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사진·답사기/전남 장성·영광·함평·나주

도봉산고양이 2019. 9. 23. 22:08



' 가을맞이 산사 나들이 ~ 꽃무릇의 성지, 영광 불갑사 '

▲  눈과 코, 입이 달린 불갑사 굴뚝

▲  대웅전 목조석가여래3불좌상

▲  불갑산 산길



상사화(相思花)는 꽃무릇이라 불리기도 한다. <열반에 드는 모습과 비슷하다 하여 피안화
(彼岸花)라 불리기도 함> 그들은 8~9월이 절정기로 상사화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받
는 영광 불갑사에서는 매년 9월 한복판에 상사화 축제를 벌인다. 비록 축제는 과거완료형
이 되었고 시간 또한 이미 10월 초를 가르키고 있지만, 아직까지 상사화가 남아있을 것이
란 순진한 생각에 불갑사로 콩 볶듯 길을 떠났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영광으로 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담
았다. 자리는 널널하여 편하게 이동을 했는데 거의 3시간 40분을 내달려 영광읍내에 자리
한 영광터미널에 도착했다. 전남 영광(靈光)은 2006년 가을 이후 10여 년 만에 방문이다.
영광터미널에서 잠시 숨 좀 돌렸다가 불갑사행 군내버스를 잡아타고 다시 20분 정도를 달
려 불갑사 종점에 두 발을 내린다. 이제 비로소 꽃무릇의 성지로 추앙받는 불갑사에 발을
들인 것이다.


♠  불갑사 입문

▲  불갑사 주차장 느티나무 - 전남 보호수 15-18-6-8호

버스가 얌전히 바퀴를 접은 불갑사 주차장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넓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
다. 이 나무는 2004년 12월에 보호수의 지위를 받았는데, 당시 추정 나이가 65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10여 년이 더해져 660~670년 정도 된다. (어디까지나 추정 나이임)
아무리 먹어도 끝이 없는 세월과 사람들의 보살핌에 힘입어 무럭무럭 자라나 지금은 높이 25m
, 둘레 5.9m의 장대한 나무로 성장했다. 그 기나긴 세월 동안 불갑사를 찾은 사람들의 정자나
무와 이정표 역할을 하였고, 지금도 그 역할은 여전한데, 문명의 이기(利器)인 차량들도 앞다
투어 그의 포근한 그늘 속에 들어가 가을 단잠을 즐긴다.

주차장을 지나면 육중하게 생긴 일주문이 마중
을 한다. 보통 문 정면에는 절 이름을 알리는
현판을 내걸기 마련이나 이곳은 뒷쪽에 걸어두
어 문을 꺼꾸로 세운 듯한 모습이다.
일주문을 중심으로 잘 꾸며진 공원이 넓게 자
리해 있는데, 이 일대를 '불갑사 관광지'라 부
른다. 이곳에는 산책로와 연못, 진달래동산,
오토캠핑장, 영광산림박물관 등이 있으며, 나
는 오로지 불갑사와 상사화만 바라보고 온 터
라 모두 쿨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  불갑사 일주문(一柱門)


▲  불갑산 호랑이상의 위엄

일주문을 지나 조금 들어서면 왼쪽에 위엄 돋는 모습에 불갑산 호랑이상이 있다. 지금이야 호
랑이와 마주칠 일이 없으니 돌에 새겨진 공룡 화석을 보듯 대수롭지 않게 여기겠지만 오랫동
안 이 땅을 주름잡던 무서운 맹수였다. 호환(虎患)을 제일 두려워할 정도로 옛 사람들에게 공
포의 대상이었으나 20세기 초반 왜정(倭政)에 의해 모두 사라지고 이제는 동물원에서나 겨우
구경할 수 있다.

불갑산에도 호랑이가 살았었는데, 1908년 2월 덫고개에서 어느 농부가 호랑이 1마리를 잡았다.
그때는 호랑이 사냥으로 먹고 살던 사냥꾼과 농사꾼이 많았던 시절로 잡은 호랑이를 어찌 처
리할까 궁리하던 중, 왜인(倭人) '하라구찌'가 찾아와 자기에게 넘기라며 200원을 주었다. 당
시 200원은 무려 논 50마지기(1만 평) 가격이었다.
호랑이를 매입한 하라구찌는 왜열도로 건너가 동경의 시마쓰 제작소에서 표본 박제를 했으며, 그것을 들고 목포로 건너와 살다가 나중에 목포 유달초교에 기증했다. (순수한 마음으로 기증
을 했는지, 1945년 패망으로 강제 귀국을 하게 되자 일종의 떨이로 넘긴 것인지는 모르겠음)
그 박제는 아직도 유달초교에 간직되어 있으며, 북한과 만주 등의 실지(失地)를 제외한 이 땅
(남한)에서 잡힌 호랑이 중 유일하게 박제 표본으로 남은 것으로 호랑이에게는 억울하겠지만
우리에게는 무척 귀한 자료이다.
이후 영광군에서 '포획 100년 만에 귀향'이라는 주제로 유달초교와 국립생물자원관 척추동물
연구과의 도움으로 모형을 제작해 2009년 4월 이곳에 갖다두어 불갑산의 새로운 명물로 삼았
다.

호랑이상 뒷쪽에는 호랑이굴이 재현되어 있는데, 가짜 돌로 만든 모형굴이라 허접하기가 그지
없으며, 호랑이상은 그럴싸하게 지어져 있어 어두울 때 보면 자칫 염통이 쫄깃해질 수 있다.


