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미,러,중,남,북의 5개국 교과서는 어떻게 서로 다르게 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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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한국/한중관계

2020. 10. 25.

글: 현혁당(炫赫堂)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중국, 미국, 북한, 남한, 여기에 소련의 일부 군대가 한반도에서 3년간 격렬한 전투를 벌인다. 백만의 생령이 도탄에 빠지며 결국 다시 북위38도선으로 되돌아와 지금까지 대치하고 있다. 각 나라 국민의 기억 속에서 60여년전의 그 전쟁은 각국이 서로 다른 명칭인 "항미원조" "625전쟁" "한국전쟁"과 "조선조국해방전생"으로 불리고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한반도가 평화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오늘, 그 세계를 뒤흔든 전쟁에 대하여 각자의 역사기술은 전쟁사 및 이데올로기에 대한 대결이 깊이 관련되어 있다. 여러 쪽의 얘기를 듣게 되면 사실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중국, 미국, 러시아, 북한, 남한은 각각의 교과서에서 한국전쟁을 어떻게 기술하고 있을까?

 

미국

 

교과서명: <세계역사>

작자: William J Duiker, Jackson J. Spielvoge (펜실베니아주립대학 역사학자)

출판사: Thomson Wardsworth

판본: 제5판

(미국의 공립,학교는 통일된 역사교과서를 채용하지 않는다. 이 글에서 참고한 고등학교 역사교과서는 현재 미국에서 가장 많이 채택된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중 하나이다. 미국의 고등학교는 개략 고1때 <세계역사>를 배운다. 한국전쟁에 대한 부분은 '아시아에서의 냉전'에 포함되어 있다)

 

한국전재은 냉전이 동아시아로 확산되는 것을 도왔다. 1894-1895년의 청일전쟁후, 조선은 이 중국의 속국에서 점점 일본과 러시아가 장악하는 것으로 전락한다. 1905년 일본은 러시아를 물리친 후, 조선을 일본제국에 병합시킨다. 그리고 1945년까지 계속된다. 제2차세계대전때 연합국이 선언한 목표중 하나가 바로 조선을 일본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었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기 전날, 소련과 미국은 38선을 경계로 이 국가를 두개의 서로 다른 점령구로 나누기로 합의한다. 그들은 처음에 한반도에 평화를 회복시킨 후 전국총선거를 거행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소관계가 악화되면서 한반도에는 두 개의 독립된 정부가 들어선다. 하나는 북방의 공산당정부이고, 다른 하나는 남방의 반공산당정부이다.

 

두 정부는 군사분계선을 따라 대립하고 긴장상태가 유지된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군대가 남한으로 침입한다. 그들의 행동은 분명히 스탈린의 허락을 받은 것이다. 트루먼정부는 즉시 미국해군과 공군에 한국을 지원하도록 명령하고,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결의를 통과시켜 회원국이 공동으로 침략에 맞서기로 결의한다. 유엔은 중국의 자리를 북경의 신정부에 주지 않았고, 소련은 항의를 표시하기 위해 이번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9월이 되어, 미국의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지휘하에, 유엔군부대는 38선은 넘어 북진한다. 목적은 한반도를 통일시키는 것이고, 단일한 비공산당정부를 성립하는 것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유엔군부대가 중국변경의 압록강에 접근하면, 중국의 간섭을 불러올 것을 우려했다. 다만, 맥아더는 그에게 중국이 대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러나 11월, 중국의 지원군부대가 북한의 편에 서서 무력으로 간섭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유엔부대를 격퇴하고, 남쪽으로 밀어냈다. 비록 전쟁은 계속되었지만, 최초의 38선 분계선 부근에서 밀고당기는 방위선이 최종적으로 형성된다.

