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의 진실탐구

역사학도 2007. 7. 29. 00:52
 
지난 7월 24일 각 신문사들 및 방송은 노무현 독재정권 과거사위의 발표를 아래와같이 보도하였다.

<<(서울=연합뉴스) 김귀근 이귀원 기자 =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두환(全斗煥) 보안사령관이 군의 '자위권 발동'을 주장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과거사위에 따르면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군 수뇌부 회의에서 자위권 발동을 주장한 사실이 보안사(현 기무사)에 보존된 2군사령부 작성 '광주권 충정작전간 군 지시 및 조치사항'에 적혀 있다는 것이다.

회의 장소와 시간이 명기되지 않은 이 문서(수기.手記)에는 주영복 당시 국방장관실에 주 장관 이희성 육군총장, 진종채 2군사령관,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 노태우 수도경비사령관, 정호용 특전사령관, 차규헌 육사교장이 참석했다.

특히 문서에는 '전(全) 각하(閣下:전두환):초병에 대해 난동시에 군인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 강조'라고 명기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자위권 발동을 주장했음을 분명히 했다. >>

그런데, 노무현 독재정권  과거사위의 첫번째 깡통 무식은 그 날이 5월 21일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며, 두번째 깡통 무식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자위권 발동을 주장하기는커녕 그 회의에 참석조차 하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정도영 보안처장이 보안사령관을 대신하여 참석하였을 뿐이요, 정도영 보안처장은 배석자에 불과하였으므로 아무 발언도 하지 않았었다.

   이 사실은 1995년 문민독재자 김영삼 정권 검찰이 보낸 질문서 중 17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에 나와 있다:

<<17. 5월21일 오후 국방장관실에서 주영복 국방장판, 이희성 계엄사령관, 진종채 2군사령관, 장도영 보안사 보안처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자위권 발동 등에 대해 논의한 사실이 있는데, 그 자리에서 논의된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정도영 보안처장에 의하면, 보안사령관을 대신하여 참석했는데 그 자리에서 진종채 2군사령관이 광주상황에 대해 보고하고 이어 자위권 발동 문제가 논의되었다는데 어떠한지, 그때 보안처장을 통해 어떤 의견을 표명하였는지.

▲정도영 보안사령부 보안처장은 국방부의 지시에 따라 1980년 5월21일 오후 5시경에 열린 「광주사태j 대책회의에 배석하였음. 동 회의에는 국방장관, 합참의장, 3 군 참모총장, 2군 사령관이 참석하였고 정도영 보안처장을 포함한 국방부와 각군의 계엄관계관이 다수 배석하였음. 대책회의에서는 진종채 2군사령관이 광주상황에 대한 설명이 있었으며 계엄군의 광주시로부터의 철수문제가 논의되었음,

▲정도영 보안처장은 「광주사태」 대책회의의 배석자에 불과하였으므로, 회의 과정에서 어떠한 의견도 개진한 바 없음.

▲정도영 보안처장은 회의 종료 후 보안사령관에게 회의결과를 보고하였음. 회의 결과에 대한 보안사령관의 지시 또는 조치는 없었음. >>

   노무현 독재정권 과거사위가 지난 24일 발표 때 언급한 회의는 1980년 5월 19일 있었던 사건에 대해서 정웅 소장의 물음에 무엇이 답변이었을지를 여러 장성이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보는 의견 교환이었다.  이 문건에서 초병은 공수부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5월 19일 광주기독방송에서 경계근무 중 폭도들에게 총을 빼앗겼던 한 초병(광주향토사단 96연대 소속)을 지칭한다.

