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생각하게 하는 글/일반 시사

하얀불곰 2007. 7. 28. 00:24
‘유교적 권위주의’ 통치 방식의 대중조작


 

▲ 박정희의 종말과 잔재를 깨야 되겠다는 메시지를 담은 깨진 그림과 장례장면. ©만화 박정희

 
왜 또 박정희인가?
 
최초로 성공한 쿠데타 주범이고, 최장기 18년간 집권한 탈권자, 친일 구 기득권의 상징 인물인 박정희.
 
이 글은 박정희 문제를 그의 행적, 그것도 공인이나 공적 관심대상으로서 민족사에서 문제되는 박정희의 발자취를 쫓아 보려는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그리고 불가피하게 그에 대한 비판과 실체를 추적하여 논의하게 된다.
 
물론 나는 이미 다들 알고 있듯이 박정희에 대해 그의 공인으로서 행적이 반민족이고 반민주인 것으로서 평가하고 있다. 특히 친일파로서 박정희의 행적은 실세로 행세해 온 친일파의 행태와 같은 틀을 아주 벗어나진 못한다.
 
친일매국 기득권부류는 항일 운동과 민족자주와 민주화를 지향하는 인사와 당파를 박멸 말살시키는 공작으로서 자기의 기득권을 유지해 왔다.

나는 그러한 친일파의 헤게모니가 잘못되었다고 보는 시각에서 1950년대부터 평생을 두고 친일파문제를 연구해왔다. 물론 나와 정반대의 처지에서 박정희를 미화시키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먼저 내 입장을 분명히 해두려는 것이다.
 
박정희를 찬양하는 이론과 주장은 박정희가 살아있을 때부터 어린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시작해 각종 방식으로 각 계층의 사람을 대상으로 대중조작이 추진되어 왔다.
 
이 작업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공식으로 지속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죽은 후에도 그 여파와 여진은 각종 형태로 아직도 작용해 오고 있다.
 
일부 박정희 추종자라고 할 부류는 박정희 피살 후에도 꾸준히 자기 기득권보존과 자기 명망의 존재를 유지시키기 위해 박정희를 미화시키는 일을 해 온다. 지금은 일본의 극우 국수주의 부류가 노골적으로 여기에 가세하고 있다.
 
일본 극우로선 박정희가 자기들이 만들어 낸 작품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현재의 일본 황국사관(皇國史觀)을 맹신하는 추종세력의 정신적 정당성을 먹혀들게 하는 유력한 발판이 되기 때문에 박정희를 기특하게 보고 아끼고 있는 것은 다들 알고 있다.
 
박정희 찬양의 소리는 아직도 그 목소리가 크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만큼 그에 대한 우상화와 대중조작의 우민정책에 오염되어 있다고 하는 징상으로 나는 본다. 
 
박정희가 피살된 1979년 직후 일본의 월간지 <<세카이(世界)>>에 ‘한국에서 온 통신’이라고 해서 연재된 글이 있다. 이 연재는 당시에 크게 주목되던 안개 속에 묻힌 한국의 소식을 알려주고 있던 소식통이었다.
 
여기서 그 일부 인용함으로써 이 글을 시작한다(T K 생이란 가명으로 연재된 이 글은 한국 중원문화사에서 <<제5공화국>>이란 시리즈로서 황인이 번역 소개했으며 그 책을 인용했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드디어 독재자 박정희는 쓰러졌다. 그것은 27일 새벽 서울을 강타한 충격적인 뉴스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고 생각했다.
 
만주 등지에서 일본군 장교계급장을 달고 천황의 이름으로 중국과 한국 독립군을 토벌하는데 앞장섰다는 박정희! 뿐만 아니라 남조선 노동당의 군사부장이라는 어마 어마한 자리에 있다가 동료 노동당원을 고발하고 살아나서 자기 형의 친구 황태성을 빨갱이라고 하여 죽여 버린 잔인할 정도로 무서운 인물 박정희!
 
진짜 빨갱이는 박정희 자신이었으면서도 수많은 민주 인사들을 빨갱이로 만들어 내기 위해 잔인할 정도로 고문을 자행했고 정권연장을 위해 자기를 가장 도왔던 김종필 조카사위마저도 권좌에서 밀어냈던 사람이 박정희다.” (위에 든 <<제5공화국>>(1)1993년, 9쪽에서 인용함.)
 
결국 박정희의 문제는 우리 현대사에서 정리되어야 할 문제다.
 
1. 우선 그의 신격화된 우상이 있는 그대로 실체가 드러나야 한다. 그래서 먼저 인물 박정희를 정확하게 공인으로 조명해야 한다.
 
2. 박정희의 신화에 오염된 우리의 풍토를 바로 세워야 한다. 결국 해방 후 친일파가 60년을 자행해 온 우민정책과 수구언론의 대중조작의 극복문제이다. 일제하 40년과 합해 100년을 우리 민족정서와 의식을 오염시켜 온 누적된 찌꺼기 청소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 스스로의 손으로 반드시 해내야 한다.
 
3. 친일 구 잔재 청산은 결국 한국의 외세의존인 친일 반민족 - 반민주세력과 대결일 뿐만 아니라, 친일부류가 외세인 일본 극우-수구와 손잡은 현실에선 결국은 파시스트 침략세력과 싸움이 된다. 이것은 국제 민주, 인권, 평화 세력과 연대로 나가야 함을 뜻한다.
 
박정희 옹호세력은 그 내외의 실세를 총동원해서 지금은 민주개혁을 친북 - 좌경 - 용공 - 빨갱이로 까지 몰고 간다. 그들의 최고의 무기인 매카시즘의 수법과 그들의 힘을 총동원했다. 따라서 그들이 이전 못지않게 개혁에 대해 트집 잡고, 헐뜯고, 사실을 자기 멋대로 과장하고 변조 왜곡하여 반격하는 중상모략은 이미 진행 중이다.
 
1. 박정희 우상화가 성공한 이유와 배경
 
피살에 대한 동정과 ‘경제성장’에 기여했다는 허위과장이 먹혀들은 풍토
 
(1) 좌절된 혁명의 ‘원죄’가 낳은 바보놀이 공화국의 구도   
 
이제까지 가장 오래도록 집권한 한국의 권력자는 이승만과 박정희다. 두 사람 모두가 권좌에서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쫓겨나거나 맞아 죽었다. 이승만은 민중봉기로 타율로 퇴진해 미국으로 도망쳤다. 박정희는 장기집권으로 부패와 타락, 주변측근의 난맥 혼선으로 통치기능이 마비된 혼돈속에서 그의 가장 충실한 측근자에 의해 사살되었다.
 
박정희의 말로는 31년간을 집권한 도미니카 공화국의 도르이요 대통령과 유사하다. 그도 정보부장에게 암살되었다. 그런데 도미니카의 정보부장은 암살후에 카나다로 망명해 목숨을 부지했으나, 김재규는 그렇지 못했다. 그러나 여기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박정희의 사망후 신격화의 실마리는 혁명으로 퇴진하거나 망명한 것이 아닌 피살이지만, 피살당한 후 박정희가 키워놓은 박정희 2세격인 추종자가 이어받는 신군부 독재의 계속에 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박정희 그늘에서 해먹은 박정희 권력의 수혜자들이 고스란히 그 기득권을 보존 유지하게 된데 이유가 있다. 박정희를 우상화시켜 내세울 절체절명의 필요성은 그들 남겨진 부류의 생존조건의 유지란 절박한 그들의 이해관계때문인 것이다.
 
더구나 박정희 사후처리를 그 박정희 추종자인 신군부가 했기 때문에 독재자를 잔뜩 추켜세우고 온갖 찬사를 남발하는 국장을 통해서 국립묘지에 안장을 한 점에 있다.
 
박정희가 살아 있는 채로 권좌에서 쫓겨났으면 정치 심판은 물론이고 쿠데타에 대한 법적 심판을 반드시 거쳐야 했을 것이다.
 
이승만이 도망가는 것을 방치한 것은 관용이 아닌 역사감각 마비와 정치의식 빈곤이며 결국 이승만의 유산과 그 독재권력이 잔재를 청산할수 없게 했다. 그래서 우리의 정치인식을 백치상태의 수준으로 머물르게 한 것이다. 박정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또한 박정희에 대해서는 그가 총에 맞아죽었다는데 대한 일말의 동정이 그에 대한 엄정한 객관 비판과 역사 심판을 위한 의식을 마비시켰다. 이 점을 파고들어서 박정희 신격화를 위해 최대한 이용하고 지금도 이용해 오고 있는 무리가 구기득권부류이다.
 
친일파 아류로서는 박정희의 실체에 대한 객관 폭로로 국민대중이 눈을 뜨고 그 정체를 알게 될 때에 자기들의 처지가 어떻게 되리라고 하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목숨걸고 온갖 궤변과 왜곡 허위와 날조를 서슴치 않고 박정희 우상화에 발벗고 나서고 있다. 그것이 우리 민중정서에 먹혀 들었다.
 
박정희가 집권기간 내내 새마을과 유신정신을 나팔 불어대고 국민교육헌장으로 귀를 따갑게 하며 박정희가 내세운 유비무환(有備無患)이란 구호와 국가안보라는 주문에 혼을 빼았긴 세대들은 박정희가 이승만에 이은 국부이고 나라님이 라는 생각이 머리속에 자기도 모르게 박혀버린 것이다.
 
그래서 박정희를 비판하면 공자를 숭배하는 유생이 공자 욕하는 사람에게 달려들듯 광증발작을 하는 증세가 생기도록 최면해 놓는데 성공한 것이다.
 
(2) 박정희 장기 집권기간 그의 공범이 된 기득권부류
 
박정희가 20년이 가깝도록 지배하는 사이에 말단 교원이나 공무원이나 소시민은 ‘박정희 세상’을 운명으로 알고 받아들여 왔다.
 
한편 박정희세상에서 돈줄을 잡아 벼락부자가 된 탈세꾼과 투기꾼은 어느덧 재계의 유지가 되고 고분고분 적당히 순응하던 인테리는 분에 넘치는 출세도 했다.
 
박정희 권력의 수혜자들은 알게 모르게 엄청나게 불어나고 그들은 직접, 간접으로 독재권력에 자기도 수동적 소극적으로라도 협조, 합세함으로써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박정희 독재의 공범이 되었다.
 
