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군(怨軍)"과 "수군(瘦軍)": 요(遼)나라가 멸망하기전에 만든 기이한 두 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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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2020. 10. 26.

글: 엽서도(獵書徒)

 

요나라의 마지막 황제 천조제(天祚帝) 야율연희(耶律延禧)는 망국지군이기 때문에, 자연히 전통적인 사학자들이 망국지군에게 준비해놓은 일련의 평가를 받는다. 그리하여 천조제는 후세의 사서에서 반드시 잔폭불인(殘暴不仁), 혼용무능(昏庸無能)한 이미지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이미 검증할 수없게 되었다. 그러나, 천조제가 요나라가 여진의 금나라에게 멸망하기 전에 조직한 두 개의 기이한 군대를 보면, 그 황제는 최소한 천마행공(天馬行空)의 상상력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첫번째 기이한 부대는 "원군"이라 한다.

 

<금사.곽약사전>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요나라는 요동인을 병사로 모집하였는데, 여진에 원한을 갚게 하겠다는 의미로 원군(怨軍)이라고 이름짓는다. 곽약사가 총사령관이 된다."

 

1116년, 발해인 고영창(高永昌)은 동경유수(東京留守) 소보선(蕭保先)을 죽이고, 스스로 대발해국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응순(應順)이라 하며 요동의 50여개주를 점령한다. 천조제는 재상 장림(張琳)을 보내 토벌했으나, 심주(沈州)에서 고영창을 지원하는 금나라병사(여진병사)에게 패배한다. 천조제는 연왕(燕王) 야율순(耶律淳)을 도원수로 임명하여, 요동의 기민(饑民)을 모집한다. 그리고 여진에 원한을 갚는다는 의미로 '원군'이라 이름붙인다. 각각 전의영(前宜營), 후의영(後宜營), 전금영(前錦營), 후금영(後錦營), 건영(乾營), 현영(顯營), 건현대영(乾顯大營), 암주영(巖州營) 모두 8개영으로 나뉘었고, 모두 28,000명이 소속되었다.

 

아쉬운 점이라면, '원군'은 거란족의 요나라에 대한 원한이 여진족에 대한 원한 못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평소에는 백성을 약탈하여 지방에 해를 끼치고, 사기도 낮았다. 또한 한때는 반란도 일으킨다. 그후 여진군대와 맞부딛쳤을 때는 즉시 궤멸한다. 결과적으로 보면, 확실히 원한은 갚았다. 그러나 대상은 기대했던 여진이 아니라 거란족인 요나라 자신이었을 뿐이다. 안타깝게도 돌맹이를 들어 자기 발등을 찍은 셈이 되었다.

 

두번째 기이한 부대는 "수군"이다.

 

1122년, 여진군대는 요나라의 중경(中京)을 함락시킨 후, 대군을 계속 남진하고, 선봉은 송정관(松亭關), 고북구(古北口)일대에 이른다. 요나라의 천조제는 여진의 금군이 남경(지금의 북경)으로 직접 쳐들어올 기세인 것을 보고, 야율순등에게 명하여 남경을 유수하게 하고, 자신은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황급히 도망친다.

 

이때, 요나라는 실질적으로 남쪽의 북송과 국경을 마주하는 농업지구의 약간의 영토만 지배하고 있었다. 일찌기 거란기병을 절대주력으로 하던 군대는 이미 거란귀족이 한인을 지휘하는 군대로 변해버렸다. 병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야율대석(耶律大石)은 요동지구에서 피난온 거란족과 해족(奚族)들 사이에서 신군(新軍)을 모집한다. 그러나, 사병들이 가난한 피난민에게서 끌어모았기 때문에, 빼빼말라서 볼 품이 없었다. 요나라도 충분한 양식을 공급해줄 수 없어서, 스스로 해결하게 하였다. 그러다보니 현지백성과 격렬한 충돌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이들을 극도로 미워하는 현지백성들은 이 군대에게 별명을 붙여준다. "수군(瘦軍)" 수(瘦)는 빼빼말랐다는 뜻이다.

 

당연히 '원군'이든 '수군'이든 모두 요나라가 금나라의 압도적인 군사적 우세하에서 마지막 발버둥을 친 것이다. 예견했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을 뿐아니라, 오히려 백성들에게 침중한 부담과 재난을 가져와 실제로는 여진족의 금나라가 더욱 순조롭게 정복할 수 있게 만들고, 거란의 요나라의 쇠망을 가속화했다. 역효과가 난 것이다.

 

그러나, 더욱 괴이한 일은 병사들이 빼빼마르고 볼품이 없었으며, 인원수가 수천에 불과했던 "수군"도 야율대석의 지휘하에, 가볍게 북송의 동관(童貫)이 이끄는 10만송군을 무찔렀다는 것이다.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