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진·답사기/은평·서대문·마포구

도봉산고양이 2020. 10. 1. 13:22

 

1. 창전동 광흥창터 표석 (공민왕사당 앞)

광흥창은 관리들에게 녹봉으로 줄 양곡을 보관하던 창고로 공민왕사당 앞에 있었다. 광흥창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

라지고 없지만 그 이름만큼은 6호선 지하철역으로 우리 곁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2. 공민왕사당 외경과 하늘 높이 솟은 회화나무와 느티나무들
공민왕사당 주변에는 수백년 묵은 회화나무 3그루와 느티나무 2그루가 우뚝 솟아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이들은 광흥

창 관리나 지역 사람들이 정자나무나 공민왕사당 수식용으로 심은 것으로 여겨진다. 

3. 공민왕사당 회화나무 (1)

추정 나이 약 230년(1968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치가 약 168년), 높이 21m, 나무둘레 350cm이다. 

4. 공민왕사당 회화나무 (2)

추정 나이 약 230년(1968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치가 약 180년), 높이 12m, 나무둘레 280cm이다,

5. 서강쌍용예가아파트 놀이터에 있는 회화나무

공민왕사당 남쪽인 서강쌍용예가아파트 놀이터에도 늙은 회화나무가 있다. 그는 추정 나이 약 330년(1968년 보호수로 지정

될 당시 추정치가 약 280년)으로 높이 12m, 나무둘레 508cm로 아파트 놀이터에 소중한 정자나무 역할을 하고 있다.

6. 공민왕사당 정문 (계단 밑 오른쪽에 광흥창 표석이 있음)

7. 공민왕사당
와우산 남쪽 자락이자 옛 광흥창터 주변에 자리한 공민왕사당은 고려 제31대 군주인 공민왕(1330~1374, 재위 1351~1374

)의 사당이다.

공민왕의 이름은 왕전(처음 이름은 왕기), 호는 이재, 익당, 왕족 칭호는 강릉대군으로 충숙왕과 명덕태후 홍씨의 차남이다.
어린 시절 몽골(원나라)에 볼모로 들어가 원나라 수도인 연경에서 살았으며, 1349년 몽골 왕족인 노국대장공주에게 장가

들어 몽골 왕가의 부마가 되었다. 

 

1351년 조카인 충정왕의 뒤를 이어 고려 군주가 되면서 비로소 고국으로 돌아갔는데 그는 철저한 반원정책으로 몽골을 배

척하고 자주국방을 강화해 북쪽으로 영토를 넓혔다. 원나라가 점거하고 있던 쌍성총관부를 공격하니 그곳 지역 세력인 이

자춘, 이성계가 내응하여 함경남도와 개마고원 지역으로 세력을 넓혔으며, 최영장군을 시켜 압록강 서쪽 요동 지역에 7개

참을 공격케 부셔버렸다. 그리고 인당이 압록강을 건너 요동 파사부를 점령했다.

이후 이성계가 고구려의 발상지로 여겨지는 졸본 지역을 공격해 오녀산성(우라산성)을 점령했으며, 지용수와 합동 작전으

로 다시 요동을 공격해 요동의 중심지인 요양성을 비롯해 요동반도의 대부분을 장악하는 성과를 내었다. 이때 북쪽으로 

양성과 요하, 서쪽은 정확하지 않으나 고구려의 비사성이 있던 대련까지 갔던 것으로 보이며, 동쪽은 압록강 중류인 고구

려의 옛 국내성 지역까지 영토를 넓혔다. 

 

허나 요양성을 점령하면서 식량창고를 불태우는 어리석음을 범해 식량 수급에 문제가 생기면서 요동 수비에 비상이 걸렸

고, 원나라가 군사를 보내자 기껏 점령한 요동 지역을 내주고 일단 철수하고 만다. (그 철수가 영원한 철수가 될 줄이야 ㅠ

ㅠ)

또한 왕권에 위협이 되거나 몽골에 빌붙은 권신들을 때려잡는 등, 고려 재부흥을 이끌었으나 노국대장공주가 산고로 사망

하자 그만 정신이 돌아버려 정사를 게을리하게 된다. 이후 그는 노국대장공주의 영전을 크게 짓는다며 국력을 크게 소모했

고, 엉뚱하게 동성연애를 즐기는 등, 영 좋지 않은 행보를 보이다가 그를 호위하는 최측근인 홍륜 일당에게 허무하게 살해

되고 만다. 

8. 굳게 닫힌 공민왕사당

그렇다면 마포와 가까운 와우산에 왜 공민왕사당이 있는 것일까? 공민왕은 그림과 음악에 매우 유능했다. 그가 그린 천산

대렵도는 그의 높은 그림 솜씨를 보여주는데, 그가 재위하던 시절 남경이라 불리던 서울에 올 때마다 이곳에 있던 정자를
찾아와 한강을 바라보며 시화를 즐겼다고 전한다.
그가 과연 이곳에 왔는지는 의문이나 조선 초기에 이르러 마포 서쪽 서강은 지방에서 올라온 농산물의 집산지 발달하면

조정에서 광흥창 등의 여러 창고를 지었다. 


광흥창을 관리하는 관리(또는 관리인)의 꿈에 공민왕이 현몽하여 '이곳은 짐의 정기가 서린 곳이니 사당을 짓고 봉제하라 
그러면 번창하리라' 하니 그는 이곳에 그의 사당을 지었다. 허나 태조 이성계는 공민왕 사당에 크게 거부감을 보이며 불신

동자를 사당에 봉안하면서 신당 또는 당이라 불렀으나 200여 년 전인 18세기에 다시 공민왕사당의 칭호를 되찾았다고 한

다.
한때 인근 창전동 33번지로 이전되기도 했으나 원래의 위치로 돌아왔으며, 원래 면적은 50평이었으나 지금은 30평 정도로

축소되었다. 그리고 1988년 경 흙바닥을 시멘트 단으로 조성하여 지금에 이른다. 

매년 음력 10월 초하루 자시에 제향을 지내고 있으며, 제사를 소홀히 하거나 부정한 일이 있으면 창고에 화재가 나는 등, 
재앙이 생겼다고 전한다. 사당에는 공민왕을 중심으로 노국대장공주와 공민왕의 열성 신하이자 80승 무패를 세운 최영장

군이 배향되어 있다.

 

공민왕사당은 국가등록문화재로 맞배지붕 사당과 태극마크가 그려진 문이 전부이다. 사당의 성격을 봐서는 서울 지방민속

문화재가 적당해 보이는데 왜 근대 문화유산과 현대 건축물 위주로 지정되는 등록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는지 모르겠

다. 

9. 공민왕사당 옆에 자리한 광흥당

광흥당은 마포구의 문화원 같은 곳으로 여러 문화행사와 강연이 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