▲  불갑산 호랑이상과 호랑이굴(뒷쪽)

▲  산뜻하게 닦여진 불갑사 가는 길 (불갑사 관광지)

▲  푸른 잎만 남은 진달래동산

▲  불갑사 해탈교

불갑사 관광지와 불갑사의 경계를 이루는 해탈교를 건너면 꿈에 그리던 상사화 군락지가 나온
다. 상사화의 마지막 향연을 기대했건만, 정작 나를 맞이한 것은 검게 떡이 되버린 시들시들
해진 상사화였다. 이것이 정녕 8~9월 동안 천하를 홀렸던 그 상사화가 맞단 말인가?


▲  잔치가 끝나버린 상사화 군락지

나의 계산은 틀렸다. 적어도 9월 말까지는 왔어야 상사화의 끝물이라도 볼 수 있는데 너무 늦
게 왔다. 여기서 불갑사 경내까지 죄다 뒤적거려도 멀쩡한 상사화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얄미운 세월이 그들의 젊음을 죄다 앗아갔기 때문이다.
불과 며칠 사이에 젊음이 사라진 상사화의 말로는 어떻게 저리 비참할 수가 있지? 되물을 정
도였다. 솔직히 검게 타듯 시들어질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오히려 꽃에 매달린 푸른 잎과 나
무가 더 아름답게 보일 정도였으니 상사화의 인생은 일장춘몽(一場春夢)보다도 못한 것 같다.
단지 그 2달을 위해 그들은 용을 썼던 모양이다. 세상에 그 무엇이든 전성기가 지나면 그 이
후의 모습은 참 우울하기 그지 없지. 그래서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  내년을 기약하며 잔뜩 웅크린 상사화(꽃무릇) 군락지
향연이 끝난 상사화의 쓸쓸한 말로, 허나 그것이 절대 끝은 아니다. 꽃은 비록 졌지만
그 꽃을 피우는 숙주(뿌리, 줄기)는 그대로 남아 내년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  숲속에 묻힌 상사화 군락지

▲  상사화 군락지 산책로 - 상사화 전성기 때 한번 거닐어보고 싶다.

상사화는 서로를 애타게 생각하는 꽃이란 뜻이다. 잎이 진 후에 꽃이 피고 꽃이 진 후에 잎이
나기 때문에 잎과 꽃은 서로 만나지 못하고 그리워한다. 그래서 상사화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
다고 한다. 또한 그럴싸한 전설 한 토막이 덧붙여져 전해오는데 내용은 대략 이렇다.

불갑산 호랑이가 꼬랑지를 살랑거리며 어흥거리던 옛날, 효성이 지극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
의 부모는 금슬 좋기로 이름난 부부였는데,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극락왕생을
빌고자 절에 들어와 100일 동안 탑돌이 불공을 올렸다.
그녀를 본 큰스님 수발승은 마음에 불이 나면서 그만 연모의 정을 품게 되었다. 하지만 승려
의 신분이고 수줍은 성격이었기 때문에 이를 표현하지 못하고 몰래 그를 보면서 끙끙 마음을
앓았다. 여인은 그런 것도 모르고 100일 불공을 마치자 미련 없이 속세로 돌아갔고, 승려는
더 이상 그를 못보게 되자 그리움이 더욱 사무쳐 결국 상사병(相思病)으로 죽고 말았다.
그리고 이듬해 봄, 승려의 사리가 안긴 부도 주변에 잎이 진 후 꽃이 피어났는데, 마치 그 승
려의 모습을 닮았다고 하여 꽃 이름을 상사화라 했다고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전설로 그
만큼 꽃이 아름답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그런 슬프고도 혹독한 전설을 붙인 모양이다.


▲  불갑사 가는길 (상사화 군락지 옆)

상사화 군락지를 지나면 석축 위에 오롯하게 자리한 승탑군(부도군)이 마중을 한다. 비석 4기
와 조그만 승탑 6기가 조촐히 승탑군을 이루고 있는데, 승탑들은 고려 말부터 조선, 20세기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원래 절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34년에 이곳으로 집합시켰다.

이들 승탑은 회명당 처묵(晦明堂 處墨), 청봉당(晴峰堂), 서산(西山), 설두(雪竇), 설제(雪醍
), 각진국사의 승탑으로 이중 각진국사 자운탑은 1355년에 조성된 것이라 전한다. 비석 중에
는 '정3품 통정대부 김상기(金商基) 공덕송비(功德頌碑)'가 있는데, 영광 출신으로 정3품 벼
슬까지 지낸 김상기가 1939년 대웅전과 종루를 세우는데 시주를 하여 그를 기리고자 세웠다.
승탑군을 지나면 담장을 두른 불갑사 경내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럼 여기서 잠시 불갑
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불갑사 승탑(僧塔)군

불갑산(516m) 서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닦은 불갑사는 상사화로도 유명하지만 자칭 백제 최
초의 사찰이라는 자부심을 진하게 간직하고 있다.
백제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384년, 그 시절 백제는 천하 제일의 해양대국으로 바다를 건너 왜
열도를 비롯해 중원대륙의 산동(山東) 등 대륙의 여러 해안 지역을 장악하면서 세력을 과시하
고 있었다. 바로 그때 인도 승려인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백제의 위엄을 듣고 동진(東晉)을
경유하여 들어온 것이다.

마라난타는 바다를 건너 영광 법성포(法聖浦)에 상륙했다고 전하는데, 그곳과 가까운 불갑산
자락에 절을 세우니 백제 최초의 절이자, 첫째 가는 절이라 하여 불갑사라 했다고 전한다. 하
지만 증거가 불충분하다. (관련 기록도 없고 유물도 없는 실정임)
마라난타 창건설이 신빙성이 떨어지자 따로 내세운 것이 백제 문주왕(文周王, 재위 475~477)
창건설이다. 이때 행은(幸恩)이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무왕(武王) 시절인 640년에 창건되었다
는 설도 덧붙여 전하고 있다. (불갑산 남쪽 너머에 자리한 함평 용천사는 600년에 행은이 창
건했다고 함) 허나 아쉽게도 이 역시 증거가 부실해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한다.

