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사진 답사기/달성군

도봉산고양이 2020. 10. 9. 12:56


1. 녹동서원 향양문(외삼문)

달성군 우록리 산골에 묻힌 녹동서원은 모하당 김충선(1571~1642)을 배향한 서원이다. 김충선은 왜열도 사람으로 왜식

이름은 사야가인데 사야익의 아들로 7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조부는 사야옥국, 증조부는 사야옥이다. 고향은 와카

야마로 혼인하여 부인이 있었다.

 

전국시대에 이리저리 끌려나디며 열심히 싸우다가 풍신수길(도요토미히데요시)이 왜열도를 어느 정도 통합시키자 전쟁

끝났구나 싶었다. 허나 왠걸, 쥐약 먹은 풍신수길이 조선과 명을 공격한다고 난리를 쳐 1592년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

(가토기요마사) 휘하의 우선봉장으로 출병하게 되었다.
전쟁에 대한 염증이 컸고 평소 조선을 동경했던 사야가는 조선 땅에 들어오자마자 휘하 병력 3,000명을 이끌고 경상도

마절도사 박진에게 항복하여 창을 완전히 꺼꾸로 들게 된다. (임진~정유란 때 조선에 항복하여 창을 꺼꾸로 든 왜군

라 부르며 이들의 수는 1만 이상임)

 

조선에 투항 후, 순찰사 김수, 의병장 곽재우를 도와 경주, 울산 등에서 왜군을 격퇴했으며, 그 공으로 조정에서 가선대

제수 받았다.
1593년 도원수 권율과 어사 한준겸 등이 주청하자 선조는 사야가를 두고 '바다를 건너온 모래(사야가의 성인 '사야'의 沙

가 '모래사'임)를 걸러 금을 얻었다'며 김해김씨의 성씨를 주었고, 충성스럽고 착하게 살라는 뜻에서 '충선', 즉 '김충선'이

이름과 자헌대부를 내렸다. (충선이란 이름 외에 '향의','귀순' 등에 이름도 하사 받았음)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손시로 등 항왜와 함께 의령 전투에 참여했다. 그때 왜군 1만 명이 산청에서 의령으로 넘어가 

(정암진)을 반쯤 건너고 있었는데, 이때 명나라 군사 수십 명과 합세해 그들을 공격했다. 허나 왜군이 마병으로 습격해 

에 빠졌으나 항왜들의 활약으로 그들을 싹 때려잡았다.


1624년 이괄의 난이 터지자 이괄의 부장인 서아지(항왜 출신)를 김해에서 처단했으며 그 공으로 조정에서 사패지를 내렸

다. 허나 김충선은 이를 사양하고 수어청에 기증해 둔전으로 사용하게 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토병 한응변과 자원군으로 나와 싸웠으며, 그로 인해 상당직에 제수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터지

자 늙은 몸을 이끌고 광주 쌍령에서 청나라군과 싸웠으나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서 항복하자 너무 열받아서 크게 통

곡를 했다.

1642년 그가 정착했던 우록리에서 71세로 사망하자 마을 뒷산인 삼정산에 장사를 지냈다. 그는 1600년에 진주목사 장춘

점의 딸에 장가들어 여러 자식을 두었으며, 그 자손이 점점 늘어나 지금은 8,000명 정도가 있다.

왜군의 선봉장으로 출전해 조선에 항복하여 조선을 위해 싸운 왜인, 왜열도 애들은 그를 두고 배신자라고 손가락질하지만

왜열도 애들 대부분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고려, 조선에서 넘어간 사람의 후손인만큼 원래 조상 땅으로 돌아온 것이

다. (그의 집안에 대해서는 분명하지가 않음)
그는 왜열도에 있을 때 화약을 다루는 직종에 있었다고 하며, 조선에 와서 자신이 가진 조총 기술을 흔쾌히 전수해주었다.

충무공 이순신도 그에게 조총과 화약제조법의 자문을 받기도 했다.

