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진·답사기/송파구·강동구

도봉산고양이 2020. 1. 27. 17:07



' 서울 백제 유적의 성지, 송파구 나들이 '

(석촌동고분군, 방이동고분군)

▲  석촌동고분군 제4호분

▲  석촌동고분군 제5호분

▲  방이동고분군 제7,8,9,10호분



서울 동남부에 자리한 송파(松坡)는 장대한 해양대국을 일구었던 백제(百濟)의 도읍인 위
례성(慰禮城)의 변두리로 여겨지는 곳이다. 백제는 고구려(高句麗)의 위대한 시조인 동명
성왕(東明聖王, 추모성왕)의 3번째 아들, 온조(溫祚)가 어머니인 소서노(召西奴)와 졸본(
卒本) 세력을 이끌고 내려와 세웠다고 전한다.
그들은 한강(漢江) 이북 서울 어딘가에 도읍을 세우고 위례성이라 하였는데, 주변 세력의
침공이 잦고 자리가 영 좋지 못해서 한강 남쪽에 또 다른 위례성을 만들어 도읍으로 삼았
다. 그래서 이전 위례성을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 이후를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위례성의 자리를 두고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논란이 많았는데 고려와 조선시
대에는 천안의 위례산성(慰禮山城)으로 여겼으며, 18세기 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이
위례성은 한강 북쪽, 하남위례성은 광주(廣州, 하남시 지역)라 주장하면서 서울+광주설이
대세를 이루었다.

20세기 이후 남한산성(南漢山城)과 풍납토성(風納土城), 하남 춘궁동을 수상하게 여겨 조
사를 벌였는데, 풍납토성 일대에서 1세기부터 5세기에 걸친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었고 올
림픽공원 조성으로 조사를 받은 몽촌토성(夢村土城)에서도 비슷한 시기의 유물이 마구 쏟
아져 위례성은 풍납토성 일대, 근초고왕(近肖古王)이 370년에 도읍으로 삼았다는 한산(漢
山)은 몽촌토성 일대로 크게 여기고 있다.
허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불과 1km거리이니 둘은 거의 한곳이나 다름 없으며, 도성(都
城) 확장 차원에서 몽촌 일대를 개발하여 왕궁과 관청을 두었다. 그래서 위례성과 한산을
아울러 한성(漢城) 또는 한산이라 부르며, 이곳에 도읍을 하던 시절을 한성백제(漢城百濟
)라 부르기도 한다.

한성백제는 개로왕(蓋鹵王, 재위 455~475) 시절까지 큰 번영을 누렸으나 475년 고구려 제
19대 태왕(太王)인 장수왕(長壽王, 재위 413~491)의 공격 앞에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 고
구려는 도성을 버리고 도망친 개로왕을 생포하여 아차산성(阿且山城)에서 처단했고, 그것
으로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위례성이란 존재를 깔끔하게 파괴시켜 위례성 3자를 세상에서
영구히 지워버렸다.
바로 장수태왕의 그 만행 때문에 위례성을 찾느라 오랫동안 허벌나게 고생하고 있는 것이
다. 허나 위례성과 이어져있던 한산(몽촌토성)은 다 부시지 않고 그들의 군사기지로 삼았
다고 한다.
이렇게 고구려에게 도읍을 짓밟힌 백제는 왜열도와 산동반도를 비롯한 중원대륙의 무수한
해안 지역을 다스렸던 해양대국의 체통도 다 내버리며 형편없이 쫓겨가 간신히 웅진(熊津,
공주)에서 정신을 차렸다.

한성(위례성)이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100% 맞는다면 석촌동과 방이동을 비롯한 송파 일
대는 도읍의 남쪽 변두리가 된다. 석촌동에는 한성백제 시절의 거대한 돌무덤이 남아있고,
방이동에도 백제 고분이 남아있으며, 가락동 등 송파 일대에 백제와 신라 때 고분이 적지
않게 존재하고 있었으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이 그들을 모두 앗아가버렸다.

본글에서는 한성백제 시절 고분군이자 나의 즐겨찾기의 일원인 석촌동고분군, 방이동고분
군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  옛 한성백제의 영화로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백제 초기의 무덤들
석촌동고분군(石村洞古墳群) - 사적 243호

▲  석촌동고분군 제3호분

송파구(松坡區) 한복판에 자리한 석촌동고분군은 천하에 몇 남지 않은 한성백제의 소중한 발
자국이다. 이곳은 한성백제 시절(1~5세기)에 다져진 백제 왕족과 귀족들의 묘역으로 특히 거
대한 적석총(積石塚, 돌무지무덤)으로 유명하다. 적석총은 5세기까지 고구려의 대표 무덤 양
식이라 흥미를 끌고 있는데, 무덤 주변에 호석(護石)까지 갖추고 있어 영락없는 고구려 무덤
꼴이다. 하여 고구려의 무덤 양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가꾸었음을 귀뜀해주고 있으며, 석
촌동이란 지명도 바로 이들 적석총 무리에서 유래되었다.

