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진·답사기/성북구·강북구

도봉산고양이 2020. 6. 28. 21:28


1. 흥천사입구에 있는 돈암동 느티나무

이 나무는 약 380년 묵은 것으로 높이 10m, 둘레 2.4m의 덩치를 지녔다. 오랜 세월 흥천사 밑 마을을 지켜준 존재로 나무

그늘에는 마을 사람들이 세운 장승과 돌탑이 있었는데, 20세기 중반 이후, 개발의 칼질로 흥천사 주변이 강제 성형을 당하

면서 장승과 돌탑은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졌고 나무도 쇠약해져 골로 가기 직전이었다. 그러다가 동네 주민들과 흥천사 승

려들이 정성스럽게 보살피면서 다행히 생기를 되찾다.

2014년 정자나무 가꾸기 사업으로 주변이 지금처럼 산뜻하게 정비되었으며, 서울시 보호수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1968년에 보호수로 지정됨)

2. 돈암동 느티나무에서 흥천사 경내로 인도하는 길
경내 밑에는 절에서 운영하는 유료 주차장이 있는데, 길 차단봉 자리쯤에 예전에 흥천사 일주문이 있었다.

3. 7층석탑 언덕에서 바라본 흥천사 대방과 경내

아리랑고개 서쪽이자 북한산(삼각산) 산줄기의 남쪽 끝을 잡고 있는 흥천사는 태조 이성계가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의

원찰로 1397년에 세웠다. 조선 최초의 원찰로 170칸 규모였으며, 처음에는 정동에 있었다. (덕수초교와 서울시의회 일대로
여겨짐)
절 공사는 건축 경력이 많았던 김사행과 김주가 맡았으며, 태조는 수시로 절 공사 현장을 찾아 일꾼들을 격려하고 돈과

량을 두둑히 내리는 등 많은 신경을 썼다. 1397년 9월 절이 완성되자 상총을 흥천사 초대 주지로 삼았으며, 조계종 본산

로 삼는 한편, 밭 250결을 내렸다.

흥천사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들어야 밥을 먹었다는 태조 이성계는 1398년 6월 절 북쪽에 3층짜리 사리전을 지었다. 그리

고 통도사에서 석가여래의 사리를 가져와 봉안했으며, 사리전이 완성되자 그 기념으로 우란분재와 신덕왕후 강씨의 수륙

를 거하게 열었다.

태종은 절에 주어진 노비의 수와 밭의 면적을 줄였는데, 나중에 태평관을 철거하면서 남게된 밭과 노비가 절에 넘어오면
오히려 증가했다. 1410년에 절을 중수했으며, 1411년 사리각을 중수했다.

1424년 세종은 각 종파를 통합하여 흥천사를 선종도회소로 삼았으며, 전답을 두둑히 내려 승려 120명이 머무는 절로
커졌
다.
1440년에는 대장경을 봉안했으며, 1441년 3월 절 중수공사가 끝나자 5일 동안 경찬회를 열었다. 또한 1447년 안대군
을 시켜 사리각에 불골을 봉안하게 했다.

1449년 가뭄이 심하게 들자 흥천사에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며칠 뒤 비가 내리자 세종은 너무 기뻐 절 승려 140명에크게
상을 내렸다.
세조는 큰 동종을 만들어 절에 내렸으며 1469년 명나라 황제가 불전을 선물로 보내자 이를 흥천사에 봉안했다.


연산군은 1503년 궁궐에 있던 내원당을 흥천사로 옮기면서 흥천사의 건축자재 일부와 불상을 양주 회암사로 옮겼으며,

에 궁궐의 말을 관리하는 사복시 관아를 설치했다. 1504년 화재로 사리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복구하
지 못했으며, 그런 상태에서 1510년 3월, 4부학당의 유생들이 불교 배척을 외치며 야음을 틈타 남아있던 사리전을 불질러

버렸다. 그렇게 하여 태조가 세운 흥천사는 사라지게 된다. 다행히 동종은 살아남아 동대문과 광화문을 전전하다가 지금

은 덕수궁(경운궁)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다.