이들은 대개 별볼일 없고 따지고 보면 큰 잘못도 없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박정희가 가득 들어앉아 있는 것이다. 살기 위해서 소심한 소시민의 비겁하고 치사한 삶을 이어온 것이 전부인데도 말이다.
 
그런데 막상 박정희가 꺼꾸러지고 보니 마음이 허전해지고, 자기의 설 땅이 없어진 것같게 앞길이 캄캄한듯 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새로운 변화에 겁부터 나고 껄끄럽게만 느껴지고 불안이 앞섰다.
 
안보가 흔들리는 것 같은 불안으로 잠이 안올 지경이 되었다. 여기에 그들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듯이 박정희 찬양의 나팔소리는 구세주의 복음처럼 들려 온 것이다. 이것이 일부 박정희 팬의 심리구조다.
 
별 볼일 없는 서민에게 박정희의 은덕이라고 해봐야 무엇인가? 그런데도 겁많고 소견좁은 생각으로는 박정희를 비판하고 부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보이는 것이다.
 
박정희 편을 드는 왕년의 유지와 아직도 돈줄과 명망가 행세를 하는 도둑들의 힘은 여전하니, 결국 그들의 눈치를 보게되면서 적당히 박정희 편의 줄에 서는 것이다.
 
한편 평생 박정희를 섬겨왔는데, 그 별이 떨어지니 허탈해서 어쩔줄 모르는 이도 있었다. 그런데 다시 박정희를 추켜세우는 붐이 일으니, 참으로 살판 난듯 겨우 정신을 차리고 박정희 편의 줄을 서는 사람도 상당수 있다.
 
박정희나 전두환 등을 추종해 온 사람들은 박정희의 ‘유교적 권위주의’의 통치 방식의 대중조작에서 중독이 되어왔다.
 
특히 충효라는 봉건 시대의 최고 가치관이 봉건잔재가 그대로 남아있는 한국풍토에선 민주시민의 정치의식을 지닌는 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효재의 <<분단시대의 사회학>>(한길사)에선 그러한 유형의 총치질서를 ‘가부장적 권위주의’라고 했다. ‘관료적 권위주의’란 표현과 함께 적절한 면이 있다.
 
박정희의 신격화가 먹혀들 토양에 기생하며 구기득권부류는 그들의 힘 있는 연줄을 대고 허약한 개혁정권의 약점을 들쑤시는데 성공하고 있다. 지역 편가르기의 박정희 전략전술은 아주 만능의 도깨비 방망이로 매카시즘 다음으로 먹히는 무기가 된다는 것을 알고선 구기득권 친일파 부류나 그와 한통속이 되는 부패세력은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
 
박정희의 신격화 거품의 정체는 바로 이러한 한국 독특한 배경을 가지고 구시대의 잔재란 토양에서 기생하고 있다. 그래서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처음부터 감정적이고 논쟁적이 된다.
 
그리고 결국은 개혁과 반개혁의 편 싸움으로 번질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가치선택이고 민족 - 민주에 대한 찬반의 갈림길이 될 수밖에 없다
 

 

②황국신민, 황군장교의 길


 

 
2.출세지향과 민족배반 - 시대 불운과 황국신민, 황군장교의 길
 
(1) 박정희가 사회인이 되는 일제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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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일제하에서 사범학교를 힘들게 나와서 초등학교 교원을 천직으로 알고 살았다고 하면 그의 살아 온 길은 달랐을 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에서 가정은 부질없다.
 
빈농에 가까운 가정인 박정희 집안의 형제는 그의 둘째형 박상희처럼 신간회의 독립운동노선에 찬성하고 나름대로 살려고 하고, 결국 해방정국에서 남로당원이 되어 미군정에 대항하다가 총살당한 사람도 있다. 박정희가 그 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보지만, 그는 일제하에서 결국 교원생활을 때려 치고 ‘긴 칼을 찬’ 출세를 위해 만주지역(중국동북)으로 간다.
 
만주에는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제국주의가 일찍이 만주철도의 이권을 장악해 군대를 주둔시켰고, 1931년 만주사변이라 하여 만주침략에 본격으로 나섰다.
 
1932년에는 ‘만주국’이란 일본관동군이 관리, 통제하는 괴뢰정권을 수립하였다. 이 괴뢰정권의 장교양성기관인 신경군관학교는 일본육사의 식민지 분교 격으로 박정희는 용케 이 신경군관학교 입학에 성공, 일본육사로 편입하여 일본제국하의 장교가 된다.
 
신경군관학교 입학에도 그의 나이가 지원적령기를 초과했기 때문에 여러 사람의 추천과 이면 배려가 있었다. 특히 그는 혈서지원으로 일본 왕에게 '진충보국(盡忠報國)'을 맹서하여 소원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 말은 박정희 전기의 일종인 최상천의 ‘알몸 박정희’에도 나온다. 그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그 이후 박정희의 행각을 보면 일본제국의 충성을 다하는 친일파가 된 것만은 확실하다.
 
여기서 이원섭이 쓴 글인 ‘황군장교 박정희의 꿈’에서 일부 인용해 참조한다.
 

“ ~ 다른 문제는 제쳐놓고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자. 일제시대 ‘황군’장교로 복무한 것만으로도 그는 국고로 기념관 건립을 지원할 만한 인물이 못 된다. 대구사범을 나와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있다가 일본제국의 중국침략기지인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반민족적이다.

 
‘진충보국 멸사봉공(충성을 다하여 나라(일본)에 보답하고, 나를 죽여서 국가를 받들겠다)’이란 혈서를 써 보내는 남다른 충성심을 과시한 끝에 ‘만주일보’에 크게 나고 입학에 성공했다. 사관생도 자질을 인정받아 일본육사에 편입하고 임관 후 독립군 토벌에 앞장선 그의 이력은 몹시 부끄러운 것이다. 조국 독립에 목숨을 바친 선열을 생각하면 더욱 할 말이 없다” (한겨레, 2001년 5월 11일 이원섭 칼럼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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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은 일본제국주의가 1945년 패전하기까지 15년 전쟁의 시작이 된 때이다. 이때에 박정희는 일본군국주의 침략정책에 편승한 것이다. 1937년에는 중일전쟁에 이어 1941년에는 진주만 기습으로 영.미에게 선전포고한다.

 
이 1930년대 중반기부터 조선내외 친일파가 극성을 떨고 조선안의 이른바 인텔리와 유지 그리고 기업가들이 자발이든 타율이든 친일매국의 길로 들어선 저주받은 시절이다.
 
특히 박정희가 택한 중국 동북지방인 만주는 연변(간도)으로 불리며 조선인이 일찍부터 정착해 사는 지역으로 조선인의 활동이 활발하던 지역이다.

일본 제국군대 출신들, 정권의 중추가 되다
 
박정희가 나온 만주군관학교는 이한림·강문봉·정일권·백선엽 들이 나왔다. 일본 제국군대 출신 인맥이  박정희 정권의 중추가 되었다. 그밖에도 ‘만주대동학원’이란 만주고등관리 양성기관은 박정희 밑에서 외무장관과 총리까지 올라가 박정희 피살 당시 총리로서 대통령 대행을 한 최규하가 나왔다.
 
만주건국대학에서 최남선은 교수가 되었고 그 학교를 나온 사람으로서 강영훈은 국무총리를 역임했으며 그는 지금도 최남선을 민족지도자로 변명한다.
 
강영훈은 인터뷰에서 "최남선은 조선민족의 장래를 위해 조선청년의 일본군대 지원을 권장했다"고 말했다.(2005년 9월 18일 추석날 방영한 만주친일파 등을 다룬 밤 9시 국정 텔레비전.)
 
이선근과 같은 친일파는 만주에서 ‘만몽논장’을 하면서 오족협화회(五族協和會) 대의원과 사무국장으로서 관동군에 군량미 비용으로 거금을 바쳤다. 이 기사는 사진과 함께 당시의 만선일보(滿鮮日報)에 게재될 정도로 유명했다. 그는 열성친일파로 박정희 집권 후에 그의 측근을 맴돌며 온갖 행각을 벌리고 전두환 집권 후에도 계속 전두환 찬양의 추태를 보인다.   
 
당시 분위기가 너도 나도 변절 투항을 해서 안일을 택하는 친일파가 번성하던 때이고 한편으로는 항일노선을 지켜내기 어려워서 결국 정절을 굽히고 민족노선을 배반하는 변절의 길을 택하는 이탈자도 나오고 있었다.
 
물론 박정희는 변절 전향이 아니고 출세를 위해 친일노선을 걸어간 자발적 친일로 간 매국노였다.
 
박정희의 해방 전 행적 
 
박정희는 신경군관학교에서 일본제국에 대한 열성과 충성이 인정되어 일본육사에 편입해서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다.
 

▲ 신경군관학교 2기생 예과 졸업식에서 박정희는 우등상을 받고 부상으로 부의 황제 명의의 금시계를 하사받았다. 대열 앞에서 생도 대표로 인사하는 사람이 박정희다. 졸업식장에서 재학생의 송사에 답하는 졸업생 답사를 낭독했는데, 그 답사 내용 중에는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휼륭하게 죽겠습니다."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滿洲日報 1942.3.24)

 

여기서 박정희의 연보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박정희 연보 -

 1917년 경북 선산출생.

 1925년 구미보통학교 입학.

 1932년 대구사범입학. 이 해에 일본제국의 괴뢰정권 만주국수립.

 1935년 5월 만주수학여행. 일본제국 지배 때 만주견문. 같은 해 김호남과 결혼.
 특히 당시 박정희는 성적불량으로 낙제를 겨우 면함.

 1937년 대구사범 졸업 후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부임.
 같은 해 큰 딸인 박재옥 출생.

 1939년 교직을 떠남.

 1940년 만주신경군관학교 입학(혈서지원으로 특혜 입학 허용).

 1942년 만주군관학교에 일제에 대한 충성을 인정받고 일본육사 3년 편입.

 1944년 일본육사 졸업 후 만주군 보병 제8단 배속, 중국항일군토벌종사.

 1945년 일제패망, 만군이탈, 북경에서 조선인 광복군에 편승,
 이 당시부터 친일행적 은폐.

