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

박수정 Soojung 2010. 10. 21. 00:44

 

 

왜?

-기륭전자노조 침탈에 맞서

 

 

송경동

 

 

왜 늘 끌려가야 하는 것은 우리들인가

 

누구의 소유도 아닌 이 대지를

수십 년 불법점거하고 있는

저 무법의 자본가들

정치모리배들은 왜 끌려가지 않는가

 

왜 늘 우리는 주어야만 하는가

 

왜 내가 노동한 가치의 대부분을

너희에게 주어야 하는가

왜 우리가 협동으로 생산한 사회적 가치가

너희의 개인 금고 속에

옛 왕족의 얼굴을 한 화폐로 변해

얌전히 갇혀야 하는가

 

2005년 10월 17일 새벽

모두가 잠든 밤

지상으로 내려와

어둔 시대의 새벽까지 깨어 있었다는 죄명으로

또 한 무리 별들이

하나씩 둘씩 검은 군홧발에 끌려갔다

 

더 싼 값에

영혼을 팔지 않았다는 죄

노동을 팔지 않았다는 죄

50일이 넘는 무법의 밤이 지나도

겁에 질리지 않았다는 죄

더 싼 값에 동지를

팔지 않았다는 죄

늘 똑같은 죄목

늘 똑같은 탄압

 

동지들이여

신새벽을 여는 동지들이여

 

저들의

불법 무단 점거를 해산하라

저 공권력의 부당한 단체행동권을 몰수하라

검찰로 경찰로 학교로 언론으로 의회로 이어지는

저 모든 착취의 라인을 봉쇄하라

 

저것은 본래

우리들의 것

비정규직 철폐

신자유주의 분쇄 연대전선으로

저들을 고립하라 포위하라

인간의 대지에서

영원히 저들을 격리하라

 

『꿀잠』(송경동, 삶이보이는창, 2006)에서

 

 

경비실 옥상 위에서 60여 일 농성을 하던 두 여성노동자는 지금 단식투쟁을 합니다.

10월 15일 아침, 그 경비실을 철거하겠다고 포크레인이 왔습니다.

2008년 그날, 용역과 구사대가 대거 몰려나왔던 걸 지금도 똑똑히 기억합니다.

아이 생일이라 잊히지도 않습니다.

기륭노조 분회장과 한 시인이 그 포크레인 위로 올랐습니다.

10월 16일, 포크레인을 가져가겠다며, 순순히 내려오지 않으면 연행하겠다고

방패를 든 전경들이 몰려왔습니다.

해가 떠 있던 낮부터 해가 진 저녁까지 포크레인 팔꿈치 끝에 두 다리를 모으고 서서

두 눈을 감고 몸을 뒤로 젖힌 채 줄 하나를 잡고 선 사람이 있었습니다.

경비실 옥상 위 두 사람은 여전히 단식투쟁을 하고

포크레인 위 두 사람도 여전히 땅을 밟지 못하고

시간은 갑니다.

엿새가 길기만 합니다.

문제가 잘 해결되어 모두 무사히 어서 땅으로 내려오기를 바랍니다.

한번씩 얼굴 보고 서둘러 뒤돌아 나와 걷는 공단 길, 

슬프고 외롭습니다. 

 

*네이버 카페 '기륭전자분회'에 가면 자세한 소식들이 올라와 있습니다.

  쇼핑몰들이 몰려 있는 공단사거리에는 사람들이 북적이는데 그 사거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기륭 노동자들이 있는 그곳은 세상과 뚝 떨어져 있는 것만

  같습니다. 거기, 바로 '나'일 '그이들'이 있습니다.

