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진·답사기/동대문구·중랑구

도봉산고양이 2018. 5. 2. 14:48




' 설렁탕의 탄생지, 제기동 선농단 (선농대제) '


▲  선농단 선농대제 제례상 (2012년)



봄이 한참 절정에 이르는 4~5월이 되면 천하 방방곳곳에서 다양한 축제와 문화행사가 열

려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에서는 종묘대제(5월 1주 일요일)와 연등회(석가
탄신일 1주 전 토~일), 석가탄신일(음력 4월 8일), 선잠제향(5월 중), 선농대제(4월) 등
이 열리는데(그 외에도 더 있음) 이들 축제 중에서 비싼 설렁탕을 무려 공짜로 제공하는
착한 축제가 있어 눈길을 끈다. 바로 제기동 선농단에서 열리는 선농대제(先農大祭)이다.
< 3글자로 줄여서 선농제(先農祭)라고도 함>


▲  제기동역에서 선농단으로 이어지는 가로수길(왕산로19길)
선농단 입구인 함경면옥에서 선농단 방향으로 약 110m의 꿀 같은 숲길이
펼쳐져 있다.

▲  담장 너머로 보이는 선농단 향나무
향나무가 있는 곳이 바로 선농대제의 뜨거운 현장인 선농단이다.


드디어 선농대제가 열리는 4월 말 토요일, 따사로운 오전 햇살의 응원을 받으며 도봉동(
道峰洞) 집을 나섰다.
1호선 전철을 타고 20여 분을 달려 제기동역에서 하차했는데 선농대제 관람과 잘 숙성된
설렁탕을 먹는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설랜다. 그렇다고 설렁탕 때문에 온 것은 절
대로 아니다. 어디까지나 우리의 고유 전통 행사인 선농대제를 참관하러 온 것이다. (참
관하러 간 것임~~~ 강조!! 근데 왜 발이 저리지..??)

선농단 입구에 이르니 선농대제를 알리는 현수막이 시원한 봄바람에 펄럭이며 대제를 구
경하러 온 사람들을 인도한다. 현수막은 촘촘하게 배치되어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으
며, 이제 막 제왕(帝王)의 제례 행렬이 끝나고 제례를 봉행(奉行)할 시간(10:30~12시)이
되어 선농단 주변은 제관(祭官)과 행사요원, 취재진, 나들이객, 동네 사람 등 수천 명의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 회색빛 도시 속에 조용히 묻혀지내는 망국의 제단 선농단, 국가
지정문화재라는 굵직한 지위를 누리고 있지만 원래 임무인 제단에서 강제 은퇴한 몸이라
꽤 적적한 신세이다. 그런 그에게도 천하가 미치도록 주목을 하는 때가 1년에 딱 하루가
있으니 바로 선농대제일이다.


♠  설렁탕의 탄생지, 농사의 중요성을 알리고 풍년을 기원하던
조선의 주요 국가 제단, 선농단(先農壇) - 사적 436호

▲  선농단 (선농대제가 끝난 직후의 모습)

선농단은 종암초교 남쪽이자 제기동 주택가 한복판에 고즈넉하게 누워있다. 이곳은 1476년에
조성되었는데, 처음 이름은 관경대(觀耕臺)로 조선의 제왕들이 신하를 거느리고 농사의 소중
함을 알렸다는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에게 제를 지내 풍년을 기원했다. 이 제사를
선농제(선농대제)라고 하며, 거기서 선농단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선농
제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청동기시대부터 농사가 시작되었다고 하니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은 그때부터 있었다. 하지만
제왕이 직접 제사를 챙기고 농사를 권장했다는 기록은 신라 초인 기원전 41년에 처음으로 나
타난다.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왕비와 함께 6부(六部)를 순행(巡行)하여 농사와 잠사(
蠶事)를 권장하고 감독했다고 하며, 매년 경칩(驚蟄)이 지나고 첫 해일(亥日)을 택하여 왕이
제를 지내고 적전을 갈거나 또는 관리를 보내 제를 지냈다.
그러다가 나중에 경주 동쪽인 명활산성(明活山城) 남쪽 웅살곡(熊殺谷)에서 선농제를 지냈으
며, 입하(立夏) 뒤 첫 해일에 후농제(後農祭)를 지냈다. 선농제란 이름은 바로 신라 때 생겨
난 것이다.