 1946년 귀국 조선국방경비대 입대, 소위 임관 

 
 
(2) 해방 전과 해방 후 박정희의 처신과 행적
 
재미 원로기자인 문명자가 쓴 ‘박정희와 김대중(월간 말지 발간)’을 보면 박정희는 항일군 토벌을 나가게 되면 신이 나서 일본도를 움켜쥐고 “요오시~ 요오시~”하고 별렀다고 한다.
 
일본말로 “요오시”란 말 뜻 자체는 “옳지”하는 정도이나, 쓰는 분위기에 따라 마음먹은 일을 벼르는 의지를 나타낼 때도 있다. 그가 울적한 채 말이 없다가도 항일군 토벌에는 의욕과 열기를 내보였다고 하는데 자세한 것은 더 알기 어렵다.
 
물론 박정희의 친일행각에 대해선 그나 그가 집권한 후에 그를 보좌하는 기관에서 의도적으로 말소해서 남아있는 자료가 찾기 힘들다. 김형욱 회고록에는 박정희가 집권한 후에 내무부 치안국 정보과가 관리하는 파일에 박정희의 남조선 노동당 전력에 대한 자료를 말소하려고 정보부까지 동원했으나, 결국 기록 말소에는 실패했다고 한다. 지금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알아보고 싶다.
 

▲ 일본 육해군 총합사전 2판에 소개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력. 일본 이름이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로 기록돼 있다. 이 사전은 동경대학출판회가 2005년 8월15일 발간한 것이다.

 

1941년 박정희는 스스로 일본 이름인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로 창씨개명하여 명실상부한 일본제국군대의 장교로서 면모를 갖추고 일본의 대륙침략전쟁에 가담한다. 자발적 친일매국행각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나는 이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박정희의 정신구조가 골수까지 친일 황국사관에 물들고 일본정신을 숭배 추종하고 일본의 군관학교 선생이나 만주국주둔 관동군 참모 ‘세지마류조(瀨島龍三)’나 만주국 고위간부로 나중에 전범이 된 ‘기시노부스게(岸信介)’ 들을 철저하게 숭배 추종하는 점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는 평생 일본 제국군인의 정신으로 살았다.

 

“박정희는 인권과 민주주의는 꿈에도 믿지 않은 사람이다. 그는 대통령 재임 때도 일본 군가를 열창하고 일본의 극우 수구 인사와 접촉해 그들의 지도 자문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청와대 뒤뜰을 일본 관동군 기마승마복을 입고 거닐 정도로 일제관동군 장교(소위 나중에 중위?)시절을 그리워 한 사람이다(중앙일보사, ‘청와대 비서실’ 참조).

 
그러한 박정희의 행적은 공인으로서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는지 문제가 되는 것이다.
 

 

③풀리지 않은 수수께끼, 남로당과 박정희


 

 
3. 남로당과 박정희 : 역사에 남은 수수께끼, 이제는 밝혀라
 
(1) 여순병란(반란) 사건수사에서 박정희의 남로당 군사책 들통 나다
 
박정희가 1961년 반공을 국시 제1호로해서 쿠데타를 한다고 정권탈취에 성공한 후에 그가 민정이양 약속을 무시하고 대통령을 하겠다고 소장에서 한꺼번에 대장으로 별을 덕지덕지 달고 난후에 “나처럼 불행한 군인이 없기를 바랍니다”하고 떠벌렸을 적에는 참으로 어처구니없었다.
 
그런 불행한 군인이 싫으면 대통령이 되겠다고 악을 쓰고 나서지 말았을 것이다. 국민 누구도 그를 잘 알지도 못했고 대통령하라고 한 적도 없다. 그런데 별은 그렇게 따기가 어렵다는데 한꺼번에 공로도 없이 감옥에 갈 군사반란의 주범이 스스로 달고 그것에도 모자라서 대통령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러니 쿠데타의 목적이 박정희의 출세였고, 그는 부귀영화와  헛된 명성에 사로잡혀 살아온 것이 분명한 것이다. 정치가나 지사의 첫 번째 조건이 출세와 돈과 인연을 끊는 것이라고 함은 초등학교 선생을 하였으니 그가 잘 알만한데도 말이다. 
 
그런데 이 당시에 느닷없이 외국 시사주간지에 박정희의 공산당 전력이 터져 나왔다. 당시에 박정희 졸개들은 그 기사가 게재된 잡지를 몽땅 걷어서 씨를 말려 못 보게 했다.
 
그러나 당시 외국 공보원에 가면 그 잡지가 그대로 있어서 보려고 한 사람은 다들 보았을 것이다. 특히 대통령선거 유세에서 라이벌 후보인 전 대통령 윤보선 씨가 박정희 공산당 전력을 폭로한 것이다. 그런데 최고회의란 군정기관은 오히려 그러한 문제제기에 대해 매카시즘이라고 호령하고 위협했다.
 
1990년대 문화방송에서 이영신 각본으로 제3공화국이 방영되었었다. 실록으로 꾸민 것이어서 사건의 이면을 보는 것으로 인기 프로였다. 그 각본이 책으로 되어 나온 것이 이영신“대하정치실록 격동 30년”으로서, 그 제2부 - 제3공화국 (전편)2(고려원 1993년)의 문제부분을 49쪽 이하에서 인용해 본다.
 
1963년 대선당시 윤보선은 2월24일 전주유세에서 박정희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며 그의 남로당(공산당) 전력을 문제 삼았다.
 
 “ ~ 박의장(박정희)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구정치인과 자기와 대결을 민족 이념을 망각한 가식의 자유민주주의 사상과 강력한 민족이념을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사상의 대결이라고 했는데, 누가 민족주의자며 누가 비민족주의자라는 것과 누가 민주주의신봉자이며 누가 민주주의신봉자가 아니냐는 것, 그리고 누가 공산당이며 누가 공산당이 아닌가 하는 것은 각자의 경력을 캐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외다!”
 

▲ 당시 이를 대서특필한 <동아일보> 호외(1963.10.13).

 
결국 윤후보의 폭로에 대하여 최고회의라는 군정권력기구의 공보실장 이후락(후에 정보부장)은 ‘국가안보’를 해치는 발언으로 몰아세웠고, 최고위원이란 군장교인 홍성철 위원은 ‘매카시즘의 악랄한 수법’이라고 성명을 발표하며 법 조치를 취하겠다고 협박했다.
 
한편 박정희의 집 안방에서는 박정희의 아내가 남편의 침묵으로 고민하며 절간을 찾아가 기원하며 마음을 달랬다고 이 실록을 기록하고 있다(위에 이영신의 책 51쪽 참조) 
 
박정희는 자신을 빨갱이 몰이인 매카시즘의 피해자인양 논쟁을 다른 방향으로 유도하여 인심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돌리는데 성공했다. 박정희가 오히려 동정표를 모으는 결과가 되었다고 한다.
 
박정희가 남조선노동당 군사책인 것이 여순사건 수사에서 들통이 난 것은 사실이다.
 
여기서 만일 들통이 안 나고 그대로 은폐된 채 지나쳤으면 박정희는 어떤 일을 했을까? 그가 스스로 자진해서 사실을 밝히진 아니했었으니, 그 귀추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추측해 볼만한 것이기도 하다는 말에도 일리가 있다.
 
박정희는 자기가 남에게 전향을 강요하면서도 자신의 전력에 대한 해명과 사상문제에 대해선 한 번도 명쾌한 해명을 해 본적이 없다.
 
이런 사람이 대통령도 되고 그를 영웅으로 찬양하는 자유는 있으면서 멀쩡한 사람이 친일기득권 실세의 비위를 상하게 했다면 빨갱이로 만들어 내는 세상이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2) 박정희의 남조선노동당 입당경위에 대한 은폐
 

▲ 박정희는 재심과 '확인장관' 등의 선처 끝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사진은 박정희 등 69명에게 감형 또는 형집행정지를 명한 육군 <고등군법회의 명령 제18호) 사본(총5매 짜리). 붉은선 부분이 박정희 관련내용임.

 
박정희가 남로당 당원으로서 군사부장(군사총책)이란 것은 여순사건 수사과정에서 드러나서 그가 남로당 프락치를 밀고 또는 제보하여 준 대가로 자신은 사형을 간신히 면하고 무기로 선고된 후에 형 집행을 면하고 불명예 제대하였다.
 

▲ 군사재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은 박정희를 '형집행정지'로 풀어준 이응준 육군본부 총참모장(육군 소장). 그는 일제하 일본군 대좌(대령) 출신이다.

사형을 코앞에 두고 살아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불명예제대 후에 육군정보기관에 무급 문관(군무원)으로 근무하다가 1950년 6.25전쟁이 시작된 후에 소령계급을 가지고 복귀된 것으로 돼 있다.

 
그런데 박정희의 노동당입당에 누가 입당보증을 섰는지, 언제 무슨 동기로 친일파인 박정희가 공산당으로 목숨을 걸고 싸우기로 작정해서 육사생도대장의 요직으로까지 진출해 조직을 확장했는지, 포섭당한 인물이 누구이고 그것이 군에 준 영향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등 규명할 일이 많다.
 
여순사건에서 남로당 계열임이 폭로되어 처형된 군인장교들은  누구누구이고, 그에 따른 군대조직을 어떻게 개편하게 되었는지 소상하게 밝히는 일 자체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그가 쿠데타 후 활동할 당시에 전 남로당계 인물이 주변에 계속 인연을 두고 그의 파트너가 되어 온 것을 정리하는데 그친다.
 
(3)박정희 주변 남로당 출신 인물들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는 남로당원으로 1946년 대구사태 당시에 미군정 경찰에게 사살 당했다. 바로 그 박상희는 김종필의 장인이다. 김종필이 박정희의 조카사위라고 함은 바로 이 점이다.
 
박상희의 단짝친구인 남로당원인 황태성은 박정희가 남로당 입당을 할 당시 입당 보증인이라고 한다. 남로당은 입당과 정식당원이 되는 절치와 수련과정이 복잡하고 어렵다.
 
입당보증인이 확실해서 심사를 통과해야만 후보당원이 된다. 일정기간 후보당원으로서 투쟁경력을 쌓아야 만이 정식당원이 된다. 그러한 심사관문도 문턱이 높고 고개가 많다. 그런데 박정희가 어떻게 그러한 고위직에 발탁될 정도로 인정받게 되었는지 아직 밝혀진 기록을 찾지 못하고 있다.
 
작년에 나온 정운현기자의 ‘실록 군인 박정희’에도 아주 조심스럽게 여순 사건에서 문제된 좌익(공산당) 경력문제를 당시에 보도된대로 자료를 꿰어 맞추고 있다.
 