 

많은 미국인에 있어서, 중국이 한국전쟁에 간섭한 것은 아시아에서 공산주의를 퍼트리려는 명확한 증거로 보았다. 최근의 자료도 모택동은 당시에 아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고 인식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만 사실상, 중국이 참전한 원인은 아마도 많은 정도에서 적대적인 미국이 그들의 국경선앞에 주둔하면 아마도 국경을 넘어 공격할 수도 있다고 여겼던 것같다. 맥아더는 당시에 여전히 공개적으로 중국의 동북지구를 폭격해야하고, 공산중국을 공격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는 중국의 우려를 더욱 강화시킨다.

 

어찌 되었건, 한국전쟁의 발발은 중국에 있어서 특히 불행이었다. 북한이 남한을 침입한 후, 트루먼 대통령은 즉시 미군 제7함대에 명을 내려 타이완해협으로 진출하게 한다. 이를 통해 중공이 대만으로 진격하지 못하게 막았다. 더욱 불행스러웠던 것은 전쟁은 서방의 신중국정부에 대한 입장을 강화시켜, 중국은 20년이라는 시간동안 주요자본주의대국으로부터 고립된다. 미국은 계속 대만의 국민당정권을 중국인민의 유일하고 합법적인 대표로 인정했고, 그들이 유엔에서 지위를 차지하는 것을 지지했다. 그 결과, 중국은 각종 형식의 경제와 기술원조를 받을 수 없었고, 부득이 완전히 소련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중소양국은 1950년 우호동맹조약을 체결한다.

 

러시아

 

교과서명: <외국최신역사>(제5판)

작자: 아 슈빈

출판사: 모스크바 더로파출판사

판본: 2008년 제5판

(이 책은 러시아교육및과학부가 추천하는 전일제학교 9학년에 사용하는 교과서이다)

 

제2차세계대전후, 한국은 두 개의 점령구로 분열된다: 소련과 미국의 점령구. 국제조약에 근거하여 외국군대가 철수한 후에 전국총선거를 실시해야 했다. 다만, 공산당과 친미역량이 전세계에서 대항하는 상황하에서,이들 조약은 이행되지 못했다. 철군전에, 소련은 북방에 자신의 김일성독재정권을 부식(扶植)했고, 미국은 남방에 자신의 이승만정권을 부식했다.

 

1948년, 한국은 두 개의 국가로 분열된다; 북방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남방의 대한민국. 두 정권은 모두 반대파를 진압하고, 무력으로 전체 반도를 탈취하려고 준비했다. 1950년 6월, 북조선군대가 남방으로 침입한다. 그리고 정식으로 그들은 이승만군대의 공격에 반격하기 위한 것이라고 선언한다. 공산당분자는 남조선의 수도 서울을 점령했다. 그리고 계속 전진하고자 한다. 8월, 남조선군대의 손에는 겨우 반도남부의 면적이 넓지 않은 부산기지만 남았다.

 

유엔의 다수 성원국은 북조선의 공격을 침략으로 보았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무력으로 침략자에 대응하기로 결정한다. 소련은 이 결정에 반대표를 던지지 않았다. 소련대표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하지 않은데 항의를 표시하기 위하여 이 회의에 결석했다. 1950년 9월, 주로 미국인으로 구성된 유엔군이 북조선군대의 후방 인천에 상륙한다. 공산당분자는 할 수 없이 황급하게 철수했다. 그들은 서울을 빼앗겼을 뿐아니라, 자신의 수도 평양까지 빼앗긴다.

 

1950년 10월, 미군의 선두부대는 조선북부국경까지 접근한다. 미군은 거의 전국을 점령했다. 스탈린과 모택동은 공산당세력이 실패하는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중국은 지원군을 조선에 파견하기로 선언한다. 실제로 이 나라에 진입한 백만이상의 중국군대는 미국인을 38선분계선으로 밀어내고자 했고, 전투가 벌어진다. 1951년에서 1953년까지, 서울과 평양 사이에서 피비린내나는 진지전이 벌어진다. 어느 한측도 전선을 돌파하지 못했다. 수십만명이 사망한다. 미국공군은 잔인하게 북조선을 공습했고, 심지어 중국까지 공습한다. 이런 공격에 반격하기 위하여, 소련의 조종사가 비밀이에 참전한다. 1953년 7월, 정전합의가 체결된다.

