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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 138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가본시기 글 공개시기 글 링크 1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 심우장, 성락원, 선잠단터 2003, 10 2013, 11 ☞ 블로그글 보기 2 종로구 경복궁, 인사동 2006, 1 2006, 1 ☞ 블로그글 보기 3 종로구 창경궁 (1) 2006, 4 2006, 10 ☞ 블로그글 보기 4 종로구 창경궁 (2) 2006, 4 2006, 10 ☞ 블로그글 보기 5 강남구 봉은사 1 (사월초파일) 2006, 5 2007, 5 ☞ 블로그글 보기 6 강남구 봉은사 2 (사월초파일) 2006, 5 2007, 5 ☞ 블로그글 보기 7 종로구 서대문구 세검정, 대원군별장, 홍지문 옥천암 마애좌상 2006, 8 2007, 8 ☞ 블로그글 보기 8 종로구 북한산 금선사 2008, 4 2..
고흥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 우주를 꿈꾸며, 고흥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 ▲ 나로호(KSLV-1) 겨울 제국의 차디찬 바람이 옷깃을 더욱 여미게 하던 1월의 끝 무렵, 겨울의 핍박에서 잠 시 벗어나고자 일행들과 따스한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아침 일찍 번잡한 서울을 떠나 충북과 충남, 전북의 여러 지역을 거쳐 저녁 늦게 전남 여 수(麗水)에 이르렀다. 여수는 원래 계획에 없었으나 광양(光陽) 땅에 이르다보니 바다 남 쪽에 아른거리는 여수 땅이 갑자기 땡기는 것이다. 하여 그 마음 뜻대로 이순신대교를 건 너 여수로 진입, 환상적인 야경을 보여주는 여천공단을 가로질러 여수 도심부에서 흔쾌히 1박을 청했다. 첫날의 여독이 대단했는지 눕자마자 바로 잠이 들어 거의 9시간을 잔 것 같다. 아침 햇살..
1. 석장리유적 첫 발굴지 석장리유적은 이 땅에서 처음 확인된 구석기유적으로 그곳에서 가장 먼저 조사를 받은 곳이 바로 이 부분이다. 즉 우리나라 최초의 구석기 유적 발굴지이다. 하여 특별히 첫 발굴지임을 알리는 깃발을 높이 세웠고, 1964년 첫 발굴때 세웠던 안내문 도 보존하고 있다. 2. 석장리 유적 강변길과 유유히 흐르는 금강 3. 석장리 유적을 만들고 한편으로는 덮쳤던 금강 지금은 강이 정비되어 있으나 예전에는 여름 폭우 때 툭하면 범람해 현재 석장리박물관까지 잠겼다. 그렇게 상황이 좋지 않 던 이곳에 일일이 모래로 둑을 만들면서 여기에 숨겨진 구석기 역사를 캐냈던 것이다. 4. 썰렁하기 그지 없는 석장리유적 선사체험장 5. 세계의 막집(움집) 전시장 공주 석장리와 제천 창내, 프랑스의 뺑스방과..
1. 석장리 구석기 유적 첫 발굴지 석장리 유적 발굴은 이곳에서 처음 이루어졌다. 즉 이 땅의 첫 구석기 유적 발굴의 현장인 것이다. 그것을 기념하고자 첫 발굴지를 알리는 깃발을 하늘 높이 세워두었다. 2. 유물 발굴 과정 (1960년대) 제일 먼저 겉흙을 걷어내고자 삽질을 하는데 위에서부터 지층 순서에 따라 1겹씩 흙을 걷어낸다. 그런 다음 그 아래 쌓임층 을 일일이 흙손을 사용해 걷어내면서 토양층 성분을 조사하고 석기를 비롯한 각종 유물을 찾는다. 3. 발굴현장을 방문한 사람들 (1960년대) 백낙준(전 문교부장관) 일행이 발굴 현장을 방문하여 손보기 교수에게 발굴 상황을 전해 듣고 있다. 4. 발굴현장에서 짐 나르기 (1960년대) 발굴을 마치고 서울로 가져갈 짐을 지게로 나르고 있는 손보기 교수,..