창건 이후, 8세기 중반에 행사존자(行思尊者)가 중창을 했다고 하는데, 행사존자는 마라난타
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니 아마도 창건 시기를 부풀리면서 나온 실수가 아닐까 싶다. 어쨌든
신라 후기나 행은이 활동했다고 전하는 7세기(무왕 시절)가 그나마 적당한 창건 시기가 아닐
까 여겨지며, 백제 후기에 살짝 창건되었다가 660년 백제 멸망 이후, 백제를 다시 일으키려는
백제 부흥군과 이를 막으려는 신라와의 전쟁 과정에서 파괴된 것을 중건했을 가능성도 있다.

고려 후기에 각진국사(覺眞國師, 1270~1355)가 머물면서 절을 크게 불리니 전각이 100여 칸,
요사(寮舍) 400칸, 부속 암자가 31개에 이르렀다고 하며, 승려 수는 수백 명을 헤아렸다고 한
다. 또한 누각의 기둥 높이는 90척, 사전(寺田)은 10리 밖까지 이어졌다고 하니 그 규모가 가히 대단했다. <각진은 순천 송광사(松廣寺) 16국사의 하나임>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전일암(錢日庵)을 제외하고 모두 잿더미가 되었으며, 법릉(法
稜)이 전일암을 터전으로 삼아 급한데로 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1634년 해릉이 중
창했으나 사세가 점점 어려워져 규모 또한 축소되었다.
1802년 득성(得成)이 중창을 했고, 1869년 설두대사(雪竇大師)가 크게 중창을 벌이면서 그동
안 잃어버린 토지를 많이 회복하였다. 1879년에 중창을 했으며, 1938년 설제가 중수를 했고,
1984년에 다시 중수를 벌여 지금에 이른다.

넓직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만세루, 일광당, 설선당, 명부전, 조사전, 칠성각,
팔상전, 천왕문, 백운당, 향로전 등 20여 동에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왕년에는 부속암자
가 31개나 되었다고 하나 현재는 전일암, 해불암(海佛庵), 불영대(佛影臺), 수도암(修道庵),
무각선원(無覺禪院) 등 5개만 남아 있다. 특히 전일암은 정유재란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존재
로 법릉이 이곳에 머물며 불갑사를 다시 일으켜 세웠으며, 임진왜란 때 왜열도로 끌려가 고생
을 무지했던 강항(姜沆)이 종종 찾아와 참선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대웅전과 목조석가여래3불좌상, 불복장전적 등 국가 보물 3점과 천연기념
물로 지정된 참식나무 자생북한지, 사천왕상과 대웅전 삼세불회도, 팔상전 영산회상도, 지장
시왕도, 동종(전남 지방유형문화재 311호), 고적급위시답병록(전남 지방문화재자료 205호).
만세루 등 지방문화재 여러 점을 지니고 있다. 그 외에 일광당과 명부전, 괘불지주, 팔상전,
각진국사자운탑비, 업경대, 대법고, 승탑군 등 수많은 비지정문화재가 있으며, 수다라 성보박
물관을 경내에 지어 절의 오랜 보물을 담아두었다.

불갑사는 고창 선운사(禪雲寺), 함평 용천사(龍泉寺)와 더불어 상사화(꽃무릇)의 3대 성지로
꼽힌다. 절 주변에 상사화를 가득 심어 8~9월에는 상사화의 향기가 경내를 뒤덮으며, 9월에는
상사화축제가 열려 절의 존재감을 천하에 널리 드러낸다.
영광 지역에서 가장 큰 절이고 영광의 주요 명승지라 답사/나들이 수요가 적지 않으며, 불갑
산이란 명산(名山)까지 끼고 있어 산꾼 수요도 대단하다. 깊은 산골에 자리해 있어 산사(山寺
)의 내음을 뿜어내고 있으며, 문화유산도 풍부해 고색의 진한 내음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 게
다가 상사화와 참식나무 등 진귀한 꽃과 나무도 절을 수식해 자연의 내음까지 덩달아 누릴 수
있다.

기왕 불갑사를 찾는다면 상사화의 향연이 펼쳐지는 8~9월을 추천한다. 물론 다른 때도 상관없
다. 절에서 불갑산 정상까지는 2시간 정도 걸리며, 남쪽에 자리한 모악산(母岳山, 348m)을 넘
어 함평 용천사로 넘어가도 된다.

* 불갑사 소재지 :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 8 (불갑산로450 ☎ 061-352-8097)
* 불갑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불갑사 경내 모형도 (수다라 성보박물관)


♠  불갑사의 보물 창고, 수다라(修多羅) 성보박물관

▲  불갑사 금강문(金剛門)

내 앞에 이르니 맞배지붕 금강문이 마중을 한다. 보통 문 이름이 쓰인 현판을 정면에 내걸
기 마련이나 특이하게 '불갑사' 현판을 앞에 내밀고 금강문 현판을 문 안쪽에 수줍은 듯 걸어
두었다. 문 좌우에는 돌담을 둘러 경내를 가렸으며, 계단을 오르면 금강문의 주인인 금강역사
(金剛力士)가 정면을 바라보며 중생을 검문한다.
문을 들어서 계단을 1단계 더 오르면 정면에 천왕문이 계단을 늘어뜨리고 있고, 왼쪽에는 명
경당(明鏡堂), 오른쪽에는 수다라성보박물관이 손짓을 한다. 박물관의 존재는 전혀 몰랐던 터
라 여기서 잠시 불갑사를 잊고 보랏빛처럼 다가선 성보박물관을 먼저 둘러보기로 했다.


▲  수다라 성보박물관
박물관 앞에는 비석을 잃어버린 연꽃무늬 비좌(碑座)가 누워있다.