   19일 광주사태가 악화되기 시작하자 2군사령부 진종채 장군은 작전참모 김준봉 장군을 대동하고 사태 파악차 광주 전교사로 갔다. 사령관 실에 윤흥정 장군과 함께 셋이 앉아서 사태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31사(광주향토사단) 사단장 정웅 장군으로부터 윤사령관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내용은 “지금 난동중인 학생들이 MBC방송국으로 몰려와 경계병의 총을 뺏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윤장군은 “아 여보시오 나보고 어떻게 하오리까 하면 내가 뭐라고 할수 있단 말이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그 사건 장소는 광주기독방송이었다.  폭도들이 MBC방송국에 방화를 시도했으나, 초병 총을 빼앗아간 사건은 광주기독방송에서 있었는데, 정웅 소장은 이 두가지 사건을 하나로 요약하여 “지금 난동중인 학생들이 MBC방송국으로 몰려와 경계병의 총을 뺏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광주지역 작전지휘권을 가지고 있던 사단장 정웅 소장이 스스로 판단할 문제를 윤장군에게 물으니 이것이 장군들 사이에 화제거리가 되고 도마 위에 올랐다.

   5월 21일 서울에서 광주사태를 걱정하는 장성들이 모여 국방장관실에 모여 좌담회를 가졌을 때 정웅 소장의 우유부단함이 도마 위에 올랐던 것이었으며, 초병이 난동자들에게 총을 빼앗겼을 때 군은 어떻게 대처하여야 하는지는 중요한 문제이기에 한마디씩 의견을 주고 받았을 뿐이었다.  더구나,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그 회의에 참석한 바 없었음은 5.18재판 때 이미 확인되었는데, 왜 노무현 독재정권 과거사위는 이상한 뒷북으로 깡통 무식을 드러내는가?

  그 메모 쪽지는 정도영 보안처장이 작성한 것이었다.  정도영 보안처장은 회의 종료 후 보안사령관에게 회의결과를 보고하였으나 아무런 지시와 조치도 없었다.  단지 보고를 들었다는 답변으로 "군인복무규율"을 언급하였던 것뿐이요, 그것을 개인적으로 종이 쪽지에 메모해 두었던 것을 가지고 노무현 독재정권 과거사위는 거창한 발표를 하였으니 실로 깡통 무식이 아닌가.  고로 노무현 독재정권 과거사위의 세번째 깡통 무식은 수신인이 없고 수신인에게 전달된 적 없는 메모가 어떻게 "군자위권 발동 주장"으로 확대 해석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김영삼 독재정권의 5.18검찰이나 노무현 독재정권 과거사위가 그 어느 장성으로부터도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는 증언을 확보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회의에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참석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아니, 참석도 하지 않았던 이가 어떻게 발언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실로, 과거사위의 깡통 무식의 억지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억지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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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 당시 광주 31사 한동석 중위의 이어지는 댓글 증언

광주사태 당시 북한군 및 당 간부 증언 동영상  

BBC 뉴스 동영상 칼럼

518 광주사태 사진전시회

탈레반에 억류된 한국인 인질 사태 최근 BBC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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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측 자료는 5월 21일 도청 앞에 집결했던 시민군 수가 20만명이었다고 넘었다고 하니, 그것이 사실인 듯합니다. 그때 한동석님이 들었던 사제 총소리를 당시 18세의 시민군 김수영(당시 전남고 2학년)이 들었습니다. 김수영씨 증언록에 여인도 그때 총상으로 사망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무장시민군과 여성 시위대가 섞여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여러 기록이 시민군 23만명이라 하기에 저는 남자들로만 구성된 시민군인가 했더니, 여성 시위대가 포함된 숫자인 듯합니다. 한동석님이 헬기(UH-1H)로 탈출하시면서 공중에서 보셨을 때 여자들의 모습도 보였는지요.

그 당시에는 저도 사실 어느 정도의 숫자인지는 짐작을 할 수가 없었고, 다만 엄청난 숫자의 인파가 군집하고 있다는 데 놀랐습니다. 남여노소 할 것없이 민간인과 군인들과의 <대결 구도>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너무나 극도로 흥분되어 있는 상황이라 그들 스스로 통제할 수도 없는 그런 상황 까지 갔다고 보여집니다. 그 당시 도청 안에 포위되어 있는 상황이라 그 외부 상황은 전혀 알 수도 없거니와 포위되어서 계속 공격을 당하고 있는 순간의 연속이라 불안하여 다른 생각은 염두 할 수도 없었습니다. <시민군(?)이 23만 명(?) > 과히 엄청난 숫자이군요. 헬기로 철수 하면서 공중에서 보았을�는 개미 떼 같이 검은 무리로 만 보였습니다.
시민군의 목적은 도청 점령이었습니다. 그리고, 공수부대가 우연히 모두 도청쪽으로 밀렸다기보다 광주 경찰이 도청 기밀 서류를 안전할 곳으로 옮길 때까지만이라도 도청을 사수해 달라고 요청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시 조선일보 기사 송고 내용 참조.)