1. 청원(청주) 두루봉동굴 유적 사진 청원 두루봉동굴 유적은 이 땅의 대표적인 구석기유적으로 꼽힌다. 이곳 역시 손보기 교수의 손을 거쳤는데, 석장리유적과 연천 전곡리유적, 단양 수양개유적만큼 중요한 곳임에도 발굴 이후 방치되어 크게 망가지고 말았다. (석회암 광산으로 계속 쓰이면서 동굴 유적이 거의 아작났음) 2. 청원(청주) 두루봉 동굴 유적 안내문 3. 청원 두루봉동굴 유적 연구자료와 거기서 나온 뼈 예술품(사슴 정강이뼈) 4. 단양 상시 바위그늘유적 사진 이곳에서는 처음으로 구석기 사람의 뼈가 나왔다. (단양에는 매포읍 상시 바위그늘유적 외에 수양개유적, 금굴 유적 등의 구석기 유적이 있음) 5. '파른'이 무슨 뜻? 손보기 교수는 '파른'이란 호를 썼다. '파른'은 파란색을 뜻하는데 그 사연은..
1. 석장리유적 발굴 현장에 쓰였던 니콘 카메라 1960~1980년대 석장리유적에서 바쁘게 쓰였던 카메라이다. 발굴 현장은 유적 전체를 담은 전경 사진이 필수인데, 그때는 나무로 제작된 사다리에 올라가서 전경을 찍었다. 카메라 뒤에 있는 빛바랜 흑백 사진은 1970년대에 찍은 것으로 사다리에 올라가서 유적 사진을 찍는 모습이다. 2. 석장리 유적과 유물 사진을 담았던 환등기 1964년 석장리유적이 발견된 이후, 1967년 미국 앤아르보 국제학회에서 처음으로 석장리 유적에 대한 발표를 했다. 유럽 등 서구는 구석기시대에 대한 학술논의가 활발했으나 우리나라는 석장리 유적이 처음이었는데, 사진은 사진대로, 자료는 자료대로 따로 환등기를 이용해 스크린에 띄워 보여주었다. 석장리 유적에서 나온 유물과 현장은 사진..
1. 원초적 석기를 만드는 구석기인 (석장리박물관) 2. 1964년 5월 석장리 유적이 발견되다 석장리유적은 이 땅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구석기유적으로 이곳을 통해 우리나라에 구석기 고고학이 싹을 피우게 된다. 3. 석기를 발견하다 1964년 5월 대학원생으로 고고학에 관심이 많던 알버트 모어와 샘플 부부는 부산 동삼동 조개더미를 발굴하고 금강을 찾아 홍수가 스쳐 지나간 금강변 석장리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금강변 언덕 밑에서 10여 개의 수상한 석기를 발견했고, 그 들이 구석기 유물이라 여겨져 서울로 올라와 연세대 사학과 손보기교수에게 이를 알렸다. 그것이 석장리 유적의 첫 세상 데 뷔였다. (알버트 모어 부부는 1960년대 연세대 객원학자였음) 4. 1964년 6월에 제작된 석장리 유적 발굴 계획..
* 공주 석장리 구석기유적 (석장리선사유적지, 석장리박물관) 금강 북쪽에 자리한 석장리 유적은 우리나라 구석기 유적의 1번지이다. 즉 이 땅에서 처음 발견되고 처음 우리 손을 거 친 구석기 유적인 것이다. 이곳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64년 봄이다. 연세대학교 객원학자로 있던 미국인 대학원생 엘버트모어(Albert Mohr)와 그 의 부인 샘플(L.L Sample)이 부산 동삼동 조개더미 유적을 발굴하고 금강을 찾아 석장리 강변을 살펴보던 중 무너진 층 에서 뗀석기를 찾으니 그것이 석장리 유적의 첫 세상 데뷔였다. 그는 연세대학교 사학과 손보기 교수와 그해 5월 21일 석장리를 다시 찾아 쌓임층이 무너진 곳에서 석기를 여럿 찾았고, 발굴허가를 정식으로 얻어 그해 11월 11일 연세대대학원 사학과에서 발굴..