태종에 의해 중구 정동에서 현재 정릉동 산골로 추방된 신덕왕후의 정릉, 그 부근에 신흥암이란 작은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1669년 정릉을 중수했는데, 신흥암이 정릉과 너무 가까워 석문 밖 합취정터로 옮기고 신흥사로 이름을 갈면
서 1510년에 사

진 흥천사의 뒤를 잇게 하여 정릉을 지키게 했다.
1794년
승려 성민과 경신이 지금의 위치로 절을 옮겨 크게 중창했으며, 1846년 구봉이 칠성각을 세웠고, 1849년 성혜가 절

서쪽에 적조암(지금은 분리됨)을 세웠다. 또한 1853년 극락보전을 중수했으며, 1855년 명부전을 지었다.

1865년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전국 8도에서 시주를 받아 크게 중창했다. 대원군은 신흥사와 정릉이 이웃한 점을 들어 옛날

없어진 '흥천사' 이름을 다시 쓰게 했는데, 이로써 흥천사 이름 3자는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 이때 이름 변경 기념으로 대

원군은 친히 '흥천사' 편액을 내렸다. (1794년에 현재 자리로 절을 옮기면서 새로운 흥천사란 뜻에서 신흥사로 했다는 이

기도 있음)

흥천사로 거듭난 이후 왕족과 사대부, 궁궐 상궁의 발길이 늘었으며, 1891년 42수 관음보살상을 봉안했다.
1933년 독성각이

실되자 이듬해 재건했으며, 1942년 종각을 새로 지었는데, 이때 오세창이 종각 현판을 선물했다.
6.25 때는 격전지인 미아리고개가 지척임에도 다행히 총탄이 비켜가 화를 면했으며, 순종의 황후인 순정효황후 윤씨가 이곳

서 힘겨운 피난 생활을 하였다. 1959년 칠성각을 짓고, 1967년 용화전을 세웠으며, 2014년에 삼각선원을 짓고 경내와 주

을 정비해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해 명부전, 대방(만세루), 용화전, 독성각, 용화전, 삼각선원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

있으며,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국가 보물인 금동천수관음보살좌상을 비롯해 등록문화재인 대방과 지방문화재 20여 점

지니고 있다. 그 외에 여러 오래된 현판, 조선 후기 불상과 탱화 등이 넉넉하게 전하고 있어 볼거리도 풍성하다.

4. 옆에서 바라본 대방

대방은 1865년에 지어진 큰 건물로 특이하게 'H' 구조를 취하고 있다. 대방이란 왕실 원찰에서 만날 수 있는 독특한 건물로

족과 양반사대부의 예불과 숙식 편의를 위해 지어졌는데, 숙식을 하는 방과 예불 공간, 부엌, 누 등을 갖추고 있으며 대원

이 남긴 현판이 걸려있다.
2018년에 해체 보수하여 2019년에 마무리를 지었으나 시멘트로 짓는 등, 여러 문제가 있어 바로 공개를 하지 않고 빈 건물

계속 두고 있다. 그러다보니 대방에 있던 탱화와 불상도 주변 건물이나 창고로 뿔뿔히 흩어졌다.

(2020년 석가탄신일 때 대방의 가운데 큰 방이 임시 개방되기도 했으며, 지금은 가운데 방과 좌/우방이 절에서 49재 등을

지내는 유가족에 한해 쉼터로 개방되고 있음)

5. 범종의 보금자리인 1칸짜리 종각

종각은 1942년에 지어진 것으로 오세창 선생이 기념 현판을 남겼다.

6. 흥천사 현판의 위엄

7. 흥선대원군이 썼다는 흥천사 현판

8. 흥천사 명부전

명부전은 1855년 순기가 세운 것으로 1894년에 중수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좌우에는 풍판을 달았으

며, 평방 윗쪽에는 공포를 촘촘히 배치한 다포양식으로 기둥 위에는 밖으로 용머리를, 안쪽에 용꼬리를 새겨 건물의 품격

을 높였다. 그리고 건물 내부에는 판형으로 운봉을 장식했다.

건물 불단에는 명부전의 주인,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도명존자, 무독귀왕이 시립해 있으며, 그 좌우로 시왕상과 귀왕상, 사

자상, 판관상, 금강역사상, 동자상 등이 빼곡히 자리해 있고, 그들 뒤로 지장탱과 시왕탱이 든든하게 걸려 있다.

조선 후기 사찰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지닌 서울에 몇 없는 불교 건축물로 명부전의 현판이 가로가 아닌 세로로 걸린 점이
이채로운데, 보통 현판의 색깔인 검은색 바탕
이 아닌 붉은색 바탕에 글씨가 쓰여 있어 중원대륙 양식의 건물을 보는 듯

하다.

9. 명부전 금강역사상과 인왕탱

10. 명부전 인왕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