백제의 적석총은 5세기 이후 석실분(石室墳, 돌방무덤)으로 모양이 점차 바뀌며, 방이동고분
군과 개발의 칼질로 사라진 가락동고분군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또한 백제의 중심이 웅진(공
주)으로 옮겨지면서 더 이상 고구려 스타일의 적석총은 등장하지 않는다.
백제는 잃어버린 한성을 되찾고자 200년 가까이 몸부림을 쳤으나 끝내 되찾지 못했고, 주인을
잃은 한성백제의 고분은 고구려와 신라의 침략군, 고려와 조선의 농민들, 대자연 형님의 집요
한 괴롭힘으로 끊임없이 고통 받으며 속세의 뇌리 속에서 잊혀지고 만다.

20세기 초반, 왜정(倭政)은 송파 벌판에 무리지어 펼쳐진 돌고분에 흥미를 던지며 조사를 벌
였다. 조선총독부가 1917년에 작성한 '조선고적도보'의 '석촌 부근 백제고분군 분포도'에 따
르면 석촌동 일대에서 89기(흙무덤 23기, 적석총 66기)의 고분이 기록되어 있으며, 가락동 등
송파구 일대에서 무려 290기 이상의 백제와 신라 고분이 존재하고 있었다. 허나 간단히 조사
만 벌이고는 무책임하게 방치해 버린다.
1974년에 이르러 서울대박물관이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벌였다. 1983년까지 조사를 벌여 적석
총 7기를 비롯하여 토광묘(土壙墓, 움무덤)와 독무덤(옹관묘), 즙석봉토분(葺石封土墳, 흙무
지무덤),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고분) 등 30여 기의 다양한 무덤과 화장(火葬) 흔적이 나왔
으며, 이들은 모두 한성백제의 무덤임이 드러났다. 하여 제왕과 귀족 뿐 아니라 하급 관리나
돈 꽤나 만지던 백성들도 이곳에 묻힌 것으로 여겨져 석촌동과 송파 일대는 한성백제 시절의
거대한 사후(死後) 안식처였음을 알려주며 시기를 달리하여 중복되게 조성된 무덤도 많아 오
랫동안 공동묘지로 쓰였음을 속삭인다.
하지만 그 조사는 송파 지역 도시정비사업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조사에 부실한 점이 꽤 많았
다. 게다가 송파 개발을 우선으로 두면서 송파 지역의 수많은 고분과 삼성동토성(三成洞土城,
강남구 삼성동) 등의 백제 유적이 천박한 개발의 칼질에 모두 희생을 당하는 비운을 겪는다.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고 깔끔하게 밀어버려 그들의 흔적을 더듬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그나
마 석촌동고분군은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 사적의 지위(1975년에 지정됨)를 얻으면서 칼날을
피해갔으나 겨우 몇 기만 살아남았다.

1986년부터 1987년까지 살아남은 고분을 중심으로 고분공원을 조성했는데, 3호분 동쪽 일대에
서 상층에 토광묘와 옹관묘가, 그 밑에 대형토광묘 등이 발굴되었다. 특히 대형토광묘는 천하
에 알려지지 않는 무덤 형태로 제일 아래층에 점토층을 파내고 그 안에 8기의 목관을 안치한
신선한 구조를 지녔다. 허나 공원을 만들면서 고분군 밑에 지하차도를 닦는 어리석음을 범했
고, 고분 주위로 주거지가 빼곡히 들어차 도시에 갇힌 답답한 모습이 되고 말았다.

2015년부터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이곳의 숨겨진 이야기를 더 풀고자 석촌동고분군을 다시 들추
었다. 그래서 제2호분과 제3호분 주변을 조사했는데 숨바꼭질을 벌였던 새로운 적석총이 발견
이 된 것이다. 그 무덤의 기단 석축은 동~서, 남~북으로 연결되어 있고, 점토를 쌓아 올린 부
분이 여럿 확인되었다. 하여 처음 지어진 적석총에 잇대어 다른 무덤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또한 2019년에는 화장된 인골이 발견되어 백제 왕실에서 화장 문화가 적지 않게 유행했음을
알려준다. 수습된 인골의 무게는 총 4.3kg으로 여러 사람의 뼈로 여겨지며, 같은 부위의 뼈가
2개 발견되기도 했다. 다만 뼈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고온에서 화장되어 유전자 분석은 아쉽
게도 불가능했다. 그리고 여러 적석총이 100m 길이로 이어진 이른바 '연접식(連接式) 적석총'
형태도 발견되었다. 이 무덤은 네모꼴의 중소 규모의 적석총 16기와 이를 이어주는 연접구,
화장한 인골을 묻은 매장의례부 3개소를 맞붙여가며 지은 큰 규모의 특이한 형태로 이를 통해
석촌동에는 아직도 숨바꼭질을 즐기는 한성백제의 비밀이 적지 않음을 알려준다. 하여 남은
비밀을 모두 밝히고자 계속 조사를 벌이고 있다.