 

 

 

 

 

 
 
 

세상 쓰기/기고

박수정 Soojung 2010. 10. 15. 11:01

 

 

  ‘어린 엄마’에게 사랑과 새 삶

  - 한상순 애란원 원장                  

                                           

 

  서울시 서대문구 대신동, 봉원사 가는 언덕길에 ‘애란원’이 있다. 지난 4월 1일로 문을 연 지 만 50년이 되었다. 1960년, 미국 장로교 선교사인 반애란(Eleanor Van Lierop) 여사가 ‘은혜원’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을 때 그곳은 미군과 한국인을 상대로 성매매에 내몰린 여성들과 가출 소녀들의 거처가 되었다. 시간이 흘러 미혼모자보호시설로 바뀌고, 임신으로 집과 학교, 사회에서 외면당한 여성들이 머문다. 위기상황에 놓인 여성들에게 애란원은 쉼터이자 삶을 꿈꾸고 준비하게 해주는 든든한 안내자다.

 

  시작은 눈물이었다

 

  9월 6일 오후, 바깥일을 보고 돌아온 한상순 애란원 원장은 한숨 돌리고 땀을 식히기보다 먼저, 한 여성의 2학기 대학 등록금 문제를 사회복지사와 의논했다.

 

  “한번 애란원 식구는 평생 애란원 식구예요. 대학 다니는 엄마한테 후원자를 모아 장학금을 지원해요. 위기를 극복하지 못해 더 어려운 상황으로 가지 않도록 하는 거죠. 애란원에서 나가는 분들께 그래요. ‘정말 어려울 때는 애란원으로 오세요. 최선을 다해 돕겠어요.’라고.”

 

  인사치레가 아니다. 한 원장이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던 대학 3학년 때, 홀트아동복지회에서 실습할 때 만난 외국 선교・사회사업가를 보면서 가슴에 새겨 지금까지 실천하는 내용이다.

 

  “그분은 아주 검소하고 절약하는 생활을 했어요. 접시에 묻은 달걀노른자 자국까지 빵으로 닦아 드셨죠. 그러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사비든 공금이든 아낌없이, 무엇이든 제공했어요. 그 모습에 감동했어요. 어려움에 처한 이에게 일회성 수혜가 아니라 질을 따져 충실히 최선을 다해 돕는 거죠.”

 

  애란원 원장으로 20년. 미혼모와 함께한 건 더 오래됐다. 1973년 한국기독교양자회(1975년 홀트에 합병. 이후 홀트) 미혼모상담부에서 8년간 일하면서 많은 미혼모를 만났다. 시작은 눈물이었을까.

 

  “1960년대에는 기아(버려진 아이)가 많았어요. 1970년 서울 사직동에 기아들이 모이는 병원이 있었는데 가면 눈물 없이 돌아설 수가 없었어요. 안아달라고 팔을 내밀던 아이들을 보았죠. 당시 아이들이 버려진 원인을 조사해보니 ‘미혼모’가 있었어요. 미혼모를 돕는 체계가 하나도 없던 때였죠. 임신했다고 아버지에게 맞아 멍든 채 쫓겨나 거리를 떠돌아 피부병이 심하게 난 여성도 있었어요. 미혼모상담부는 아이를 버리기 전에 방법을 찾자는 거였죠. 상담하면서 갈 곳 없는 여성들을 애란원에 들어가게 안내했습니다.”

 

  한 원장은 아이들을 낳고 키우던 1981년부터 10년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애란원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기타를 치며 함께 노래하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미혼모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들에겐 고통이 겹겹이었다. 학대와 가출, 길 위의 생활, 임신과 입양, 상처, 타인과 관계 맺지 못하는 어려움….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그들에게 한 원장은 애란원과 함께 기회가 되어주고 싶었다.

 

  “한 엄마가 병원비를 가지고 애를 낳으러 병원에 갔는데 왜 남편이 없느냐고 묻더래요. 미혼모라는 이유로 쫓겨났답니다.”

 

  사회적인 편견은 미혼모가 아이를 낳고 키울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아이 양육에 필요한 사회 지원도 없었다. 미혼모 아이는 입양 보내는 걸 당연시했다. 우리 사회는 미혼부는 언급하지 않고 미혼모를 비난하고 양육 능력마저 격하해 입양을 당연시했다. 아이를 낳아 기를 권리가 없었다. 한 원장은 어쩔 수 없이 입양을 택한 엄마들이 겪는 고통을 곁에서 보았다.

