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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구암공원 & 허가바위 & 광주바위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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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답사

2010. 3. 31.









[답사]구암공원 & 허가바위 & 광주바위 에서

(2010/03/27 현재)


(사)서울문화사학회의 제233회 답사지로 강서구
가양동 허준(許浚)박물관 인근 탑산 일대에 이 지방(공암)에서 출생하여
생을 마친 동의보감(25권, 3106쪽)의 저자 허 준(AD1539~1615)을 기려 그의 호를 따서 이름을 지은
구암(龜巖)공원 과 양화대교가 놓여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강하류를 건너는 공암(孔巖)나루터 였으며
탑산 아래의 양천 허씨(陽川許氏)의 시조인 허선문(許宣文)이 태어났다고 하는천연적인 바위동굴인
허가(許家)바위 그리고 한성백제 때 토지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드리던 바위라는 뜻의 광주바위 전경 입니다 


 

 

 

 

 

공암나루터 이었으며 양천허씨의 발상지라는 허가바위 입니다 

 

 

 

 

 

 

 

 

 

 

 

 

 

 

 

 

 

 

 

 

 

 

 

 

 

 

 

 

 

 

 

 

옛날 큰홍수가 나서 경기도 광주에서
떠내려온 바위라는 전설이 있는 광주바위 입니다


 

 

 

 

 

 

 

 

 



◈구암공원(龜巖公園)

 

-소재지 :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 1471


공원주위에는 서울 기념물 제11호인 허가바위가 있고 공원내에는 전설이 깃든 광주바위와 허준 선생이 앉아서 병자를 진료하는 인자한 모습의 동상 그리고 호수, 정자, 어린이 놀이시설이 있으며 인근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또한 주변에 허준박물관과 한강시민공원이 있어 인근주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그리고, 7월부터 10월까지 건강 약초교실이 매주 일요일 2시부터 5시까지 운영되어 한방비누 만들기 등 다양한 한방체험을 할 수 있다.

 

-개  원 : 1993. 10. 31
-공원면적: 28,943.8㎡
-주요식물: 스트로브잣나무, 소나무, 은행나무, 느티나무 등
-주요시설: 연못(5,100㎡), 음악분수, 허준 동상, 정자,어린이놀이시설,

                           관리 사무실


허준동상 : 허준의 본관은 양천으로 자는 청원, 호 구암으로 선조때 내의가 되어 왕실의 진료에 공을 세웠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때 어의로 왕을 끝까지 호종하고 돌아와 1604년 호성공신 3등에 책록되고, 1606년 양평군에 봉해졌다. 후에 대간의 반대로 직위가 취소되고, 1608년 선조가 죽자 치료를 소홀이 했다는 죄로 파직 당했다. 1610년(광해군 2년) 16년의 연구 끝에 완성한 『동의보감』은 조선 한방의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18세기에는 일본과 청나라에서도 간행될 만큼 높이 평가되었으며 지금도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판되고 있다.

연못 : 면적은 5,100㎡이며 수심은 약2m이고 바닥은 자연암반으로 위치별로 수심의 차이가 크며, 호안은 부분적으로 자연석 호안이고 일부는 암반이다. 그리고 연못내에는 음악분수가 설치되어 2004년도부터 운영되고 있고, 슈베르트의 빌헬름텔을 비롯해 총 11곡의 음악에 따라 분수가 춤추고,
야간에는 282개의 조명이 조화를 이루며 환상적인 분수쇼를 연출하기 때문에 허준박물관과 함께 이 지역의 명물로 자리잡고 있다. 음악분수의 운영시간은 매년 4월부터 10월까지 주간 12시, 2시, 4시 및 야간 7시, 8시, 9시 총 6회 각 30분간씩 운영된다.

 

◈허가 바위

 

-지정번호 : 서울시기념물 제11호
-지정일자 : 1991. 12. 24
-소재지 : 강서구 가양동 산1-2호
-시대 : 삼국시대 이전
-양천허씨의 발상지

 

허가바위는 탑산아래 천연적인 바위동굴이다. 옛날 석기시대 사람들이 한강가에서 조개와 물고기를 잡으며 이곳에서 살았으리라 짐작되는 혈거동굴로서 연구가치가 매우 높은 이 굴은 올림픽대로가 건설되면서 육지로 변하였으며 현재는 영등포공고 정문앞에 위치한다. 이 굴에서 양천허씨(陽川許氏)의 시조 “허선문(許宣文)”이 태어났다는 설화가 있기 때문에 이 굴을 양천허씨의 발상지라고 부른다.