석촌동고분을 배경으로 한 석촌동고분공원의 면적은 약 49,999㎡로 적석총 3기와 흙무덤 1기,
무덤 흔적 4기를 지니고 있으며, 20여 기는 땅속에 묻어버렸다. 공원에는 소나무와 단풍나무
등을 넉넉히 심고 상큼하게 산책로를 닦았으며, 24시간 열린 공간으로 산책이나 운동을 나온
동네 사람부터 답사와 출사, 나들이객들까지 고루고루 찾아오는 서울의 굴지 명소이다.
비록 경주(慶州) 대릉원(大陵苑)의 위엄에는 미치지 못하나 인근의 방이동고분군과 함께 서울
에 딱 2곳 뿐인 고분공원으로 도심 속의 소중한 오아시스이자 쉼터, 그리고 고색이 깃든 사적
공원으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 248일대 (가락로7길 21)


▲  남쪽에서 바라본 석촌동 제3호분
그 모습이 마치 거대하고 신성한 제단(祭壇)처럼 보인다.


석촌동고분군 북쪽에는 이곳의 맏이격이자 백미(白眉)인 제3호분이 딱딱한 돌피부를 드러내며
길게 누워있다.
그는 3단의 네모난 적석총으로 고구려 적석총의 자존심인 장군총(將軍塚)과 많이 비슷해 눈길
을 끈다. 그 독특한 생김새로 '백제의 피라미드','서울의 피라미드'란 별명을 지니고 있으며,
무덤의 동서 길이 50.8m, 남북 길이 48.4m, 둘레는 무려 199m에 이른다. 그 대단한 덩치에 비
해 키는 겨우 4.5m에 불과해 사람으로 따지면 완전 초비만형 무덤인데, 1980년대 중반까지 민
가들이 건방지게 무덤 위에 들어앉아있었고, 세월 또한 이 무덤을 그냥 두지 않았다. 그로 인
해 무덤의 키와 덩치가 다소 깎여나갔다. 하여 원래 둘레와 폭, 높이는 지금보다 훨씬 컸다고
보면 된다.
어쨌든 북한과 만주, 요동(遼東), 왜열도 등 잃어버린 땅을 제외한 우리나라에서 경주 황남대
총(皇南大塚) 다음으로 덩치가 크며, 비록 장군총과 황남대총보다 키는 많이 작으나 둘레와
덩치는 그들을 능가한다. 만약 키까지 제대로 받쳐줬다면 그 위엄은 실로 대단했을 것이다. 

무덤은 약간 높은 지형을 평탄하게 다지고 40~50cm 두께로 진흙을 깐 다음, 자갈돌과 지댓돌
을 차례로 깔았다. 그 위에는 40cm가 넘는 크기의 깬돌과 작은 판자돌을 가로 누여서 층층히
다졌으며, 무덤 꼭대기에는 4호분과 달리 돌이 고여있다. 부장품이 많았을 것으로 여겨지나
이미 오래전에 싹 털려 금으로 만든 얇은 장식 조각인 달개, 백제 토기 조각, 동진(東晉) 시
대 도자기 조각 정도만 겨우 건졌다.

이르면 3세기 중반에서 적어도 4~5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무덤의 위엄으로 봤을 때
백제의 전성기를 닦았던 고이왕(古爾王)이나 근초고왕의 능으로 추정하고 있다. 요즘에는 근
초고왕으로 무게가 더 쏠리고 있으나 출토 유물이 빈약하고 사료(史料) 또한 부족하여 이 역
시 허공의 메아리에 불과한 실정이다.


▲  제3호분의 옆모습

▲  제3호분의 뒷모습
자연석이 사람의 손을 타 차곡차곡 쌓이면서 거대한 적석총의 위엄을 이루었다.

▲  석촌동 제4호분

제3호분 남쪽에는 제4호분이 놓여져 있다. 3단으로 이루어진 네모난 적석총으로 제3호분의 축
소판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한 변의 길이는 17m 정도이며, 겉모습은 돌로 이루어져 있
고 내부는 흙으로 채워져 순 돌로 이루어진 고구려 적석총과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하여 이
런 무덤 양식을 백제식 적석총(돌무지무덤)이라 부른다.

