맡고 있던 오함이었다. 1965년, 모택동의 기획하에 상해의 요문원이 <신편역사극 <해서파관>을 논한다>는 글을 쓴다. 이 글에서 오함의 이 극은 우경기회주의분자가 원망하는 소리이며, 팽덕회사건을 뒤집고자 하는 것으로 반당반사회주의의 대독초라고 말한다. 이 글은 1965년 11월 10일 상해의 <문회보>에 발표되고, 얼마 후 전국에서 대비판의 바람이 불게 된다.

 

1966년 5월 16일, 문혁이 시작된 후, 오함은 "당중앙모주석을 공격"한 "반혁명수정주의분자"로 낙인찍힌다. 거의 매일 비투를 당했다. 당시 8살된 아들 오창(吳彰)이 나중에 회고한 바에 따르면, "나는 영원히 그들이 부친을 뜨거운 햇볕아레 고목나무에 무릎을 꿇리고 묶어놓았던 것을 잊을 수 없다. 목으로는 뜨거운 모래를 들이부었다. 그들은 돌아가며 가죽띠로 그를 때렸고,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뜯고, 그의 귀를 비틀었다. 각종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그를 모욕했다. 부친은 삼일이면 두번 정도 끌려나가 유투(遊鬪)를 당했고, 학교에서도, 구에서도, 현에서도, 여기에서도, 저기에서도 비투당했다."

 

1967년초, 오함은 살던 집에서 쫓겨나, 북경 영정문외의 한 구석진 거민루(居民樓)로 이사갔다. 거기서도 발코니의 등자(凳子, 등받이 없는 의자)에 서서 하루에 수차례 '청죄(請罪)'해야 했다. 1967년 가을, 오함등을 북경시위당교에 모아 노동개조에 참가시킨다. 슬래그를 골라내고, 쓰레기를 치웠다. 그 동안 계속 얻어맞았다. 옛 상처가 아물기도전에, 새 상처가 생겼다. 어떤 때는 맞아서 입으로 피를 흘리기도 했다.

 

하루는, 한 무리의 폭도가 오함의 집으로 돌맹이를 집어던지며, 오함을 욕했다. 오함의 처인 원진(袁震)이 참지 못하고 이런 말을 한다: "너희는 적을 대하는 것보다 심하게 한다. 오함은 적이 아니다." 바로 이 몇 마디 말때문에, 원진도 노동개조대에 끌려가서 갖은 고초를 겪는다. 그녀의 두 다리가 마비되었는데, 적시에 치료를 받지도 못한다. 14살짜리 양녀 오소언(吳小彦)은 부득이 매일 성의 남쪽에서 30리길을 자전거타고와서 그녀를 돌봐야 했다. 1969년 3월 17일, 원진은 병이 너무 심해지자 병원에 가는 것을 허락받는다. 그리고 다음 날 병원에서 사망한다.

 

1968년 3월 오함은 "반도" "특무"로 체포된다. 구금기간동안 그는 머리카락이 다 뽑혀나가고, 가슴은 맞아서 울혈이 졌다. 1969년 10월 11일, 돌연 어떤 사람이 오함의 자녀인 오소언, 오창을 병원으로 데려간다. 오누이가 병실에 들어섰을 때, 전안조(專案組)의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 "너희 부친이 오늘 아침에 죽었다." 두 아이는 졸지에 놀라서 멍해진다. 조금 지나서 둘은 방성통곡을 한다. 그들 둘은 돌아가신 부친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게 해달라고 요구하지만, 허락하지 않는다. 그저 오함이 남긴 약간의 유물만 받아온다. 오함의 유골은 지금까지도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1975년 8월, 부친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오소언은 전안조에 서신을 써서, 3가지를 요구한다: (1) 오함에 대하여 결론을 내려달라; (2) 오함의 유골을 돌려달라; (3) 집에서 압수해간 서적을 돌려달라. 며칠 후, 오소언이 체포된다. 전안조는 그녀의 발에 각료(脚鐐)를 채우고, 그녀가 울지 못하도록 수면주사를 놓는다. 그녀는 앞니가 모두 나가고, 이마에도 구멍이 났다. 1976년 9월 23일, 오소언은 약을 먹고 자살한다. 나이 겨우 22살이었다.

 

결론

 

오함은 1949년 11월 북경시부시장이 된다. 중공의 고관이라 할 수 있다. 문혁전에 모택동이 일으킨 여러번의 지식인을 숙정하는 활동에서, 그는 항상 남을 숙정하는 사람이었다. 문혁이 되자, 그는 제일 먼저 숙정당하는 지식분자가 되고, 일가 3명이 목숨을 잃는다.

 

속고, 사람들을 해치고, 결국 자신이 해침을 당하고, 마지막에는 유골조차 남기지 못했다. 이것은 오함의 비극이다. 또한 중공체제하에서의 중국지식분자의 비극이다. 오늘날까지, 이 비극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