 

한국

 

교과서명: <국사>

(여기에서 한국전쟁의 원인과 영향을 소개한다. 한국전쟁을 한국에서는 "6.25전쟁"이라고 부른다)

 

1. 6.25전쟁의 배경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한 후, 김일성등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의 지지를 받아 실권을 장악하고, 독재체제의 기초를 건립하기 시작한다. 이와 동시에 그들은 민족주의자를 숙청하고, 민족주의이념을 탄압하여 빠른 시간내에 북한을 공산화시킨다.

 

1946년 2월, 김일성은 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조선임인민위원회는 토지개혁법령, 중요산업국유화법령등을 반포하여, 공산주의체제의 기초를 강화한다. 그리고 1948년 9월 북한공산정권을 건립한다.

 

북한공산정권은 소련과 비밀리에 군사협정을 체결하여, 군사력을 증강시키며, 대한민국을 침략할 준비를 한다. 다만 당시 한국은 각지에서 소란과 파업등이 일어났고, 사회가 아직 완전히 안정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리고 정당과 사회단체는 각자 생각이 달랐고, 정치계는 혼란상태였다.

 

2. 북한의 남침

 

북한은 한편으로 남침준비를 강화하며, 다른 한편으로 겉으로는 한국과의 평화공존을 희망한다고 했다. 이를 통해 남침의 의도를 은폐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은 38선을 넘어 남침을 개시한다.

 

국군은 무기의 낙후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수호할 결심을 하고, 용감하게 북한공산군과 전투를 벌인다. 다만 병력과 장비의 부족으로 국군은 대규모의 공산칩입에 부득이 작전상 후퇴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정부는 공산군의 침략을 피하기 위해, 대전,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철수한다. 그리고 부산을 임시수도로 삼는다.

 

6.25전쟁이 개시된 후, 나이가 아직 어린 학생들도 자유를 지키기 위해 펜을 놓고 군에 들어온다. 그리고 국군과 함께 용감하게 싸웠다. 많은 청년들은 군대를 지지하고, 최전선에 섰다.

 

북한공산군의 칩입으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긴급히 회의를 소집한다. 그리고 북한을 침략자로 확정하고, 철수를 요구한다. 이와 동시에 유엔은 한국에 파병결의를 한다.

 

국군과 연합군은 인천상륙을 계기로 반격을 개시한다.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다. 이 기회에 통일의 숙원을 실현하기 위해,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공산군을 물리친 후, 북한경내로 진격한다.

 

국군은 유엔군과 계속 진격하여 압록강변에 이른다. 통일이 눈앞에 왔을 때, 중국군대가 개입하여 부득이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은 대량의 군대를 동원하여 인해전술을 펼쳤고, 남으로 내려왔으며 한때 서울을 다시 점령한다. 국군과 유엔군의 분투로 서울을 다시 수복하고, 그후 전선은 38선주위에서 교착상태를 이룬다. 전쟁은 공방이 계속되는 도잇에 정전회담도 시작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정전합의를 체결한다(1953년 7월)

 

3. 6.25전쟁의 결과

 

북한이 일으킨 6.25전쟁은 자유와 평화에 대한 도전이었고,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무수한 국민이 이번 전쟁에서 생명과 재산을 잃는다. 이번 전쟁에서, 한국은 모두 150만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냈고, 무수한 전쟁고아와 이산가족을 만들어 냈다. 

