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사진·답사기/경기 남부(수원·화성·오산·평택)

도봉산고양이 2020. 6. 16. 22:15
오산 독산성, 세마대 


' 오산 독산성(세마대) 봄나들이 '

▲  오산 독산성(독성산성)


봄이 막바지에 이르던 평화로운 어린이날에 다 큰 일행들과 오산 독산성(독산)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높이 떠있던 12시에 병점역(1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화성시마을버스 56번을
타고 독산 북쪽인 한신대학교로 이동했다. (병점역에서 한신대까지는 버스 10분 거리)

한신대 종점에서 완만한 산길을 타고 10여 분 정도 오르니 독산성 산림욕장이 마중을 한
다. 이곳은 오산시(烏山市)에서 1999년에 닦은 숲으로 소나무가 무성하여 그윽한 솔내음
을 불어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아름다운 말이 있듯이 우리는 소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고 가져온
간식과 음식을 섭취하며 늦은 점심을 때웠다. 그렇게 배를 잔뜩 불리고 다시 10여 분 오
르니 보적사로 인도하는 길이 나오고 그 길을 오르면 독산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  독산성과 보적사로 인도하는 오르막길
오색 연등이 대롱대롱 길을 비추며 중생을 맞이한다.

▲  보적사 방면 오르막길에서 바라본 수원시내와 화성시 병점 지역

▲  보적사로 인도하는 구부러진 오르막길 (보적사 주차장)

오산 북부에 자리한 독산은 해발 208m의 조촐한 산으로 독성산(禿城山), 세마산(洗馬山)
. 석대산, 향노봉 등의 별칭을 지니고 있다. 이곳이 유명세를 탄 것은 바로 독산성과 세
마대 덕분으로 면적도 적고, 인구도 적고, 볼거리도 빈약한 오산시에서 매우 애지중지하
는 꿀단지 같은 존재이다.


▲  보적사 주차장에서 바라본 천하
경기도 제일의 도시, 수원(水原)과 그를 남쪽으로 둘러싼 화성시 병점, 동탄 지역


♠  독산성에 감싸인 조촐한 산사, 보적사(寶積寺)
- 오산시 향토유적 8호

▲  보적사 해탈문(解脫門)으로 살아가고 있는 독산성 동문

하늘을 향해 야트막하게 솟은 독산 정상 북쪽에 오산 지역 유일의 전통사찰인 보적사가 포근
히 둥지를 틀고 있다. (경기도 전통사찰 34호)
독산성 동문 바로 안쪽에 자리해 있어 성곽을 담장으로, 동문을 정문으로 삼고 있는데, 동문
에 '해탈의 문'이란 간판을 내걸어 일종의 해탈문으로 삼았다.

독산성 품에 안긴 보적사는 인근에 있는 화성 용주사(龍珠寺)의 말사로 무려 401년에 백제(百
濟) 왕실에서 창건했다고 전한다. (또는 고려 초에 창건되었다고 함) 허나 아쉽게도 이를 밝
혀줄 유물과 증거가 없는 실정이며, 오래된 전설 외에는 그리 오래된 유물도 없고, 절의 원래
이름도 전하지 않는다. 게다가 지금의 절은 20세기 초반에 형성된 것이라 창건 시기를 추정하
기가 어렵다.
하여 아마도 절이 우후죽순 들어서던 고려 때나, 독산성이 다소 밥값을 하던 조선시대에 승병
들의 주둔지로 조촐하게 지어진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1920년에 주대식이 약사전(藥師殿)을 부시고 대웅전을 지으면서 절 이름을 보적사라 했다. 이
는 절에 전해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을 바탕으로 지은 것으로 옛날 어느 춘궁기(春窮期) 때
먹을 것이 쌀 1되 밖에 남지 않던 노부부가 그 쌀을 미련 없이 절 부처에게 공양을 했다. 그
리고 집에 돌아오니 희안하게도 곳간에 쌀이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부처가 몇 배로 되돌려준 모양이다. 이에 무한 감동을 먹은 그들은 계속 열심히 공양
을 하였고 여기서 보물을 쌓았다는 뜻에 '보적사'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허나 전설에서는
보물 대신 쌀이 쌓인 것이니 미적사(米積寺)라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았을까 싶다.

1986년 주지 도광(道光)이 세마대의 이름을 따서 세마사(洗馬寺)로 이름을 갈았으나 얼마 안
가서 다시 보적사로 변경했다.
조촐한 경내에는 1986년에 중수된 대웅전과 선실(禪室), 요사(寮舍), 삼성각(三聖閣) 등이 있
으며, 성문 밑까지 길이 닦여져 있어 차량으로도 경내 접근이 가능하다.