1974년 발굴조사 때는 윗쪽 3단에서 동서 4.6m, 남북 4.8m 크기의 돌방으로 여겨지는 부분과
너비 2m 정도의 널길의 윤곽이 확인되었으며, 1984년 조사 때는 진흙을 다져 쌓은 흙무지무덤
에 돌을 씌운 무덤임이 밝혀졌다.
시신을 묻은 흔적은 흙을 다져 쌓은 지점 3곳에서 각각 발견이 되었으며, 이미 내부가 싹 털
린 상태라 부장품은 거의 나오지 않았고 돌무지 속에서 벽돌과 기와, 토기 등의 조각만 일부
수습이 되었다.
4~5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제3호분이 고이왕이나 근초고왕의 능(陵)이 맞다면 이 무
덤은 그의 왕비나 가족 무덤 정도 될 것이다. 제3호분과 달리 무덤 꼭대기는 돌 대신 풀이 돋
아난 흙으로 마무리를 지었으며, 무덤 아랫도리에는 작은 호석이 몸을 기대고 있다.


▲  옆에서 바라본 제4호분

▲  석촌동 제2호분

제4호분 남쪽에 자리한 제2호분은 제4호분과 쌍둥이꼴 모습으로 3단의 기단으로 이루어져 있
다. 동서 약 16.4m, 남북 16.5m, 둘레 65m, 높이 3.5m의 덩치를 지닌 그는 1985년 이후에 복
원되었는데, 그 이전에는 기단부의 1m 정도, 내부 흙무지는 높이 3.8m 정도가 겨우 살아남아
돌로 덮힌 낮은 봉우리 모습으로 있었고 그 주변으로 민가와 담장이 어지럽게 들어서 있었다.

제4호분처럼 겉은 돌, 속은 흙으로 된 백제식 돌무지무덤(적석총)으로 서북쪽 모서리에서 나
무관(나무널) 1기가 발견되었는데, 움을 파지 않고 널을 놓은 뒤 작은 봉분을 만들었다. 그리
고 나중에 무덤을 확장했다.
널무덤과 서남쪽 봉분 안에서는 3세기 말에 만든 것으로 여겨지는 굽다리접시와 곧은입 항아
리가 나왔을 뿐, 이미 속 빈 강정이 되버린 상태였다.


▲  서쪽에서 바라본 제2호분

▲  남쪽에서 바라본 제2호분과 제4호분, 그리고 제2롯데월드
적석총 너머로 일명 '사우론의 탑'이라 불리는 제2롯데월드가 하늘을 건드리며
아슬아슬하게 바라보인다. 이곳은 잠실 지척이라 고분공원 어디서든
저 이상한 키다리가 시야에 들어온다.

▲  석촌동 제2호 토광묘(움무덤) 모형

제2호분 동쪽 소나무 숲에는 제2호 토광묘의 모형이 누워있다. 이 무덤은 원래 여기서 북쪽으
로 10여m 떨어진 곳에 있으나 보존을 위해 땅속에 고이 묻고 대신 이곳에 모형을 두었다.
그는 땅을 파서 움을 만들고 관을 넣은 천하에 흔한 무덤 양식으로 평면은 장방형(長方形)이
고, 장축은 동남동에서 서남서로 두었다. 벽면은 바닥에서 위로 향해 약간 경사가 졌고, 별다
른 시설이 없는 바닥 동쪽에는 회백색에 짧은목 단지 1개가, 움 안 흙속에서는 지름 1.6cm 크
기의 민고리 금귀고리 1개가 발견되어 귀족의 무덤임을 귀뜀해 준다.

무덤의 크기는 길이 223cm, 너비 76cm, 높이 21cm로 제3호분 동쪽에서 집단 움무덤과 대형 움
무덤이 10여 기 이상 발견되었는데, 적석총 바닥보다 아래층에 자리한 것으로 보아 적석총보
다 이른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석촌동 회화나무 - 서울시 보호수 24-7호

제2호분 서쪽에는 다소 허전해보이는 회화나무 하나가 철을 지팡이 삼아 몸을 지탱하고 있다.
그는 240년 정도 묵은 것으로 높이 12m, 둘레 2.3m인데, 2015년 이후, 회화나무와 제2호분 주
변에서 석촌동고분군의 숨겨진 이야기를 캐내려는 굳은 집념으로 나무 주변에 펜스를 두르고
발굴조사를 벌이고 있다.
다른 나무들은 거의 생생한 모습이나 이 나무는 벌써부터 노화가 되었는지 잎사귀는 커녕 가
지 조차 부실해 머리숯 일부만 남은 애처로운 신세가 되었다. 몸도 썩 좋아보이지 않아 저러
다 골로 가는 건 아닌지 심히 우려된다.