또한 강서구의 최초 지명은 제차파의현(劑次巴衣縣)으로 “제사드리는 바위”라는 의미를 지님으로서 강서구 최초의 지명이 이곳 허가바위로부터 나왔음을 알 수 있다. 굴의 크기는 가로 약 6m, 세로 약 2m, 길이 약 5m이며 사람들 10명이상이 들어갈 수 있는 동굴이다.
 양천허씨의 시조인 허선문은 고려 태조가 견훤을 정벌하러 가면서 이곳을 통과할 때 도강(渡江)의 편의와 군량미 제공 등으로 공을 세워 공암촌주(孔巖村主)의 벼슬을 받았다고 한다. 경기읍지에 보면 다음과 같은 양천허씨의 기록을 찾을 수 있다. “허선문은 나이가 90이 지났는데도 고려 태조를 섬겨서 견훤을 정벌하러 갈 때 군사들을 격려한 공이 크므로 공암촌주로 삼았다. 그리하여 그 자손이 공암허씨가 되었으며 공암은 양천이므로 공암허씨는 양천허씨를 말한다.” 그 후 양천허씨의 자손은 번창하였으며 조선조 세조때 북병사로 이시애난을 평정한 허종, 동의보감을 저술하신 의성 허준, 허침, 허엽, 허목, 허련, 허난설헌 등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고, 특히 허가바위는 구암(허준)선생이 동의보감을 집필하였고 또한 생을 마치신 곳이기도 하다

 

 ▶양천허씨(陽川許氏) 성(姓)의 연원

 

허씨(許氏) 성(姓)의 연원은 멀리 가락국(駕洛國)의 시조인 김수로왕(金首露王)의 왕비(王妃)인 보주태후(普州太后) 허황옥(許黃玉)에 두고 있다.
허황옥은 원래 인도(印度)의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로서 16세에 배를 타고 지금의 경남 창원시 웅동면 앞바다에 이르러 김수로왕의 영접을 받고 왕후가 되었다.
 그 후 아들 10명을 두었는데, 허왕후가 자기 성이 이어지기를 간청하자 수로왕은 맏아들[태자(太子)] 거등(居登)은 김씨로 왕통을 잇게 하고, 두 왕자에게는 허씨(許氏)로 사성(賜姓)하니 허씨 성은 수로왕비 허황옥의 성을 따르게 한 데서 유래한다.
나머지 일곱 왕자는 불가에 귀의하여 하동칠불(河東七佛 : 경남 하동에 七佛寺가 있다)로 성불하였다고 전한다.
가락국 10대 구형왕[仇衡王 : 양왕(讓王)] 12년(서기 532년)에 신라에 합병되니 자손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그 후 고려초에 와서 거주지에 따라 공암(孔巖), 태인(泰仁), 하양(河陽), 김해(金海)로 분관되었으니 공암은 곧 양천(陽川)이다.


-공암(孔巖) 즉, 양천허씨(陽川許氏) : 시조는 수로왕의 30세손인
                                   허선문(許宣文)
-태인허씨(泰仁許氏) : 시조는 수로왕의 30세손인 허사문(許士文)
-하양허씨(河陽許氏) : 시조는 수로왕의 33세손인 허강안(許康安)
-김해허씨(金海許氏) : 시조는 수로왕의 35세손인 허염(許琰)


또 인천이씨(仁川李氏)도 허씨에서 갈려나온 성씨이다. 따라서 김해김씨, 허씨, 인천이씨는 이성동족(異姓同族)으로 한 핏줄이라 할 수 있다. 허씨의 본관은 [조선씨족통보]등의 문헌에 59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그것은 세거지(世居地)일 뿐이며 현존하는 본관은 양천(陽川)·태인(泰仁)·하양(河陽)·김해(金海) 4본이 관향으로 되어 있다.