 

이번 전쟁을 통하여, 한국은 토지가 황폐해지고, 공장, 발전소, 건물, 교량, 철도등 경제시설은 철저히 파괴된다. 인원과 물질의 손실이 아주 컸을 뿐아니라, 정신적인 상처도 마찬가지로 컸다. 남북간은 이 전쟁으로 인하여 엄중한 적대정서가 형성되었고, 그 결과는 평화통일을 실현할 수 없게 만들었다. 쌍방은 오랫동안 대치상태를 이어갔고, 민족의 비극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중국

 

교과서명: 고중역사선수3 <20세기의 전쟁과 평화>

편저: 과정교재연구소, 역사과정교재연구개발센터

주편: 오위(吳偉)

출판사: 인민교육출판사

판본: 2007년 2월 제2판

 

1. 조선전쟁의 발발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소양국은 원래 일본식민지였던 조선에 진입하여 일본군의 항복을 받는다. 쌍방은 북위38도선을 항복접수분계선으로 하여, 남북 두 개의 점령구가 형성된다. 미국의 부식하에 1948년 5월 조선남부에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이 성립되고, 9월, 소련의 지지하에, 소련북부에서 김일성을 국가원수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성립된다. 조선반도에 두 개의 서로 대립하는 정권이 수립된 것이다.

 

20세기 50년대초, 미국은 소련을 우두머리로 하는 사회주의진영을 자신들이 세계의 패권을 차지하는데 최대의 장애로 여겼다. 미국이 보기에, 조선반도의 충돌은 미국의 조선반도에서의 이익을 위협할 뿐아니라, 더더욱 "소련이 일으킨 전세계적 전쟁의 제1단계"라고 보았다. 조선에 대한 무장간섭을 진행하기 위하여, 미국의 동아시아에서의 이익을 유지 확대하기 위하여, 또한 이를 기회로 전세계에서 자신의 패권정책을 추진하기 위하여, 사회주의진영에 대한 포위와 봉쇄를 강화한다.

 

1950년 6월 25일, 조선내전이 발발한다. 조선인민은 신속이 서울을 점령하고, 남으로 진격한다. 한국군대는 계속 패퇴했다. 이는 미국의 강렬한 반응을 불러온다. 미국은 소련대표가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결석한 것을 이용하여 조선문제를 토론한다. 안전보장이사회를 조종하여 북한을 '침략자'로 규탄하는 결의를 통과시킨다. 그리고 한국을 무장원조하겠다고 선언한다. 또한 제7함대를 타이완해협에 진주시켜, 중국내정에 간섭한다. 

 

같은 해 8월, 조선인민군은 이미 남부의 90%이상의 토지와 인구를 점령했고, '유엔군'과 한국군을 동남해안일대로 몰아넣었다. 패국을 만회하기 위하여, 맥아더의 계획하에 미국은 동아시아의 기동병력 5만명을 모아 500대의 비행기와 300척의 군함의 지원하에 9월 15일 돌연 조선반도 중부의 인천에 상륙한다. 그리고 조선인민군 남진부대의 퇴로를 차단한다. 조선전장에서의 대비에 변화가 발생한다. 9월 28일, 미군은 서울을 점령한다. 10월 다시 "38선'을 넘어 평양을 점령한다. 미군은 금방 전화를 중국북한변경의 압록강변까지 끌고오고, 중국동북지구를 폭격하여, 중국의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하였다.

 

2. 항미원조(抗美援朝), 보가위국(保家衛國)

 

1950년 10월, 김일성은 모택동 주석에게 긴급지원전보를 보낸다. 중국에서 출병하여 도와달라는 것이다. 국가안전을 보호하고, 사회주의국가가 외래침략과 간섭에 저항하는 것을 돕기 위하여, 중공중앙정치국과 중앙주요지도자들은 신중한 고려를 거쳐 중국인민지원군을 조직하기로 결정한다. 10월 19일, 사령관 팽덕회의 지휘하에, 지원군은 3로로 나누어 압록강을 건너 항미원조작전을 시작한다. 지원군은 적군이 경적(輕敵)하고 병력을 나누어 위험을 무릅쓰고 진격한 약점을 이용하여, 전후로 2차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평양을 해방시키며, 미군을 '38선' 이남으로 쫓아낸다. 이후 쌍방의 전선은 기본적으로 "38선"부근으로 안정된다. 3차례의 상호 공격과 수비의 대규모 전투를 진행하게 된다.