 

  “엄마들은 아이를 보내고 평생 아파합니다. 그 어려울 때 아이와 함께 살게 조금만 도와주면 되는 걸 하지 못했죠, 우리 사회가.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는 에너지를 애를 키우는 데 쓸 수는 없을까, 그래서 원하는 엄마에게 양육하게끔 도와주자고 마음먹었죠.”

 

  해외 미혼모들은 대부분 양육을 선택한다고 한다. 사회가 뒷받침해주기 때문이다. 입양도 엄마가 주체가 되어 진행하고 입양 이후에도 아이와 관계를 잇는다.

 

  “1994년에 미국 입양기관과 미혼모보호시설을 방문했는데 많은 미혼엄마가 아이를 키웠어요. 공개입양을 하고 양부모 가정도 엄마가 선택해요. 제가 충격을 받았어요. 문화가 다르다지만 한국 사회가 미혼모 인권에 대해 관심도 없고 생각조차 할 수 없던 때였죠. 선택하고 요구할 권리, 나는 양육을 원한다는 말조차 할 권리가 없었어요. 미혼모는 입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저는 이제 엄마잖아요

 

  한 원장은 애란원에서 국내외 공개입양을 추진하고, 양육을 원하는 엄마들을 지원했다. 물론 선택은 당사자가 한다. 그 여성이 놓인 현실은 어떤지, 정부와 애란원, 주변 사람들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안내하고, 권리를 알려준다. 이들의 권리와 존엄, 안전을 지키는 것. 한 원장과 애란원의 중요한 임무다. 또한 미혼모와 아기들, 특히 청소년 미혼모들이 겪는 어려움에 귀 기울이고, 지원 방법을 고민하고, 후원자를 모으고 정부에 제도마련과 개선을 요구했다.

 

  해마다 양육하는 미혼모가 늘고 있다. 지난해 애란원에서는 85명 중 67명이 양육을 선택했다. 10년 새 62%나 증가했다. 그만큼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여전히 미혼모 문제를 성 문제, 개인의 일탈로 여겨 ‘그까짓 것들 왜 돕느냐’는 편견이 있다. 기업도 후원을 꺼린다. 미혼모 뒤에는 사회 문제가 있다.

 

  “IMF 외환위기 때 애란원에 들어온 여성 중 75%가 10대였습니다. 15~17세였죠. 전수조사를 해보니 가정이 이미 깨졌어요. 방임과 가정폭력으로 더는 가정이 안전하지 않았죠. 오히려 위험을 느껴 가출해요. 그런 상황에서 공부할 수도 없고, 결석해도 학교가 개입하지 않아요. 그러다보니 삶의 의미를 못 느낍니다. ‘내가 안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하며 스스로 희망을 접어버리죠.”

 

  술 없이는 잠들지 못할 정도로 고된 일을 하는 부모, 가난, 폭력, 다툼이 일상이 된 현실에서 도망 나오듯, 쫓겨나오듯 집을 나온 딸들이다. “이 친구들이 두 발로 서는 게 중요합니다. 이들이 제대로 서면 가족이 사는 거죠.”

 

  “저는 이제 엄마잖아요. 엄마가 예전처럼 살면 안 되잖아요.”라며 간호조무사가 된 스무 살 엄마, 취업해 경제 문제를 해결하고 꿈을 위해 미술공부를 하는 학생 엄마, 가난한 고향 집 동생을 공부시키고 어머니를 모시는 어린 엄마…. 예기치 않은 임신은 위기였지만 애란원에서 위기는 새 삶을 찾는 계기가 된다.

 

  “작은 성공의 기회를 마련해주어 ‘내 인생에도 희망이 있다, 삶이 의미가 있다’는 걸 깨닫게 해요. 책임감을 찾게 하죠. 자기가 뭘 원하는지 찾는 데 처음에는 어려워해요. 어려서부터 아무도 그들에게 뭘 원하는지 묻지 않았거든요. 그 과정을 지나면 자기와 남을 보는 눈이 달라져요.”