서울의 남주작, 남산 '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 나들이 ' ▲ 남산서울타워 ▲ 남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 백범광장 주변 여름이 빠르게 익어가던 6월 끝 무렵, 일행들과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南山)을 찾았다. 서울 한복판에 누워있는 남산은 내 어릴 적 즐겨찾기 장소로 고등학교 1학년까지 남산 인 근에 살면서 뒷동산 삼아 활보했던 추억 깊은 현장이다. 나는 남산의 물을 먹고 자랐으며, 남산에서 친구들과 뛰어놀고, 남산 정상에 올라 천하를 바라보며 나름대로의 꿈을 키웠다. 고등학교 이후 남산과 먼 곳에 살게 되면서 다소 뜸해졌고, 가끔 찾는 정도에서 머물다가 2015년 이후 오후와 저녁, 평일, 휴일을 가리지 않고 발걸음을 크게 늘리고 있다. 햇님의 기운이 가장 왕성한 14시, 동..
1. 정릉 서쪽 숲길 숲길 옆에는 얕게 닦인 도랑이 있는데 그 도랑은 정릉의 금천 역할을 했다. 조선 왕릉은 능역 앞에 금천 역할을 하는 계곡을 두고 금천교를 닦았는데, 선릉과 정릉의 금천은 거의 도랑 수준으로 작다. 2. 정릉(중종의 능) 정자각 앞 3. 정릉 서쪽 숲길과 도랑(금천) 4. 선정릉 숲길 (중간 숲길) 선릉과 정릉은 숲이 매우 짙어 숲길이 아주 일품이다. 선릉과 정릉 사이에는 낮은 산이 있고, 두 능을 잇는 숲길이 여럿 닦 여져 있는데, 선정릉 정문에서 남쪽 길을 거쳐 재실, 선릉으로 가는 남쪽길은 평지 길이며, 정릉에서 정현왕후 윤씨 능을 잇 는 북쪽 길은 정현왕후 윤씨능 동쪽 고갯길을 빼면 거의 평지이다. 반면 중간 길은 북쪽 길과 남쪽 길에 비해 완전히 산을 넘는 고갯길로 주변이 온..
1. 중종의 능인 정릉 선릉 동쪽이자 선정릉 정문 동쪽에 조선 11대 군주인 중종의 능 정릉이 있다. 중종 능은 처음에 중종의 2번째 왕후인 장경 왕후 능(희릉) 서쪽 언덕에 닦여졌으나 1562년 중종의 3번째 왕후인 문정왕후가 이곳으로 옮겼다. 기존 자리가 풍수상 영 좋지 못하여 옮겼다고 하나 실상은 중종과 같이 묻히고 싶은 욕심으로 그리 한 것으로 문정왕후가 사망하고 이곳에 묻히려 고 했으나 정릉 자리가 홍수 피해가 잦아 부득이 불암산 남쪽 자락에 따로 묻히니 그곳이 태릉이다. 하여 정릉은 중종 혼자 묻혀있다. (왕후가 홀로 묻힌 능은 많으나 제왕이 혼자 묻힌 능은 건원릉과 정릉 등 거의 없음) 2. 솔내음이 진한 정릉 서쪽 숲길과 얕게 파인 도랑(금천) 3. 정릉 예감 제향에 사용된 축문을 태워 묻..