황태성은 1961년 5.16쿠데타로 박정희가 집권에 성공한 후에 북에서 밀파되었다. 그 이유는 박정희·김종필과 접선에 있다고 하는데, 여기서 서울신문에 황태성의 조카사위인 권상능의 말을 인용해 해설한 기사를 보자.
 
2001년 6월 1일자 대한매일(현 - 서울신문) 15면 기사를 보면 황태성의 조카사위로서 당시 황태성 사건에 연루돼 2년간 감옥살이를 한 권상능은 당시 발간된 월간‘민족21’과 인터뷰에서 황태성이 남파된 것은 박정희와 접촉이 목적이었으며 1961년 8월경 황태성은 박정희와 김종필 등과 접촉을 시도, 공식적인 만남은 불발인 채 1963년 처형됐다고 한다.
 
김형욱은 당시 미국정보기관이 황태성 사건에 대해 정보를 입수해 한국 측 정보관계자나 박정희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일설은 황태성이 사전 비밀조직 준비 중이던 민주공화당 조직 훈련을 지원했다고도 한다. 진실은 아직도 안개 속에 가려진 사실로 남아있다.
 
가장 문제가 된 인물은 박정희와 대구사범 동창이고 하숙 친구인 일본규슈제대 출신인 엄민영과 관계다. 엄민영은 일제고문 합격자로 군수를 한 친일파인데 해방 후 남로당 당원이 되었다.
 
1950년 6.25 전쟁 직후엔 당시 북에서 남파된 역사학자 전석담 밑에서 서울지역 대학책의 중요 요직을 담당 활동하다가, 미군이 진격해 들어오자, 먼저 처자를 평양에 보내고 그 후에 월북하다가 동두천근처에서 미군포로가 되어 거제도에 수용되었다가 그 후 석방된 자이다.
 
엄민영이 왜 포로가 되었는가 하면 노동당원은 전시에 ‘무장 빨치산’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무장한 부대원으로 월북하다가 미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그는 박정희가 집권할 때에 내무장관과 주일 한국대사를 했고 박정희의 정치고문이었다. 그의 규슈제대 출신과 인연이 되어 박정희 주변에서 활약한 이는 공화당 의장 백남억이다.
 
백남억은 대구대학 교수로서 공화당에 가담하는 것으로 돼 있으나, 원래 그는 일제 때 조선총독부 철도국 직원이었다가 해방 후에 부산 철도국 운수과장으로서 총파업을 지도 선동한 주모자로 활약했다.
 
그로 말미암아 미군정의 수배인물로 돼 도망쳐서 잠적했다가 후에 대구대학교수가 된 인물이다(정영진, ‘폭풍의 세월 - 대구10-1사건을 일으킨 사람들과 그 이데올로기’(한길사,1990년 ,297쪽 참조). 그가 박정희의 공화당 간부가 되었다.
 
김형욱의 ‘회고록’을 보면 김성곤 공화당 재무위원은 남조선 노동당 경북도당 재무책이었다고 한다. 그는 박정희처럼 내무부 친안국 정보파일에 기록된 그의 남로당 참여기록을 말소하려고 갖은 노력을 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이런 박정희 주변인물 중에서 박정희 재임 중 사고가 난 것은 엄민영이다. 그는 주일 대사시절에 조총련을 통해 재북 처자와 접선을 하려다 미국정보기관이 포착해 자살을 하려했고 일본 게이요대학 병원에서 사망했다. 문명자 기자는 박정희가 엄민영을 어떻게든 살려내라는 간곡한 부탁도 허사로 독극물 중독으로 사망했다고 밝히고 있다.
 
김성곤이 박정희가 의도한 삼선개헌에 반대, 배신했다고 해서 정보부에 끌려가 수염이 뜯기는 소동이 벌어진 것은 널리 알려진 소문으로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엄민영의 자살사연은 당시에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출신은 교수를 비롯한 각계의 명사 중에도 있다. 그래도 그들이 박정희 밑에서 활약하며 전력 때문에 문제된 적은 없다. 그렇지 않고 박정희 반대편에 서는 사람은 생트집이 잡혀 좌경 용공으로 신세를 망쳤지만.
 
여기서 박정희의 쿠데타 이전(1961년)까지의 연보를 정리한다.
 
 
⊙1947년 소위에서 대위로 승진 사관학교 중대장 근무.

⊙1948년 소령진급.10월 여순반란사건 발발,11월 남로당간부사실이 발각되었으나 수사협조(밀고)로 처형모면하고 석방.

⊙그 후 6.25전쟁 전까지 육군정보국에 근무하면서 보도연맹원 처리안 기획.

이 사실은 미국정보공개에 의한 문서조사에서 드러났다. 월간 ‘말’2001년 5월호에 실린 이도영의 ‘제주도민 예비검속은 이승만 피신을 위한 정지작업’이란 글을 보면 박정희와 김종필은 전쟁 후에 벌어진 민간인 집단학살의 주역으로 그 육군본부정보국 작전 과장이었다. 이 사실은 피살자 유족이기도 한 제주도 교사인 이도영의 미국에서 공개된 문서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1950년 박정희 소령지위 회복. 중령진급. 김호남과 이혼하고 육영수와 결혼.

⊙1953년 정전협정 체결 후 준장으로 진급.

⊙1957년 제7사단장.

⊙1958년 소장진급.

⊙1960년 부산군수기지사령관. 2군 부사령관.

⊙1960년 4-19혁명으로 전쟁전후의 민간인학살과 친일파죄과에 대한 조사 성토로 불안을 느낀 박정희 등 친일파의 박혁명 음모가 싹틈.

⊙1961년 군사반란인 5-16 쿠데타를 일으킴. 
 
 
(이후의 연보는 대개 공지된 것이므로 생략함)
 

 

④정적제거, 음모의 명수 박정희


 

 
4. 박정희의 쿠데타와 그 이후 행적
 
(1) 5.16쿠데타와 미국 중앙정보부
 
한국군대의 통수 작전권이 1950년 전쟁발발 후 대전협정으로 미군에게 이양된 이후 그것이 근본적으로 틀을 바꾸진 않았다. 물론 지금 한미연합사령부란 지휘체계가 수립되어 있다. 그렇지만 군대가 미국 통제 또는 주재 하에 있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한국군은 미국고문관이 각 요소에서 배치돼 있고 군부대의 이동을 함부로 한국군지휘관 재량으로 할 수 없다. 이것은 상식이 아닌 엄연한 사실이다.
 
그런데 어떻게 박정희가 3000여명으로 수도서울로 진격 쿠데타를 해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고, 그것이 미국군부나 미국정부에서 인용하는 일이 되었을까?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의문이다. 박정희와 김종필이가 아무리 천재적인 모사꾼이고 쿠데타 전술의 달인이라고 해도 한국의 1961년의 군사실정에서 박정희의 쿠데타의 성공은 의문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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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한가지 참고자료가 있다. 일본의 군사법령과 군대문제에 전문가인 역사학자 오오에 시노부(大江志乃夫)가 지은(<<戒嚴令>>(岩波新書, 초판1978년-1992년)을 보면 미국초대 중앙정보부장 알렌 덜레스가 영국 비비시방송에 출연해 재임 중에 가장 성공한 공작으로서 한국의 1961년 5-.6쿠데타를 들고 있음을 소개한 것이 있다(위에 든 책, 28쪽.)
 
위의 사실은 더 깊이 자료를 찾아보기 어렵지만, 우리에겐 심각한 의문을 던져주는 문제임에는 틀림없다.

(2) 박정희의 일본인맥 
 
박정희는 집권전후에 그의 정권 장악과 유지에 있어서 철저하게 만주시절의 일본군인으로 돌아가서 만주시절의 인맥에 의존했다. 우선 한국인으로서 만주중심으로 활동한 친일파를 모아서 정권 핵심부에 드려 앉힌 것을 비롯해서 만주국괴뢰정부와 인연이 있으면 더욱 신뢰하고 친근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친일파이면 다른 사람보다 신뢰했다. 1963년 대통령선거 운동에서 밀가루 등 양곡을 뿌려서 유권자를 자기편으로 하였다. 그런데 그 외국양곡의 변칙도입에서도 장기영이라고 하는 일제시대 은행출신을 이용했다. 일제친일과 인연이 있는 백두진도 뒤에 고위층으로 국회의장까지 시켜가며 써먹었다. 이 점은 이승만의 친일파 신뢰에 뒤지지 않은 행적이다.  
 
박정희가 쿠데타로 부상할 당시에 일본에 생존한 만주시절의 최고의 인물은 기시노브스게 수상과 세지마류조 관동군 참모중령이었다. 기시에게는 일찍이 1961년 미국 방문길에 인사차 방문 밀담하면서 믿을 만한 일본인 추천을 의뢰해 일본의 흑막이 되는 인물의 추천을 받았다. 기시는 세지마와 함께 박정희가 가장 숭배한 인물이다.

다음에 세지마류조는 관동군 참모 중령으로 일본군의 박정희 소위의 상관이었다. 그는 일본 육사와 육대의 수재로 알려진 신화적 인물로서 야마사키 도요코의 <<불모지대>>란 소설의 주인공이고, 나카소네의 최고 자문역이고 박정희와 거래할 당시엔 이토추 상사간부로서 강화조약을 체결한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나라와의 뒷거래를 하는 브로커로서 한일관계에서도 그가 큰 역할을 했다. 그는 박정희에 이어 전두환과 노태우 3개 군정대통령의 고문이고 스승으로서 한국의 국정지도에 임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일본 극우 우익의 흑막이고 깡패 두목인 고다마요시오(兒玉譽士夫)와의 관계이다. 그는 2등 수교훈장까지 대한민국정부로부터 받았으니 할말이 없다. 여기에 정건영(鄭建永)(일본 이름 아리모리 다카시(有森隆))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재일동포로서 1천 5백 명을 거느리는 깡패두목이고 그러한 인연으로 고다마의 그늘에서 활약했다. 그가 한국외환은행의 보증으로 수십억엔(圓)대의 토지매입과 그것이 박정희 재산이라고 한일 두 나라 국회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박정희는 죽을 때까지 친일파이고 그리고 나아가서 일본사람이었다. 그 일본사람도 제국시대의 군국주의자로서 일본 왕의 신하였다고 하는데 한국의 치부가 되고 있다.  