21세기 이후 많은 고찰(古刹)들이 성보박물관이란 자체 박물관을 지어 절의 보물을 보관/전시
하고 있다. 불갑사 역시 그 유행에 흔쾌히 합류하여 'ㄱ'자 구조의 성보박물관을 하나 장만해
세상에 내놓았다.
불갑사의 오랜 보물을 머금은 보물 창고로 거추장스런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타서 내부를
둘러보면 되며 관람시간은 9시~17시까지다. (매주 월요일 휴관, 관람료 없음) 무슨 박물관이
이렇게 볼거리가 많은지 사진에 담고 하느라 30분 정도 인적이 없는 박물관 내부를 신나게 누
볐다.

▲  다양한 모습을 지닌 16나한상과 인왕상(仁王像)

석가불3존좌상과 그들의 열성 제자인 16나한상,
그리고 그들을 지키는 인왕상. 제석(帝釋), 범
천(梵天) 등은 지금은 없어진 나한전(羅漢殿)
에 있었다.
그 나한전이 퇴락하자 그것을 부시고 팔상전으
로 자리를 옮겼으며, 지금은 이렇게 성보박물
관에 안착했다.
이들은 1706년 도인 옥잠의 발원시주로 조성된
것으로 당시 유명한 화승(畵僧)인 색난과 그의
제자 초변, 영선 등 10명의 화승과 함께 만들
었으며, 석가불3존좌상의 얼굴이 둥글고 넓적
하여 포근한 이미지를 보이고 있다.

▲  16나한을 거느린 석가불3존좌상
(석가불과 제화갈라보살, 미륵보살)


▲  팔상전 영산회상도(아랫 그림)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307호

팔상전(八相殿) 후불탱화였던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는 석가여래가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
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이다. 현재는 성보박물관에 편히 뉘어져 있는데, 1777년 영광 지역에서
유명했던 비현, 복찬, 쾌윤 등 금어(金魚) 3명과 편수 12명이 참여하여 만들었다.


▲  두 눈이 인상적인 대웅전 용마루 보탑(寶塔)

불갑사의 왕년의 위엄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대웅전 용마루 중앙에 무려 용의 얼굴을 지닌 보
탑을 달았다. 현재는 용마루에서 떨어져 나와 성보박물관에 머물고 있는데 익살스럽게 표현된
용머리 위에 기와집 모양의 탑신(塔身)과 4각 지붕을 두었고, 다시 그 위에 둥근 머리 장식을
두었다.
이 보탑은 점토를 구워서 만든 것으로 그 피부에 '甲申 五月','盡○手 陟敏(척민)'이란 명문
이 새겨져 있어 1764년 5월, '척민'이 대웅전을 중수하면서 만든 것임을 귀뜀해 준다. 이렇게
용머리 보탑을 용마루에 둔 것은 대웅전의 위엄을 높이려는 의도로 볼 수 있으며, 지붕에 보
탑 등의 장엄물을 두는 것은 주로 동남아와 중원대륙 남쪽 사원에서 많이 나타나는 양식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흔치 않은 유물이다.


▲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308호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를 담은 그림이다. 지장보살 좌우와 밑에 도명
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 시왕, 범천, 제석천, 사천왕을 두고 그 밑부분에 판관
(判官) 등을 배치했으며, 윗쪽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미륵보살, 대세지보살,
제화갈라보살 등 보살 6명을 집합시켰다.
보통 지장시왕도에는 다른 보살까지 무더기로 그려진 예는 거의 없는데, 그림의 색채가 밝고
선명하여 그저 어둡고 무서울 것만 같은 저승 식구들에 대한 이미지를 화사하게 비추고 있다. 가늘고 섬세한 필법과 안정적인 화면 구성 등을 보이고 있으며, 밑부분이 조금 헝클어진 것
외에는 건강 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이 그림은 1777년에 비현, 복찬, 쾌윤 등 9명의 화승이 그린 것으로 그들은 순천 선암사(仙巖
寺)를 중심으로 많은 불화(佛畵)를 남겼다.


▲  삼세불회도(三世佛會圖)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306호

삼세불회도(삼세불탱)란 조선 후기에 크게 유행했던 삼세불(석가불, 약사불, 아미타불)을 담
은 그림으로 원래 대웅전에 있었다. 불갑사의 대표적인 불화로 꼽히고 있는 그림으로 1762년
이전에 그려진 것으로 여겨지며, 비단 바탕에 아주 현란하게 채색되어 꽤 밝은 색채를 보인다.
그림 윗쪽에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갖춘 석가여래를 비롯해 좌우에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배치해 삼세불을 이루었으며, 3세불 좌우와 밑부분에는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대
세지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 미륵보살, 지장보살 등 8명의 보살을 배치했다. 그리고 네 모
서리에 사천왕을 하나씩 넣었고, 3세불 윗쪽에 분신불(分身佛) 2명과 10대 제자, 천중(天衆)
2구를 넣어 그림을 고루고루 채웠다.


▲  칠성탱(七星幀)

칠성탱은 1892년에 영광읍 주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만든 탱화이다. 두광과 넓직한 신광
을 두룬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그림 윗쪽에 조그만 동자를, 중간에는 칠여래(七如來), 밑에
는 칠원성군(七元星君)을 배치했으며, 색채가 화사하여 선명한 기운을 전해준다.


▲  검은 피부의 조그만 철불좌상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불갑사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이다. 귀여운 동자승을
모델로 한 듯 덩치는 매우 작지만 고졸한 미소만큼은 잃지 않았다.

▲  오래된 법고(法鼓)
법고는 사물(四物)의 하나로 1885년에 통나무로 제작되었다. 원래 대웅전에 있었으며,
길이 85cm, 직경 75cm 규모로 이제 겨우 130살로 한참 북소리를 낼 나이지만
일찌감치 새 법고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현역에서 물러났다.