* 보적사 소재지 :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 150 (독산성로 269번길 144, ☎ 031-372-3433)


▲  보적사의 담장이 되버린 독산성 북쪽 성곽
옛날처럼 군사 기지로 쓰일 일이 없으니 이제는 절을 지키는 담장이 되어
자신을 낮추어 살아가고 있다.

▲  보적사 3층석탑
근래에 지어진 탑으로 석가탑(釋迦塔)을
많이 닮았다.

▲  배가 시커먼 똥배 포대화상의 위엄
그의 배를 어루만지며 소원을 빌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  맞배지붕을 지닌 대웅전(大雄殿)

▲  대웅전에 봉안된 석가3존상


▲  보적사에서 바라본 푸른 천하 (화성시 북부 지역)

보적사 경내 남쪽에 독산성 성곽길이 펼쳐져 있다. 성곽 방어물인 여장은 오래전에 사라지고
그냥 성곽만 남아있는데, 성곽 높이가 3~5m에 이르니 자칫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기 바란다.


▲  보적사 남쪽 성곽에서 바라본 천하 (수원 남부와 화성 병점, 동탄 지역)
보이는 범위는 앞서 보적사 방면 오르막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직까지 독산 북쪽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  독산성 북동쪽 성곽 (세마대 동쪽)


♠  권율장군의 세마(洗馬) 설화가 깃든 오래된 산성
오산 독산성(禿山城)과 세마대(洗馬臺)터 - 사적 140호


▲  독산성 동문 주변

독산 산정에 자리한 독산성<독성산성(禿城山城)>은 백제 때 닦여진 매우 늙은 성이다. 신라와
고려도 이 성을 손질해 사용했으며, 조선도 서울 남부를 지키는 요충지로 썼다.

이곳이 크게 이름을 날린 것은 바로 임진왜란 시절이다. 1592년 12월, 전라도 관찰사 겸 순변
사(巡邊使)인 권율(權慄)장군이 근왕병(勤王兵) 2만을 모아 서울로 향하다가 바로 이곳에 진
을 치고 주변에 있던 왜군을 토벌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재미난 설화가 한 토막 전해오
고 있으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권율이 2만 대군을 이끌고 이곳에 들어와 진을 쳤다. 그들을 두려워한 왜군은 성을 포위해 공
격을 가했는데, 아무리 공격을 해도 소용이 없자 뿔이 난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은 첩자를
보내 성의 결점을 알아오라고 했다. 그 결과 성에 물이 매우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식량이 많아도 물이 없으면 게임이 끝나는 법, 왜군은 성 밑에 큰 웅덩이를 파 성 내
부에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지하수를 차단하니 얼마 안가서 조선군은 물로 크게 곤란을 겪게
되었다. 그러자 왜장은 물 1지게를 보내 조롱하며 조선군의 분열을 조장하려고 했다. 허나 권
율이 누구던가?
그는 기가 막힌 계략을 생각해내고 다음 날 아침, 왜군들이 잘 바라보이는 곳에 백마를 데리
고 와서 흰쌀을 말에게 끼얹어 목욕시키는 연극을 보였다. 그것을 본 단순한 왜군은 말을 목
욕 시킬 정도로 물이 많다고 판단하여 포위를 풀고 바로 줄행랑을 쳤다. 그때 권율은 그들을
추격하여 수천의 왜군을 잘 다져진 고기 덩어리로 만들었다.
이상이 독산성의 세마대 설화이다. 쌀로 말을 씻겼다고 해서 장대(將臺) 이름을 세마대라 했
을 정도이니 아마도 사실이 아닐까 싶다. 이런 설화는 구미 천생산성(天生山城)에도 전해오고
있는데, 해가 막 뜰 때쯤 저리 연극을 한다면 정말 물로 착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1593년 9월, 3일 동안 백성들이 합심하여 성을 수축했으며, 1595년 포루(砲樓) 시설이 설치되
었다. 1597년 2월에는 조총을 방어하고자 평평한 집을 성벽 안에 짓고, 거기에 성 아래로 향
한 창문을 설치해 석차와 포차를 배치했다. 그리고 성 밖에는 목책을 세우려고 했으나 실현하
지는 못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권율의 빛나는 전승지로 천하에 널리 알려지자 성의 중요성도 커져 1602년
수원부사 변응성(邊應城)이 수축했으며, 1796년 수원 화성(華城) 축조로 그 남쪽을 지키는 용
도로 개축되었다. 이때 독산의 이름이 잠시 향로봉으로 갈렸는데, 앞서 말했듯이 늘 물이 부
족한 곳이라 그 이후 철저히 버려지게 되었다. 아무리 수비하기에 좋은 곳이라 해도 물이 없
으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성 둘레는 1,800보(3,240m)로 현재는 그 1/3정도만 남아있으며, 4개의 문을 갖추고 있다. 성
벽 바깥은 장방형 또는 방형(方形)으로 다듬었고, 약간의 기울기를 주어 매우 단단하게 쌓았
다. 성 내부에는 보적사와 세마대가 있으며, 옛 건물터가 조금 남아있다.
오산의 대표적인 명소로 탐방로와 숲길이 잘 닦여져 있으며, 숲이 무성하고 조망도 일품이라
교외 나들이 및 소풍 장소로 아주 제격이다. 속세에서 독산성으로 가려면 세마역(1호선)에서
보적사입구를 거쳐 가거나 한신대에서 산림욕장을 거쳐가는 것이 좋으며 경사가 완만하여 오
르기도 쉽다.