 
(3) 박정희의 정적(政敵)처리 - 라이벌을 제거해 온 음모의 명수
 
박정희의 정적 제거의 기술은 당장에는 눈에 안 띠지만 어느 시기가 지나면 깜짝 놀랄 정도의 결과로 나타나기도 했다. 특히 그는 주변측근의 한시적 이용과 사후 제거의 기술에 능수 능란했다. 함께 쿠데타를 일으키고 쿠데타의 둘러리를 섰던 장도영, 송요찬, 박창암으로부터 하급 부하격인 원충연까지도 반혁명음모로 제거해 감옥에 보내고 폐인을 만들었다.  
 
쿠데타로 쫓겨난 장면 총리도 쫓겨난 것으로 부족해서 법정에 세워서 망신을 주고 웃음꺼리를 만들어서 속이 터져 죽게 했다. 윤보선 처리는 운 좋게도 박정희 남로당 전력을 들치는 것을 트집 잡아서 오히려 윤보선이 매카시즘으로 모함한다고 해서 동정표를 받았고 그 후에  윤보선을 필요하면 적당히 재판정으로 끌어낼 듯이 법률의 올가미로 당겼다, 늦췄다 하다가 자연사하는 것을 기다렸다. 이 공작은 성공작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의 집권 후에 가장 골칫거리는 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김영삼과 김대중이었다.
 
여기서 함석헌에 대해선 그가 내던 <<씨알의 소리>>잡지를 폐간도 시키고 잡아넣기도 했으나, 꼿꼿해서 부러지는 체질이 아니고 밟히곤 일어나곤 했다. 별별 모략중상을 하고 섹스 스캔들로까지 정보기관을 동원해 몰아갔으나 성공하진 못했다.  

 

▲ (왼쪽) 26세 때의 장준하 모습. (오른쪽) 해방 직전인 1945년 8월 중국 산동성 유현의 어느 사진관에 노능서와 김준엽, 장준하가 차례로 섰다(왼쪽부터). 이들 셋은 학도병으로 참가한 후 일본군 병영을 탈출, 중경 임시정부까지의 긴 여정에 올랐다.


그런데 장준하에 대해선 참지 못했던 것 같다. 장준하가 일본군대 탈출과 임정에 가담한 광복군출신이란 민족사에 빛나는 ‘금뺏지’는 박정희의 일본제국군대 하급장교인 민족반역자란 렛델과 대조가 되어서 그의 화통을 터지게 했을 것이다. 결국 장준하는 의문의 죽음을 했다. 아마도 앞으로 정보기관의 비밀문서가 공개되는 날에는 그 비밀도 밝혀질 것이다.
 
김영삼은 결국 초산세례란 테러도 당하고 1979년 국회에서 제명까지 시켜서 매장하려고 했으나, 결국  박정희 자신이 부마사태로 목숨을 내놓았다. 김영삼은 섹스 스캔들로 간단하게 추락시킬 수도 있다고 예측했었으나, 워낙 그가 ‘바람둥이’로 알려져서 그의 섹스스캔들 문제는 국민대중이 듣고는 웃어넘기는 정도가 되어서 먹혀들지 않았다.
 
박정희가 일생일대 가장 미워하고 두려워한 적수는 김대중이다. 빨갱이로 만들려고 온갖 공작이 진행되었으나 실패했다. 결국 납치 살해하는 공작도 재일한국 중앙정보부 간부인 김동운의 지문이 범죄 현장에서 발각됨으로써 수포로 돌아갔다.

김대중 제거의 특명은 전두환에게 이어졌으나, 광주를 피바다로 만들고 내란죄로 법정에 세웠다. 그런데 성공직전에 전두환은 김대중의 미국망명을 허용했다. 릴리대사의 회상록에 의하면 레이건대통령이 전두환의 방미조건으로 김대중의 미국망명을 조건으로 내세워서 전두환에게 갈고리를 걸었다고 한다. 전두환이 충견노릇을 하기에는 두툼하고 강한 목걸이 이외에 갈고리로서 김대중을 미국에 두는 미국정책에 양보한 것이다.

이처럼 전두환에게 신뢰를 두지 않은 것은 전두환이 박정희의 충복이긴 했으나, 1979년 12.12 반란을 준비하면서 일본대사에게는 사전에 보고했으나, 미국에겐 거리를 둔데 대한 불신에서 연유하기도 했을 것이다.   
 
박정희의 라이벌에 대한 제거책술은 결국 자기 코앞에 있는 두 사나이를 충복으로 착각함으로써 ‘남잡이, 제잡이’식으로 스스로가 치명타의 자살 꼴을 불러드렸다. 정보부장인 김형욱을 망명토록 놓쳐버린 것이고, 김재규를 궁정동에서 여인환락의 술자리 파트너로 너무나 오래도록 혹사시켜 모멸하고 그의 매국적 치부를 보여주어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만든 실수라고 할까?

결국 독재자는 그의 측근 심복의 칼을 받는다는 것을 현대사에선 도미니카 도루이요 대통령이 정보부장 총에 맞아죽은 사례가 있고, 고대 로마제국의 시저는 그의 사생아인 브르터스에게 칼을 맞아죽는 운명에서 보여주고 있다.

 
 
⑤박정희의 꿈, ‘병영-감옥국가’


 

 
5.쿠데타의 동기와 목표
 
(4) 박정희가 쿠데타로 만들려고 한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박정희는 해방 전 일제하에선 조국을 배반하고 일제 왕에게 혈서로 충성을 맹서했다. 해방 후에는 남로당에 비밀입당하여 공산당원이 됨으로써 또다시 배반의 길을 걸었다. 그것이 들통나자 다시 남로당에 자기가 권장 가입시킨 동료를 배신해 그들을 총살대로 몰아세우고 자신만은 살아남았다.

그러다가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하에서 매카시스트가 발상 기획 시행한 보도연맹원에 대한 불법적인 집단학살이 유족의 청원으로 문제되어서 국회에서 조사가 진행되자 당황했다. 결국 학살의 진상이 규명되면 이승만 정권하의 매카시즘 하수인의 설 땅이 없어지게 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들 학살에 관련된 범인들은 불안과 초조 속에서 결국 최악의 사태를 뒤집는 비상수단으로 쿠데타를 자행하기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가 혼자의 힘과 구상으로 순수하게 친일파만의 이해관계를 동기로 쿠데타를 착수 실행한 것으로는 단정 할 수 없다. 다만 일부 친일파의 입지를 찾는 반혁명의 반동 쿠데타의 주역이 된 것만은 사실이다.  
 
한국의 군사정권의 우두머리들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 모두가 정보장교출신이다. 그들의 정치, 행정, 경제, 사회 등에 대한 제반 국책처리는 정보공안기관을 통해서 수행해 왔다. 여기서 군사정권의 성격과 실상을 드러낸 자료로 참고가 될 사항으로서 한 사례를 들어 보자.

1979년 박정희 최후의 잔치가 된 궁정동 안가 만찬에 참석한 당사자는 여인을 제외하고선 박정희, 김재규, 김계원, 차지철 등 모두가 정보장교 출신들이다.
 

1961년 5.16 쿠데타를 정당화하는 이른바 ‘군사혁명위원회’의 ‘혁명공약’은 반공을 국시 1호로 한다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쿠데타 당일부터 일제검거 대상을 보면 혁신운동과 민족통일운동, 노동운동과 사회운동, 민주적 학생운동과 진보성향의 인테리 등이었다.
 
물론 쿠데타의 직격탄은 헌법기관인 국회와 지방의회를 해체하고, 정당 사회단체를 강제해산시키고, 각 공공기관에 군인을 파견해 감시 통제하고, 심지어는 군인이 교통정리까지 해서 시민에게 위압을 가하였다.
 
가장 중요한 조치는 나찌가 유대인과 공산당 사민당 등 진보정당계와 함께 집시와 소수 이탈자집단을 싹쓸이 했듯이, 5.16쿠데타를 한 주역은 (1) 이른바 불온분자로 자유당 이래 리스트에 오른 자를 검거, 숙청하고 (2) ‘언론기관정화조치’라고 이름 붙여서 하듯이 각급 기관과 기업체에 까지 손을 뻗쳐서 군정에 걸림돌이 될 요소나 트집잡힐 문제가 있는 자(병역미필과 기타 전과자)는 숙청하였다. (3) 정치인도 ‘구정치인’은 때 묻은 자로서 ‘세대교체’해야 한다고 정치활동 금지하는 법률을 만들어 공직후보로 진출할 기회를 사전에 제거했다. 이런 조치는 전두환에게도 그대로 계승된다. (4) 무엇보다 전체 국민을 지역단위와 직장단위로 조직, 통제하고 정보기관의 감시 하에 두었다. 이러한 작업은 중앙정보부라고 하는 공식 정보기관 이외에 군정보기관과 각종 공안기관이 담당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만들고자한 나라는 무엇인가? 나찌의 수권법을 모방해 표절한 국가비상조치법은 국가권력의 전권을 군인집단인 ‘국가재건최고회의’에 백지위임한 헌법파괴의 법령이다. 이 법령으로서 이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의 제도가 파괴되고 군부 파시스트 독재체제가 된 것이다.
 
이른바 1963년 제5차 개정헌법을 국민투표란 정치연극의 절차를 거쳐서 새 단장을 했지만, 그 헌법의 골격은 1인의 최고권력자인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권위주의적 권력지배를 헌법이란 간판으로 위장, 분식한 것이다. 박정희의 군정은 결코 민주공화제가 아니라, 만주 괴뢰국의 관동군 관리체제와 일제의 전시 총동원체제의 전쟁국가를 합친 특이한 병영- 감옥국가를 만들어 내려고 한 것이다. 이 점이 아주 중대하고 심각한 문제이다.
 
구태여 외국 사례를 들면 1930년대의 스페인 프랑코의 독재나, 장개석 국민정부의 총통제나, 그리스 군사정부의 대령들의 독재체제를 본 뜬 것이다. 박정희는 유신헌법독재를 분식 위장하기 위하여 프랑스 1957년의 드골헌법을 들먹이지만, 근본적으로 그것과는 성질이 다르다. 껍데기가 비슷하고 드골 1인 쇼가 돋보여서 그런 식의 권위주의적 체제인 것으로 보이지만, 그 헌법에 따라 드골이 쫓겨나지 않았는가? 지금 프랑스에서 드골 행세하는 자가 나오는가?
 
