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시절

simzie 2008. 8. 11. 01:50
한국 클럽문화 원조 음악감상실 '쎄시봉'
 [기록으로 보는 대중음악사] 60년대 청년문화의 진원지
이메일보내기 김형찬 _ 대중음악연구가
 
중구 서린동에 위치한 쎄시봉의 입구.
▲ 중구 서린동에 위치한 쎄시봉의 입구.

1994년부터 ‘빵’, ‘드럭’ 등의 이색적인 클럽이 생겨나면서 홍대 앞은 라이브음악을 위주로 하는 클럽가가 형성되었다. 뭔가 특이하고 전위적인 문화를 추구하는 젊은이들이 홍대 앞에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1970년대처럼 무자비한 퇴폐업소 단속이나 길거리 장발단속은 없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뻔한 상업주의 문화에 식상한 불만족스런 젊은이들은 지하의 클럽에서 꼼지락거리며, 어른들이 도저히 이해 못할 ‘비밀스런 쾌락’을 추구하면서 자본이 모든 것을 획일화시키는 신자유주의 현실 속에서도 홍대 앞을 주목할 만한 문화적 켄텐츠가 있는 ‘관광특구’로까지 지정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쉽게 자만하지는 마라. 30년 전에 훨씬 더 몰이해하고 척박한 상황에서 한국 클럽문화의 원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선배님’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올 것이다.

1960년대 초반 서울 중심가는 음악감상실(또는 뮤직홀)이라는 젊은이들을 상대로 하는 새로운 업소가 생겨나면서 분위기가 바뀌게 된다. 최동욱, 이종환이 DJ라는 직업을 시작했던 종로의 ‘디쉐네’, 매주 한 번 트위스트파티를 열었던 종로2가의 ‘뉴월드’, 충무로의 ‘쎄시봉’과 ‘카네기’, 명동의 ‘메트로’와 ‘라 스칼라’, 광화문의 ‘아카데미’ 등이 그것이다.

인기여하는 그 감상실의 프로에 달려있다. 디스크에만 의존하지 않고 라이브를 가수들이 직접 나와서 노래를 한다든지 조그만 규모의 캄보밴드가 나와서 즐거운 연주를 해준다든지 하면 또 인기가 달라지기도 한다… 클래식만 듣는 감상실과 경음악만 듣는 감상실의 분위기는 다르다. 클래식 위주의 감상실은 물을 끼얹은 것처럼 차분한 것이고 경음악 위주의 감상실의 분위기는 솜사탕 같은 것이다. 물을 끼얹었다는 말은 각기 흩어져서 움직임 없는 정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솜사탕 같다는 것은 엉성하긴 하지만 한 솥의 식구처럼 그대로 뭉쳐있다는 말로 해석된다. 특기할 것은 경음악감상실에서 나오는 사람들은 클래식 감상실을 별로 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서울시내 두 곳의 클래식 감상실에 하루 평균 도합 200명, 다섯 곳의 경음악감상실에 하루 평균 도합 1000명의 감상자가 드나든다.
                  「태양이 있는 지하실 음악감상실의 생태」 『주간한국』 65.6.13, 20-21쪽.

이런 업소들이 새롭게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디스크 감상에서 라이브 생음악으로의 전환이라는 영업전략 때문이었다. 더불어 1950년대를 지배했던 어른들의 클래식 음악문화가 1960년대로 넘어오면서 젊은이들이 주도하는 팝송듣기로 문화적 취향이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 음악감상실 중에서 대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프로그램을 고루 갖추고 젊은 문화를 선도해 나갔던 곳이 ‘쎄시봉’이다. 불어 표기로 ‘C'est Si Bon’(영어로 It's So Good)인 이곳은 1953년 중구 서린동에서 개업하여 1961년경에는 종로의 YMCA 뒤쪽으로 갔다가 1963년경 무교동의 서린호텔 옆 ‘공안과’ 뒤쪽에 ‘스타다스트’라는 나이트클럽 옆에 붙은 작은 건물에 정착한다.

'쎄시봉'이 인기 있었던 이유는 대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성격의 프로그램을 고루 갖추고
젊은이 문화를 선도해 나갔기 때문이다. 사진은 주간한국에서 실시했던 '성점감상실'
시간에 김상희가 길옥윤의 반주로 노래하고 있는 장면이다.

1층으로 들어가 매표소에서 40원 짜리 입장권을 사서 문지기에게 제시하고 입장하면 안내 아가씨가 자리를 정해주고 주문을 받았다. 내부는 대여섯 층의 계단을 연결고리로 하는 복층이었고 1층은 150석 정도의 홀이고 2층은 80석 정도의 레코드가 들어찬 DJ박스가 있는 총 30평의 넓은 음악감상실이었다.

