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사진·답사기/경기 구리·남양주·가평

도봉산고양이 2008. 5. 7. 18:25



~~~~~  수락산 덕릉마을 역사 산책  ~~~~~


 ▲  덕흥대원군 묘역을 지키는 좌쪽 문인석(무인석이라고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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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락산(水落山, 638m) 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덕릉(德陵)마을은 조그만 자연부락으로 수락산
과 불암산(佛岩山, 507m) 사이에 자리한 산촌(山村)이다. 서울보다 늦게 해가 뜨고, 일찍 지
는 이곳은 서울과는 불과 고개 하나 사이로 지하철4호선 당고개역에서 버스로 5분 거리이다.

깊숙한 벽지마을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물씬 풍기는 덕릉마을은 등산객과 나들이객을 상대로
주막을 하는 집들이 많으며, 행정구역은 경기도 남양주시(南楊州市)이나 상당수 서울을 생활
권으로 삼고 있다.

마을의 내력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은 없으나, 마을의 든든한 후광인 흥국사가 부락
뒤쪽에 있고,서쪽 언덕에는 마을 이름의 유래가 된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드넓은 묘역이
있어 이들을 바탕으로 조선 중기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  마을 신앙의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 덕릉마을 산신각(山神閣) -
경기도 지방민속자료 9호


조선 왕실의 별궁(別宮) 같은 흥국사(興國寺)를 둘러보고 덕릉마을 동쪽 산자락에 있는 산신각
을 찾았다.
산신각은 마을에서 훤히 바라보여 찾는 데 별로 어려움은 없다. 게다가 이정표도 친절히 베풀어
져 있으니 그것만 졸래졸래 따라가면 된다. 하지만 산신각으로 통하는 길목에 있는 농가에는 무
서운(?) 개들이 여러 마리씩 포진하며 멍멍거리고 있어 그 앞을 지나기가 상당히 껄끄럽다. 내
가 도둑질이나 이상한 짓을 하러 온 것도 아니거늘 왜 저것들의 잔소리를 바가지로 들어야 되는
가? 그들의 이유 없는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부근으로 우회했다. 산자락에는 누런 색의 낙엽들
이 산을 이루며 쌓여들 있어 겨울의 제국이 도래했음을 실감나게 해준다. 낙엽의 푹신한 촉각과
그들이 내는 사각사각 소리를 노래 삼아 들으며 산신각 앞으로 다가선다.


▲  가까이서 바라본 산신각 ~ 당집치고는 너무 화려한 모습이다.
옥의 티라면 산신각 현판이 약간 비뚤어져 있다는 것.


옛 마을에는 마을의 수호신을 모신 당집이 꼭 하나씩 있었다. 주로 성황신(城隍神)이나 조상신
을 모신 성황당(城隍堂), 서낭당 등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당집 대신 돌탑을 세우고 금줄을 치
기도 한다. 덕릉마을 산신각도 일종의 마을 당집으로 성황신 대신 수락산의 산신을 모신 것이
큰 특징이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을 얹힌 조그만 집이지만 그에 딸린 토지는 300여
평에 이른다.

당집치고는 너무 화려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 산신각은 아쉽게도 입을 굳게 봉하고 있어 내부를
보는 것은 어렵다. 건물의 구조는 앞 부분은 비어 있고 뒷부분에 방을 둔, 이른바 전당후실(前
堂後室)의 형태라고 한다. 건물 양쪽으로 바람을 막는 풍판(風板)을 달았으며, 기둥과 평방(平
枋)에는 곱게 단청을 입히고, 문짝과 양쪽 벽에는 화려한 색채로 여러 문양을 그려 넣어 미적(
美的)인 부분도 상당히 배려하였다. 확실치는 않지만 산신각을 세울 때, 흥국사의 화승(畵僧)이
마을 사람들의 부탁으로 곱게 색칠해 준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건물 후실에는 산신도(山神圖)가 걸려 있는데, 그림 가운데로 산신이 연꽃 모양의 부채를 들고
앉아있고, 왼편으로 호랑이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으며, 오른쪽으로 동자(童子) 2명과 복
숭아를 든 여인, 그리고 차를 끓이는 승려가 배치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도난을 우려
하여 덕릉마을 마을회관에서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이 건물은 188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마을 신앙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유물로 그 가치
가 인정되어 지방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산신제는 매년 음력 1월 초하루와 10월 초하루 밤에
지내며 마을사람 중 1명을 제주(祭主)로 삼아 유교식으로 제를 지내는데 요즘은 1월 초하루에만
지낸다고 한다. 제사 시간도 밤 10시부터 준비하여 자정에 제를 지낸다고 하며 예전보다는 좀
간소화되었다고 한다.