한동석님의 처음 댓글 "MBC 방송국에서 우여곡절 끝에 비상 탈출하여, 밤 11시 경부터 다음 날인 5월 21일 <도청 발포사건>직후까지 (불행 중 다행으로 도청광에 공수부대와 같이 포위 되어 있었던) 도청광장에 있다가"를 방금 다시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5월 20일 죽을 고비를 넘기신 후에도 귀가하시기는커녕 도청광장으로 가셨군요. 침구 준비도 안되어 있었을텐데, 도청 광장에서 야영하셨나요? 96연대 40명이 함께 야영하였나요?
어떻게 글로 설명하기가 그렇습니다만, 전쟁터라고 생각하시는 게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50월 20일 밤 상황은 시민들한 테 잡히면 끝장입니다. 그래서 챙피스러운 이야기지만, 무기로 시민들을 제압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무작정 돌과 화염병을 맞을 수도 없고, 외부에서 지원병력이 시내로 들어올 수도 없이 고립이 된 상황인데, <귀가>라니요! <야영> 잠을 잘 수가 있나요? 목숨이 촌각에 달려 있는 데... 오죽하면 저가 단독으로 MBC방송국에서<탈출을 결심>하고 무전기 까지 끄고 병력을 인솔하는데 방향만 무등산 쪽으로 향했겠습니까? 그런데 운 좋게도 광주 경찰서(?) 까지 1차 탈출에 성공하여 잠시 쉬고 있는데, 뒤를 돌아 보니 MBC 방송국 건물과 옆의 병원 옥상까지 불길이 완전히 쌓였던 장면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무전병이 실수로 무전기를 개방하여 교신하는 과정에서 2소대(분대병력)와 3소대(분대병력) 가 안전한(공수부대가 집결되어있었음) 도청광장으로 먼저 대피를 하게되었고, 저희 병력은 경찰서에서 간편한 복장으로 무기와 실탄만 챙겨서 무등산 방향으로 2차 탈출을 시도하다가 우연히 2,3소대 병력을 만나게 되어서 선임 소대장인 저가 96연대 1대대 소속 3개팀(선임소대장 저를 포함하여 두명의 소대장<중위 & 소위>)을 재편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가 자정 무렵(5월 21일 0시) 입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영화에도 나오는 젊은 여성의 선무방송은 지금도 소름이 끼칠 정도 입니다. (계엄군은 포위가 되었으니 투항하라는 식의 엠프 방송) 장교인 저도 감당이 안되는 상황이어서 40여명의 병사들은 도청 별관 복도에 가면(쪼그려 앉아서 잠시 눈을 붙이는 정도의 수면 상태) 하도록 지시하고 장교 두명과 함께 교대로 도청 광장을 살피면서 밤을 새우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인데. <귀가> <침구> <야영> 그것은 사치스런운 이야기지요.
사병들을 재우기 위해서 교대로 보초 근무(?)까지 하신 장교님들 이야기가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한동석님도 당시 심신이 극도로 지치신 상태였을텐데 보통 정신력이 아니면 그렇게 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당시 상황이 불타는 MBC방송국 건물에서 탈출하는 것만으로 안전 지대에 오게 된 것이 아니라, 흉기를 든 시위대의 포위망을 탈출하셔야 하는 상황이었군요.

두가지가 궁금합니다. 무전기를 끄신 것은 무전기 소리가 시위대에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는지요? 그리고 젊은 여성의 엠프 선무 방송을 기억하시는지요? 계엄군을 대상으로 하는 선무방송까지 있었다는 것은 저에게도 금시초문입니다. (계엄군은 포위가 되었으니 투항하라는 식)의 선무 방송 구호 중 기억하시는 구호가 있는지요?