▲  귀여움이 묻어난 6명의 동자상

곱게 색이 입혀진 동자상은 조선 후기에 나무로 제작된 것이다. 당시 불갑사 동자승을 모델로
했는지 하나 같이 귀엽기 그지 없는데, 원래는 명부전 시왕상 옆에 있었으나 다 없어지고 이
들 6개만 남아 성보박물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몸에 걸친 옷과 손에 든 물건, 얼굴, 머리 스타일, 덩치, 키에 이르기까지 모두 제각각의 모
습으로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그들의 해맑은 표정이 보는 이로 하여금 한 줄기 웃
음을 머금게 한다.


▲  푸른 피부의 목어(木魚)
용머리에 물고기 몸통을 섞은 듯한 모습으로 앞서 법고와 더불어 사물의 일원이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지금은 박물관 유물로 너무 편하게 살아가고 있다.

▲  가마(연) 같은 모습의 불감(佛龕)
불감은 호신불을 휴대하고자 만든 것으로 가로 83cm, 세로 61cm, 높이 88cm이다.
다른 불감과 달리 여닫는 문이 없으며, 연(가마)의 형태를 취한 점이
이채롭다. (조선 후기 유물)

▲  업경대(業鏡臺)

업경대는 사람이 죽어서 저승(명부)에 이르렀을 때 얼마나 착하게 살았나 죄업을 비춰준다는
거울이다. 그 거울을 보면 자신의 나쁜 짓이 모두 비춰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거울 보
기가 좀 겁이 난다.
이들은 나무로 만든 것으로 아주 순한 표정을 지은 사자 암수 1쌍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자
대좌 위에 업경을 받치는 간주(竿柱)를 세우고, 그 위에 업경과 활활 타오르는 모습의 화염무
늬를 두어 나쁜 짓에 대한 경각심을 주지시켰다. (나쁜 짓을 많이 하면 뜨거운 불구덩이 지옥
으로 간다는 식으로) 대좌까지 완전히 갖춘 업경대로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으며, 불갑사가 내
세우는 휼륭한 보물로 조각 수법이 매우 뛰어나다.


▲  불갑사를 거쳐갔던 옛 승려들의 진영(眞影)
18세기 후반~19세기 후반에 제작된 진영(영정) 5점이 남아있다.
(누구의 진영인지는 모르겠음)

▲  조선 후기에 지어진 불연(佛輦)

불연은 불상과 보살상, 영가의 초상화나 위패를 운반하는 가마이다. 보통 절 문 밖까지 연을
메고 나가 대상물을 싣고 다시 절로 가져왔으며, 4명이 가마채를 들거나 끈으로 매어 운반했
다. 불연의 모습이 제왕과 왕족들이 사용하던 가마와 많이 비슷해 그 축소판을 보는 듯 하다.


▲  소통(疏筒)과 가사함(袈裟函)

소통(왼쪽)은 법회나 여러 불교 의식 때 신도들이 소망을 적어서 낭독한 후, 그 종이를 말아
넣어두던 통이다. 가로 23cm, 세로 16cm, 높이 88cm로 조선 후기에 제작되었으며, 통 밑에는
난간을 두룬 수미단(須彌壇) 모양의 대좌를 두어 소통의 품격을 드높였다.

가사함(오른쪽)은 승려의 가사(袈裟)를 보관하던 목함으로 2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별
도의 가사함을 둔 것은 이곳이 거의 유일하다고 하며, 그 형태가 독특하다. (조선 후기에 제
작됨)


▲  불갑사 불복장전적(佛腹臟典籍) - 보물 1470호

불갑사에는 사천왕상과 석가불3존상 및 16나한상, 지장보살3존상 및 시왕상 몸 속에서 나온
오래된 서적들, 이른바 복장 전적(典籍)이 매우 많다. 자그마치 193종 259책의 분량으로 불갑
사의 장대한 내력을 더욱 꾸며주는 빛과 소금과 같은 존재인데, 이들은 '불갑사 불복장전적'
이란 이름으로 국가 보물 1470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천왕상 몸 속에서 나온 것은 판본 33종 46책, 낙장본(落張本) 16종 20책 등, 총 49종 66책
으로 완주 화암사(花巖寺)에서 발행된 '불설대보부모은중경(1441년)','지장보살본원경(1453년
)' 등이 있으며, 임진왜란 이전 판본이 대부분이라 모두 보물의 지위를 얻었다.

석가불3존상과 16나한상 몸 속에서 나온 것은 76종 84책으로 '백운화상초록불조 직지심체요절
(1378년)','선종영가집(1381년)','천노금강경(1387)','묘벙연화경언해(1463년)' 등 고려 후기
와 조선 초기 판본이 많이 나왔다. 이들 역시 보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지장보살3존상과 시왕상 뱃속에서 나온 것은 68종 97책이다. 고려 후기 판본인 '묘법연화경(
妙法蓮華經)'과 '금강반야바라밀경언해(1464)' 등 조선 초기 서적이 대부분이라 모두 보물의
지위를 얻었다.

▲  묘법연화경 - 1382년 작

▲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 - 1382년 작

▲  금강반야바라밀경언해 - 1464년 작

▲  법집별행녹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
要幷入私記) - 14세기 후반

▲ 지국천왕(持國天王) 탱화

↖  증장천왕(增長天王) 탱화

◀  다문천왕(多聞天王) 탱화



불갑사는 사천왕상을 배려하여 그들의 후불탱
까지 남겼다. 아마도 사천왕의 수호력이 길이
길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차원에서 그리 한 것
이 아닐까 싶은데, 1904년에 조성하여 천왕문
내부의 사천왕상 뒷쪽에 배치했다. 허나 지금
은 성보박물관으로 탱화를 모두 옮겼으며, 사
천왕상만 천왕문에 남아있다.