▲  제3호 움무덤(토광묘)

제1호분 북쪽에는 제3호 움무덤의 모형이 있다. 표토(表土) 밑 70cm에서 발견된 것으로 실물
은 보존을 위해 모형에서 50cm 땅속에 방수처리를 하여 묻었다.
무덤의 길이는 208cm, 너비 58cm, 깊이 26cm로 네 모서리가 둥그스름한 네모난 모습이다. 장
축은 동북-서남 방향으로 제2호 움무덤처럼 특별한 시설은 없었으며, 북서쪽 모서리에 회청색
짧은목단지 1개가 발견되었다.


▲  내원외방형(內圓外方形) 적석총(A호 적석총)의 흔적

내원외방형 적석총이란 바깥을 네모나게 만들고 그 속살을 동그랗게 다진 돌무덤을 일컫는다.
우뚝 솟은 적석총의 위엄은 온데간데 없고 그 밑도리 흔적만 아련하게 남아있는데, 어느 세월
이 잡아갔는지 무덤은 녹아 없어지고 그 자리에 민가와 경작지가 가득 들어앉은 것을 발굴조
사로 모두 치워버리고 무덤 기단부의 서남쪽 모서리와 서쪽, 북쪽의 기단 일부가 확인되었다.
하여 나온 것을 바탕으로 정리를 해보니 기단 안쪽은 지름 11.4m의 흙무지무덤이 있고, 기단
겉면은 한 변이 16m인 네모난 모습을 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신라 무덤에서 볼 수 있는 호석처럼 안쪽에 둥근 원 모양으로 열을 지은 꺤돌이 봉분 자락에
놓여 있었고, 그 바깥에 자갈돌과 네모 모양으로 열을 지어 놓여진 테두리의 깬돌은 제1,2,3
,4호분처럼 계단식 적석총의 흔적으로 여겨진다.

1987년 발굴조사 때 돌무지 움무덤 2기와 돌널무덤(석관묘) 3기가 안쪽 바닥면에서 나왔는데,
돌무지무덤이 파괴된 이후에 조성된 무덤일 가능성이 있어 내원외방형 돌무지무덤과의 관련성
은 분명치가 않다. 또한 무덤 안과 밖에서 각종 토기와 손칼, 쇠못, 꺾쇠 등의 철기가 나왔으
나 이곳이 일종의 교란층(攪亂層)이라 백제 유물인지도 정확하지가 않다.

무덤의 모습이 확실치가 않아서 적석총의 내부를 적나라하게 보여줄 겸, 복원하지 않고 이런
모습으로 깔아두었다.


▲  남쪽에서 바라본 내원외방형 적석총(A호 적석총)의 흔적

▲  석촌동 제1호분

내원외방형 적석총 서쪽에는 제1호분의 흔적이 있다. 제1호분은 사람들이 집을 만들고자 부셔
버린 탓에 정확한 구조를 확인하기가 어렵게 되었는데, 무덤을 깔고 앉던 집들을 밀어버리고
발굴을 벌여 무덤의 밑도리를 확인했다. 그 결과 무덤 2개가 남북으로 이어진 쌍분(雙墳)임이
밝혀졌으며, 북쪽 무덤은 3세기 중반, 남쪽 무덤은 3세기 말~4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파악
되고 있다.
북쪽 무덤은 동서 9.9m, 남북 8.9m, 남쪽 것은 동서 9.6m, 남북 9.8m 규모로 이들은 3.7m 정
도의 거리를 두고 있으며, 그 사이를 진흙으로 메우고 서쪽으로 길게 돌을 덧쌓아 무덤을 연
결했다. 또한 길이 20~30cm 크기의 깬돌로 네 벽을 쌓았으며, 바닥에는 10cm 안팎의 돌조각과
자갈을 깐 석곽(石槨) 4개가 있었다.
가장 큰 석곽은 길이 2.5m, 너비 2.3m 크기로 한가운데에 동서 방향으로 놓았고, 작은 석곽은
길이 1.2m, 너비 1m 크기로 3개를 북쪽 벽에 잇대어 나란히 놓았다. 석곽의 크기로 보아서 큰
것은 무덤 주인(물론 왕족이겠지), 작은 것은 그 가족으로 여겨진다.

여기서는 백제 토기와 기와, 금귀걸이 등이 조금 나왔으며, 고구려의 환인현(桓因縣) 고력묘
자촌 제15호분과 평안북도 송암리 제45호분과 비슷해 고구려 묘제를 따랐음을 보여준다. 현재
는 무덤의 밑도리만 밝혀진 상태라 일단 밑부분만 정비하였다.