 

1951년 7월, 소련의 건의하에, 교전쌍방은 조선전쟁 정전협상을 시작한다. 이때부터 조선전쟁은 한편으로 협상하며 다른 한편으로 싸우고, 싸우고 쉬고를 계속하는 새로운 단계에 들어선다. 지원군과 조선인민군은 수량상의 우세와 사기가 높았다; 미군은 기술장비에서 명확히 우세했고, 제공권과 제해권을 장악했다. 지상부대의 화력과 기동능력도 아주 강했다. 다만 미군은 사기가 낮아서, 대규모반격전을 전개할 힘이 없었다.

 

전쟁과 협상테이블에서 계속 힘겨루기를 하다가, 1953년 7월 조선정전협정이 최종적으로 체결된다. 협정에서는 쌍방이 조선에서 일체의 적대활동을 정지하고, 북위38도선부근의 쌍방실제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기로 하며, 협정발효우 60일내에 전쟁포로를 송환하기로 한다.

 

3. 조선전쟁의 영향

 

조선전쟁은 제2차세계대전이후 동서방 양대진영의 대립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대규모의 국부전이다. 주요참전국 및 동북아의 국제정세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조선반도의 분열국면을 가속화했다.

 

조선전쟁에서, 신중국은 세계의 최강대국가인 미국과 3년전쟁을 치렀고, 미군의 불패신화를 타파했다. 미국이 전쟁을 통해 아시아의 사회주의국가를 말살시키려 했던 기도는 철저히 실패로 끝난다. 신중국은 제국주의세력이 전화를 집앞까지 끌고 왔을 때 어쩔 수 없이 '보가위국'을 위해 항미원조전쟁을 진행했다. 

 

북한

 

중학교재

 

1. 남조선의 조선침략의 전쟁준비

 

(1) 정치생활의 파시스트화

 

1948년 12월 1일 <국가안보법>을 만든다; 1949년초 <신문간행물법>을 만들어 완전히 여론과 출판의 자유를 말살한다; 다시 <국방경비법>(1948년 7월), <국군조직법>(1948년 11월), <병역법>(1949년 3월)등 기타 일련의 반동법률을 만든다. 이를 통해 전면적으로 파시스트통치기구의 괴뢰체제를 확립한다.

 

(2) 혁명역량진압

 

첫째, 민주주의정당과 사회단체조직의 활동을 완전히 금지한다.

 

1949년 9월에서 10월의 기간동안, 강제로 132개의 정당과 사회단체조직을 해산시킨다.

 

둘째, 제주도인민의 항쟁을 진압한다.

 

미국 군사고문단 로버트의 지휘하에, 미제국주의와 남조선괴뢰군대는 1948년 제주도인민의 반항투쟁을 진압하며 7만여명을 도살하여 전체 도민의 4분의 1을 죽인다. 전체 도의 400여 마을중 295개마을 약 1만여명의 주민이 완전히 불에 타서 재로 남는다.

 

셋째, 여수군인의거를 진압하다.

 

여수군인의거를 진압하기 위해, 1948년 10월 미제국주의와 남조선괴뢰군대는 비행기, 탱크와 군함을 동원하여 5000여호의 주민의 집을 불태우고, 야만적으로 6천여명의 무고한 백성을 도살한다.

 

(3) 전쟁준비를 위한 '원조'

 

미제국주의는 <상호방위원조법>(1949년)과 <군사원조쌍방협정>(1950년 1월)을 제정한다. 특히 1950년 2월, 미국국회는 남조선에 대한 <원조법>을 통과시킨 후, 추가로 남조선에 대한 직접군사원조를 확대한다. 다른 한편으로 모든 원조자금은 북한침략의 전쟁에만 사용했다.