한동석님이 탈출하실 무렵 전국 대학 벽보에는 <광주사태 속보>라는 대자보가 붙었습니다. 그 대자보 내용은 "광주시민 수만 명이 군인들 총에 사살되었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려 왔다" 등의 내용이 담긴 대자보였습니다. 서울대 운동권이 만든 대자보라고 하며, 광주사태라는 용어는 이 대자보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는데, "광주시민 수만 명이 학살되었다"는 의미로 광주사태라는 용어를 사용했었던 것입니다.

대다수의 한국 국민이 이 선동적인 유언비어 대자보의 내용을 여태껏 집요하게 맹신하고 있습니다마는 저는 누가 혹은 어떤 세력이 그런 유언비어들을 퍼뜨렸는지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시위 주동자들이 광주시민들에게 북한 방송을 들으라고 강요했으며, 당시 광주의 상황이 북한에서는 실시간 생중계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광주시민은 도청으로! 도청으로!" 외치며 선무 방송을 했던 여성이 계엄군을 향해서도 "계엄군은 포위가 되었으니 투항하라"는 식의 선무 방송을 했다는 사실이 섬뜻합니다. 계엄군이 포위되었다는 사실을 시민군측에서 알고 있었다면, 이것은 평양에서도 알고 있었음을 의미하니까요. 그래서, 계엄군을 대상으로 하는 선무방송 내용이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지 몹시 궁금해지네요.
첫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겟습니다.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다음 기회가 있겟지요.
그리고, 두번째 질문은 엠프 선무 방송은 시위대의 함성(수만명)과 함께 울려서 뚜렷하게 서술은 할 수가 없지만 투항하라는 식은 분명했습니다. 그 당시 계엄군이 포위 되었다(퇴로가 차단 된 상태를 의미함)는 사실은 그 현장(도청 중심 1-2 Km 반경) 주변에있던 시민들은 모두 알고 있는 상태지요.그렇게 밤새도록(새벽 3시이후- 6시 까지 잠시 소강상태)집요하게 밀어부쳤던 군중들이었으니깐요.
극소수의 사람들은 어떻게 5월 27일 새벽 도청 재 탈환시에 계엄군이 <투항>을 권유해도 끝까지 저항할 수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계신 분도 있지만, 저는 그날 밤 그 상황을 몸소 격은 당사자로서 이해를 할 수가 있습니다. 선무 방송 내용을 정확히 기억을 해 두었으면 좋았을 것인데. 아뭏든, 너무나 충격적이 었건만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병사들이 동요할 까 걱정이 되어서 잘 들리지 않는 곳(도청 별관 건물 내부)으로 병력 이동을 지시 했습니다.
무전기를 끄신 이유에 대하여 다음 기회에 들을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제가 궁금했던 이유는 저도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던 무전기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광주사태 당시 광주시를 들낙거렸던 친구들은 북한에서 광주사태가 생중계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때는 설마 했었는데, 최근에 탈북자 증언과 다큐멘터리로 분명하게 확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전남치안본부는 광주와 북한 사이를 무수히 오가는 무선교신을 확인했다고 증언하시는 논객들이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생중계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광주에 북한 세력이 침투해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지요.

저에게 시민군의 무전기는 정말 수수께끼입니다. 5월 27일 새벽 도청 재 탈환시에 남아있었던 시민군은 대다수가 군복무를 하지 않았던 자들입니다. 들블야학 청소년들이 많이 있었지요. 그리고, 군대 갔다 와도 통신병 출신이 아니면 무전기 조작을 할 줄 몰랐던 시절입니다. 시민군 중 무전기 들고 다니며 교신했던 자들은 쏙 빠졌다는 얘기인데, 그들의 정체가 궁금합니다.