 

  막힌 곳을 뚫어주는 사람

 

  미혼모가 경제・사회・정서적으로 자립하려면 출산을 넘어 양육・거주・직업・교육지원이 필요하다. 이에 애란원은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애란원(임신・산후조리 중인 미혼모자 생활시설), 애란 모자의 집(양육미혼모자 공동생활가정), 애란 세움터(입양모 공동생활가정), 나・너・우리 한가족센터(지역사회 거주 미혼모부자 위기・양육・자립지원센터), 대안교육위탁기관(미혼모 특화학교 교육), 양육모자립홈(취업한 양육미혼모자 공동생활기관), 입양모자립홈(취업한 입양모 공동생활기관)으로 전국에서 유일하다.

 

  “엄마들이 자립하기가 쉽지 않아요. 집으로 돌아간 뒤 재가출・재임신율이 65%까지 됐어요. 가정에서 지낼 수가 없는 거죠. 한 사람을 사회에 세우는 데 주거가 필요해요. 엄마들이 사회에서 어려움을 겪는 게, 좋은 일자리가 있어도 아이를 충분히 돌봐줄 어린이집을 찾지 못해 포기하고 열악한 파트타임 일자리를 얻어요. 그런 걸 보면 속상하죠. 거기서 우린 다시 생각하죠. 자기 욕구를 인식하고 해결하면 사람이 한 단계 성장합니다.”

 

 

 

  한 원장은 자립 방향을 함께 고민하고 ‘막힌 곳을 뚫어주는 사람’이다. 필요와 욕구를 이야기하게 하고, 귀 기울인다. 미혼모와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기에 가능하다.

 

  “작은 가지에 새가 앉았다 일어나면 나뭇가지가 흔들리잖아요. 작은 돌 하나를 물에 던져도 파장이 일어요. 한 사람이 자기 두 발로 우뚝 서면 주변 사람들까지 변해요. 이런 네트워크를 통해 한 사람을 철저히 자립하게 해야 합니다.” 한 원장은 이를 위해 정부와 기업, 우리 사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엄마와 아이들은 미래의 인적자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왜 투자를 안 할까요? 낙태 얘기를 하고 출산정책을 말하는데 아이들을 낳으라고 말하기 이전에 이미 낳은 아이들을 잘 키울 생각을 해야죠. 이런 네트워크를 광역마다 하나씩 둬 의미 있는 일을 하면 좋은데 정부는 예산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더 끌고 나가야지요.”

 

  한 원장은 네트워크 기관을 수시로 다니면서 엄마들을 만난다. 진로계획 진척을 점검하고, 어려움이 있다면 원인과 해결방법을 함께 찾는다. 엄마들은 그가 오는 걸 좋아한다.

 

 

 

  청소년 미혼모도 공부해야

 

  지난 8월 30일 국가인권위원회는 교육과학기술부를 비롯해 각 시도교육청에 ‘청소년 미혼모 학습권 보장 방안 정책’을 권고했다. 서울시교육청은 애란원에 ‘나래대안학교’를 위탁해 현재 청소년 미혼모 2명이 공부한다. 그간 청소년 미혼모는 낙태나 입양을 조건으로 학교에 다니거나 아니면 자퇴를 강요당해 배울 권리를 빼앗겼다. 저임금노동・실업・빈곤의 악순환 구조를 만들었다.

 

  “시설 거주 기간이 6개월일 땐 학력교육을 않고 직업교육을 했어요. 그런데 취업하면 두세 달 만에 관둬요. 노동집약적 일이 너무 힘든 거죠. 고등학교는 졸업해야 직업 선택 범위가 넓어지고 원하는 걸 하겠다싶어 공부를 시켰어요. 학교에서는 쫓아내고 우리는 어떻게든 해보려고 검정고시 보고 자격증 따고 그러는 게 어떨 때는 슬펐죠. 이번 국가인권위원회 권고는 아주 중요합니다. 국가기관에서 처음으로 미혼모 인권을 말한 겁니다. 의미가 있죠. 파장이 클 거예요. 실행 기관들이 내실을 기해 준비를 잘 해야겠지요.”