고려 때는 983년 1월, 성종(成宗)이 원구단(園丘壇)에서 기곡제(祈穀祭)를 지내고 몸소 적전
을 갈아 신농씨와 후직씨에게 제를 지냈다. 하여 이때부터 이 땅의 토속적인 농사 신(神) 대
신에 중원대륙에서 가져온 신농씨와 후직씨에게 제를 지낸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성종은 송
나라와 교류를 하며 중원(中原) 문화에 깊이 심취해 그곳의 문화와 제도를 마구잡이로 가져온
군주이기 때문이다.
허나 고려는 황제(皇帝)가 원구단에 나가 하늘에 제를 지낼 때, 풍년을 같이 기원했고, 매년
열리는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에서도 일종의 기곡제(祈穀祭)를 지내 별도의 선농제
는 거의 갖지 않았다.

그러던 선농제가 크게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조선 초부터이다. 태조 때 적경공제지법(籍耕供
祭之法)을 제정하고 태종 때는 적전단(籍田壇)을 수축했으며, 1430년에는 박연(朴堧)의 건의
로 선농지악(先農之樂)에 쓰이는 토고(土鼓)를 대체하고자 가죽 테를 한 북을 만들어 사용하
였다. 그러다가 1476년 성종의 왕명으로 관경대를 만드니 그것이 지금의 선농단이며, 사직단(
社稷壇), 선잠단(先蠶壇), 영성단(靈星壇)과 더불어 국가의 주요 제단으로 큰 대접을 받았다.

선농제를 지낼 때는 제왕이 직접 신하를 거느리고 제를 지냈으며, 그것이 끝나면 동적전<제기
동과 전농동(典農洞) 일대>으로 이동한다. 거기서 적전을 관리하는 적전령(籍田令)이 푸른 보
자기에 감싸인 쟁기를 제왕에게 올리며, 그것을 받은 제왕은 직접 쟁기를 잡고 밭에 5번 쟁기
질을 하는 이른바 친경(親耕) 쇼를 벌였다.
쟁기가 끝나면 관경대로 올라가 백성 가운데 특별히 선발된 70세 이상 노인들을 위로하고 그
들이 밭을 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런 다음 농작물 씨앗이 얼어죽는 것을 막는 절차까지 마
무리 되면 의식이 끝났음을 선포하고 궁궐로 돌아간다. 이렇듯 친경의례는 농사의 소중함을
제왕이 몸소 보여주고 비록 잠깐이지만 백성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으로도 활용되었
다.
허나 친경의례는 성종 이후 어쩌다 1번 벌일 정도로 거르는 경우가 많았으며(연산군 1회, 중
종 2회, 명종 1회, 선조 1회, 광해군 1회~) 인조에서 현종까지는 아예 하지도 않았다. 숙종(
肅宗)은 의식을 치루려고 단단히 준비까지 했으나 날씨가 받쳐주지 못해 무산되었으며, 영조
시절에 비로소 다시 치러지게 된다.

동적전이 있던 제기동과 전농동 지역은 지금은 완전 주택가라 썩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20세
기 초까지만 해도 너른 경작지였다. <제기동(祭基洞)은 제사를 지내는 터란 의미로 선농단에
서 비롯된 이름임>
왕실에서 관리하던 적전(籍田)은 2곳이 있었는데 선농단 근처에 동적전이 있었고, 개성(開城)
동쪽 전농동에 서적전(西籍田)이 있었다. 동적전은 제사용 곡식을 저장했는데, 선농단(관경대
)과 희우정(喜雨亭), 필분각(苾芬閣)이 있었고, 다수의 창고가 있었다. 반면 개성에 있는 서
적전에는 형향각(馨香閣)과 창고가 있었다.
동적전에서 나온 곡물은 종묘제례에 주로 썼으며, 서적전 곡물은 왕실에서 벌이는 온갖 제사
의식에 동원되었다. 이들 적전에서 쓰고 남은 곡물은 백성을 구휼할 때 쓰거나 의약청(議藥廳
), 산실청(産室廳) 및 제왕과 왕비의 예장(禮葬)에 사용했다.

▲  청량대 표석

▲  선농단 북쪽 홍살문

이렇듯 왕실의 주요 행사로 바쁘게 살았던 선농제는 1909년까지 잘 유지되었으나, 1908년 이
후 향사이정(享祀釐正)에
관한 순종의 칙령(勅令)에 따라 국가 제단을 정리하면서 사직단에
통합되었다. 허나 동적전 친경의례는 1910년 5월까지 이루어졌는데 그때 순종이 신하와 백성
을 거느리고 친경을 하는 장
면이 빛바랜 흑백사진으로 남아있다.