‘쎄시봉’이 DJ가 신청곡을 받아 음악을 틀어주던 방식에서 청중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문화마당으로 바뀌게 된 것은 당시에 TBC-TV에서 PD로 일하던 이백천의 역할이 컸다. 1964년 4월 이백천은 직접 마이크를 들고 청중 속을 누비며 음악신청을 받고 얘기를 나누는 ‘Date with petit Lee' 라는 프로를 진행했는데 이것이 청중들의 큰 호응을 받으면서 ’쎄시봉‘은 완전히 분위기가 변하게 된다.

‘쎄시봉’이 젊은이들의 새로운 명소로 각광받게 된 이유는 요일별로 다양한 새로운 프로그램이 있었기 때문이다. 월요일에는 수용자들이 신보를 듣고 곡에 별의 숫자로 등급을 매기는 수용자 비평마당인 ‘성점(星占)감상실’ 이, 수요일에는 시인을 초대해서 자작시 낭송과 말씀을 듣는 '시인만세'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시인만세'는 서정주 시인을 시작으로 박목월, 박재삼 시인이 초빙됐고 아마추어 시인도 참가하여 자작시를 낭송했다.

금요일에는 ‘Date with petit Lee'의 후속프로인 ’대학생의 밤‘이 마련되어 대학생들의 라이브 노래마당이 펼쳐졌다. 바로 여기에 각 대학의 통기타 매니아들이 모여들어 첨단유행이었던 통기타음악을 들려주기 시작한다. 조영남은 온 몸을 쥐어짜는 우렁찬 소리로 <Sea of Heartbreak>와 <Don't Worry>와 같은 컨트리를 피아노를 치며 불러 청중들의 혼을 빼놓았고, 윤형주는 수정같이 맑고 깨끗한 목소리로 Bobby Darlin의 <Lost Love>, Kingston Trio의 <Scarlet Ribbon>를 불러 여학생들을 반하게 만들었다. 박상규와 장영기는 ’코코‘ 라는 듀엣으로 <Quantanamera> <베사메무쵸>와 같은 라틴음악, <Keep on Running> <딜라일라> <Yesterday> 등 1000곡이 넘는 팝송 레퍼토리를 자랑했다.

전위예술가 정강자씨가 쎄시봉에서 ‘투명풍선과
누드’ 라는 해프닝을 벌이고 있다.

이장희가 여드름 가득한 얼굴로 장만영의 시를 낭송하면 여대생들의 앵콜이 줄을 이었고 송창식이 이태리 가곡 <남몰래 흐르는 눈물>과 <September Song>, <Twelves of Never> 등의 팝송을 불렀을 때는 감동한 청중들이 눈물을 흘릴 지경이었다. 1968년 2월 여기서 만난 송창식과 윤형주가 트윈폴리오라는 한국 최초의 통기타 듀엣을 결성하여 한국 통기타음악의 장을 열게 된 것은 이런 문화적 배경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이 밖에도 부정기적인 프로그램들이 있었다. 아무나 나와서 무언가를 보여주는 ‘즉흥 스테이지’ 에서는 가끔 기발한 행위예술이 선보였다. 전유성이 정장에 파란 넥타이를 하고 올라와서 가위로 넥타이를 싹둑 자르고는 아무 말 없이 인사만 하고 내려갔다. 이것은 백남준이 속해 있었던 전위예술 그룹 ‘플럭서스’ 의 요셉보이스의 행위예술을 흉내 낸 것이었다. 여성 전위예술가 정강자는 거의 나체로 행위예술을 연출하여 충격을 주었다.

‘삼행시 백일장’은 누구나 참가할 수 있어서 인기가 있었는데 수상자에게는 ‘쎄시봉’ 입장권을 선물로 주었는다. 이때 사회를 맡은 사람이 명사회자 이상벽이다. 명사를 모셔서 젊은 세대와 대화하는 시간을 갖는 ‘명사특강’ 에는 한국일보 정광보 기자, 국회의원 김대중 등이 초빙되었다. 음반제작에 들어가기 전에 대학생들의 반응을 알아보는 ‘신곡합평회’는 ‘성점강상실’과 함께 수용자와 음반시장을 연결하는 기획적 마인드로 운영된 프로그램이었다.