양천허씨는 조선조에서 20대 명족(名族)으로 손꼽혔으며 비록 많지 않은 인구로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여 명문으로서의 지위를 굳혀왔다.
또 인천이씨(仁川李氏)도 허씨에서 갈려나온 성씨이다. 신라 경덕왕(756년)때 허기(許奇)가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을 때 마침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자 현종(玄宗)을 호종하여 그 공으로 당나라 황실의 성(姓)인〈李氏〉를 사성받고 소성백(邵城伯: 소성백은 지금의 仁川)에 봉해져 인천이씨의 연원을 이루게 되었다.

 

 광주바위

 

-소재지 :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 구암공원 인공호수내

 

가양2동 공암나루에 서 있는 바위가 광주바위이다. 높이 12m의 세 덩어리로 이루어진 이 바위는 광제(廣濟) 바위 또는 광주(廣州)바위라고 한다. 광제바위는 너른 나루에 있는 바위라는 뜻으로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한강의 물길을 장악하고 있을 때 이곳을 공암나루라 한 것으로 광주바위라 하는 것은 광제바위가 잘못 전해져서 얻은 이름이라 추측된다.
이 광주바위 즉 공암은 70년대까지 한강 물 속에 그대로 잠겨 있었고 허가바위 굴 밑으로 강물이 넘실대며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80년대 올림픽대로를 건설하면서 둑을 쌓자 이 두 바위는 육지 위로 모습을 드러나게 되었다.

 

▶구암공원과 광주바위 이야기

 

동의보감의 저자인 구암 허준선생의 출생지이자 생을 마치신 이곳 가양동에 공원을 조성하고 허준의 아호를 따서 "구암공원"이라 하였다.
구암공원 내에는 허준선생이 앉아서 어린 환자를 진료하는 인자한 모습의 동상이 있으며, 구암공원 내 호수안에는 고색이 창연한 도담삼봉 같은 바위 3개가 있어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어 내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먼 옛날경기도 광주에서 큰 홍수가 났을 때 이 바위가 물에 떠내려 왔다고 하여 광주현감이 양천현감에게 1년에 빗자루 3자루씩 세금을 받아갔다는 재미있는 전설이 서려있다.
조선이 한양에 도읍을 정하기 이전에 김포, 부평, 인천, 수원 등지에서 개성이나 평양으로 가려면 이 공암나루를 건너는 것이 가장 지름길이었으므로 이 시절 한강나루 중에서는 이 공암나루가 가장 번성했다.
그래서 고려 태조도 이 나루를 건너 천안으로 향했던 것이다. 이에 현의 이름도 공암이라 하고 나루 이름도 공암진이라 했던 것인데 고려 충선왕 2년(1310)에는 고을 이름을 양천으로 바꾸면서 읍치(읍소재지)를 현재 양천향교가 있는 가양동 231 일대의 궁산 아래로 옮긴다. 그러자 공암에는 나루만 남는다.

공암이나 허가바위는 모두 자줏빛을 띤 바위다. 세 덩어리로 이루어진 공암은 광제(廣濟)바위 혹은 광주(廣州)바위라고도 부른다. 이것이 백제 때부터 부르던 이름이 아니었나한다. 광제바위는 너른 나루에 있는 바위라는 뜻일 터이니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두고 한강의 물길을 장악하고 있을 때 이 공암나루는 너른 나루 중 하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광주바위라 하는 것은 광제바위가 잘못 전해져서 얻은 이름이리라. 그런데 광주에서 떠내려와서 광주바위라 한다는 전설을 붙이고 광주관아에서는 매해 양천현령에게 싸리비 두 자루를 세금으로 받아 갔다고 한다. 어느 때 이를 귀찮게 여긴 양천현령이 이 바위들이 배가 드나드는 데 거치적대니 광주로 다시 옮겨가라고 하자 광주 아전들은 다시는 이 바위를 광주바위라고 주장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광주바위 즉 공암은 70년대까지 한강 물 속에 그대로 잠겨 있었고 허가바위 굴 밑으로는 강물이 넘실대며 스쳐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80년대 올림픽대로를 건설하면서 뚝 길이 강 속을 일직선으로 긋고 지나자 이 두 바위는 육지 위로 깊숙이 올라서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은 구암 허준((龜岩 許浚·1546∼1615)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는 구암공원 한 귀퉁이에 볼품없이 처박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