왜정(倭政) 때는 지역 사람들에 의해 선농제가 조촐히 진행되었으나 1940년대 왜정이 망국의
제단을 욕보이고자 선농단 주변에 청량대공원(청량대)을 닦으며 제단을 아작내고 동적전이 있
던 곳에는 전농공원을 닦았다. 이때 제단 북쪽 땅이 떨어져나가 보통학교(현 종암초교, 1922
년 개교)가 지어졌고, 1935년에 제단 남쪽에 경성여자사범학교(현 서울대 사범대학)가 들어서
면서 남쪽 땅까지 썰려나갔다. 또한 군수물자 징수란 명목으로 제사 도구를 거의 뜯어가 제사
도 중단되고 말았다.
어둠의 시절 이후에도 수난은 여전하여 1946년 이후 제단 주변에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차 30
년 이상 잠수 아닌 잠수를 타며 주택가에 묻혀있었다. 그러는 사이 선농단의 이름도, 존재감
도 모두 희미해져 세상의 뇌리 속에서 완전히 잊혀져 갔다.
그러다가 1979년 제기동에 뜻있는 이들이 '선농단친목회'를 결성하여 자비를 들여 1년에 1번
씩 치제(致祭)를 올리기 시작했다. 세상의 무관심 속에 세월의 저편으로 넘어가려고 하는 선
농단의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그렇게 선농단은 다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고, 동대문구와 같이 제례를 지내다가 1988년 행
정기관장 최초로 동대문구청장이 선농제 초헌관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후 1992년에는 '선
농대제 보존위원회'가 결성되었고, 동대문구의 흔쾌한 지원과 폭풍 홍보에 힘입어 지역의 대
표 축제이자 문화행사로 제대로 거듭났다. 행사 규모도 비록 옛날만큼은 못해도 나날이 커져
갔다.
그러다가 선농단 복원 여론이 강하게 피어나면서 2013년 8월, 선농단 주변에 장막을 치고 복
원 공사에 들어갔고 2015년 4월 공사가 완료되어 다시금 세상에 위엄을 드러냈다. 옛 선농단
의 모습이 상당수 회복된 것이다. 또한 선농단 북쪽에는 선농단 역사문화관을 닦아 선농단과
선농대제의 이해를 돕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선농단의 구조는 단 주위로 크게 터를 다지고 그 한복판에 단을 두었다. 단이라고 해서 높이
구축된 것은 아니며 땅바닥에서 조금 솟은 정도이다. 제단 테두리는 돌로 잘 다지고 안쪽은
흙으로 다졌는데, 2015년 원래 모습으로 복원되면서 부득이 하얀 피부의 석재가 다소 섞여있
다. 기존에 쓰였던 옛 석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여 오래된 돌과 새 돌이 어색하게 조화
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새 돌도 선배 돌을 닮아가며 고색의 기운을 머금을 것
이다.
제단 외곽에는 낮은 키의 토담을 쌓았고, 동쪽과 서/남/북쪽 테두리 중앙에 붉은 피부의 홍살
문을 세웠는데. 이들 문과 토담은 2015년에 복원된 것이다. 선농단 남쪽에 1단의 석축을 두었
으며, 단 서남쪽에는 500년 이상 묵은 향나무가 영욕의 세월을 견딘 제단을 굽어보고 있다.

▲  선농대제의 한 모습

▲  펄펄 끓는 가마솥 설렁탕

선농대제는 처음에는 정월 길(吉) 해일(亥日)에 했으나 태종(太宗) 때 경칩이 지난 첫 해일로
변경되었다. 그때가 농사가 시작되는 3월이기 때문이다. 음력 2월 첫 신일(辛日)에도 제사를
지내기도 했으며, 1910년에는 양력 5월에 거행되었다. 그러다가 1979년 이후에는 4월 말~5월
초/중순 사이에 하다가 지금은 4월 하순 토요일에 하고 있다.


제향(祭享)은 10변(籩) 10두(豆)의 중사(中祀)로 거행하고, 친림제향 때는 아헌관(亞獻官)은
왕세자(王世子)나 황태자(皇太子)가, 종헌관(終獻官)은 영의정이 맡았다. 집례(執禮)의 창홀
(唱笏)에 따라 음악을 연주하고 육일무(六佾舞)를 추며, 제례 봉행 순서는
① 전폐례<奠幣禮, 농업신에게 예물을 올리는 의식> → ② 천조례<薦俎禮, 제신(祭神)에게 음
식을 올리는 진찬(進饌)의식> → ③ 초헌례<初獻禮, 초헌관이 1번째로 농업신에게 작을 올리
는 의식> → ④ 아헌례<亞獻禮, 아헌관이 2번째로 농업신에게 작을 올리는 의식> → ⑤ 종헌
례<終獻禮, 종헌관이 3번째로 농업신에게 작을 올리는 의식> → ⑥ 음복례<飮福禮, 제관이 제
사를 마치고 신이 내린 제물을 먹는 의식> → ⑦ 망료례<望燎禮, 폐백과 축문을 태워 땅에 묻
는 의식> 순으로 거행된다.