♠  불갑사 경내 둘러보기

▲  천왕문(天王門)

성보박물관에서 계단 하나를 오르면 천왕문이다. 이 문은 부처와 절을 지키는 사천왕의 보금
자리로 이들 사천왕은 원래 고창 흥덕에 있던 연기사(烟起寺)터에서 가져온 것이다.

때는 1870년 어느 날, 불갑사에 머물던 설두대사 봉기(奉琪)의 꿈에 사천왕이 나타났다. 그들
은 비를 쫄딱 맞은 처량한 모습을 보여주며 지붕 좀 씌워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그들을 소수
문해보니 이미 망해버린 고창 연기사터에 버려져 있었다.
그래서 배 4척을 끌고 가서 그들을 데리고 오니 영광 사람들의 환호가 대단했다고 하며 경내
에 사천왕의 집(천왕문)을 지어주자 그들의 가호 덕분인지 여러 번 화재를 모면했다고 한다.
허나 굳이 사천왕의 현몽이 아니더라도 설두는 연기사터 사천왕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
다. 아직 불갑사는 사천왕도 갖추지 못했고, 연기사터 사천왕이 잘만들어진 작품이기 때문에
굳이 새로 만드는 것보다는 버려진 그들을 구제도 할 겸, 데리고 와 불갑사의 사천왕으로 삼
은 것이다.
또한 불갑사에서는 이들 사천왕을 특별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들 뱃속에 오래된 귀중한 서
적(49종 66책)을 복장 유물로 넣어두기도 했고, 1904년에는 사천왕후불탱까지 제작하여 그들
뒷쪽에 걸어두었다. 보통 복장유물은 불상이나 보살상 뱃속에 넣어두기 마련인데 말이다.

▲  천왕문 사천왕상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159호

▲  대웅전을 가리고 앉은 만세루(萬歲樓) - 전남 지방문화재자료 166호

천왕문을 지나면 만세루가 정면을 가리며 우뚝 자리해 있다. 그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맞배
지붕 건물로 1층 부분 높이를 낮게 해서 건물 옆구리로 돌아가 법당을 친견토록 했다. 이는
경내를 외부로부터 보이지 않게끔 하려는 조선 후기 사찰의 특징이다.
만세루는 강당(講堂) 및 행사 공간으로 왕년에는 정면 7칸, 기둥 높이는 무려 90척에 이르렀
다고 한다. 90척이면 1척에 23cm로 계산해도 20.7m라는 소리인데, 그만큼 불갑사가 잘나갔다
는 뜻이다. 허나 정유재란 때 파괴되었고, 수 차례 보수를 거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아담하
게 굳어졌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만세루
만세루 현판이 앞이 아닌 뒷쪽에 걸려 있다.
불갑사는 은근 뒷쪽을 좋아하는 듯~~

▲  대웅전 뜨락 우측의 일광당(一光堂)
1620년에 중건된 건물로 원래 선방이었으나
지금은 승려의 거처로 쓰인다.


▲  설선당 - 거의 'ㅁ' 구조의 건물로 선방(禪房)과 요사(寮舍), 종무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템플스테이 숙소로도 쓰임)

▲  불갑사의 목구멍, 세심정(洗心亭)

산사에는 늘 목을 축여주는 샘터가 있기 마련이다. 불갑사 역시 불갑산이 베푼 옥계수를 끌어
와 샘터(약수터)를 갖추었는데, 샘터 위에 기와 지붕을 얹히고 마음을 씻는다는 뜻에 '세심정
'이라 이름 지었다. 샘터를 뜻하는 정(井) 대신 정(亭)을 칭한 점이 이채로운데, 네모난 석조
에는 불갑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듯, 늘 물이 가득해 가뭄에도 별 끄떡이 없다고 한다.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가득 담아 갈증으로 활활 타들어가는 목구멍을 진화 작업을 하
니 속세의 때가 싹 가신 듯, 속이 시원해진다. 그렇게 2~3모금을 마시고 나서야 비로소 발이
떼어졌다. 물 맛이 괜찮은 것을 보니 불갑사의 인심도 그런데로 괜찮은 모양이다.

▲  갈증을 씻겨주는 세심정 샘터

▲  무량수전(無量壽殿)
아미타불의 거처로 근래에 지어졌다.


▲  무량수전 옆구리에 자리한 5층석탑

불갑사의 유일한 석탑이지만 대웅전 앞에 두지 않고 경내 외곽인 무량수전 옆에 마치 숨바꼭
질 하듯 숨겨두었다. 그의 모습이 백제(百濟) 탑의 상징인 부여 정림사(定林寺)터 5층석탑을
닮았는데, 옛 백제 땅의 중심인 충청도와 전라도에는 백제 멸망 이후, 정림사 탑을 닮은 석탑
이 많이 등장했다.
지금도 정림사 탑의 후예는 계속 지어지고 있으니 아직도 백제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은 모
양이다. 하긴 백제는 정말 그리워할 가치가 있는 나라이다. 식민 사관 쓰레기들과 잘못된 역
사 지식을 가진 작자들에 의해 형편없이 왜곡되고 저평가되서 그렇지, 천하 제일의 해양 대국
으로 왜열도를 비롯한 동북아를 호령했었고 700년 동안 꾸려온 찬란한 문화와 유물을 후세에
넘겼던 팔방미인의 나라였다. (반면 조선과 왜정은 정말로 잊고 싶음)


▲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무독귀왕, 시왕 등 저승(명부) 식구들의 보금자리이다.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원래는 대웅전 바로 좌측에 있었으나 1936년 승려 만암이 지금 자리로
약간 후퇴시켰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지장보살 좌우에는 1654년에 조성된 시왕상이 자리해
있는데,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들이 꽤 느긋해 보인다. 그들 모두 시왕이라는 같은 간판을 달
고 있지만 다른 옷과 얼굴, 포즈를 지니고 있어 각자 개성이 넘치며, 시왕상과 지장보살3존상
뱃속에서는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 서적 68종 97책이 쏟아져 나와 성보박물관에 담아두었다.