 

  한국 사회에서 미혼모는 극소외층이라고 한 원장은 말한다. 20년간 미혼 엄마들의 아픔이 생생하게 자기 아픔이 되어버린 사람, 그 세월만큼 울었어도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글 박수정 사진 한금선

국가인권위원회 『인권』9·10월호 <인권이 만난 사람>

 

 

 

* 2010년 10월 23일(토) 아침 11시부터 낮 4시까지 애란원에서 '제 7회 자립 양육모자를 돕기 위한 바자회'가 열린다고 합니다. 두 해 전, 애란원 바자회에서 사온 옷들을 아이와 제가 아직까지 잘 입고 있습니다. 그때 샀던 차, 티백에 쓰여진 글귀들이 얼마나 제게 위안과 힘을 주었던지요. 물건을 고르고 낸 돈은 정말 얼마 안 되는데 그보다 몇 배는 더 큰 것들을 얻어왔지요. 자세한 사항은 애란원 누리집(www.aeranwon.org)에 가면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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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쓰기/기고

박수정 Soojung 2010. 9. 2. 12:23

 

 

2010 월화수목금금금

 

 

  김준희(가명, 52세) 씨는 1994년부터 공장에서 일했다. 폐업할 때까지 9년 일한 첫 직장은 문구 공장으로 정규직이었다. 그 뒤로 계속 파견직이다. 그는 ‘정년퇴직’을 꿈꿨지만 파견노동자에게는 당찮다. 지금은 네 번째 공장, 4개월째 일한다. 다른 데선 1년 계약이었는데 여긴 3개월이다.

 

  일하는 곳은 서울 영등포구, 휴대전화 배터리 조립 공장이다. 150여 명 대부분이 40~50대 여성으로 정규직이 30여 명, 나머지는 파견직이다. 일이 힘들어 그만두는 사람들이 많은데 빈자리는 인력회사가 바로 채운다. 회사는 노동자가 자주 바뀌는 일에 신경 쓰지 않는다. 하루 최대 물량만 뽑으면 되니까.

 

  노동시간은 아침 8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다. 아침, 낮 한 번씩 10분 쉬고 점심시간은 50분이다. 화장실은 층마다 5칸, 쉬는 시간이면 사람들은 황급히 아래위층으로 달린다. 점심식사도 서둘러야 한다. 오후 작업 시작 10분 전에 자리에 앉아야 한다. 일감이 밀리면 화장실도 안 가고, 점심도 거른다. 컨베이어벨트는 노동자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공장에선 모든 걸 “빨리빨리” 해야 한다.

 

  “2시간 한 타임에 보통 1800~2100개를 생산하는데 2700개를 낼 때도 있어요. 5㎝도 안 되는 간격으로 물량이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오는데 마치 새까만 개미떼가 끊이지 않고 줄지어 오는 것 같아요.”

 

  두 명이 맡는 공정은 좀 나은데 혼자 하는 일은 정신없다. 지난 5월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조카들이 보낸 위독하시다는 문자도, 돌아가셨다는 문자도 때를 놓쳐서 보았다.

 

  종일 의자에 앉아 작은 배터리를 만들다보면 몸이 굳는다. 다들 목과 팔, 손목이 성치 않다. 김준희 씨도 왼팔이 안 올라가 침을 맞았다. 배터리 뚜껑을 씌우다 엄지손톱을 다친 날엔 아무 처치도 못하고 일했다. 피멍 들고 젖혀진 손톱을 감추려고 일부러 매니큐어를 발랐다. 일주일 뒤 손톱이 빠졌다. 새 손톱이 이제 반쯤 올라왔다. 그 사이, 뚜껑을 계속 씌웠다.

 

  8시간 노동이 끝나면 다시 노동이 시작된다. 김밥 한 줄과 우유 한 팩을 10분 안에 먹고 잔업을 한다. 날마다 김밥이다. 맛도 정성도 없는 저녁에 질려 사람들은 몇 개 집어먹다 만다. 우유만 마시거나, 굶은 채 5시 40분부터 밤 9시 30분까지 일한다. 김준희 씨는 일한 지 한 달 만에 몸무게가 6㎏ 줄었다.