영신악(迎神樂)은 경안지악(景安之樂)을 연주하고 전폐례에는 숙안지악(肅安之樂). 진찬례에
는 옹안지악(雍安之樂), 초헌례에는 수안지악(壽安之樂)을 연주하며 일무생들은 문무(文舞)를
춘다. 이어서 서안지악(舒安之樂)을 연주할 때는 일무생들은 무무(武舞)를 추기 시작하며, 아
헌례와 종헌례 때는 수안지악을 다시 연주하고 철변두(徹籩豆)할 때는 옹안지악을, 송신할 때
는 경안지악을 연주한다. (절차가 매우 복잡함)

제사 제물로는 소와 돼지, 양의 고기와 피, 쌀과 기장, 과일, 떡, 술 등을 올렸으며, 모든 행
사가 끝나면 친경에 쓰인 소를 잡고, 제물로 쓰인 소고기를 넣어 탕을 끓였다. 그리고 제물로
쓰인 쌀과 기장으로 밥을 짓고 돼지고기는 편육으로 썰었는데, 탕에 밥을 말고 편육과 여러
반찬을 겯드려 행사에 참여한 신하와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제물에 김치가 없기 때문에 파를 씻어다 놓았고, 간장도 쓰지 않기 때문에 소금으로 탕의 간
을 맞추었다. 오늘날 설렁탕을 먹을 때 파와 소금을 겯드리는데, 그 전통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선농단에서 끓인 탕이라 하여 '선농탕(先農湯)','설농탕','설롱탕'이라 불렸
으며,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가운데 글자가 살짝 움직여 지금은 '설렁탕'으로 주로 불린다.
우리나라 대표 음식의 하나이자 서울의 토박이 음식 설렁탕은 이렇게 선농대제 뒷풀이 음식으
로 태어난 것이다.

또한 설렁탕의 옛 이름 중 하나인 설농탕의 유래에 대해서 1940년에 홍선표가 쓴 '조선요리학
'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는 앞서 선농탕과는 약간 다른 것이라 햇갈림을 준다.
'세종대왕이 선농단에서 친경하던 때에 비가 심하게 내려서 촌보(寸步)를 옮기지 못할 형편에
이르렀다. 신하들이 배가 고파서 견디기가 힘드니 왕이 친경에 쓰던 소를 잡아서 맹물에 넣고
끓이라 하였다. 고기 끓인 국물에 소금을 넣어 먹으니 이것이 설농탕이다'

그 외에 오랫동안 탕을 끓이면 국물이 흰빛을 띠어 '눈처럼 뽀얗다','눈과 같이 무르녹는다'
는 뜻에서 설롱탕이 되었고, 그것이 설렁탕으로 변했다는 견해도 있다. 허나 보통은 선농탕
유래를 많이 신뢰한다.

동대문구의 대표적인 문화행사로 거듭난 선농대제는 보통 10시부터 시작된다. 왕산로에서 선
농단까지 짧게 어가행렬을 비롯한 제례행렬을 선보이며, (예전에는 동대문구청에서 출발했음)
10시 20분 정도에 개회식을 갖고 10시 30분부터 12시까지 제례를 봉행한다.
제례를 치르는 동안 선농단 북쪽 종암초교에서 동대문구 공무원과 새마을단체 사람들이 점심
을 준비하며 12시부터(보통 11시 30분 이후부터 배식함) 선농대제의 백미(白眉)이자 상징인 '
전통
설렁탕 재현 및 나누기' 시간을 갖는다. 설렁탕은 누구든 먹을 수 있으며, 전통에 따라
탕에 밥이
말아져 나온다. 반찬으로는 설렁탕의 단짝인 김치와 깍두기를 비롯해 떡과 생수가
제공된다.
설렁탕은 넉넉히 준비하기 때문에(보통 2,000~3,000명 분을 준비함~)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
다. 초반에 가면 사람이 너무 미어터져 밥이 오기까지 상당한 인내를 요하니 차라리 사람이
많이 빠져나간 12시 30분 이후에 먹기를 권한다. 음식은 각자가 알아서 챙겨먹는 것이 아닌
새마을단체 사람들과 자원봉사 학생들이 알아서 갖다준다. 늦게 갔을 경우에는 밥을 먹을 의
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으며, 가급적 13시 이전에 가는 것이 좋다. (떡과 김치 깍
두기 등이 빨리 떨어
짐)

공짜 설렁탕이지만 맛은 생각 외로 괜찮아 왠만한 설렁탕 전문점을 울게 할 정도이다. 시중에
서 거의 7,000~9,000원 하는 설렁탕을 선농대제의 일환으로 공짜로 먹을 수 있으니 정말 좋은
축제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13시부터는 선농단 역사문화관에서 설렁탕 요리대회(설롱 요리대회)가 열리며 요리가
끝나면 시식 기회를 제공한다. (대회 참가 자격은 동대문구 관내 식당이나 학교, 단체에 한함
) 음식을 맛보고 괜찮은 음식에게 점수를 주면 되며 그것을 토대로 요리대회 승부를 결정한다.