* 소재지 :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 155외


▲  독산성의 얼굴, 세마대

독산 정상에는 독산성의 얼굴이자 장대인 세마대가 의연하게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2
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임진왜란 이후에 지어졌으며, 왜정(倭政) 때 세마대 이야기에 크게 발
작한 왜인들이 부셔버렸다. 이때 성 안에 살던 300호 정도의 민가도 강제로 정든 고향을 떠나
주변으로 흩어져야 했다.
1957년 세마대가 복원되었으며, 이승만 전대통령이 이곳을 다녀가 세마대 현판을 남겼다. 건
물 중앙에는 툇마루 같은 것이 있어 앉아갈 수 있으며, 소나무에 둘러싸여 있어 이곳에 앉아
있으면 자연히 솔내음을 누리게 된다.


▲  이승만이 남긴 세마대 현판의 위엄

▲  독산성 동쪽 치 (독산성에서 가장 동쪽 부분)
이곳에 서면 세교지구와 오산시내, 운암지구, 동탄신도시가 앞다투어
시야에 잡힌다.

▲  부드럽게 펼쳐진 독산성 성곽 (동남쪽 성곽길)

▲  남쪽을 향해 고개를 내민 독산성 남쪽 치

이곳은 독산성의 남쪽 끝으로 오산시내와 화성시 정남면 지역이 훤히 두 눈에 들어온다. 권율
이 쌀로 말을 씻기는 연극을 했던 현장이 바로 이곳이 아니었을까? 그만큼 시야도 좋고 산 밑
에서도 쉽게 눈에 띄는 곳이다.


▲  봄이 활짝 나래를 펼치는 독산성 남쪽 성곽

▲  독산성 남쪽 성곽

독산성을 다시는 안와도 될 정도로 완전히 1바퀴를 돌고 싶었는데, 일행들의 권유로(나는 힘
이 없었음) 절반만 돌다 철수했다. 아무래도 다음에 또 인연을 지어 나머지를 모두 둘러보라
는 독산성의 숨겨진 뜻인가 보다. 어쨌든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른다.


▲  독산성 남쪽 성곽에서 바라본 오산 서북부(세마동) 지역
정면에 보이는 산줄기를 넘으면 바로 오산 시내이다.

▲  수풀 속에 잠든 의문의 주춧돌

동문터 주변에는 2013년 11월에 발견된 오래된 돌이 누워있다. 딱 봐도 사람의 손길이 거쳐간
돌임을 눈치챌 수 있는데, 고려 때 이용된 건물터 주춧돌이나 석등 초석으로 보고 있다.
현재 독산성에는 세마대 외에는 성곽 건물이 남아있지 않은데, 그가 건물 주춧돌이라면 장대
나 군창(軍倉), 군사 숙소를 받치는 용도로 쓰였을 것이고, 석등 초석이라면 오래된 유물이
없어 애태우는 보적사의 유물일 것이다. 하지만 발견된 것이 달랑 돌 하나 뿐이니 그 이상의
상상은 어렵다.


▲  문 천정이 사라진 동문

독산성 동문은 동그란 천정인 홍예도 없이 문의 흔적만 남아있다. 잘 쌓여진 성돌을 보니 이
곳이 정말 크고 단단한 성임을 느끼게 하는데 그 문을 나서 15분 정도 내려가면 보적사 일주
문이 나온다.