 

  노동은 주말・공휴일 특근으로 이어진다. 특근수당은 잔업수당과 같다. 토요일에는 점심시간을 줄여 5시까지 일한다. 사람들은 주중 잔업을 하루 빼고 별일 없으면 토요일 특근에 다 나온다. 일요일에는 30여 명이 나와 한 라인을 돌린다.

 

  50대 여성이 일할 자리가 이 사회에는 별로 없다. 힘들어도 계속 일하고 싶은 그는 “저녁을 제대로 먹고, 일주일에 두세 번 고정해놓고 2시간만 잔업하면 좋겠다”고 바란다.

 

  노동자 0.75명?

 

  경기도 군포시 한국복합물류단지 안 물류회사에서 수입레저용품을 다루는 홍종혁(가명, 35세) 씨는 토요일도 5시까지 일하는 주6일제 근무에 연월차휴가가 없는 정규직 노동자다. 요즘은 8시에 퇴근하나 6월까지는 9시에 퇴근했다. 지난해 11월부터 올 1월까지 석 달은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했다. 그와 동료 5명 모두 잔업수당을 받지 못했다. 애당초 없었다. 사람들은 밥을 대 먹는 식당에서 날마다 삼겹살을 시켜 팀장에게 ‘소극적 저항’을 했다. 근속자들이 문제를 제기하자 7시 이후 근무에 잔업수당을 준다고 했다.

 

  “잔업을 돈으로 계산하니까 일하는 시간이 줄더군요. 결국 회사는 비용이 들어가야 근무시간을 줄여요. 그런데 노동시간이 주니까 노동 강도가 세졌죠. 회사는 선량함이 없어요. 그럴 수 없는 조직이니까요.”

 

  적정 시간을 일하자면 최소 서너 명이 더 필요하다. 하지만 회사는 “외주로 일감을 따오기 때문에 계약할 때 인건비를 최대한 낮게” 잡는다. 이른바 ‘인건비 따먹기’다. 계약서에 적힌 ‘0.75명’. 저 노동자는 대체 누굴까. 홍종혁 씨 일도 두 사람이 필요한데 ‘1.5명’이라고 적혔다고 한다. 정작 일은 혼자 해야 하고.

 

  “불법인데도 인력회사를 통해 용역・도급・파견 형태로 언제든 사람을 쓰니까 회사는 사람을 존중할 줄 몰라요. 이쪽 일엔 20대가 많은데 이직률이 높죠. 업체나 고객사를 생각하면 숙련된 사람이 필요한데 정규직으로 쓰지 않고 일당제로 사람을 쓰기도 해요.”

 

  발바닥이 화끈화끈

 

  7월 8일 목요일 낮 12시, 서울 모 대학병원 정문에서 ‘청소노동자에게 따뜻한 밥 한끼의 권리를’ 캠페인이 열렸다. 병원 청소노동자들과 노조・사회단체 활동가들이 함께했다. 50~60대 노동자들은 용역회사 소속이다. 병원은 용역회사와 1년 단위로 계약하는데 노동자들은 고용승계된다. 근무시간은 새벽 6시부터 낮 4시까지다. 아침 8시와 정오에 1시간씩 밥 먹는 시간이 있다. 사실 일은 6시 전에 시작된다. 한 여성 노동자가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새벽 4시 30분에 나오는 사람도 있어요. 6시에 나오면 일을 못 추스르니까요. 90명이 일할 자리에 72명이 일하니 한 사람당 일이 많아요. 힘들고 일할 양도 많아 젊은 사람들은 하루 일해보고 호랑이 만난 것처럼 도망가요.”

 

  캠페인단이 전날 노동자 50명에게 노동환경 설문조사를 했다. ‘출근시간’을 보면, 49명이 6시보다 일찍 출근한다고 답했다. 60~90분 앞서 출근하는 사람이 31명으로 가장 많았고, 90~120분 먼저 나오는 이도 7명이나 되었다. 물론 무임금이다. 인력을 확충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 용역회사는 6시부터 일하라 한다. 노동자들이 쉴 공간도 문제다.