1. 선릉 성종 능침 (정자각 뒤쪽에서 바라본 모습) 2. 정자각에서 정현왕후 윤씨 능을 이어주는 신로 선릉은 정자각에서 성종 능침과 정현왕후 윤씨 능침까지 돌로 다진 신로를 닦았다. 이는 선릉 제향 때 그들의 혼령이 정자 각까지 편히 오라고 만든 것으로 신로 대부분은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3. 선릉 성종 능침 동쪽 숲길 이곳에 성종 능침으로 인도하는 숲길이 있다. 4. 선릉 성종 능침으로 인도하는 숲길 (기와 돌담은 선릉 곡장) 성종 능침 바로 앞까지 인도하는 숲길로 기와 돌담 너머가 능침이다. 5. 선릉 성종 능침 (호석을 두룬 육중한 봉분과 망주석, 석양, 혼유석 등) 선릉 능침 내부는 문화유산 보호로 접근을 통제하고 있어 능침 바로 앞에서 마치 휴전선 너머의 금지된 땅을 바라보듯 구 경해야 된다..
1. 영덕 칠보산 유금사 동해바다를 옆구리에 낀 영덕 고을의 북쪽 끝, 칠보산 동쪽 자락에 유금사란 고즈넉한 비구니 산사가 숨겨져 있다. 동해안 7번국도에서 칠보산 자락으로 꽤 들어가야 되는 깊은 산속에 자리한 이곳은 무려 637년에 자장율사가 왕명으로 창건했다 고 전한다. (과연 그럴까?) 절 주변에 금이 많이 나와서 유금사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하는데, 조선 중기까지 대웅전과 종각, 장화보인산령각 등 많은 건물을 지니고 있었고 머무는 승려도 수십 명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그러던 어느 날 주지가 경주 불국사 법회에 참여 하고 돌아오는 길에 절 앞 용소에서 용 2마리가 예민(?)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격한 흥분과 고약함을 느꼈다. (유금사 는 불국사의 말사임) 그리고 절에 들어서기도 전에 폭..
1. 선릉 수복방 정자각 동쪽에 자리한 수복방은 맞배지붕을 지닌 조그만 2칸짜리 집으로 선릉을 관리하는 사람이 일을 보거나 생활을 하던 곳이다. 선릉 제향 때는 여기서 제사음식을 준비하기도 했다. 2. 솔내음이 그윽한 선릉 숲길 3.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한 선릉 성종 능침 4. 선릉비가 들어있는 비각 선릉의 주인을 알려주는 지붕돌 비석을 머금고 있다. 세종의 영릉까지는 신도비를 주로 세웠으나 문종부터는 지붕돌 비석 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5. 비각에 감싸인 선릉비 6. 선릉 정자각 (선릉에 묻힌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에게 제를 지내는 건물) 7. 선릉 정자각 돌계단 왼쪽 계단은 제왕 전용, 오른쪽은 신하와 아랫것들 전용이다. 지금은 어느 계단을 이용하든 상관이 없으나 옛날에는 사람들 을 철저히 가리..
1. 선릉 재실 선릉과 정릉 사이에 고즈넉한 한옥인 재실이 있다. (선정릉 정문에서 평지길인 선정릉 남쪽 숲길을 따라 선릉으로 가면 알 아서 나옴) 이 재실은 선릉과 정릉 제례를 준비하던 곳으로 능 제향에 앞서 제관들이 미리 들어와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제사를 준비 했다. 평소에는 능을 관리하는 참봉이 거주하면서 능역을 지켰으며, 향을 보관하는 안향청, 제례업무를 담당하는 전사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행랑채 등을 지니고 있다. 건물에 단청은 하지 않았으며, 재실 내부는 공개하고 있다. 선정릉은 매주 월요일 쉬며,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에는 문화의 날이라고 하여 무료로 개방한다. (이는 입장료를 받는 다른 왕릉, 궁궐도 마찬가지임) 2. 재실의 중심 건물인 전사청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