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진·답사기/은평·서대문·마포구

도봉산고양이 2020. 11. 13. 23:41


1. 형구돌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을 교수형으로 처단하려고 사용했던 돌덩어리이다.  저 돌덩어리에 죽어간 사람들의 신

음과 메아리가 들리는 듯 하여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2. 연자매처럼 보이는 이것은??

모습은 연자매이나 실은 노기남 대주교의 금경축 기념비이다. 노기남(1902~1984)은 최초의 한국인 주교이자 제10대 서울

대교구장을 지낸 사람으로 대주교 사제 수품 50주년(1980년 10월 26일)을 기념하고자 세웠는데, 그 기념비를 특이하게 연

자매로 만들었다. 원래는 그의 합정동 자택에 있었으나 나중에 이곳 절두산성지로 옮겼다. 

3. 절두산성지 한복판에 세워진 김대건 신부 동상

4. 석굴에 봉안된 하얀 피부의 성모 마리아상

5. 성모 마리아상 주변

6. 흥선대원군의 쇄국 망령이 깃든 척화비

척화비는 흥선대원군이 쇄국 정책을 굳게 하고자 전국에 세운 비석이다. 지금은 몇 개 남아있지 않은데, 이곳 척화비는 아

쉽게도 가짜이다. 비석을 두드려보면 돌소리가 아닌 빈 공간 소리가 나기 때문이다. 척화비는 쇄국정책 외에도 천주교 박

해와도 관련이 조금 있다보니 잠두봉을 천주교성지로 꾸미면서 모조품을 하나 들여놓은 것이다. 

7. 문지방돌과 오성바위

유리막 안쪽에 문지방돌이란 조그만 돌과 오성바위란 너럭바위가 들어있다. 문지방돌은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을 지낸 다
블뤼(Daveluy, 안돈이 1818~1866) 주교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그가 1845년 김대건을 따라 이 땅에 들어온 후, 충청도 합

덕 신리에 있는 교우촌에 머물렀는데, 그곳에 마련된 임시 거처에 있던 것을 가져온 것이다.

8. 확대해서 바라본 조그만 문지방돌

9. 오성바위(오성석)

병인박해 때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다블뤼주교와 위앵(Huin, 1836~1866) 신부, 오매트르(Aumaitre, 1837~1866) 신부,

황석두(1813~!866), 장주기(1803~1866) 등이 보령 갈매못으로 끌려가는 도중, 아산 음봉면 길가에 있던 이 바위에 앉아서

신앙을 다짐했다고 한다. 그 연유로 복자바위라 불리었고 1984년 그들이 성인품에 오르자 오성바위라 부르고 이곳으로 가

져와 각별히 챙기고 있다.

10. 가까이서 바라본 김대건신부 동상

11. 김대건 신부 동상 주변에서 바라본 잠두봉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12. 늦가을이 깃든 절두산성지 산책로

13. 천주교와 관련된 여러 비석들이 모인 곳

14. 천주교성지에 왠 승려 비석이?? 해운당대사 의징지비
이 비석은 1638년에 입적한 의징선사를 기리고자 그가 머물렀던 여주 주어사에 1698년에 세운 것이다. 비신 높이 91cm,
폭 33cm로 비석이 있던 주어사는 광주 천진암과 함께 18세기 천주교 강학이 처음으로 이루어져 천주교의 발상지로 여겨

진다.

이벽 등 천주교에 관심이 있던 사대부들이 많이 찾았다고 하며, 양반사대부들이 절에서 공부를 하거나 휴식도 취할 겸 학

문을 논하던 장소로 즐겨 이용했다. 그러다보니 절에서 그들에게 강학 장소를 빌려준 것인데, 그 연유로 조선 조정에게 탄

을 받아 절은 폐사되고 승려들은 죄없이 처단되는 비운을 겪는다.

이후 주어사터는 오랫동안 자연 속에 묻혀있다가 병인박해 때 처단된 남종삼의 손자인 남상철이 1960년에 발견했다. 절터

를 홀로 지키고 있던 의징선사비는 절두산성지로 들고갔으며, 천진암과 주어사터를 천주교성지로 삼아 적극 홍보하고 있

다. (주어사터는 천주교에서 1982년부터 2022년까지 임차했다고 함)

허나 비석의 주인공인 의징은 천주교와 관련이 없는 인물이다. 아무 관련도 없는 비석을 주어사터에 있다고 해서 가져온 것

인데, 불교 쪽에서는 제자리로 보내야 된다는 여론이 강하게 나오고 있다. 내가 봐도 제자리로 보내는 것이 맞다고 본다. 또

한 천진암과 주어사터는 천주교에서도 중요한 곳이지만 그들 역시 엄연한 불교 유적이므로 천주교 혼자 차지하지 말고 불

교와 같이 살피는 것이 맞다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