결국 박정희가 남긴 유산이며 그가 만들려고 한 작품은 ‘신군부독재’의 사나운 폭정과 부정부패 속에서 그 추종 아부 편승한 무리가 지배하는 파쇼체제라고 할까? 그는 관동군이 관리하던 만주괴뢰국의 국가 모습을 머리 속에 하나의 모델로 하면서 당면한 새 정세에 대응해 자기의 만년왕국을 꾸며내려고 망상한 야심가이다.
 
(5) 정보원이 관리하는 병영-감옥 국가의 현실 : 긴급권과 정보공작으로 통치 
 
처음부터 박정희의 권력지배는 민주주의와 인권과는 상관이 없었다. 혁명공약 1호의 반공국시도 민주질서나 자유민주주의를 방어하는 반공이 아니라, 자기의 권력 유지를 위한 반공국시였기 때문에 매카시즘의 칼바람은 더욱 살인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박정희는 쿠데타 직후부터 주로 계엄령이나 긴급권발동을 내세운 지배와 그것을 지탱하는 조직으로 정보공작을 통해서 전체 국민을 감시 통제하였다. 시민생활을 감옥의 질서로 규격화 통제하고 개인을 이등병으로 지배해 복종시키는 국가의 병영화였다.
 
그의 지배구조는 모든 국민을 이등병으로 몰아세워 가면서 규율을 잡고 통제하려고 했다. 그것을 보완 추진하는 캄풀주사기 사건날조와 사법살인과 정치재판이었다. 처음부터 군사재판으로 제압해 가는 계엄령지배였고 그것을 좀더 강하게 먹혀들게 하는 간첩사건의 날조와 그 재판극을 통한 겁주기의 공포정치였다.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과 피살자 유족회 대표 및 최백근 사회당 간부가 빨갱이로 몰려서 사형판결을 받았다.
 
거기다가 깡패라고 해서 이정재와 임화수 등 자유당 정치깡패가 국민의 원한을 사고 있는 것을 알고 거리에 조리돌리고 덕수궁 뒤뜰로 끌고 가 개머리판과 군화로 짓이겼다. 그렇게 버릇을 가르쳐주는 것으로 국민대중이 심정적인 만족감을 가지도록 부추겼다. 그래서 결국 무법과 불법, 탈법과 비법이 법을 말살하고 우위에 오르는 세상이 되었다. 법치주의의 조종이 울렸다.
 
‘국토건설단’이라 하여 강제노동 캠프를 만들었다. 전두환의 ‘삼청교육대’의 선례이다. 무법이 법으로 통하는 철권지배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렇게 민주주의와 인권을 말살한 기반위에서 노동쟁의는 빨갱이로 몰리고, 노총은 어용조합으로 개조되고 근로감독관은 노조감시관이 되는 이상한 시대가 되었다.

그러한 철권의 탄압으로 덕을 톡톡히 본 것은 재벌임은 말할 것도 없다. 재벌은 군정독재의 파트너이고 시종꾼이 되어 독점과 특혜에 기생하는 반사회적 기업이 되었다. 
 
(6) ‘새마을 운동’과 ‘유신체제’의 실체
 
만주에서 일제시대 오족협화회 간부로 민족반역의 매국노 짓을 한 이선근은 박정희 밑에서 어느 사립대학교 총장 취임사에 새마을 정신과 유신정신을 주제로 한 열변을 토해서 세상 사람을 웃기고 또 한탄하게 했다. 
 
박정희는 일제시절의 관제 하향식 대중동원방식으로 모든 국민을 하나로 묶어세워 나가려고 했다. 그가 보기엔 국민의 자치와 자율에 의한 밑으로부터의 생활개선이라는 시민적 발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의 생각으론 국민은 우민(바보)이고, 기껏해야 지배나 통치의 대상이나 객체였다. 장군이 이등병을 보는 관점에서 지배했다.

아울러 이 국민은 놔두면 언제 잘못을 저지를지 모르는 괴물로 보았다. 그래서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관료가 주도한 일제하 국민총동원운동의 복사판이다. 그 타율적 강제적 대중동원으로 개발과 풍요의 신화를 조작하려고 했다.
 
1961년 쿠데타 직후에 정보부 못지않게 신경을 기우려 만든 것이 ‘재건국민운동’이었고 여기에 친일파 인테리로서 기회주의자이면서도 명망가로서 대학총장을 하는 유진오를 본부장으로 앉혔었다. 유진오는 고분고분 박정희의 연극에 들러리를 섰다. 박정희로선 유진오가 일제하의 국민정신총동원운동에 줄을 선 전력이 있는 만큼 한통속이 되어줄 것을 알았다. 후에 유진오가 박을 반대하면서도 박의 일제방식에 대해선 하나도 비판하지 않은 것을 봐도 이 점은 박의 예상이 들어맞은 것이다.
 
지금까지 박정희 찬양의 유일한 단골 메뉴는 그가 경제발전의 공로자라는 것이다. 히틀러나 스탈린 류의 경제발전을 찬양하는 논법과 논리라면 할 말이 없다. 박정희의 행적을 정리해 본 한겨레21의 특집에 실린 글을 인용해 참고해 보자(한겨레21,2005년 2월 15일자, 18쪽이하 인용).

“ --- 이런 주장(박정희가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로자란 주장 : 인용자)은 박정희 같은 독재를 하고도 경제성장을 시키지 못한 우간다의 이디아민이나 중앙아프리카의 보카사, 버마의 네윈 같은 독재자와 비교할 때에 쓸 수 있는 이야기일 뿐이다. --- 한국경제가 1997년 말에 외환위기를 당한 것도 박정희식 경제모델의 파탄이 아니었을까?”
 
정경유착 재벌위주의 특혜와 독과점기업체제의 시장주도와 대외 종속의 파행구조로 인한 퇴폐와 분배구조의 부자위주와 경제전반의 수출주도위주와 내수시장 개발에 소홀로 인한 허약체질을 봐야 한다.

특히 한국의 재벌과 졸부의 돈벌이는 생산면보다 토지투기와 증권조작, 탈세와 특혜융자, 시장독과점과 관청 후견의 온실육성의 비호의 병리가 문제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중소기업의 문제나 농업경제파산과 저임금구조와 노동운동 탄압에 대해선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말이다.  
 

무엇보다 박정희의 헌정파괴 행위는 제2의 쿠데타인 1972년 유신정변이다. 이 소동은 친위 쿠데타이다. 자기가 만든 법제조차 필요하면 파괴하여서 법의 권위와 안정성을 스스로 뒤집어엎은 것이다. 이를 그는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불렀다. 그래도 민주주의간판을 이용할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그가 1969년 삼선개헌으로 중임제한 규정조차 짓뭉겨버렸을 때에 그는 이미 영구집권이란 민주주의에 대한 반역의 길을 다시 한발 들어섰다. 이후의 그가 간 길은 긴급조치의 남발과 사법살인사건의 날조로 인혁당 피고인 8명에 대한 재심기회도 주지 않는 전격적 형집행이었다. 그는 엉터리 재판극조차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지경에 달했다. 이미 그는 독재자이기 보다는 ‘폭군’이고 ‘무법자’가 되었다.


이 지경에 이르면 국민대중의 저항권의 발동이나 민주혁명을 위한 봉기를 악법과 폭정에 대한 저항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를 행한 것이 학생이고 일부 지식인이었고 노동자였다. 그들의 민주투쟁은 우리 역사에서 우리 민족의 명예와 긍지를 회복 유지시켜 주는 암흑속의 한줄기 빛이었다.    
 
(7) 박정희 공인으로의 청렴도와 성윤리 문제

 

▲ 미 국립문서보관소(NARA) 문건 파일.

이 보고서에는 한일협상 시작에서부터 협상 타결에 이르는 과정에서 어떤 형태로 여러 가지 검은 뒷거래가 이루어 졌으며 협상 전 과정에 미국이 어떻게 개입하고 관여했는지를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박정희 찬양으로 자기의 부정축재 재산과 가짜의 명망을 보존하려고 하는 부류는 그가 청렴한 정치인이었다고 한다. 이 말처럼 새빨간 거짓말은 없다. 2004년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이 미국의 중앙정보부 기록을 통해 박정희가 1965년 한일협정 체결 이전에 이미 일본 기업가들이 주는 명목으로 6천6백만달러를 받아먹었다는 보고서가 있다(민족문제연구소 발간, 민족사랑, 2004년 8월호에 실린 해설 (<친일과 매국, 필연적 귀결 - 미국국립문서보관소 소장 ‘한일협정’ 관련문서 발췌-> 참조). 그 뿐인가 각종 명목으로 업계로부터 받아들여 챙긴 리베이트는 얼마인가? 이 점을 문명자 기자는 그가 쓴 <<박정희와 김대중>>에서 솔직 대담하게 말하고 있다.

▲ 1965년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박정희 대통령. 왼쪽부터 정일권 총리, 박 대통령, 이동원 외무장관, 김동조 주일대사.
  
박정희의 6천6백만불 사전 수령에 대해 신용하는 다음과 같이 분통을 터트리고 있다.


 “ --- 그런데 일본 뇌물 6천6백만달러를 받고 국익을 팔아 ‘매국외교’를 한 무리들이 ‘굴욕외교’ 파기를 주장했다고 애국적 학생들과 국민들을 탄압하고 체포 투옥하여 징역을 살리고 불구자로 만든 것이다.”(신용하, <한일협정과 6600만달러의 뇌물>한겨레, 2004년 8월 18일자 기고문에서 인용.).
 
문제는 그 정도가 아니다. 박정희는 일제의 전범이고 일본정계의 흑막 브로커인 고다마요시오와 세지마류조를 끌어 들여 거래를 해 왔다. 전범인 기시노부스게 수상은 만주시절에 박정희 상사격의 인물로서 패전 후에도 그의 노선은 군국주의였다. 그런데 박정희는 그에게 일등 수교훈장까지 주었다. 고다마요시오란 깡패에게도 2등 수교훈장을 주었다. 만주관동군시절의 상관인 세지마류조 중령에게는 스승으로 대접을 해서 그의 지도와 자문을 받아 국정처리에 임했다. 이것이 그의 대일외교 실체이고 그의 가짜 ‘민족적 민주주의’의 기만극의 일부이다.
 