※ 선농단, 선농단역사문화관 찾아가기 (2018년 5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제기동역 1번 출구를 나가면 바로 선농단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그의 지시
  에 따라 오른쪽으로 나무가 우거진 가로수길을 5분 들어가면 선농단이 나온다. 선농단 역사
  문화관은 그 북쪽 3거리(종암초교 정문 동쪽)에 자리한다.
* 지하철 6호선 안암역(3번 출구)에서 성북구 마을버스 04번을 타고 종암초교에서 하차, 여기
  서 길 반대쪽으로 건너면 종암초교로 인도하는 골목길(무학로44길)이 있는데 그 길로 도보
  3분
* 선농단 관람 시간 : 10시 ~ 18시까지 (11~2월은 17시까지)
* 선농대제는 4월 하순 토요일에 열린다. (4월 중순 쯤에 선농단 역사문화관에 전화문의를 해
  보는 것이 제일 좋음)
* 선농단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 274-1 (무학로44길 38, 선농단역사문화관 ☎
  02-355-7990)
* 선농단역사문화관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남쪽 홍살문에서 바라본 선농단과 선농대제


♠  선농단과 선농대제 둘러보기

▲  서남쪽에서 바라본 선농단과 선농대제

선농단에는 푸른색 시트 커버를 걸친 제사상 4개가 놓여져 있다. 이중 큰 상은 선농단 북쪽과
동쪽에 배열하니 이들은 농업신인 선농씨와 후직씨의 밥상이며, 다른 조그만 상 2개는 선농단
밑에 둔다.
제단에서 남쪽 홍살문까지 붉은 카페트를 쫘악 깔고, 서쪽과 남쪽에도 붉은 카페트를 깔아 바
로 남쪽으로 향하게 했는데, 이들은 제왕을 비롯한 제관이 움직이는 동선이다. 제단 남쪽 정
면 길로 제단으로 들어가 의례를 치른 다음, 서쪽이나 동쪽 카페트를 따라 다시 남쪽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선농단 주위로 갑옷을 입거나 무관 복장을 갖춘 무관(武官)들이 삼엄하게 늘어서 있어 선농대
제의 엄숙함을 한껏 고조시킨다. 1시간 반 가까이 저렇게 서 있는 것도 그리 쉽지는 않을텐데
말이다. 허나 옛날과 달리 그저 자리만 지키면 되며, 옆 사람과 수다를 떠는 모습도 쉽게 목
격이 된다. 그것이 옛날과 오늘날 선농대제의 차이이다. 만약 옛날에 그렇게 산만하게 행동했
다면 바로 파직감이다. 그만큼 까다로움을 요구했던 국가의 제례의식이었기 때문이다.


▲  전통 방식으로 재현된 가마솥 설렁탕 부뚜막

선농단 서쪽에는 누런 피부의 부뚜막을 설치하여 정겨운 가마솥을 걸고 설렁탕을 끓이고 있다.
장작을 넣어 부뚜막을 계속 흥분시키면서 탕을 숙성시키고 있는데, 선농대제가 무르익을 수록
설렁탕도 그만큼 익어간다.


▲  동남쪽에서 바라본 선농대제

선농단 남쪽 밑에는 금관조복(金冠朝服)을 갖춘 제관들이 홀(忽)을 쥐어들며 3줄로 늘어서 있
다. 이들 상당수는 선농대제 보존위원회 위원들로 석전대제와 사직대제, 종묘대제 보존위원들
도 섞여있다. 제왕은 보통 동대문구청장이 담당하고 있는데, 대례복(大禮服)과 12면류관을 갖
춘 자못 제왕다운 모습으로 대제에 임하고 있다.
제관들은 노천에 멍석을 깔고 앉거나 절을 하지만 제왕은 그들 동쪽에 차려진 노란색 천막 안
에서 햇살을 피하며 대기한다. 그리고 의식을 행할 때는 옆에 자리한 내관이 붉은 일산(日傘)
을 받쳐들고 그를 따르니 역시나 제왕이나 우두머리 자리가 좋긴 좋다.

제관 자리 남쪽에는 하얀 천막이 쳐져 있고 의자가 넉넉히 놓여져 있어 행사 관계자들과 세금
이나 축내는 구의원과 국회의원 밥버러지들, 지역 유지들, 관람객들이 앉아있으며 제관들 서
쪽에는 붉은 옷을 입은 여인들이 무리를 지어 앉아있는데 이들은 일무(佾舞)를 맡은 사람들이
다. 그리고 그들 북쪽에는 제례악을 맡은 사람들이 각기 악기 1개 또는 2개씩 거느리며 악기
를 조정한다.


