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희지(王羲之)의 생졸년(生卒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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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남북조)

2020. 11. 23.

글: 송지견(宋志堅)

 

왕희지는 59세때 죽었고, 그는 58년간 살았다. 이 점은 사서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고, 아무런 이견이 없다. 다만 왕희지의 생졸년에 대하여는 서로 다른 견해가 있다. 첫째, 303년에 태어나서, 361년에 죽었다는 것이고, 둘째, 307년에 태어나서, 365년에 죽었다는 것이며, 셋째, 321년에 태어나서 379년에 죽었다는 것이다.

 

왕희지는 도대체 몇년도에 태어나서, 몇년도에 죽었을까? 우리는 그와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들과 비교해서 답안을 찾아보기로 한다.

 

355년 즉 영화11년, 왕희지는 왕술(王述)의 아래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회계내사(會稽內史)의 관직을 사직한다. 왕희지는 원래 왕술과 나란히 이름을 떨쳤다. 이전에 그는 그의 아들들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회조(懷祖)보다 못하지 않다. 그런데, 그와의 지위는 차이가 있다. 그건 너희들이 탄지(坦之)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회조'는 왕술이고, '탄지'는 왕술의 아들이다. 왕희지가 왜 이렇게 말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아들 응지(凝之), 휘지(徽之), 조지(操之), 헌지(獻之)는 왕술의 아들 왕탄지와 동년배들이라는 것이다.

 

373년, 간문제(簡文帝)가 사망했을 때, 환온(桓溫)은 병력을 펼치고 진황실을 전복시키려 했다. 다만 사안(謝安)과 왕탄지가 진황실의 중신이므로 환온은 "사안과 왕탄지를 불러, 그들을 해치려 했다" 이런 위기에, "왕탄지는 아주 두려워하며, 사안에게 계책을 물었다. 사안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나중에 환온과 만났을 때, "왕탄지는 땀이 흘러 옷을 적셨고, 수판을 거꾸로 들었다. 그러나 사안은 담담하게 자리에 앉았다. 사가들은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왕탄지와 사안은 처음에 나란히 이름을 떨쳤는데, 그제서야 사람들은 왕탄지가 사안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왕탄지가 사안과 나란히 이름을 떨쳤다는 것은 사안과 그가 동년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두 가지 사례를 보면, 왕탄지를 중간으로 하여 참조해볼 수 있다. 그는 왕응지형제들과 동년배이고, 사안과도 동년배이다. 당연히 이는 사안과 왕탄지 및 왕응지등의 연령이 별차이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진서>에 이런 기록도 있다. 왕헌지는 "일찌기 형인 왕휘지, 왕조지와 함께 사안을 방문했다. 두 형은 속사를 여러가지 얘기했는데, 헌지는 단지 날씨만 얘기했다. 그들이 나가고 난 후에 손님이 사안에게 왕씨형제의 우열에 대하여 묻는다. 그러자 사안이 대답한다: '막내가 낫다' 손님이 왜 그런지 묻는다. 사안이 대답한다: "길인은 말이 적다. 그가 말을 적게 해서 안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 사안은 황희지의 이 몇몇 아들보다는 나이가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희지와 왕술이 나란히 이름을 떨치고, 사안과 왕술의 아들 왕탄지가 나란히 이름을 떨친다. 왕희지가 사안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은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만일 그가 321년에 태어났다면, 사안보다 오히려 1살이 적게 된다. 그가 왕술과 나란히 이름을 떨쳤는데, 그보다 살많은 사안은 오히려 그의 아들과 동년배인 왕탄지와 나란이 이름을 떨친다면 좀 말이 되지 않는 것같다.

 

왕희지가 321년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아래의 두 가지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첫째, <진서> 왕희지본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왕희지의 서예는 "노년이 되어서 비로소 훌륭해진다(暮年方妙)". 그 근거는 "왕희지의 서예는 처음에 유익(庾翼), 치음(郗愔)만 못했다." 나중에 왕희지가 "장초(章草)로 유량(庾亮)에게 답신을 보냈는데, 유익이 깊이 탄복한다." 그리고 왕희지에게 서신을 써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옛날에 백영(伯英)의 장초(章草) 십지(十紙)를 가지고 있었는데, 강을 건너면서 이리저리 떠돌다가 잃어버렸다. 항상 그 글이 뛰어나다고 감탄하고 있었는데, 그대가 형님에게 보낸 답신을 보니 환약신명(煥若神明), 돈환구관(頓還舊觀)입니다" 이를 보면, 최소한 유량과 유익이 살아 있을 때 왕희지의 서예는 유익이 '깊이 탄복할'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유량은 340년에 사망했고, 유익은 345년에 사망한다. 만일 왕희지가 321년에 태어났다면, 그가 유익으로 하여금 '깊이 탄복하게' 한 답신은 늦어도 바로 유량이 죽은 해 즉 340년에 쓰였을 것이다. 그때 왕희지는 나이 겨우 19살이다. 영화9년(즉 353년) 난정에서 모였을 때, 왕희지가 쓴 천하제일행서라는 <난정집서>를 썼을 때 그의 나이 겨우 32살이다. 그렇다면 '노년이 되어서 비로소 훌륭해졌다'는 말과 맞지 않는다.

 

둘째, 왕희지가 영화11년 관직을 사임할 때 그의 아들에게 한 그 말은 그의 아들들이 관직에서 왕탄지만 못하다고 질책한 것이다. 그에게는 7명의 아들이 있는데, 이름이 알려진 아들이 5명이다. 첫째인 현지(玄之)는 일찌감치 요절했다. 나머지는 차례대로 응지, 휘지, 조지, 헌지이다. 가장 어린 왕헌지가 그 해에 12살이다. 만일 왕희지가 321년에 태어났다면, 그가 관직을 사임했을 대 34살이 된다. 이는 왕희지가 22살때 이미 아들 7명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럴 가능성이 있을 수 있는지느 말하지 않더라도, 설사 그가 16살때 자녀를 낳았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매년 1명씩 낳았다고 하더라도, 그가 관직을 사임하는 해에 현지의 나이가 겨우 18살이고, 응지 이하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무슨 관직에서 잘나가고 아니고를 따질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왕희지가 321년에 태어나서, 379년에 죽었다는 설은 성립하기 어렵다.

 

나머지 두 설은 비교적 근접해 있다. 303년에 태어났다면, 사안보다 17살이 많고, 지둔(支遁)과 손작(孫綽)보다 11살이 많다. 그렇게 보면 353년 난정에서 모일 때, 왕희지는 딱 50세가 된다. 355년 관직을 사직할 때 그는 이미 52살이 된다; 307년에 태어났다면 사안보다 13살이 많고, 지둔이나 손작보다 7살이 많다. 그렇게 되면 353년 난정에서 모였을 때 왕희지는 46살이고, 355년 관직을 사임할 때 그는 이미 48세가 된다. 그러나, 두 설은 너무나 근접해 있어서 고르기가 더욱 어렵다.

 

소흥의 문물애호가 장소영(張笑榮)이 소장하고 있는 왕희지의 처인 치선묘비(郗璇墓碑)를 보면, 묘주인인 치선은 '승평2년 술오년 사월갑인월 삭칠일경신일이 죽었다'고 되어 있다. 당시 왕희지는 56세이다. 전문가가 이를 근거로 고증한 바에 따르면 왕희지의 생졸년은 303년-361년이 된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필자의 왕희지가 321년에 태어났을 리가 없다는 추리와 부합한다. 303년인지 307년인지의 모순도 함께 해결되어 버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