▲  보적사와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한 일주문(一柱門)
높이가 상당한 일주문 현판에는 '독산성세마대산문(山門)'이라 쓰여 있다.
즉 보적사를 뜻한다.


보적사입구로 나온 우리는 물향기수목원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그날 코스가 그랬음) 버스로
가기에는 매우 애매하여 도보로 가기로 했는데, 동네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독산과 오산시내
사이에 자리한 여계산을 넘어 세교지구로 넘어갔다.
이 구간은 경기도와 오산시가 닦아놓은 '경기도 삼남길 7코스' 독산성길로 세마교에서 독산성
과 여계산. 고인돌공원을 거쳐 은빛개울공원까지 이어지는 7.2km의 길이다. 여계산은 독산보
다 낮은 산이나 숲이 삼삼하여 오솔길처럼 걷기 좋으며, 그 산을 넘어 세교지구에 이르니 왠
돌덩이들이 땅에 바짝 누워 우리를 바라본다. 뭔가 해서 살펴보니 고인돌(지석묘)로 산을 내
려오니 너른 공원이 나타나는데, 그 공원에도 고인돌이 잔뜩 널려있다. 바로 금암동 고인돌공
원이다.


♠  오래된 고인돌을 후광으로 삼은 금암동 고인돌공원
'오산 금암리 지석묘군 - 경기도 지방기념물 122호'

▲  금암리 5호 고인돌

오산 세교지구(세교신도시) 남부에 고인돌공원이 넓게 누워있다. 이곳은 큰 바위가 많은 마을
이라 하여 '묘바위', '검바위', '금암'이라 불렸는데, 그것이 이 지역의 이름인 '금암동(錦岩
洞)'이 되었다.
공원을 중심으로 고인돌 11기가 발견되었는데, 그중 신원이 확실한 9기가 경기도 지방기념물
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나머지 2기(10,11호)는 신원이 확실치 않은 존재> 11기 중 4기는 공
원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있어 공원 안내문을 참조하여 숨바꼭질을 하기 바란다. (7기는 공원
에 있음)
이들 고인돌은 덮개돌(뚜껑돌)이 모두 땅에 누워있어 내부 구조는 아직 밝혀진 게 없으나 아
마도 무덤방이 땅 속에 있을 것으로 보이며, 달랑 덮개돌만 있는 고인돌로 보인다. 덮개돌은
화강암을 사용했으며, 길이는 1.96m에서 최대 6m까지, 너비 1.2~3m, 두께 0.3~1.1m이다. 2호
고인돌에는 알구멍이라 불리는 성혈(聖穴)의 흔적이 있으며, 청동시시대 유물로 이곳을 다스
렸던 세력의 우두머리 무덤으로 여겨진다. 그 시대면 한참 옛 조선(朝鮮, 고조선)이 동아시아
와 중원대륙의 적지 않은 땅을 다스리던 시절이니 아마도 옛 조선의 간접 지배를 받았을 것이
다.

고인돌 주변에 세교지구가 들어서자 오산시는 여계산 동쪽 자락과 묶어 고인돌공원을 닦아 시
민들에게 선사했다. 도시 한복판에 자리한 흔치 않은 고인돌공원으로 시민들의 포근한 휴식처
이며, 공원 한복판에는 잔디를 넓게 닦아 탁 트인 모습이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오산의 새로
운 명소로 인근에 독산성, 여계산, 물향기수목원과 같이 연계해서 둘러보면 정말 배부른 여로
(旅路)가 될 것이다.

* 소재지 : 경기도 오산시 금암동 520일대 (수목원로 449)


▲  금암리 4호 고인돌

▲  재현된 움집

여기서 움집터가 발견되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 청동시시대까지 무작정 선사시대(先史
時代)로 몰고 있는 경향이 커 그에 걸맞게 움집을 재현한 모양이다. 그래도 청동기시대는 돌
만 다르던 석기시대보다 더 진보된 사회인데, 사람들이 다 움집에만 살았을까? 게다가 옛 조
선(고조선)과 동이족의 수준 높은 문화가 천하 곳곳을 어루만지던 시절이고 그들이 만든 한자
(漢字)까지 있거늘...


▲  고대(古代)의 비밀을 품으며 오후 햇살을 누리고 있는 1,2호 고인돌

▲  멀리서 바라본 1,2호 고인돌의 위엄

고인돌공원에 있는 고인돌을 모두 둘러보고 싶었으나 시간이 여의치 못해 이 정도만 둘러보고
문헌근린공원을 넘어 물향기수목원으로 이동했다.
이후 내용은 생략하며, 5월 5일 오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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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6월 16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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