▲  선농대제에 임하고 있는 제관들
전통 행사로 진행되는 지금도 이러한데 옛날에는 정말 숨소리도 내기 힘들 정도로
정성과 엄숙을 다했다. 그때는 조금의 실수나 긴장 풀린 모습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만약 걸리면 파직을 시키거나 징계를 주었다.

▲  동쪽 홍살문 남쪽에서 바라본 선농대제
(노란 천막은 제왕이 대기하는 특별 공간)

▲  제례 봉행이 시작되면 제관들은 전폐례부터 망요례까지 무려 7개의 의식을
수행해야 된다. 그때마다 단으로 올라가 의식을 치루고 다시 내려와
대기하다가 다음 의식이 시작되면 또 올라간다.

▲  선농단 남쪽에서 대기하고 있는 일무생들
사단법인 아악일무보존회 사람들로 모두 여자들이 맡는다. 앳된 20대부터
중년층에 이르기까지 36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  문무(文舞) 율동을 선보이는 일무생들

▲  제례악을 맡은 사람들 (경기도립국악단)

▲  서쪽에서 바라본 선농단과 선농대제

▲  북서쪽에서 바라본 선농단과 선농대제

▲  음복례가 진행되고 있는 선농단
음복례는 제관이 제사를 마치고 제물로 올린 술을 마시는(음복) 의식이다.

▲  음복례도 거의 끝나가고

▲  대제의 마지막 단계, 망요례

음복례가 끝나면 폐백과 축문을 태우고 선농단 북쪽에 마련된 공간에 묻는다. 망요례를 끝으
로 1시간 반에 걸친 선농대제는 마무리가 되며, 원래대로라면 친경 의식도 해야 되나 부근에
친경을 벌일 경작지가 없기 때문에 계속 생략되고 있다. 그러니 선농대제는 '설렁탕 나누기'
를 포함해 2/3 정도만 재현되고 있는 셈이다. 허나 어찌하겠는가? 아무리 전통 행사라고 해도
시대에 맞게 변형과 축소는 어쩔 수가 없다.


▲  망요례를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제관들
다들 속으로 '이제 행사도 끝났으니 밥 묵으러 가자~~!' 이랬을 듯~~

▲  선농대제에서 활약한 전통 악기들
궁중 의례나 종묘제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몸값 비싼 악기들이 주류를 이루어
선농대제의 높은 품격을 보여준다.


대제가 끝나자 선농단 주변의 통금은 모두 풀렸다. 제관들과 행사 요원들, 높은 작자들은 기
념사진을 찍거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하나 둘 밥 먹으러 사라지고, 제단 주변은 관리
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어수선한 상황이 되었다. 대제를 구경하던 사람들은 제단으로 들어와
초롱초롱 호기심 어린 눈으로 제삿상과 제물, 제기, 악기 등을 살펴보고 사진에 담느라 부산
하다. 그렇다고 제물과 제기를 가져가지는 말자~! 그냥 손으로 쓱쓱 어루만지고 끝내면 된다.


▲  선농대제 제삿상 <후직씨에게 올리는 제삿상, 2012년>

▲  금동 빛깔의 장엄스런 제기들
사극에서나 보던 고급 제기들이 속인들의 호기심을 건드린다. 백성들은 감히 쓰지도,
만지지도 못했을 저들을 직접 두 눈에 담으니 기분이 참 새롭다. 저들은 가격이
얼마나 하려나? 몇 개 장만하여 내 밥그릇으로 쓰고 싶다.

▲  제주(祭酒)을 담은 그릇과 의식 때마다
손을 씻는 정화수와 수건들

▲  창고로 퇴장하는 제기들
이제 1년 뒤에나 볼 수 있겠구나...


▲  가벼운 태풍이 지나간 듯 어수선한 선농단 (대제 직후의 모습)

제관과 행사요원들이 밥 먹으러 가고 선농대제로 잠시 긴장을 탔을 선농단은 제사 소품이 어
지럽게 깔린 채, 휴식을 취하고 있다.
저 소품들은 점심 이후에 모두 정리되어 창고로 옮겨지며, 제단 주변을 깨끗히 손질하여 언제
시끌벅적한 대제를 지냈냐는 듯 원래의 적막한 모습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아무리 점심시간이
라고 하지만 제단 위에 저렇게 소품을 방치하는 것은 좀 결례가 아닐까 싶다. 선농단이 마치
제례용품 창고가 되버린 듯한 씁쓸한 현장처럼 보여 적어도 제단 밖으로 모두 옮겨놓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싶다.