 
산신각을 살펴보고 아래로 내려가니 바로 마을회관이 나온다. 하지만 회관 주변으로 가득 쌓아
놓은 땔감 등으로 길이 차단되어 있어 약간 갈팡질팡하고 있으려니 마침 회관에서 아줌마 1명이
이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어디서 오냐고 물어본다. 그래서 산신각을 보러 왔다고 그러니 그
제서야 표정을 바르게 고치고는 구경은 잘했냐고 묻는다.
 
산신각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니 여러 번 매스컴을 통해 존재가 알려지면서 찾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산신각으로 오르는 길이 제대로 정비되지 못하여 답사객들이
적지않은 불편을 겪고 있다고 한다. 제사에 대해서 물어보니, 예전에는 1년에 2번 지냈는데 요
즘에는 음력 1월에만 지낸다고 한다. 산신각은 덕릉마을을 지키는 신성한 곳임과 동시에 마을
의 존재와 전통을 알리는 홍보대사의 역할까지 하고 있어 산신각에 대한 자부심이 정말로 대단
한 것 같았다.

길이 막혀 아줌마가 알려준 길로 가니 아까 전, 개들이 포진해 있는 집이 나온다. 결국 길이라
고는 그것 밖에는 없어서 개들의 적지않은 잔소리를 허벌나게 들어가며 서둘러 그곳을 빠져 나
왔다. 산신각을 찾은 이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라도 길가에 멍멍이를 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설
령 그들이 산신각을 수호하는 임무를 지녔다고 해도 말이다. 산신도 그걸 원치는 않을 것이다.

※ 덕릉마을 산신각 찾아가기 (2008년 5월 기준)
* 지하철4호선 당고개역(1번 출구)에서 청학리로 넘어가는 10-5번 시내버스, 33, 33-1번 마을버
  스를 타고 흥국사입구(덕릉마을) 하차. 도보 5분

♣ 덕릉마을 산신각 관람 정보 
* 산신제는 매년 음력 1월 초하루에 지내며 밤 10시에 제를 준비하여 자정에 제를 올린다.
*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 산5



 ♠  '아버지는 임금이고 아들은 왕이오', 조선왕조 최초의 대원군(大院君),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묘역 - 경기도 지방기념물 55호


▲  덕흥대원군 내외 묘역

덕릉마을 서쪽 언덕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원군인 덕흥대원군의 묘역이 자리해 있다. 덕흥대원
군은 조선 11대 군주인 중종(中宗)의 8번째 아들로 창빈안씨(昌嬪安氏)의 소생이다. 이름은 이
초(李岹)로 1530년에 태어났으며, 겨우 9살에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를 지낸 정세호(鄭世虎,
해주 정씨)의 딸과 혼인하여 하원군과 하릉군(河陵君, 덕흥군의 형인 금원군<錦原君>의 양자로 
들어감),
하성군 등 3명의 아들을 두었다. 하지만 명줄이 지극히 짧아 1559년, 불과 29세의 나
이로 평범하게 인생을 마친다.

그의 존재와 무덤은 이름도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수많은 왕족과 마찬가지로 자칫 잊혀
질 존재가 될 뻔 했다. 허나 천운이 그들 부자(父子)에게 있었는지 막내 아들인 하성군 이균(河
城君 李均)이 왕이 되면서 능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음은 물론 조선 최초의 대원군이란 상징적인
의미까지 지니게 되면서 일약 유명해 진다.