박정희와 선이 닿고 있으면서 고다마요시오와 중개역을 한 재일교포 깡패이고 토지투기꾼인 정건영(鄭建永 - 일본이름 : 마치이(町井久之)로 행세)에 대해선 이미 드러난 것이므로 일부 그에 관한 기록을 인용해본다.
 
“마치이(町井久之)는 광역 폭력단 ‘도오세이가이(東聲會)’의 전(前) 회장. 한국이름은 정건영이다. 박정희가 편하게 고다마요시오와 박정희 사이를 중개한 인물. 東亞相互企業은 마치이(정건영)의 회사로서 고다마요시오조차 한 때에는 임원으로 이름을 올렸었다.” 한다.
 
마치이(정건영)가 어째서 이만한 토지를 가지고 있었는가 하면 한국의 외환은행으로부터 日本不動産銀行(후에 日本債權信用銀行. 현 아오조라銀行)을 거쳐서 54억엔(圓)의 특별융자를 받았었기 때문이다. 뒷날 이 특별융자는 한-일 양국 국회에서 박정희가 재산을 해외로 도피시키려 한 것이 아니냐고 추궁당했었다. (아리모리타카시(有森隆), 戰後60年史 9개의 黑幕, 講談社, 2005年, 72쪽에서 인용.).
 

박정희가 남긴 자산으로 지금 드러난 것이 얼마인가? 나는 다른 말은 안한다. 그의 자녀가 지닌 재산은 그들 자녀가 벌어들인 것보다 아버지로 터 물려받은 유산인 것이 많을 것이다. 이 점 하나만 살펴봐도 이야기는 끝난다.
 
박정희의 여인관계 하면 우선 정인숙여인의 변사 사건이 떠오른다.
그런데 그의 권력은 그를 반대 비판하는 정적을 여인 스캔들로 낙마시키길 즐겨왔다. 그 대표적인 희생자가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하며 민주운동을 해서 박정희를 반대했던 이병린의 간통죄사건이다. 이병린은 간통죄로 망신당하고 변호사 자격도 박탈당한다. 그 이외에도 여인문제로 정보기관의 협박을 받은 정재계의 유력인은 얼마나 있는지? 언젠가는 그에 관한 파일도 드러날 것이다.
 
박정희가 궁정동 비밀아지트에서 술과 여인잔치를 하다가 김재규에게 사살당한 사건을 두고는 말도 많다. 일본 월간지 <<세카이>>에 실린 ‘TK生으로부터 편지’에는 당시의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 ---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했던 것은 그가 외설(음란)영화를 보며 옆에 있던 여자에게 웃음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거기에서 김재규는 ‘더러운 놈’이라는 말과 함께 방아쇠를 당겼다. 박정희는 ‘네가 말하는 것은 모두 들어줄테니-- ’라며 살려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먼저 든 책 49쪽에서 인용.)
 

요즘도 박정희의 여인행각에 대해선 주간지에 단골메뉴로 실리기도 한다. 아니 그보다 박정희 사살관계 공판에서 그 피고인들의 입을 통해서 나온 말만으로도 엄청난 이야기 꺼리가 될 것이다. 박정희와 정인숙여인 피살사건의 소문은 그가 생존당시에도 널리 퍼졌다. 그의 피살 후 여인 편력에 대해선 주간지 기사를 모으면 하나의 책을 엮을 수 있다. 한겨레 21에 난 기사는 아주 예의를 갖춘 기사라고 볼 수 있다(한겨레21, 2005년 2월15일 22쪽 및 27쪽 기사 등.). 여기선 이 정도로 그친다. 

 

▲ 한강변서 피살된 정인숙


왜 이 부분을 말하게 되는가 하면 그의 청렴과 모범적 생활이란 우화를 그의 신격화에 이용하려는 것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일부라도 알리는 뜻이다.
 
(8) 탈권과 몰락의 숙명
 
쿠데타는 내란죄이고 군사반란죄로서 실정법 질서하에서 어떠한 명분으로서도 정당화 내지 합법화될 수 없는 것이다. 박정희는 억지로 합법을 가장하기 위해서 개헌과 국민투표를 했고, ‘근대화’란 과업을 내세워서 지도자로서 정통성을 조작하려고도 했고, 결국은 ‘국가의 안전보장’이라는 최후의 주문을 끌어내 국민에게 밀어붙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가능한 사정범위는 정보원을 풀어논 감시와 강권발동 정도였다.
 
박정희와 그 쿠데타 가담자들은 쿠데타 초기부터 민정이양을 약속했으나, 그것은 물론 거짓말이다. 그렇게 하고자해도 감옥가거나 교수대 - 총살대 앞에 설 운명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하고 싶어도 못한다. 그러려면 쿠데타는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역사상 권력을 스스로 내 놓은 권력자는 없다.
 
박정희는 민정이양 압력을 우선 군정연장으로 끌고가려고 현역군인을 사주해서 군정연장데모를 하게 했다. 그리고 별을 스스로의 어깨가 무겁도록 달아매어서 소장에서 대장이 되었다. 그리고 전역사에선 “나처럼 불행한 군인이 없길 바란다.”고 했다. 그러면 군인만 그만두지 말고 권좌에서 물러나면 그만인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1961년 박정희는 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미국 가는 길에서 그의 만주시절 상관인 기시노브스게 수상을 만나서 장관급 대우를 할 터이니 믿을 만한 일본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그에 대해 기시는 후에 말하길 “한국에서는 당시에 정권을 떠나면 망명하는 것이 상식이기 때문에 망명 후를 위하여 돈을 비축할 방도를 상담하길래 이것도 야치(矢次)군이 처리하도록 했다.”고 말하고 있다(다하라 소오이치로(田原總一郞) <<日本의 戰後>>上(講談社,2003년, 301쪽 이하에서 인용.). 이처럼 정권에서 물러나면 교수대를 안 가려면 망명을 하게 된다는 스스로의 길을 잘 알고 있던 박정희가 스스로 물러나는 절차를 밟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미 1963년 개헌에 의한 헌법(5차개헌)은 라틴 아메리카의 권위주의적 대통령제로서 부통령이 없는 권력집중형 제왕적 대통령제였다. 물론 중임제한 규정이 있었으나, 처음부터 밀고나가기에는 무리수가 따르는 것은 당연히 알고 대처했다.
 
그래서 1969년의 3선개헌은 불가피한 과정인데, 일부 박정희의 추종자가 착각하고 후계자 운운 하다가 김성곤처럼 정보부에 끌려가 수염이 뜯기고 모욕당해서 울화병으로 죽고마는 해프닝도 발생했다.
 
특히 삼선개헌을 통해 1970년대 대선에서 간신히 당선이란 고비를 만들어낸 박정희는 1972년대 닉슨과 다나카 총리가 중국 모택동과 악수하고 수교하는 급변정세 앞에서 당황, 북의 김일성 주석에게 이후락 정보부장을 밀사로 특파해서 공존의 여유를 얻어내 결국 친위 쿠데타인 유신정변(10월유신이란 쿠데타)을 실행했다. 스스로가 만든 법제조차 뒤엎는 무법의 파쇼군사독재체제의 수립이었다.

그 이후 그의 운명은 민중봉기로 퇴장당하거나 죽거나 하여야만 실마리를 풀 수 있는 배수진을 스스로가 만들어서 그 올가미를 스스로 목에 걸어버린 것이다.
 
일부에선 박정희의 권력집중과 영구집권을 주변정세에 의한 여건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본다. 그것은 쿠데타의 생리와 병리를 전혀 무시하거나 지나쳐버린 논의로서 설득력이 없다. 집권절차 자체가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로 권력의 전당으로 무단 침입한 무법자가 스스로 권력의 전당에서 물러난다는 것은 소가 웃을 일이로서 그러한 역사는 아직 없었다. 장래도 그런 무법자는 등장할 수 없다.
 
결국 박정희는 이 민족에게 무엇을 주고 간 권력탈취자인가? 그는 영웅도 아니고, 애국자도 아니며, 유능한 정치인도 아니며, 모범적 군인도 아니다. 더더구나 민족주의자나 민주주의자도 아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이 말에는 독자가 대답하라!

 

 

⑥식민과 수구를 넘어 자주와 개혁의 시대로


 

 
6. 박정희의 정치 이데올로기의 본적지와 박정희에 대한 평가
 
(1) 출세주의자의 황국신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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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박정희는 따분한 말단 교원노릇을 하는 것에 대한 지겨움에서 벗어나서 ‘긴 칼’ 찬 잘난 사람되는 출세의 길로 일제 장교로의 길에서 찾았다.
 
사실 박정희의 사고방식과 정신구조는 일본제국주의 장교로서 손색이 없다. 그는 일본제국군인이지 배달겨레는 아니다.
 
원래는 출세하려고 강한 세력에 빌붙는다고 해서 일제에 투항, 편승하였는데, 그 일제의 명치유신 등 국가주의와 국수주의 및 황국사관에 입각한 대동아공영권의 사상, 특히 군사적 위세와 강압에 의한 사회 정치적 개조와 경제적 발전 전략에 크게 공감, 공명하며 감화되어 그에 추종하기에 이른 것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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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군을 소탕하러 가는 일본군.

 
미라잡이가 미라가 되어버린 격이 되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깊은 지식이나 명상과 사색을 통한 통찰 및 정신적 고뇌를 통한 깊은 성찰을 할 만한 견식을 갖추지 못한, 일제사범학교 교육수준에서 굳어버린 그의 소견으로선 그러한 결과가 되고만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일제 사범학교 교육의 해독성은 일본패전 후 요시다시게루가 총리 당시에 도쿄대학 (東京大學) 상법(商法)교수이고 후에 일본 최고재판소 소장을 역임한 카도릭 자연법학자인 다나카고오타로오(田中耕太郞)에게 문부대신(교육부장관)을 하도록 교섭을 했을 때에 첫 번째 조건이 일제시절의 사범학교제도를 폐지하는 것이었다.

다나카교수에 의하면 “일본교육 결함의 하나의 근원은 앞에서 굽신 대고 뒤에서 배신하는 사람(面從腹背的 人物)을 양성하는 경향이 있는 사범교육에 있습니다. 사범학교를 전면 폐지하고 사범 학벌을 해소해야 합니다.”라고 그의 교육개혁구상을 제시했다고 한다((大下英治, <<吉田茂 - 戰後復興에 운명을 건 원맨 宰相>>(講談社,1995년,96쪽에서 인용.).
 