♠  선농단 마무리 (향나무, 설렁탕, 선농단 역사문화관)

▲  선농단 향나무 - 천연기념물 240호

선농단 서쪽에는 나이도 지긋한 오래된 향나무가 넓게 그늘을 베풀고 있다. 그는 선농단의 오
랜 상징이자 얼굴로 나이가 무려 500년 이상을 헤아린다. 20세기 후반에도 추정 나이가 500년
이었다고 하니 선농단과 나이가 그런데로 비슷할 듯 싶으며, 1476년 선농단을 닦을 때 성종이
기념으로 심거나 15세기 후반 선농대제 기념으로 심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천하에 널리고 널
린 나무 중에 유독 향나무를 심은 것은 제사 때 피울 향을 충당하고자 함이다.

아무리 먹어도 줄지 않는 세월이란 무한 양분과 국가 제단에 자리한 잇점으로 관리들과 귀족
들의 보살핌이 대단했다. 게다가 대제 때마다 곡차(穀茶)의 기운을 듬뿍 받으니 키가 13.1m,
둘레 2.28m에 어엿한 나무로 성장했다. 대제가 끝나면 막걸리를 비롯하여 제사에 쓰인 술은
이 나무에 모두 부었다고 하며, 어렸을 때부터 강제로 술에 길들여지다보니 이제는 내성이 생
겨 어지간한 술에도 눈 까딱하지 않을 것이다.


▲  선농단의 흑역사, 바닥에 눕혀진 청량대(淸凉臺) 표석

향나무 북쪽에는 '청량대' 3자가 쓰인 표석이 표석이 벌러덩 누워있다. 여기서 청량대는 왜정
이 선농단을 욕보이고자 제단 주변에 닦은 공원으로 '청량대공원'이라 불렸다. 공원 앞에 청
량대 표석을 세워 선농단의 이름을 억지로 대신했는데, 1945년 8.15이후 제기동과 용두동 주
민들이 몰려와 왜정이 세운 청량대 표석을 때려 눕혀 땅에 묻어버리면서 어둠의 시절에 대한
울분을 조금이나마 달랬다.
그러다가 2013년 이후 선농단을 복원할 때 다시 꺼내서 이곳에 눕혀놓았다. 90도로 세워놓으
면 왜정 잔재에 기만 살려주는 꼴이 되니 이렇게 눕힌 것이다. 비록 왜정이 남긴 고약한 흔적
이지만 기왕 다시 햇살을 보게 된 거 이런 상태로 선농단 곁에 두어 후대에 경계로 삼는 것이
좋을 것이다. 허나 이 땅에는 아직도 때려눕힐 왜정의 잔재가 너무 많다. 그것들을 모두 잡는
그날, 이 땅에 진정한 광명이 올 것이나 그럴려면 아직도 까마득하니 그저 곡소리만 나올 뿐
이다.


▲  선농대제는 끝났지만 숙성의 끝을 향해 부뚜막에 몸을 기대며
제 갈 길을 고집하는 가마솥 설렁탕


선농대제도 다 끝나고 사람들도 대부분 빠져나간 선농단에서 유일하게 펄펄 흥분을 내는 존재
가 있다. 바로 황토색 부뚜막에 걸린 가마솥 설렁탕이다. 부뚜막에는 아직도 온기(溫氣)가 여
전해 뜨거운 입김을 불어대며 탕이 아주 사골이 되도록 펄펄 숙성시키고 있는데 탕 국물이 아
주 하얗게 변해 뽀얀 눈이 내려앉은 것 같다.
설렁탕 나누기 행사에서 이 가마솥 설렁탕을 쓸 것 같지만 절대로 쓰지 않는다. 동대문구에서
따로 조리하여 가져와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이 설렁탕은 어디까지나 재현용이며 가마솥 안에
는 국물만 보일 뿐 고기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허나 냄새만큼은 설렁탕 냄새 비슷하여 아
마도 소뼈 등을 넣고 삶은 듯 싶다.


▲  선농단 북쪽 밑에 자리한 선농단 역사문화관

선농단 역사문화관은 선농단을 복원하면서 새로 닦은 것으로 2015년 4월에 문을 열었다. 이곳
에는 선농단과 선농대제의 역사와 유물, 디오라마를 비롯하여 설렁탕의 깊은 유래, 농업의 역
사와 농기구들을 다루고 있으며, 어린이를 위해 선농단 탁본 체험, 선농대제 의복 체험, 선농
대제 사진 촬영 등의 여흥거리도 준비되어 있다.
지하 2층 규모로 지하 1층에는 선농단과 선농대제, 어가행렬, 제왕의 친경의례 등을 다루었고,
지하 2층은 설렁탕과 농업 관련 유물과 서적 전시, 체험 코너, 청소년 쉼터와 배움터, 중정(
시간의 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정 같은 경우는 향나무 남쪽에 있었던 옛 선농단을 투영
한 곳으로 내,외부에 24절기를 표현하여 그 24절기에 따라 빛과 그림자가 햇님의 운행에 따라
시간과 계절, 날씨의 변화된 조건에서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알려주는 공간이다.