투항을 권유해도 끝까지 저항했던 이유 중 하나가 도청 지하에 8톤 다이너마이트 폭파장치를 해두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런데 박남선과 윤상원은 시민군 화약반과 소준열 장군과의 통화로 두 명의 군인이 25~26일에 뇌관을 모두 분리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지요. 그리고, 윤상원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였는데, 저는 김대중의 미등록정당 국민연합 사무총장이자 김대중 내란 주동인물로서 그가 간직한 비밀이 컸기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한동석님, 정동영이 광주사태 당시 MBC 앵커였다는 사실 확인하였습니다. 제가 http://blog.daum.net/sionvoice/6651445 에 "광주사태 점화원인을 정동영에게 묻는다"라는 제목으로 쓴 글에 있군요. 한 단락 여기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정동영은 광주사태 당시 MBC 앵커였다면서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이틀 전인 5월 16일에 김대중 홍위병들이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전국총학생회장연석회의를 개최하였으며, 그 날 연속회의의 목적은 5월 22일로 예정된 김대중의 내란을 준비하기 위한 것, 즉 김대중이 최규하 대통령을 무력으로 하야시키고 자기가 스스로 대통령되기 위한 거사 준비였다는 사실을 몰랐는가? 본래 김대중은 광주사태를 전국적으로 일으키려 하였기에 광주사태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전국 각 대학교에 시위선동 대자보가 나붙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정동영이 침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릇 모든 점화에는 점화 원인이 있다. 2003년 1월 대구지하철 사고 때도 점화 원인이 있었다. 그럼에도 광주사태 점화 원인에 대하여는 정동영이 이렇듯 침묵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점화원인의 진실을 말하지 않고 광주사태의 진실을 말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고 정동영은 생각하는가? >