 

  “휴게실이 좁아 조회 때면 네 무릎 내 무릎 얹어 포개 앉아요. 1시간 일하면 10분 쉬게 돼 있는 노동법이 있어도 쉬지 못하죠. 쉴 장소도 없어요. 일하는 곳에서 휴게실까지 머니까 건물의 배관이나 전선이 내려가는 PS실에서 쭈그려 앉아 쉬거나 밥을 먹어요. 얼마 전 휴게실을 2평 늘려줬는데 늘리나 마나예요. 좁아서 거기 다 못 와요.”

 

  집에 가면 다들 몸이 처져 저녁 해 먹고 그냥 쓰러져 잔다고 한다. 그리고 새벽 2시 30분이나 3시에 일어나 새벽 4시에 맞춰 집을 나선다. “집에 가면 발바닥이 화끈화끈해요. 구공탄 하나 얹은 것 같아요.”라는 말을 들으니 1970년대 청계피복노조 여성노동자가 쓴 글, 한 구절이 떠오른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뼈에서 오도독 소리가” 난다던.

 

  이게 사회생활인가요?

 

  3년차 정보통신(IT)산업노동자 김윤아(가명, 24세) 씨는 2년간 날마다 아침 9시부터 밤 12시까지 일했다. 막차를 타고 집에 가면 2시, 씻고 누우면 3시, 6시에 다시 출근했다. 밤샘도 잦았다.

 

  “그렇게 일하다 어느 시간이 지나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아요. 숨이 턱턱 막히죠. 한번은 책상에 엎드려 자는 게 눈치 보여 화장실에 가서 변기 뚜껑 덮고 앉아 그대로 2시간을 잤어요.”

 

  김윤아 씨는 지금 다른 기업에 파견 나가 일한다. 일이 늘어 여름휴가는 포기해야 하나 야근이나 밤샘이 본사만큼은 아니다.

 

  “관리자가 팀을 비교해요. 어느 팀은 야근한다, 주말에도 나온다 하면 눈치가 보여 알아서 늦게까지 일하고 주말에도 나왔죠.”

 

  강제 야근에 사람들은 불만이 컸다. 정규 시간에 집중해서 일하고 잘 쉬어야 좋은 프로그램을 개발할 텐데, 문제를 말해도 바뀌지 않았다.

 

  “어느새 사람들이 그렇게 일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해요. 불만을 말해도 안 들어주니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거죠. 이틀 밤새워 일했는데 새벽 첫차 타고 잠시 집에 갔다가 아침에 나오라고 해도 당연한 요구라고 받아들여요. 왜냐면 사회생활이니까요.”

 

  연월차휴가도, 휴가비도, 상여금도 없는 정규직. 야근수당 산정 방식도 좀 이상하다.

 

  “평일 야근수당이 5000원이에요. 3시간 넘게 해야지 3시간 아래는 안 줘요. 밤 12시 넘어 일하면 야식비 5000원 줘요. 주말은 4시간에 점심값 5000원 포함 2만5000원, 8시간에 3만원 줘요.”

 

  충분히 쉬지 못하고 무리하자, 오른쪽 귀가 잘 안 들렸다. 의사가 청력이 안 좋아졌다며 “당신 몸이 중요하지 일이 중요하냐”고 다음날 오라 했는데 결국 못 갔다. 일이 많아 친구 만나기도 어렵다. 친구들도 야근수당 없이 일하고, 집에까지 일감을 싸가는 힘든 시간을 겪는다. 학생 때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노동자’가 된 스물넷 그와 친구들이 너무 일찍 비정한 세상을 만났을까.

 

 

글 박수정

국가인권위원회 『인권』7·8월호 <특집> 쉼

 

 

'모든 인간은 합리적인 노동시간의 제한과 정기적인 유급휴가를 포함한 휴식과 여가의 권리를 갖는다.' - 세계인권선언문 제24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