허나 다른 박물관, 전시관과 비교해서 크게 두드러지는 부분이나 매력은 별로 없으며, (체험
코너나 중정 정도~) 전시 유물도 좀 빈약한 실정이다. 그러다보니 관련 해설과 사진, 디오라
마가 주류를 이루고 있어 선농단 후식거리로 1바퀴 둘러보며 선농단을 복습하는 공간으로 활
용하면 될 것이다. 특히 아이들을 동반하여 왔다면 꼭 들려서 체험 코너에서 놀게 해주는 것
도 좋다. (선농대제 의복 체험, 사진 촬영 등)


문화관 정문에는 전통 찻집과 기념품점이 있어 잠시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도 누릴 수 있으며,
마침 정문 앞에서 설렁탕 요리 대회(설롱 요리대회)가 열리고 있어서 분위기가 가마솥 설렁탕
처럼 아주 뜨거웠다.

★ 선농단 역사문화관 관람정보 (2018년 5월 기준)
* 관람시간 : 9시~18시 (겨울 11~2월에는 17시 30분까지)
* 관람료 : 무료 (매주 월요일과 법정공휴일은 휴관)
* 상설 전시 해설 : 1일 6회 (10~16시까지 매시 정각, 12시는 없음)
* 단체 전시 해설은 10~20명 단체에 한하며 관람 5일 전까지 전화로 신청 요망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 274-1 (무학로44길 38, ☎ 02-355-7990)


▲  선농단과 동적전의 위치

▲  1739년에 작성된 친경의궤(親耕儀軌)

▲  동적전식례(東籍田式禮)
동적전에 관해 기록한 책으로 1824년부터 1853년까지 쓰였다.

▲  신농씨 제례상

▲  선농대제에서 먹은 설렁탕의 위엄

선농단과 선농대제를 둘러보고 그날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설렁탕을 먹으러 종암초교로
이동했다. 선농단 일대를 동분서주하다 보니 시장기가 무척 치솟아 뱃속이 아주 반란 직전이
다.

설렁탕은 동대문구청에서 마련하여 제공하는 것으로 행사 관계자는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 무
료로 대접하고 있다. 그러니 누구든 와서 운동장에 설치된 천막에 앉으면 설렁탕과 김치, 깍
두기, 떡, 생수, 1회용 숟가락과 젓가락을 제공받는다. 직접 줄을 서서 음식을 받는 것이 아
닌 자원봉사자들이 직접 갖다주는 방식으로 초반에 가면 자리를 잡기도 힘들뿐 더러, 음식이
내 앞에 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려 차라리 좀 늦게 가는 것이 낫다.
12시 30분 이후에는 빈 자리가 많아서 적당한 곳에 앉아 음식을 나르고 치우느라 바쁜 그들에
게 1그릇 청하니 바로 잘차려진 설렁탕을 가져다준다. 혹자(或者)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
다. '공짜 설렁탕이니 맛도 별로고 고기도 별로일 것이다'
하지만 동대문구가 지역 이름과 선농단, 선농대제의 이름을 걸고 제공하는 설렁탕인지라 맛은
시중의 유명 설렁탕에 크게 뒤지지 않는다. 그러니 안심하고 먹자. 파도 넉넉히 들어있고, 고
기도 그런데로 담겨져 있으며, 김치와 깍두기도 맛이 괜찮다. (예전에는 밥과 탕을 따로 주었
으나 이제는 탕에 말아서 제공함)

설렁탕의 양은 사람마다 틀리겠지만 나한테는 좀 적었다. 뱃속도 1그릇을 더 조공으로 보내라
고 극성인지라 1그릇을 더 청하여 2그릇을 비웠다. 어차피 늦게 가면 초반과 달리 음식 여유
가 있기 때문에 1그릇을 더 먹고 반찬을 더 축내도 상관은 없다. 그날 배식이 어여 끝나야 설
렁탕 나누기 행사도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분 좋게 설렁탕 섭취를 마치고 나오니 시간은 어느덧 13시 20분이 되었다. 선농단에
3시간 가까이를 머물며 선농단과 선농대제, 선농단 역사문화관, 향나무, 거기에 설렁탕까지
정말 남부럽지 않은 시간을 보내며 눈과 입, 코, 귀 등 5각(五覺)이 즐거웠던 답사였다.
이렇게 하여 내년 선농대제와 설렁탕을 벌써부터 고대하며 '설렁탕의 고향, 선농단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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