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황제즉위제도의 변천

댓글 3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초기)

2005. 8. 7.

청나라의 황제즉위방식은 크게 4단계를 거쳐 변화해갔는데, 바뀌면 바뀔수록 개악된 듯한 느낌이 있다.

 

첫째 시기. 귀족추대방식

 

누르하치의 후계자인 청태종, 청태종의 후계자인 순치제는 모두 귀족추대방식으로 황제에 올랐다. 전 황제의 사망후 8기의 주요 귀족들이 모여서 상의한 후 다음 황제를 추대하였다.

 

이 방식의 장점은 민주적이라는 점 이외에도, 당대의 가장 능력있는 자가 황제에 오른다는 것이다. 누르하치는 창업황제이긴 하지만 결국 만주족 귀족중 가장 능력이 있으므로 황제에 올랐던 것이고, 청태종 또한 누르하치의 4대패륵중에서 가장 능력이 있었으므로 황제에 올랐다. 순치제의 경우에는 본인이 가장 능력이 있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섭정을 맡았던 뚜얼곤과 지얼하랑은 당대의 가장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시기, 유조계위(遺詔繼位)방식

 

순치제의 후계자인 강희제, 강희제의 후계자인 옹정제(옹정제의 등극에 대하여는 말이 많으나, 정사를 기준으로 하는 경우)는 모두 선황의 유조에 의하여 황제에 올랐다.

 

이 경우의 유조는 사망직전 또는 직후에 황족과 중신들에게 유조를 낭독하는 방식으로 다음 후계자를 정했다. 순치제의 경우에는 후계자를 선임하면서 효장태후, 아담 샬, 그외 중신들의 의견을 들은 후 강희로 결정하고, 쑤오니, 어비롱, 수커하사, 아오바이를 보정대신(輔政大臣)으로 임명하였고, 강희제의 경우에도 신하들에게 차기 황제에 대한 의견을 물어본 적이 있었다.

 

나중의 함풍제가 동치제를 세운 것도 유지방식이었다. 함풍제는 사망하기 전날 유일한 자식이었던 동치제를 황태자로 명하면서, 8명의 대신을 고명대신(顧命大臣)으로 임명하였다.

 

세째 시기, 비밀입저(秘密立儲)방식

 

옹정제의 후계자인 건륭제, 건륭제의 후계자인 가경제, 가경제의 후계자인 도광제, 도광제의 후계자인 함풍제는 이 방식에 의하여 황제에 올랐다.

 

옹정제는 자신이 황위에 오를 때, 형제들간의 다툼이 너무 격렬한 폐단이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여 황제 1인이 비밀리에 다음 황제가 될 사람의 이름을 써서 귤갑(금갑)에 넣어 황제가 정무를 보는 정대광명(正大光明)이라고 쓴 편액의 뒤에 보관해 두고, 황제가 죽은 후 황족과 중신이 함께 꺼내서 확인한 후 다음 황제를 옹립하는 방식이었다.

 

이 방식은 청나라의 특유한 계위방식으로, 중국의 다른 황조에서는 선례가 없었다. 다만, 이 방식의 문제점은 황제가 혼자서 비밀리에 후계자를 정하게 되고, 검증의 기회가 없다는 점에서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청나라의 경우에도 보면, 건륭제는 비교적 성공적인 선택이었으나, 가경제의 경우에는 보통수준의 선택이었고, 도광제는 좀 잘못된 선택이었고, 함풍제는 아주 잘못된 선택이었다.

 

넷째 시기, 의지계위(懿旨繼位)방식

 

함풍제에게는 외아들인 동치제만 있었으며, 동치제는 자식이 없었고, 광서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함풍제 이후에는 비밀입저방식은 없었다.

 

광서제, 선통제는 서태후의 의지로 계승하였다. 중간에 광서제가 유폐되면서 잠시 단군왕 재의의 아들 부준을 보경제에 잠시 임명했던 적이 있다.

 

이들은 모두 아이신줴뤄씨이면서 모친이 자희태후의 여동생, 질녀 또는 양녀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서태후는 전형적으로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황제에 올렸으며 나이는 광서제 4세, 선통제 3세에 불과하였다. 청나라가 멸망의 길로 들어선 상태에서 이와 같은 서태후의 자기와 가까운 혈친을 챙기는 욕심으로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