덕흥군의 형인 명종(明宗)은 후사도 남기지 못한 채, 1567년 홀연 승하해 버린다. 왕실에서는
마땅한 적임자를 물색하다가 덕흥군의 막내인 하성군을 왕위로 추대하니 이가 곧 임진왜란으로
허벌나게 고생을 했던 조선 14대 군주 선조(宣祖)이다.
 
선조는 아비가 후궁 소생이라는 것에 대해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왕족이긴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서얼 왕족이라 정통성(正統性)이 크게 떨어진다는 큰 약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
래서 그런 약점을 극복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부친에 대한 효도의 일환으로 즉위 이듬해인 1568
년 대원군 제도를 시행하여 그 1호로 부친을 덕흥대원군으로 추존(追尊)한다. 그래도 성이 차질
않는지 부친의 묘역을 릉(陵)으로 높이려고 했으나 신하들이 법도에 어긋난다며 쌍수를 들며 반
대했다. 그러자 선조는
'과인(寡人)이 임금이 되어 아비의 묘를 마땅히 왕릉으로 높이려고 하는데 그것이 어찌 법도에
어긋난다는 거요!'
강하게 불쾌감을 표했으나 역시 어림도 없었다.

상심에 빠져있던 쪼잔한 선조에게 어느 날, 내관이 좋은 방도가 있다며 은근히 아뢰기를 
'흥인문(興仁門) 밖 숯포에 사람을 보내 나무와 숯을 지고 온 나뭇꾼들에게 어디서 왔는지 물어
서 덕릉을 지나왔다고 하면 밥과 술을 대접하고 나무와 숯값을 후하게 쳐주십시요. 그러면 금세
덕흥대원군의 묘가 아닌 덕릉으로 소문이 날 것입니다'

내시의 건의에 방긋 미소를 띄운 선조는 바로 흥인문(동대문) 밖 숯전에 막대한 돈을 뿌리기 시
작했다. 예나 지금이나 돈이면 안되는 게 없는지라, 돈을 뿌린 만큼 정비례의 효과가 나타나 선
조를 기쁘게 했다. 그야말로 본전 그 이상을 뽑은 셈이다.

나뭇꾼들의 입소문은 불암산, 수락산 부근 나뭇꾼 뿐 아니라 한강이 흘러가는 경기도 동남부 지
역, 그리고 멀리 강원도까지 퍼져 나갔다. 정말 덕흥대원군 묘역이 어딘지도 모르고 근처에 갈
일도 없는 강원도와 타 지역 나뭇꾼들까지 한몫 챙기고자 뗏목에 나무를 바리바리 싣고 올라와
너도나도 덕릉을 지나왔다고 우기니 순식간에 덕흥대원군의 묘는 '덕릉'으로 자연히 높여진 격
이 되었으며 '덕릉'은 그 시절 최대의 유행어가 되었다. 그래서 흥국사 아래 마을은 덕릉마을이
되었고, 상계동에서 청학리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도 덕릉고개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덕릉의 관
리를 위해 1568년 흥덕사(흥국사)를 원찰로 정하고 막대한 재정을 지원했다.

이렇게 엄청난 돈을 발라가며 덕릉으로 격상시키는데 성공은 하였으나 선조가 세상을 뜬 후에는
'덕흥대원군묘'로 명칭이 복귀되었으며 실록(實錄)에도 덕릉 대신 '~묘'로 표기되었다.

덕흥군의 아내 정씨는 인달방(사직공원 부근)에 살면서 조선 왕실의 또 다른 원찰인 북한산 화
계사(華溪寺)를 문이 닳도록 찾아가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


▲  덕흥대원군의 장자인 하원군의 묘역 (뒷부분)

덕흥군을 시작으로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 인조의 생부로 원종<元宗>으로 추존), 전계대원군(
全溪大院君, 철종의 생부), 흥선대원군(유일하게 생존시에 대원군으로 격상) 등 모두 4명의 대
원군이 나왔다.