2. 바깥에서 바라본 녹동서원 숭의당
1789년 대구 지역 유림들과 김충선의 후손들은 김충선을 길이길이 기리고자 경상감사에게 서원 건립을 희망하는 향장을

렸다. 하여 1794년 김충선 묘 밑에 녹동서원이 세워지게 된다.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정리 사업 때 없어졌다가 1914년에 중건었으며, 1972년 서원의 규모가 작아서 원래 위치보

다 100m 떨어진 현 자리로 옮겨 증축했다.

 

서원 구조는 전형적인 전학후묘 형태로 사당이 강당의 우측 배면에 자리해 있으며, 외삼문인 향양문을 들어서면 강학 공

인 숭의당이 나타난다. 그리고 우측 후면에 내삼문과 사당인 녹동사가 있다. 서원 외삼문은 굳게 잠겨있어관람을 원한

다면 한일우호관에 있는 문화유산해설사에게 요청하면 되는데,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낮은 담장 밖에서 까치발로 

라보면 어지간한 것은 다 보인다.

3. 녹동서원 주변에 박힌 부질없는 표석

2001년 와카야마(화가산)현에서 보낸 한일문화교류단이 이곳을 방문한 기념으로 세운 것이다. 정의를 실천한 사야가(김충

선) 장군을 높이 찬양하고 한,일 양국의 우호친선을 기원하면서 세웠다고 쓰여있는데, 글쎄???

진정한 한,왜 평화를 원한다면 왜열도의 원래 주인인 우리의 그늘로 돌아오는 것이 맞다고 본다. 그렇지 않으면 진정한 한,

왜 평화는 없다. (두 지역의 평화는 원숭이로 퇴화된 왜열도 애들이 늘 깨버림)

4. 문을 굳게 잠군 우록서원 내삼문과 녹동사

내삼문 안에 김충선을 배향한 녹동사(사당)가 있다.

5. 한일우호관 앞에 세워진 금색 피부의 고양이상(명제 : 화합의 미소)

'마네키네코'라 불리는 왜열도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고양이상으로 행운과 복을 부르는 존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왼손을 들

고 있으면 사람을 부르고, 오른손은 복을 부르며, 두 손을 다 들면 사람과 복을 모두 부른다고 한다. 그 고양이상이 우리 전
통의 복주머니를 들고 있으며, 그 앞에 있는 의자는 저고리 형상을 하고 있다.

이 고양이상은 안태영이 만든 것으로 뜬구름 같은 한.왜 화합과 이곳에 온 사람들의 복과 행운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장만한
것이라고 한다. (이런 것은 늘 뜻만 거창함;;)

6. 금색 피부 고양이상(화합의 미소) 안내문

7. 충절관에 깃든 모하당전집

녹동서원 충절관에는 김충선의 유물과 관련 서적들이 들어있다. 김충선이 쓴 것을 모아서 정리한 모하당집과 맹주집주

전, 각종 필사본 11종 12책, 임진왜란 때 쓰인 조총과 칼, 화살 등 19점, 고종이 1892년에 김충선에게 내린 교지 등이 있으

며, 녹동서원 안에는 녹동재기, 상량문 등 6점의 현판과 향양문 다락에 모하당집 79점의 책판이 있다.

충절관 관람은 한일우호관에 있는 문화유산해설사에게 요청하면 된다. (충절관은 늘 문이 닫혀있음)

8. 모하당 문집 목판

9. 김충선이 우록리에 정착하여 남긴 문구 (사슴을 벗하며...)

10. 진중화로와 진중화저

11. 1892년에 고종이 김충선에게 내린 교지

12. 오래된 조총과 조총신

13. 김충선이 사용했다는 대도 등의 칼

14. 모하당문집 초판 목판

15. 녹동서원과 충절관 관람안내

16. 김충선의 유물과 서적, 관련 유물을 머금고 있는 충절관
충절관 관람 때 정면에 있는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서쪽 협문으로 들어갔다. (정면 문은 단체 손님이나 비싼 손님들 올때나

열어두는 모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