 

(4) 괴뢰군대의 확대

 

남조선괴뢰군대는 개편전에는 겨우 5개여단이었는데, 1949년 연말 무장역량이 이미 8개보병사단과 1개 장갑연대, 2개의 독립대대, 6개의 105밀리곡사포대대로 증가된다. 그외에 수천명의 해군, 공군부대와 5만명의 전투경찰부대를 보유했다. 그후 1950년 6월까지 남조선괴뢰군대는 15만명으로 증가한다.

 

미제국주의는 계속 군사원조를 증가했고, 대규모로 남조선에 군함, 비행기, 탱크등 전투무기와 전투기재를 제공했다

 

(5) 남조선군사기지화추진의 강화

 

군용도로, 항구, 비행장의 건설과 개조공사를 추진하고, 중요한 지구에는 영구적인 군사시설을 구축했으며, 38선 전역에 참호등 방어공사를 축조했다.

 

(6) 고의적인 무장도발을 진행

 

미제국주의는 1947년부터 계속 무장도발을 진행한다. 1949년에만도 1,863차례의 무장침범이 있었다.

 

1949년까지, 미제국주의는 조선에 대한 무장침범중에서, 남방괴뢰부대의 81보뎡사단과 수도사단의 대대, 중대, 호림부대, 백골병단등 연대를 동원했고, 사단규모의 병력을 투입했으며, 심지어 특수부대, 해군과 공군까지 동원한다.

 

1949년 미제국주의는 이미 북한에 대한 무장진공계획의 준비공작을 마쳤다. 그러나, 남방괴뢰군대는 38도선의 무장침범중 계속하여 참패를 당했다. 그리하여, 미제국주의와 남방괴뢰정권은 부득이 '북벌계획'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수정해야만 했다.

 

2. 북한을 침략한 전쟁

 

(1) 로얄의 '북벌계획'에 대한 지도

 

1950년 1월, 미국 육군성장관 로얄은 남조선에 들어와 괴뢰군대의 북벌계획을 지휘했다.

 

(2) 맥아더의 지시

 

1950년 2월, 맥아더는 역적 이승만과 괴뢰군대의 총참모장을 미국극동사령부로 불러, 조선진격의 구체적인 지시를 내린다.

 

(3) 비상경계령반포

 

1950년 6월 9일, 11일과 13일, 미제국주의는 각각 <특별조사경비령> <비상경비령>과 <예비비상경계령>을 반포하고, 38선과 남조선전역에서 삼엄한 전쟁분위기를 조성한다.

 

(4) 덜레스의 진격지시

 

1950년 6월 18일, 덜레스는 미국대통령 트루먼의 특사로 남조선에 들어와, 미국군사고문단과 남조선괴뢰군대의 고위장교들을 데리고 38선일대를 시찰한다. 그리고 38선의 방어공사에서 최종적으로 북벌작전계획을 승인한다. 다음날, 덜레스는 이승만괴뢰집단에 진격지시를 내리고, 6월 25일 북으로 진격하기로 결정한다.

 

이를 보면, 미제국주의는 북으로 진격하기 위하여, 세밀한 계획과 충분한 준비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마침내 1950년 6월 25일 북방을 향한 침략전쟁을 일으킨다.

 

3. 전쟁기간, 미제국주의는 우리의 공화국을 제거할 험악한 마음을 가졌다.

 

(1) 일체의 침략세력을 동원하다.

 

첫째, 미제국주의이 침략군대

 

1950년 6월 25일 미제국주의는 남조선괴뢰군대를 전쟁에 투입한 후, 6월 26일, 전체 전선에서 미국해군해병대를 출동시킨다. 6월 27일 미국대통령 트루먼의 명령에 따라, 전면적으로 미국해군과 공군부대를 출동시킨다. 

 

둘째, 유엔군대를 조종한다.

 

1950년 7월 7일, 미제국주의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조종하여, 소위 북방의 '침략'을 이유로, 유엔군을 결성한다. 그후 미제국주의침략군과 함께, 미국을 따르는 15개국가(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에티오피아, 프랑스, 컬럼비아, 룩셈부르크, 뉴질랜드, 터키, 타이, 필리핀, 남아공, 그리스, 벨기에)의 용병이 조선침략전쟁에 개입한다.