▲  제1호분의 속살 (석곽이 발견된 밑도리 부분)

▲  석촌동의 유일한 흙무덤인 제5호분

석촌동고분군에서 가장 남쪽에 자리한 제5호분은 이곳 유일의 흙무덤으로 즙석(葺石) 봉토분
이다. 이름도 참 어려운 즙석봉토분이란 내부 구조 위에 흙을 다져 쌓고 그 위에 강돌과 막돌
을 섞어서 깐 다음에 다시 그 위를 흙으로 엷게 덮은 무덤을 말한다.

이 무덤은 둘레 17m, 높이 3m의 동그란 봉토분으로 5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왕족이
나 귀족의 묘로 여겨지는데, 파란만장한 세월을 겪은 적석총들과 달리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내부 조사를 딱히 벌이지 않고 봉분의 흙을 쌓은 형태만 확인했다. 봉분은 즙석식으로 봉긋하
게 닦았으며, 개발의 칼질로 사라진 가락동고분군 제1,2호분도 같은 즙석식으로 내부는 하나
의 봉분 안에 여러 개의 나무널과 독널이 들어있어 그와 비슷한 구조로 여겨진다.

백제의 즙석봉토분은 토착 세력의 무덤 양식에 즙석이라는 고구려식 요소가 가미된 설과 봉분
을 만들고 지상에 시신 안치 공간을 둔 마한(馬韓)의 무덤 양식이란 견해가 있으나 확실한 것
은 아직 모른다. (즉 고구려+백제 양식 혹은 백제+마한 양식)


▲  석촌동 돌마리 표석

석촌동고분공원 동문에는 '전통마을 돌마리' 표석이 이곳의 옛 추억을 상기시키고 있다. 돌마
리는 석촌동의 옛 이름으로 적석총에서 유래되었으며, 마리는 마을을 뜻한다.
돌마리는 이곳에 뿌리를 내린 마을이었으나 송파 개발에 휩쓸려 사라지고 지금은 서울의 일부
가 되어 그 이름만 남아있다. 지금은 도시 속에 파묻혀 옛 마을의 모습은 죄다 증발해버렸지
만 전통마을을 칭하는 것을 보면 돌마리 시절의 사람들이 적지않게 살고 있는 모양이다.
석촌동은 1963년 광주군 중대면(中垈面)에서 서울로 편입되어 강남구가 되었으며, 1988년 송
파구로 분리되어 송파구의 일원이 되었다.


♠  석촌동고분군과 쌍벽을 이루던 옛 한성백제의 무덤들
방이동고분군(芳荑洞古墳群) - 사적 270호

석촌동고분군만 보기에는 너무 허전하여 그날의 여로(旅路)를 한층 살찌울 겸, 두 다리를 다
시 재촉하여 방이동고분군으로 이동했다. 둘 사이의 거리는 약 1.7km로 쉬엄쉬엄 걸으면 20~
25분 정도면 닿는다. (나는 걸어갔음)
석촌동고분군과 올림픽공원 중간에 자리잡은 방이동고분군은 석촌동과 더불어 서울에 딱 2개
밖에 없는 백제 고분군이다. 송파와 광진구 지역에 무려 수백 기나 존재하던 백제의 무덤들이
개발의 칼질에 모두 목이 떨어지고 몸이 부셔져 겨우 석촌동과 방이동의 10여 기만 남은 것이
참으로 통탄스러울 따름인데, 조선총독부가 1917년에 송파 지역 고적조사사업을 벌이면서 방
이동고분군이 발견되었다.
허나 간단한 조사 이후 다시 버려졌으며, 철저하게 파괴되어 그 존재가 세월 속에 푹 묻히고
만다. 그러다가 1973년 김모씨의 집 뒷산 언덕이 무너지면서 숨겨진 석실고분(제1호분)이 속
살을 드러내니 그것이 방이동고분군의 20세기 후반 첫 세상 데뷔였다.

1976년까지 발굴 조사를 벌인 결과 8기의 고분이 확인이 되었으며, 한성백제 후반인 4~5세기
에 조성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무덤의 주인은 당연히 백제 왕족과 귀족으로 화려했을 부장
품은 옛날에 싹 털려 겨우 유약이 입혀진 회청색경질 굽다리접시와 굽다리접시 뚜껑, 약간의
토기와 철제류만 건졌을 뿐이다. 특히 제6호분에서 나온 회청색경질 굽다리접시는 신라 토기
와 비슷해 6~7세기 이후에 닦여진 신라 고분으로 보기도 한다.
허나 제1,4,6호분은 백제 스타일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고분)이라 백제 무덤으로 여기고
있으며 웅진백제 시절에 조성된 공주 송산리(宋山里) 제5호분과 구조와 형식이 비슷해 방이동
고분 양식이 공주로 이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제5호분은 구덩식 돌덧널무덤으로 확인되었으며, 제3호분 같은 경우 백제가 일부 조성하고 이
후에 신라가 재활용했다는 견해도 있다. 즉 백제 귀족들의 묏자리로 쓰였다가 6세기 이후 서
울 지역이 신라 치하가 되면서 신라 조정에서 보낸 귀족과 관리의 무덤들이 들어선 것이다. (
신라로 넘어간 백제 관리와 귀족들의 무덤, 또는 그 후손들의 무덤으로 보기도 함) 그래서 백
제와 신라의 무덤이 공존하게 된 것이다.