1965년에 경복궁 광장에서 공연을 했던 영국의 리버풀 비틀즈를 초대하여 라이브 공연을 벌일 정도로 ‘쎄시봉’은 앞서가는 참신하고 대담한 운영을 하며 음악감상실 문화를 선도하게 된다. 새로운 문화를 수용할 청중들, 재능있는 꾼들, 새로운 음악문화,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담아줄 장소가 완비된 것이다. 똑같이1964년 4월에 시작된 YMCA의 싱얼롱 Y와 더불어 '세시봉'은 다운타운가의 새로운 문화적 진원지가 되었고 이 파장은 서울 장안에서 좀 세련되게 논다는 젊은이들에게 도도한 물결로 파급되게 된다.

‘쎄시봉’이 젊은이들의 음악감상실로 성공한 이유는 당대의 문화를 주름잡던 다양한 연령층의 인물들이 드나들며 서로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쇼기획과 연출계의 조용호와 김일태, 방송계의 PD와 DJ인 이선권, 피세영, 박광희, 이백천, 신문사 연예기자 정홍택 등이 그 주인공이었다.

1965년 가을에 한국에 왔던 리버풀 비틀즈(실제이름
쿠바스)가 쎄시봉에서 열광의 무대를 연출하고 있다

이 30대 터줏대감들은 그 곳을 드나들던 싹수있어 보이는 대학생들(윤형주, 송창식, 김세환, 이장희, 조영남, 윤여정, 이상벽 등)에게 음악적, 문화적 자극을 주었고, 이들을 미래의 스타로 매체에 소개하기도 했다. 또한 이들을 돌봐주고 품어준 어른들이 있었으니 김성수 (현재 성공회의 대주교) 신부, 정신 심리학자 이시형, 미술 평론가 이일, 여류화가 비함 등이 그들이다.

‘쎄시봉’에서 죽치던 대학생 패거리들은 그야말로 ‘문화적 백수’들이었다. 다른 의미가 아니라, 자신들을 후견해 준 어른들의 집으로 몰려다니며 문화적 향기를 습득하고 어울려 노래도 했으며, 신문방송계의 인물들에게 픽업되어 매체에 출연해 ‘인기도 얻고 돈도 벌었다’는 뜻이다.

방송관계자들은 ‘쓸 만한 물건’을 헌팅할 수 있는 중요한 장소로 이곳을 드나들었으며 이들의 측면지원에 의해 ‘쎄시봉’ 죽돌이들은 이후 1970년대에 새로 등장한 통기타 음악의 스타로 가요계를 석권한다.

1990년대 홍대앞에서 클럽이 생기기 시작하여 한국의 인디음악문화를 이끌었듯이 1960년대의 음악감상실은 한국의 클럽문화의 시초라고 할 수 있으며 이곳을 토양으로 통기타음악은 새로운 음악문화로 피어오르게 된다. ‘쎄시봉’은 1969년 5월에 전세계약만료 이후 새 집을 구하지 못하고 폐업한다. 

서울 종로구 서린동 115에 자리잡은 음악감상실 '쎄시봉'이 간판을 내렸다. 대학생이라면 한두 번 안 가본 사람이 없는 서울의 명물. 17년간 이어온 친근한 이름이 하룻밤 사이에 종적을 감추었다… '쎄시봉'이 문을 닫은 건 5월2일 아침 7시 집달리에 의해서였다. 당초 230만원에 세든 이 집은 68년 11월에 계약만료됐고 집주인의 요구대로 집을 넘겨줘야했다. 그러나 이흥원씨(58)는 새로 이사할 장소를 잡지 못한 채 6개월만 연장해달라고 애원했다. 5월25일이면 '쎄시봉'이 문을 연지 17주년 기념일. 그날까지 만이라도 기다려달라고 했다. 그러나 집주인의 고소로 이 문제는 법정에 올랐고 판결은 결국 이씨가 패소 집을 내놓게 되었다. 
                                「간판 내린 음악실 쎄시봉 17년」 『선데이서울』 69.5.11, 12쪽

놀이터를 상실한 ‘쎄시봉’ 죽돌이들은 이곳을 통해 얻은 명성으로 1969년 명동에서 개업한 ‘오비스캐빈’이라는 라이브업소로 옮겨 아마추어 통기타가수로서 돈을 벌다가 1970년 6월29일 개업한 ‘개구리홀’이라는 새로운 놀이터로 이동한다.

2층의 무대에서 노래하고 있는 여성.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찬 쎄시봉 내부를 볼 수 있다.

출처 : 연어알
글쓴이 : 북극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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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시절을 공유하던 친구들과 함께 그 감동을 느끼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