최규하가 일본 고등사범출신으로 친일파에의 길을 간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박정희가 사범학교 교육에서 잔뼈가 굳으면서 출세를 위한 배신과 변절을 겪으면서 결국 일본제국의 신민(臣民)이 되어서 정신적 귀의처를 일본제국의 황국신민(皇國臣民)의 길에서 찾은 것은 그 시대를 산 시골의 가난한 청년으로서 성급하고 무모한 출세의 집념이 초래한 비극이라고 할까?
 
박정희는 민족주의자도 아니고 민주주의자는 더욱 아니다. 그의 한민족에 대한 경멸감은 일본제국의 조선인 편견과 바로 찍어 논듯이 닮았다. 그는 민주주의에 대해 체질적으로 반발하며 경멸해 온 것을 그의 태도와 행적에서 숨기지 못했다. 
 
그는 조선민족 비하의식을 그가 감화를 받은 이광수의 <<이순신>>이란 소설에서 받은 것을 그의 이조역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서 그대로 들어내고 있고, 그의 정치인식과 역사관은 명치유신의 지사라는 사무라이 숭배에서 나타난다. 그는 기시노브스게(岸信介)에게 명치유신 지사(志士)인 하급 사무라이들의 정신과 행적을 숭배한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이효재가 박정희의 통치 방식을 ‘유교적 - 가부장적 권위주의’라고 한 표현도 일면을 표시한 적절한 지적이다(이효재, 분단시대의 사회학,한길사).
 
결국 그는 일본제국의 황국신민이고 일본 황군으로서 일군장교 다카키마사오로서 살아오며 행동했다. 그가 일제군국주의로부터 모방한 정신과 제도의 흔적을 간략하게 정리해 본다.
 
 
◈ 일본 문부성의 ‘정신문화연구소’ - 박정희의 정신문화연구원
 
◈ 일본 왕의 ‘교육칙어(敎育勅語)’ - 국민교육헌장
 
◈ 국민정신총동원운동’ - 재건국민운동과 새마을운동
 
◈ 明治維新 - 10월유신
 
◈ 愛國班 도나리구미(隣組) - 반상회
 
◈ 헌병과 고등경찰 - 특무대(보안사령부) 및 중앙정보부
 
◈ 쿠데타에 의한 구가접수 관리기법인 일제 관동군의 만주괴뢰국 조정 - 쿠데타 에 의한 국가재건최고회의와 현역장교 사병 파견 감시 조종 통제
 
◈ 전시총동원체제의 총력전 경제 - 개발독재에 의한 경제발전 전략 
 

(2) 박정희 행적에 대한 평가
 
박정희 행적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를 정리해 볼 단계이다. 이에 대해선 내가 일찍이 2001년 <<박정희 역사법정에 세우다>>(푸른세상, 2001년. 73쪽부터 124쪽까지 참고. 및 한상범, <<현대법의 역사와 사상>>(나남, 2001년, 273쪽부터 340쪽까지 참조)와  그 밖에 한상범, <<일제잔재 청산의 법이론>>(푸른세상, 2000년, 173쪽부터 276쪽까지 참조.)을 낸 바 있다.

그와 동시에 같은 해 박정희 흉상 제거가 기물손괴의 형사범이라고 기소되어 재판을 받는 박정희기념관 반대 단체의 곽태영 등 피고인을 변호하는 공술인으로서 12월 12일 서울 남부지원에서 공술한 자료가 있다. 그것은 <<亞-太 公法硏究>>제10집 2002년에 <박정희 평가서>란 이름으로 그대로 수록했다. 이 자료를 대개 그대로 요약 정리키로 한다.
 
1) 친일파로서 박정희의 대한민국 건국정신에 대한 위배와 반민법 해당사항 - 박정희의 만주 등지 행각은 친일파 민족반역의의 행실로 반민법 3조 6호에 해당한 “군-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로 민족에 해를 가한 자”이다. 2005년 8월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의 친일명단에도 박정희는 수록되어 있다.
 
2) 해방 후 1948년 여순 반란 사건 당시 폭로된 남로당 군사책과 그에 따른 제반 행적 및 육군정보부대에서 무급문관근무시의 보도연맹원 처리행각 - 이 문제도 상술해서 생략하거니와, 이 사실은 특히 이도영의 조사폭로가 참조가 됨을 다시 지적해 둔다(월간 <<말>>지 2001년5월호 참조.).
 
그 밖에 박정희의 측근 부하였던 김형욱 정보부장 <<회고록>>(朴思越 공저,(1)(2)(3)전예원, 1991년)이 폭로한 박정희의 남로당 전력 은폐시도 등 사실에 대한 기술도 참고가 된다.    
 
3) 박정희의 군사반란죄 - 박정희는 쿠데타란 내란죄를 실행, 군사파쇼체제로 개변함으로써 민주공화제를 전면 파괴했다. 특히 만주지역 활동의 전력이 있던 친일인맥으로 헤게모니를 장악하여서 친일파지배시대를 일층 강화했다. 만주의 친일인맥 일부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강영훈(국회의원 및 국무총리 등 역임) - 만주건국대 2기
 
◈고재필(국회법사위원장 및 보사부장관) - 만주대동학원 졸, 만주안동공서관리
 
◈민기식(군 장성, 최고위원 및 국회의원) - 만주건국대 1943년 졸업
 
◈박림항(최고위원 및 건설부장관) - 만주군관학교
 
◈백선엽(육군총참모장) - 만주군관학교
 
◈박상길(청와대 대변인) - 만주 펑덴학원 법정과 졸업
 
◈유원식(최고위원 ) - 만주군관학교 졸업
 
◈유진오(재건국민운동본부장) - 만주괴뢰국 10주년기념에 당해 <반도사회와 樂土 만주>친일 논설집필로 만주통치 찬양
 
◈이주일(최고위원 및 감사원장) - 만주군관학교 졸업 및 일제하 조선인 친일 특수부대 군관
 
◈정일권(참모총장 및 국무총리와 국회의장) - 만주군관학교 일제헌병 소좌(소령)
 
◈최규하(국무총리, 외무부장관, 대통령) - 만주대동학원졸업, 만주국관리시보
 
◈황종률(재무장관) - 만주대동학원 졸업 만주국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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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집권수단으로 정보기관 설치운영과 긴급권 남용 - 박정희의 주된 지배수법과 방식은 감시와 탄압 및 긴급권 남용이었다. 이는 헌정질서 파괴의 행위를 일상화 항속화시킨 졸렬한 수법으로서 전국을 감옥과 병영으로 전락시키고 국민을 죄수나 이등병으로 취급하는 처사였다.
 
5) 영구집권을 위한 삼선개헌과 유신쿠데타 - 자기가 만든 제도하에서도 집권연장에의 길이 저지되자, 1969년 삼선개헌을 자행해 헌법제도를 파괴하고, 1972년에는 친위 쿠데타를 자행해 무법통치로 들어섰다. 이는 어떠한 이유로도 변명이 될 수 없는 법질서의 근본을 두 번 세 번, 파괴한 난동이다.
 
6) 근대화란 정치구호와 정경유착과 재벌위주의 특혜독과점 경제구조로 - 박정희의 경제발전 신화의 핵심은 히틀러식 개발 발전의 찬양과 동일선상에서 분석 비판되어야 한다. 여기선 자세한 논의를 할 여지가 없으므로 생략한다.
 
7) 정치적 반대파와 비판 세력 등 말살의 탄압과 사법살인 등 - 박정희의 지배는 법치주의의 전면 거부와 총체적 붕괴로 특징지울 수 있다. 집권기간 중에 각종 간첩사건의 날조와 엉터리재판, 사법살인 등의 예는 민청학련사건과 인혁당 사건, 장준하피살사건과 최종길교수 고문치사사건, 계엄령으로 국법을 유린 말살하며 고문탄압을 일상화시킨 죄, 특히 섹스 스캔들을 이용한 반대 비판자에 대한 사회적 매장 수법 등 온갖 추악한 일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다.
 
8)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대중조작의 우민화로 정신 오염시킨 죄과 - 박정희는 히틀러 집권 12년이나 만주괴뢰국 13년을 무색하게 할 군정 30여년 친일지배 60년의 레일을 깔아 놓았다. 그럼으로써 민중을 우민화시키고 사회적 부패와 퇴폐풍조를 만연시켰다. 자기는 나라 도적질을 한 자이면서도 뻔뻔하게 윤리 선생을 자처하고 나서서 교육이니 미풍이니 하면서 젊은이의 긴 머리 깎아 모욕주기와 소녀의 짧은 치마를 호통 치며 정숙을 설교하였다. 이 얼마나 위선이고 ‘도둑이 매를 드는 격(賊反荷杖 格)’의 일인가? 여기서 사회윤리와 정의감 및 민족정기는 깡그리 우롱당하고 가치기준은 시궁창속에 묻혀버린 것이다.
 
맺음말 - 박정희 폭정의 청산은 연면히 이어오는 민족 민주 투쟁의 역사적 의미의 확인
 
박정희의 탈권과 영구집권은 이 민족의 크나 큰 치욕이고 비극이고 민족정기에 대한 모독이었음을 역사가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편 국가권력의 강권장치를 총동원한 반역집단의 탄압에 맞서 맨주먹으로 투쟁하여 반민족 반민주 부류를 퇴장시킨 우리 겨레의 빛나는 전진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승만의 전제폭정을 민중의 이름으로 쫓아냈듯이 박정희 군사파쇼나 그 후속 추종자의 집권을 맨주먹 투쟁으로 권좌에서 물러나게 했다. 비록 미완과 부분적인 승리였지만, 민주의 발판을 마련해 오늘을 이루어 냈다. 
 
우리는 자연인으로 박정희보다는 공인으로서 반민족적이고 반민주적인 친일파로서 박정희를 청산하고 나아가야만이 우리가 민족으로서나 시민으로서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다. 우리의 선각자와 우리들이 흘려온 피 눈물의 대가로 아직도 한 시대를 긋는 갈림길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 고비를 넘는 것이 우리 시대의 우리가 갚아야 할 빚이다.

 
한상범 ⓒ참말로 
출처 : 추억& 역사속으로 http://blog.naver.com/one2on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