---▶ 아가야 들, 참 말 많넹.. 역사학도와 한동석 -- 둘이다 열심히 공부 하려므나.. 젖도좀 더 먹고.. ㅋㅋ
뭐꼬 이 병신새끼들은? 빰따구를 찌져벌라
군단쪽 사진은 없�냐 시러베새끼들아
시민쪽 사진밖에 없는새끼들이 글로 몇페이지 뚜드린다고 착각하것냐
요세유행하는 역발상인가? 아니면 학문의 틈새시장인가? 너무 억지라고 생각하지않나? 대충 사진갖다붙이고 밑에 터무니없는글 써놓고 기사는 죄다 당시 신군부쪽기사나 어디서 듣보잡같은 자료만 엮어서...님...솔직해집시다. 님께서 마음속에 느끼는대로 머리가 좀 따라가주세요. 거짓말은 자꾸하다보면 님스스로 진실과 헷갈릴떼가있습니다. 그렇제 되기전에 좀더 이성적으로.....네? 아셨죠? 정신차리세요. 이런 식으로 되도안한 내용으로...... 이제 진실모두 밝혀진것 가지고 꼭 장사하듯이 역사를 연구하지마시고. 무슨 지만원같이 허위사실 자꾸 발설하고 다니면.....님.... 이런다고 님이 역사학계에서 먹어줍니까????......나 원참.....너무너무 잘 웃다가갑니다.
참나님, "신군부쪽기사"라는 것이 존재하나요?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노태우가 물태우라지만 광주사태에 대하여 자기 입장을 밝힌 적이 있다면 전두환 전 대통령을 백담사로 유배보내거나 518광주폭동을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입법화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미개인들의 문제는 근거 없는 주장을 한다는 것인데요. "신군부쪽 기사"라는 것이 있었다는 님의 주장은 근거가 있는 주장인지요?
참 재미있는 글 보고 갑니다.
가장 객관적인 입장에서 중간에 서서 한번더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여기 글은 모두 님 의견을 주장할 군부기사나 짜 맞쳐서 올린듯 한데 그때 당시 광주시민들 상대로
나온 증언이나 증인및 기사들도 같이 올려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평가 해보는것은 어떤가요
역사 평가는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가장 중립적인 입장에서 관련 기사및 증언들 증인들을첨부해서
평가 해야지 제가 보기에는 중립을 지키지 못하고 신군부 기사 몇가지 짜맞춰서 근거 없는 주장하고 똑같습니다.
일본이 오래전 침략 전쟁을 반성하지 못하고 아직까지도 역사를 자기나라 편에 서서 아무 근거 없는 사실주장 하는것랑 님이 님생각에 의거에서 짜맞추기식 역사 평가하는것랑 똑같습니다.
광주청년/ 윗글에 "1995년 문민독재자 김영삼 정권 검찰이 보낸 질문서 중 17번째 질문"이 인용되어 있는데요. 님 눈에는 그것이 군부기사로 보이는지요? 만약 군부 기사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저희에게도 좀 보여 주실 거죠?
역사학도 좋아하고 자빠졌네 ㅋㅋㅋ 문학학도가 그나마 쫌 니 정체성에 어울리지 않겠냐? 한동석님도 이놈 망상질좀 그만하게 그만하세요.
역사학도야 인터넷에 돌아댕기는 잡글 모아서 니가 망상질한다고 역사의 진실이 밝혀진다냐? ㅉㅉㅉㅉ
저는 그 시대 인물들을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사건 전개 과정을 몸소 겪으면서 지켜 보았던 그 시대의 증인입니다. 저는 제가 보았으며, 제가 아는 사실들에 대하여 더 이상 침묵하여서는 아니될 책임이 있는 증인입니다.
역사학도님 그때 현장에 있지도 않셨으면서 누가발포를 했니않했니 웃음을 참을수가없군요
그럼 시위와 상관이없는 그때 군의 임산부 총검사건 그외도 군의 주암리쪽인가 어린이 어른 포함 무작위총기난사사건 어려 선행된 야만적행위는 정당하다는 말씀인지 반성좀하세요 귀가막히는군요 ...
만약 임산부 총검 사건이 있었다면 희생자 이름을 대주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가해자가 시민군과 북한군이었다는 사실을 밝혀 드리겠습니다. 임산부 총검 사건 희생자 이름을 대주시기 바랍니다.
계엄군 투항하라 했다는 선무방송 이라니 웃음을 참을수가없군요 .... 그런 방송은 있지도 않았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증언을 혼돈하신것같네요 한가지 덧붙일것은 선거때가되니 음해공작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오로지 한탕주의식 선거로 변하는것에 대해 개탄하면서 이런 민감한시기는 현실성있는 정책과비젼을 토론하지 못하는게 아쉬운 일이라생각합니다 역사학도 님 여기저기 자료를 짜맞추기식 으로 열거하고 그때에 행쟁하지않을수없었던 슬픔과 비극을 당신은 진정 모르실것입니다 시간나시면 광주에 망원동묘지라도 다녀오세요 그러면 님도 많은 평정을 �을수있으리라고봅니다 이만 실래가많았습니다
오월님, 5월 20일 야간부터 5월 21일 새벽 사이에 시민군이 도청광장에 포위되어 있는 계엄군을 상대로 한 선무 방송 내용 말입니까? 저는 그 시대의 일연의 사건들을 목격한 증인이지만 님은 광주사태를 겪어 보셨는지요.
이제까지 도대체 왜 광주사태가 그 지경까지 갈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많았는데, 이곳에 와서 단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518이 계엄군의 의도적인 잔학한 만행으로 촉발, 확대되었다고 아는데 상식적으로 계엄군 측에서 그렇게 해서 정치적으로 얻을 게 하나도 없었거든요. 혹자는 전두환이 계엄상황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데, 그런 목적이라면 그런 수단으로 스스로 무덤을 파는 행위 -우발적 사고가 아닌 의도적인 잔인한 살상 행위-가 아니라도 다른 방안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계엄군 측이 자기 통제하나 못할 바보도 군대도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님의 합리적이며 객관적인 관찰 감사합니다. 그래서 김대중의 내린을 직접 겪고 광주사태 상황을 시시각각 관찰하고 있었던 우리는 유언비어와 싸우며 진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것입니다.
둔갑을시켜 5.18특별법을 통과시킨 민주화 운동은 무효다 그러기에 5.18을 제조명 하여야한다.전 두환의 발포명령은없었고 1980년5월21일12시59분 조 사천이 카빈총에 맞아 사망하자 그 큰 비극이 일어났던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