▲  조선 후기에 조성된 명부전 지장보살3존상과 시왕상(十王像)

▲  칠성각(七星閣, 왼쪽)과 팔상전(八相殿, 오른쪽)

대웅전 뒷쪽에는 조사전(祖師殿)과 칠성각, 팔상전이 쌍둥이꼴 모습으로 나란히 자리를 지키
고 있다.
조사전은 불갑사를 거쳐간 주요 승려들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으며, 오래 숙성된 진영은 모두
성보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칠성각은 칠성 식구를 담은 칠성탱을 중심으로 산신(山神) 식
구가 담긴 산신탱, 독성(獨聖) 식구들이 담긴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으며, 팔상전은 1822년에
중건된 것으로 석가여래와 16나한, 1702년에 그려진 팔상도(부처의 일대기를 담은 8개의 그림
)가 봉안되어 있다. 특히 팔상전 석가불과 16나한 뱃속에서는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 서적 76
종 84책이 쏟아져 나와 불갑사의 고색의 품질을 더욱 끌어올려주었다.


♠  불갑사 대웅전(大雄殿) - 보물 830호

▲  불갑사의 중심, 대웅전

서쪽을 바라보고 선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아담한 팔작지붕 건물이다. 18세기 이전
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기와에서 '건륭(乾隆) 29년'이란 글씨가 발견되어 1764년에 수리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09년 중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지붕 용마루에는 도깨비 얼굴의 보주를 얹혔는데, 현재 성보박물관에 있는 용마루 보탑이 바
로 이곳에서 위엄을 뽐냈다. 지붕을 받치는 공포를 촘촘히 배치한 다포(多包) 양식으로 건물
가운데 칸 좌우 기둥 위에 용머리 조각을 두었으며, 문짝에는 연꽃과 국화 무늬 꽃창살을 달
아놓아 꽃창살의 상징인 부안 내소사(來蘇寺) 대웅전의 흑백 꽃창살과 자웅을 겨룬다. 그리고
건물 내부 모서리 공포 부분에도 용머리를 두었고 천정은 우물 천정으로 학과 까치가 그려진
벽화가 있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사찰 건축물로 건물은 비록 작지만 안과 밖이 화려하기 그지 없으며, 시
대적인 특성과 용마루에 보탑 등의 장식을 다는 등, 다른 곳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독특한 개
성을 보여준 점이 참작되어 보물의 지위를 얻었다.

▲  옆에서 바라본 대웅전

▲  법당 수호용으로 걸어둔 신중탱


▲  대웅전의 낮고도 아름다운 하늘, 우물천정

▲  학과 잠자는 까치, 나무 등이 그려진 벽화

대웅전 내부에는 여러 벽화가 전하고 있다. 너무 불교 일색으로 도배하기가 뭐했는지 선비들
과 절의 주요 고객인 여자 신도들이 좋아할만한 것을 그려놓았는데, 마치 수묵담채화를 벽에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 하다.
이들 그림은 조선 후기에 그려진 것으로 어느 화승(畵僧)이 그림 작업을 하면서 절대로 훔쳐
보지 말 것을 당부하며 문을 걸어잠궜다. 하지만 사람이란 궁금하면 오금이 저리는 법, 어느
성미 급한 승려가 몰래 들여다보고 말았다. 그러자 화승은 피를 흘리며 죽었다고 하며, 그 피
가 까치가 되어 날라갔다고 한다.
이런 비슷한 전설을 가진 절이 강진 무위사(無爲寺), 부안 내소사(來蘇寺), 무주 안국사(安國
寺) 등에 전하는데, 그림을 그린 승려가 모두 파랑새로 변해 사라진데 반해 여기서는 죽어서
까치가 되어 사라졌다는 점이 특징이다. 워낙 잘 그려진 그림이라 절에서 그럴싸한 전설을 덧
붙여 그림 수식용으로 삼은 것이다.


▲  출입문에서 바라본 대웅전 목조석가여래3불좌상과 닫집

▲  가까이서 본 목조석가여래3불좌상 - 보물 1377호

대웅전 불단에는 쌍둥이처럼 생긴 목조석가여래삼불이 대좌(臺座)를 갖추며 앉아있다. 건물은
서쪽을 향하고 있는데 반하여, 삼불과 불단은 남쪽을 향하고 있어 서로 따로 노는 모습이다.
이런 유형은 영주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과 대전 고산사(高山寺) 등이 있는데, 고려~조선
불교 건축물에서는 거의 흔치 않은 구조로 주목을 끈다. 허나 원래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건물과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가 1869년 지금처럼 방향을 틀었다고 전하며,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다.

이들 삼세불은 석가불을 중심으로 약사불과 아미타불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심 불상인 석가불
이 단연 덩치가 크다. 좌우 협시불은 석가불의 ¾ 정도 크기로 다들 듬직하게 생긴 신체에 무
릎도 넓어 안정되어 보인다.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솟아 있고, 얼굴은 살이
좀 붙어있어 네모난 모습이며, 작은 입에는 나름 미소가 깃들여져 있다. 눈썹은 살짝 구부러
져 있고, 눈은 살며시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귀는 중생의 민원을 빠짐없이 들으려는 듯 어
깨까지 축 늘어졌다.
두꺼운 목에는 삼도(三道)가 획 그어져 있고, 몸에 걸친 옷은 양쪽 어깨를 덮고 가슴 윗쪽을
드러내고 있다. 옷주름은 다리 위까지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으며, 수인(手印)은 항마촉지
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다. (석가불만 다른 수인을 취함)

이들은 1635년 무염(無染)을 비롯한 승일, 도우, 성수 등 10명의 화승이 만든 것으로 불상 뱃
속에서 관련 조성기가 나와 조성 시기와 만든 사람을 고맙게도 밝혀주고 있다. 무염은 호남과
충청도, 강원도에서 활약한 승려로 이들 3세불이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이른 것이다. 그래서
무염의 작품과 경향을 파악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어주어 보물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만약 조성기가 없었다면 아직도 지방문화재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조성기는 중요한
존재이다. 그가 있냐 없냐에 따라서 몸값과 등급이 크게 달라진다.