 

셋째, 일본군국주의의 무장침략세력이 조선전쟁에 참가하다

 

1950년 7월 27일 영국로티어통신 보도에 따르면 2만5천명의 일본침략군의 무장역량이 조선전쟁에 참가했다. 

 

(2) 현대무기와 전쟁기재의 사용

 

전쟁초기, 미제국주의는 B-29를 위주로 한 각종 비행기 1,500여대를 동원한다. 그러나 전쟁의 최후단계에는 약 1만여대를 투입한다. 그리고 세균무기, 화학무기등 대량살상무기도 사용한다.

 

(3) 군비지출과 군수물자

 

조선전쟁기간동안 미군의 군비지출은 200여억달러이다. 군수물자는 개략 7,300만톤이상이 소모된다. 태평양전쟁시기의 11배이다.

 

(4) 가장 야만적이고 가장 잔혹한 전쟁수단

 

첫째, 부정당한 침범이다.

 

둘째, 대규모상륙작전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때, 미제국주의는 태평양지구의 육해공군부대를 모조리 동원하고, 지중해함대와 미국을 따르는 15개국가의 군대도 대규모로 작전에 투입된다. 우리의 인민군용사들은 겨우 4문의 대포와 1개중대의 역량으로 5만여명의 병력과 300여척의군함 및 1000대의 비행기를 상대해야 했다. 월미도에서 3일간 힘들게 막아내어, 인민군대의 전략적후퇴를 통해 역량을 보존할 수 있게 해주었다.

 

셋째, 대규모의 집중진격

 

미제국주의는 부대의 원산근해의상륙작전에 협조하기 위하여, 1211고지일대에 대규모로 미친듯한 공세를 퍼붓는다.

 

넷째, 초토화작전

 

당시, 유엔군사령관인 클라크는 1952년 8월 공화국 북반부의 78개도시를 '지구상에서 소멸시키겠다'고 큰소리치며, 군대에 무차별공습과 포격을 가하도록 명령한다. 평양시에만 42만7천여발의 폭탄과 네이팜탄이 떨어진다.

 

(5) 미제국주의의 치욕적인 참패와 정전협정

 

미제국주의는 전선에서 침략의 야심을 달성하지 못하자, 협상을 통해 실현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염치없는 군사외교책략을 쓴다. 1951년 6월 우리측에 정전협상을 요청하여, 협상을 통해 그들의 침략목적을 달성하고자 한다. 소위 '영광의 전쟁'을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협상이 결렬되자, 미제국주의는 즉시 원자탄을 사용하겠다고 협박했고, 최후의 대규모의 미친듯한 진격을 진행한다. 그들은 '행동이 교섭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한편으로 새로운 공세를 펼치고, 다른 한편으로 간첩집단을 이용하여 우리 당과 정부를 분열시키고 전복시키려 했다. 그러나, 미제국주의와 남조선괴뢰정권의 모든 악독한 계획은 우리에 의해 여지없이 분쇄되었다.

 

(6) 조선반도 북반부와 남반부에서 살해된 무고한 생명의 인원수

 

북반부: 수십만명, 남반부: 100여만명

 

(7) 투하된 폭탄, 포탄수량

 

평균 평방킬로미터당 18개의 폭탄, 포탄이 투하됨. 평양시에 투하된 폭탄과 네이팜판의 수량은 평양시인구총수에 상당했다. 

 

(8) 건물, 전답과 문화유적이 입은 파괴와 약탈

 

전쟁기간, 북반부의 8700여개 공업과 기업, 60여만호의 주택, 5천여곳의 학교, 수천개의 병원, 수만헥타르의 논밭과 6700여곳의 문화유적이 파괴된다. 남반부는 전쟁이 개시된 4개월동안 50여개 도시가 파괴되고, 12,400여개의 마을이 잿더미로 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