방이동고분군은 석촌동고분군처럼 그 가치가 인정되어 국가 사적의 지위(1979년 12월에 지정
됨)를 부여 받았다. 그래서 개발의 칼질에서 해방되는 기쁨을 누렸으며 서울시에서 1983년에
이들을 복원하고 고분공원으로 닦아 속세에 내놓았다.
현재 정비된 고분은 8기로 서쪽 언덕에 제1,2,3,6호분이, 동쪽 언덕에 제7,8,9,10호분 4기가
자리한다. 조사를 받은 무덤은 제1,4,5,6호분이며, 나머지는 아직 손을 대지 않았고, 제4,5호
분은 복원되지 못했다. 2011년에 석실을 비롯한 고분 상당수를 보수했으며, 2016년에 제3호분
봉분이 흘러내리면서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이를 복구할 겸, 재조사에 들어가 그 주변을 통제했
다.
이곳은 시내 한복판에 감싸여 있으며, 언덕에 자리해 있어 인근 시가지보다 해발이 조금 높다.
고분 주변에는 소나무와 단풍나무 등 온갖 나무들이 심어져 있고 산책로도 잘 닦아놓아 산책
의 운치를 더했으며, 석촌동과 달리 개방시간에 제한을 두어 6시부터 20시까지만 빗장을 열어
둔다. (12~2월은 9~18시) 들어가는 문은 오금로에 접한 서쪽에 딱 하나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송파구 방이동 125 (오금로 219 ☎ 02-410-3661)


▲  방이동 제1,2,3호분

방이동고분군은 크게 2개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정문을 기준으로 왼쪽(서쪽) 언덕에는 제1,
2,3,6호분, 오른쪽(동쪽) 언덕에는 제7,8,9,10호분이 자리해 있으며, 이들은 서로 200m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 그 사이에는 나무가 우거져 있어 자연의 향기까지 아낌없이 보탠다.


▲  늦가을 단풍이 곱게 까페트를 이룬 제1호분 앞 산책로

▲  죽음 앞에서 처절한 아름다움을 드러낸 단풍잎들 (제1호분 앞)

벌써부터 시작된 겨울 제국(帝國)의 압박에 땅으로 떨어진 단풍들은 마지막 아름다움을 불사
르며 서서히 저물어가는 늦가을의 발목을 붙잡으려 든다. 허나 아무리 그들이 안간힘을 써본
들 약기운이 다 된 늦가을은 결코 겨울을 이기지 못한다. 어디까지나 단풍들의 부질없는 몸부
림일 뿐, 그들은 '낙엽'이란 우울한 이름이 되어 삶을 마감해야 된다.
단풍도 그렇지만 인간 역시 늦가을의 저물어감을 아쉬워하는 것은 마찬가지라 땅바닥을 장식
하는 단풍잎을 바라보며 '올해도 이제 다 저물었구나. 곧 1살이 강제로 누적되겠네' 우울감
에 적지 않은 고통을 받는다.


▲  방이동 제1호분

제1호분은 방이동고분군의 대표격인 존재로 무덤 안으로 인도하는 문이 무덤 서쪽에 달려있다.
이 무덤은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 굴식돌방무덤)으로 시신과 부장품을 둔 현실(玄室, 널
방)과 바깥과 현실을 이어주는 연도(널길)를 갖추고 있다. 깬돌로 널방을 다졌으며, 석실 벽
이 위로 올라갈수록 모두 안쪽으로 기울어지게끔 다져 폭을 좁히고 맨 위에 큰 돌을 올려 천
장을 만들었다. 이런 식의 천장을 어려운 말로 '궁륭형'이라고 부른다.