▲  현란하기 그지 없는 대웅전의 하늘
(우물천정, 공포, 용머리 장식, 불상 그림과 연꽃무늬 등)

▲  장대한 세월 앞에 형편없이 쪼그라든
각진국사자운탑비(覺眞國師 紫雲塔碑)


대웅전 옆에는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제대로 털린 비석이 하나 있다. 그는 불갑사를 크
게 일으킨 각진국사의 행장(行狀)이 적힌 자운탑비로 그의 명성의 반비례로 비석 상태는 참
우울하기 그지 없다. 귀부(龜趺)의 용머리는 절반 이상 날라간 상태이고, 발가락 또한 죄다
뜯겨져 나갔으며, 행장이 적혔을 빗돌은 죄다 날라가 겨우 일부만 남았다.
불갑사가 절의 큰 은인이나 다름이 없는 그의 탑비를 일부러 푸대접할리는 없을터, 그만큼 불
갑사의 인생이 파란만장했음을 이 비석이 몸소 보여주는 것 같다.

각진국사 복구(復丘, 1270~1355)는 경남 고성 출신으로 10살에 천영(天英)에게 출가를 했다. 천영이 죽자, 도영(道英)의 제자가 되었으며, 21살에 승과(僧科)에 급제하여 충주 정토사(淨
土寺), 강진 월남사(月南寺)에 머물렀다. 1320년 조계사 13세 사주(社主)가 되어 선풍을 날렸
으며, 장성 백양사(白羊寺)를 크게 중창하고, 말년에는 불갑사에 머물며 절을 크게 불렀다.
1350년과 1352년 왕사(王師)에 임명되었고, 공민왕(恭愍王)으로부터 각엄존자(覺儼尊者)라는
호를 받았으며, 1355년 입적하자 각진국사(覺眞國師)라는 시호를 내려 그를 기렸다.


▲  불갑사 참식나무 자생북한지대 - 천연기념물 112호

불갑사 남쪽 산자락에는 참식나무 자생지가 있다. 녹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 우리나라와 왜열
도, 중원대륙, 대만에 분포하고 있는데 이곳 자생지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바로 이 땅에서 가
장 북쪽 자생지(自生地)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마음편히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최북단이 이
곳이다.

참식나무 자생지 안내문은 경내 바로 뒷쪽(남쪽)에 있지만 그들의 보금자리는 한참을 더 올라
가야 나온다. 나는 시간을 이유로 거기까진 가지 않았는데, 이 나무에도 믿거나 말거나 전설
이 하나 전해온다. 아마도 인도 승려 마라난타 창건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불갑사에서 지었을
것이다.

백제 때 불갑사 승려인 정운이 머나먼 인도로 유학길을 떠났다. 거기서 불교 공부를 하던 중,
인도 공주와 친해져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이를 안 인도왕이 이래서는 안된다면서
승려를 추방시켰다. 정운과 강제 이별을 하게 된 공주는 너무 슬퍼하며 두 사람이 늘 만나던
곳에 자라던 나무의 열매를 따서 일종의 사랑의 증표로 주었고, 승려는 그것을 가져와 불갑사
뒷쪽에 심으니 그것이 자라서 참식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  그림 같은 호수 불갑사제

불갑사에서 3분 정도 오르면 불갑산 계곡물을 모아서 만든 불갑사제가 나온다. 절 바로 윗쪽
으로 불갑산이 베푼 계곡이 졸졸졸~♪ 흐르다가 이곳에 모여 끝없는 대장정을 준비한다. 장차
다가올 늦가을의 향연을 준비하는 나무들과 알을 품은 어미새처럼 푸근하기 그지없는 불갑산
산줄기는 호수 수면에 비친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으며 몸단장에 여념들이 없고, 삼삼한 숲에
둘러싸인 호수의 자태는 첩첩한 산중에 묻힌 비밀의 호수처럼 신비롭고 아름답기 그지 없다.


▲  불갑사제 호수 산책로

▲  녹음이 짙은 불갑산 산길 (불갑산 정상 방면)

호수 주변 숲에도 상사화가 넓게 자리를 닦고 있었다. 허나 이곳 역시 검게 떡이 된 상태. 정
상인 상사화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오늘 상사화 구경은 완전 틀렸구나~~! 가는 날이 완전 문
닫는 날이었으니 말이다.


▲  불갑산 산길 (불갑사제 주변)
해불암입구 갈림길까지만 조금 올라갔다가 불갑사로 쿨하게 철수했다.

▲  불갑사 관광지에 자리한 연지(蓮池)와 정자

기분 같아서는 해불암과 불갑산 정상, 그리고 함평 용천사까지 싹 인연을 짓고 싶지만, 시간
도 넉넉치 못하고 오늘 너무 무리를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아서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으
로 쿨하게 넘겼다. (용천사는 나중에 인연을 지었음)
내가 이 땅에 살아있는 한 언젠가 또 인연을 짓지 않겠는가? 게다가 상사화라는 아름다운 무
기도 있으니 10년 안에 꼭 찾아오리라 다짐을 하고 나의 제자리로 발길을 돌렸다.

이렇게 하여 영광 불갑사 나들이는 다소 아쉬움을 남기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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