선조의 효성과 함께 정치적, 집안 배경의 약점을 커버하기 위한 그의 몸부림이 서린 묘역으로
500년 가까운 세월을 흥국사와 함께 하고 있으며 덕흥대원군의 묘 아래에는 선조의 맏형인 하원
군(河原君)의 묘가 자리해 있다.
 
매년 봄, 가을에는 흥국사에서 덕흥대원군의 재(齋)를 지냈는데 재에 소요되는 비용을 부근 학
림사(鶴林寺)와 내원암(內院庵)에서 상당수 부담했다고 한다. 그 부담이 얼마나 컸던지 허리가
부러질 지경이었다고 하며, 심지어 학림사를 덕흥대원군 묘역에 포함시키는 등 폐단이 심했다고
한다.

※ 덕흥대원군 묘역 교통편 (2008년 5월 기준) ~
* 지하철 4호선 당고개역(1번 출구)에서 청학리로 넘어가는 10-5번 시내버스, 33, 33-1번 마을
  버스를 타고 흥국사입구(덕릉마을) 하차. 오던 길(상계동 방면)로 4~5분 정도 걸으면 묘역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 산5-13



▲  덕흥대원군 묘역으로 가는 산길
겨울에 푹 잠긴 산길에는 낙엽들이 즐비하게 널려 딱딱한 산길을
돌뿌리에 걸려 넘어져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게 베풀어 놓았다.


▲  덕흥대원군 묘역 아래에 들어앉은 하원군의 묘역 (앞부분)

덕흥대원군의 장자인 현녹대부(顯祿大夫) 하원군과 부인 홍씨의 유택이다. 봉분의 모습이 잘 만
들어진 찐빵, 만두를 쏙 빼어 닮아 나의 허기진 배를 강하게 자극시킨다. 묘역 주변으로 문인석
1쌍, 망주석(望柱石) 1쌍이 나란히 시립(侍立)하여 쓸쓸한 묘역을 지킨다.


◀  하원군 신도비(神道碑)
하원군의 생애를 빼곡히 적은 비석으로 신도비
는 신도(神道)와 통한다는 묘역의 동남쪽에 세
우는 것이 상례이나 이 비석은 특이하게도 서
남쪽에 세워졌다.

신도비라고는 하지만 귀부와 이수를 갖추지 않
았으며 팔작지붕을 닮은 지붕돌과 비석을 심은
비좌(碑座)가 전부인 대체로 조촐하고 간소한
모습이다.




▲  덕흥대원군 신도비(神道碑)

▲  다소 뚱뚱해 보이는
덕흥대원군 묘역 앞 장명등(長明燈)


신도비는 육중한 덩치를 가진 귀부(龜趺) 위로 비신(碑身)이 심어져 있고, 지붕돌로 그 위를 마
무리 하였다. 두 발을 앞으로 뻗으며 정면을 바라보는 거북의 모습이 귀엽기만 하다. 이 비석도
하원군의 신도비와 마찬가지로 무덤의 서남쪽에 자리해 있다.


 ◀  덕흥대원군 묘역을 지키는 서쪽 문인석
양손으로 홀을 쥐어들며 선비의 기개를 상징하
듯 180도로 꽂꽂히 선 문인석. 약 450년의 세
월을 그렇게 서 있음에도 표정 하나 찡그리지 
않고 오히려 엷은 웃음을 선보이며 우리를 맞
이 한다.


~ 이렇게 하여 덕릉마을 역사 산책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  답사, 촬영 일시 - 2006년 12월 12일 / 2007년 12월 29일
  *  작성 시작일 - 2006년 12월 17일
  *  작성 완료일 - 2006년 12월 21일
  *  숙성기간 ~ 2006년 12월 22일 ~ 2008년 5월 7일    
  *  공개일 - 2008년 5월 7일부터
  *  마지막 수정일 - 2008년 9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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