무덤의 높이는 2.2m, 둘레 12m이며, 돌로 다진 현실은 길이 3.1m, 너비 2.5m, 높이는 2.15m로
중앙에는 시신을 안치했던 시상대(屍床臺)가 있다. 연도는 현실 남쪽 벽 서쪽에 닦여져 있는
데, 길이는 약 2.39m, 너비 1.06m, 높이는 1.1m이다. 그리고 널길 입구에는 1983년에 화강암
으로 문을 달아 흙과 돌이 무너지지 않게 했으며, 굳게 닫힌 문 창살을 통해 무덤 속살을 구
경할 수 있다. 방이동 식구 중 유일하게 속살(널길, 널방)을 개방하고 있으니 이곳에 왔다면
꼭 살펴보도록 하자.
무덤은 오래전에 도굴되어 나온 유물은 없으며, 인근 주민들에 의해 토기 3점이 수습되었다.


▲  돌로 차곡차곡 닦여진 제1호분의 속살(널길과 널방)
바로 앞에 보이는 널길(현도)은 바깥과 무덤 석실을 이어주는 짧은 통로로
저 통로의 끝에 무덤 주인과 부장품이 깃든 널방(현실)이 있다. 이곳에
가득했을 부질없는 부장품들은 나쁜 손에 의해 모두 털리고 이제는
먼지만 가득하다. (무덤 내부는 접근 금지)

▲  제1호분의 옆 모습

▲  나지막하게 누워있는 제2호분

▲  피가 묻힌 듯 붉은 단풍잎을 군데군데 걸친 제3호분

제1호분 동쪽에는 제2호분과 제3호분이 누워있다. 제2호분은 지름 13.4m, 높이 2.7m이며, 제
3호분은 지름 13.12m, 높이 2.9m 규모로 봉분 서북쪽 밑도리에 얇게 호석이 둘러져 있다. 이
들은 조사를 받지 않고 겉모습만 복원을 했는데, 2016년 봄에 제3호분 봉분 흙이 흘러내려와
봉분이 오목하게 변형된 사고가 발생했다.
송파구는 한성백제박물관에 점검을 의뢰했고, 박물관 측은 무덤 안쪽의 무너짐 방지와 보존
정비 대책을 세우고자 정밀발굴조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무덤을 정비 할 겸,
아직 열지 못한 제3호분의 뚜껑을 열고 한참 조사를 벌이고 있다. 이번에는 부디 굵직한 것들
이 많이 나와서 이곳에 숨겨진 이야기 보따리가 흔쾌히 풀렸으면 좋겠다.


▲  제6호분

제6호분은 1976년에 조사를 받았다. 무덤 내부는 제1호분과 비슷한 횡혈식석실(굴식돌방) 구
조로 석실 중간에 벽을 쌓아 서쪽 주실(主室)과 동쪽 부곽(副槨)으로 나누었고 남쪽 벽 중앙
에 연도(널길)가 닦였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무덤의 지름은 10.6m, 높이는 2.1m이며, 여기서는 회청색경질 굽다리접시가 나왔는데, 그 굽
다리접시가 백제가 아닌 전형적인 신라 토기의 형식이라 6세기 이후에 조성된 신라 고분으로
보기도 한다. 


▲  늦가을이 너울치는 고분공원 중앙 동쪽 산책로 (남쪽 방향)

▲  고분군 중앙 동쪽 산책로 (북쪽 방향)
늦가을이 이곳에 마지막 작품을 빚으며 슬슬 올해를 정리한다. 이번에 그가
떠나면 내년 10월에나 기약을 해야 된다.

▲  누런 낙엽들이 귀를 접고 누워있는 현장
(고분공원 중간 부분)

▲  방이동고분군 남쪽 식구들 (제7,8,9,10호분)

방이동고분군 동쪽 언덕에는 제7,8,9,10호분이 조용히 누워있다. 푸른 소나무가 이들을 빙 둘
러싸며 그윽한 솔내음을 베풀고 있어 콧속에 낀 속세의 때를 긴장 타게 만드는데 이들 무덤은
1983년에 복원된 것으로 겉모습과 덩치는 서쪽 무덤들과 비슷하나 딱히 특이사항은 없다. 무
덤의 속살은 이미 도굴되어 유물도 없고, 방이동고분군 자료에도 북쪽 무덤만(제1,2,3,6호분)
만 부각시킬 뿐, 남쪽 무덤은 소외되어 있다.


▲  남쪽에서 바라본 제7,8,9,10호분

▲  제8호분

▲  제9호분


▲  돌이 입혀진 고분군 남쪽 산책로

▲  솔내음이 가득한 고분군 중앙 서쪽 산책로

겨울 제국(帝國)의 등쌀에 점차 빛을 잃어가는 늦가을의 끝 무렵을 즐기며 1시간 정도 방이동
고분군을 둘러보았다. 이미 여러 번 인연을 지은 곳이나 올 때마다 마치 새로운 곳처럼 늘 새
롭다. 이렇게 하여 백제의 향기를 쫓을 송파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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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1월 2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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