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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재(源仁齋) - 인천이씨 중시조 이허겸의 묘 앞에 세운 재실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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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답사

2013. 7. 4.









 

원인재(源仁齋) - 인천이씨 중시조 이허겸의 묘 앞에 세운 재실 탐방

(2013/06/27 현재)


인천 이씨 중시조인 이허겸의 묘 앞에 세운 건물이다. 건물의 명칭을 원인재라고
한 것은 인천이 인천(인주)이씨 각 파의 근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천이씨는
김해허씨에서 갈라져 나간 성씨로 알려져 있으며『고려사』에 보면 그의 선조는 신라
때 부터 지금의 인천인 소성현에 살았는데, 신라 사신으로 중국 당나라에 갔다가
천자로 부터 성(姓)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인천 이씨가 고려시대 귀족 대열에 낄 수
있게 된 것은 이허겸 때 부터로, 그의 외손녀(사위 김은부의 딸) 3명이 모두 현종의
비(妃)가 되었다. 첫째 외손녀는 원성황후로 덕종과 정종 두 왕을, 둘째 외손녀는
문종을 낳았다. 그 뒤 그의 증손녀(손자 이자연의 딸) 세명 역시 문종의 비로 입궐
하는 등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기 까지 7대에 걸쳐 귀족정치의 막강한 파벌을 이루었다.
이는 이허겸의 묘가 연화부수지의 명당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이 건물을 언제 세웠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32대 손과 33대 손의 글을 통해,
조선 순조 7년(1807) 혹은 고종 4년(1835)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건물의 본래 위치는
연수구 연수동 적십자 요양원 으로 들어가는 좌측의 신지마을에 있었으나 택지개발사업으로
인해 해체되어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그의 묘역으로 옮겨져 복원하였다.


 

 

 

 

 

 

 

 

 

 

 

쌍명재(雙明齋) 이인로(李仁老)선생 문학비 입니다. 

 

 

 

 

 

 

 

 

후문 첨소문(瞻掃門) 입니다. 

 

 

 

 

 

 

동재 승휴당(承休堂) 입니다. 

 

 

 

강당 돈인재(敦仁齋)- 현판 : 1999년 당시 김종필(金鍾泌) 국무총리가 편액하였다 

 

 

 

서재 율수실(聿脩室) 입니다. 

 

 

 

정문 경선문(景先門) 

 

 

 

 

이허겸(李許謙) 재실 : 원인재(源仁齋) 입니다. 

 

 

 

 

 

 

옛 간치도(看雉島)의 이허겸(李許謙) 묘역 입니다.

 

 

 

 

 

 

 

 

 

 

 

 

 

 

 

 

 

 

 

 

 


■원인재 (源仁齋) 


-종 목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5호 
-지정(등록)일 1990.11.09
-소 재 지 인천 연수구  연수동 584 
-소유자(소유단체) 인천이씨종중


인천 이씨 중시조인 이허겸의 묘 앞에 세운 건물이다. 중시조란 이름이 별로 없던 성(姓)씨를 가진 집안을 일으켜 세운 선조를 말한다.

 

『고려사』에 보면 그의 선조는 신라 때부터 지금의 인천인 소성현에 살았는데, 신라 사신으로 중국 당나라에 갔다가 천자로부터 성(姓)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인천 이씨가 고려시대 귀족대열에 낄 수 있게 된 것은 이허겸 때 부터로, 그의 외손녀(사위 김은부의 딸) 3명이 모두 현종의 비(妃)가 되었다. 첫째 외손녀는 원성황후로 덕종과 정종 두 왕을, 둘째 외손녀는 문종을 낳았다. 그 뒤 그의 증손녀(손자 이자연의 딸) 세명 역시 문종의 비로 입궐하는 등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기까지 7대에 걸쳐 귀족정치의 막강한 파벌을 이루었다. 이는 이허겸의 묘가 연화부수지의 명당에 자리잡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팔작(八作)지붕 형식인 이 건물의 건립 연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32세손이 쓴 《원인재기(源仁齋記)》와 33세손이 쓴 원인재상량문(源仁齋上樑文)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순조 7년(1807) 또는 고종(高宗) 4년(1835)인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건물의 명칭을 원인재라고 한 것은 인천이 인천(인주)이씨 각 파의 근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원래 연수구 연수동 적십자 요양원으로 들어가는 왼쪽의 신지마을에 있었으나, 택지개발사업으로 해체되어 주변에 위치하고 있는 그의 묘역으로 옮겨져 복원하였다. 팔작지붕 형식을 하고 있다. 언제 지어졌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32세손이 쓴 《원인재기(源仁齋記)》와 33세손이 쓴 원인재상량문(源仁齋上樑文)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1807년(순조 7)이나 1835년(헌종 1)인 것으로 보인다.


 

●이허겸(李許謙)묘·신도비·원인재-인천이씨-

-인천광역시 문화재 제5호

-인천광역시 연수구 연수2동 584

 

  이허겸[李許謙, 생몰년 미상], 고려 초기의 문신, 본관은 소성(邵城)·경원(慶源)·인주(仁州)·인천(仁川), 아들은 좌복야 이한(李翰), 손자는 문하시중 이자연(李子淵), 사위는 문하시중 김은부(金殷傅) 이다 .

 

  김은부는 고려 8대 현종 비 원성왕후(고려 9대 덕종, 10대 정종의 모후), 원혜왕후(고려 11대 문종의 모후), 원평왕후의 아버지이다.

 

  현종 15년(1024) 상서우복야 상주국 소성현개국후 식읍일천구백오십호(尙書右僕射上柱國邵城縣開國侯食邑一千九百五十戶)에 증직되었다.

 

 

- 김해김씨·김해허씨·인천이씨 유래 -

 

  가락김씨(김해김씨) 시조인 가야국 김수로왕(金首露王, 서기 42년~199년)은 배를 타고 들어온 아유타국(지금의 인도) 공주와 혼인을 하였는데 이름이 허황옥(許黃玉)이었다. 김수로왕과 허왕후 사이에는 장자 거등(居登)을 비롯하여 10여 명의 왕자들을 낳았다는데 왕자들은 처음엔 왕의 성을 따라 김씨로 하였다. 그러나 왕비인 허씨가 자기의 성인 허씨의 성도 보전해 달라고 왕에게 간곡하게 부탁하여 장자 거등은 왕의 대를 잇기 위해 김씨 성을 그대로 따르게 하고, 아래로 두 아들은 어머니의 성을 따라 허씨로 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일곱 형제들은 불문에 귀의하였다.

 

  가락국이 신라에 병합되었을 때 허씨의 후손 중에 허기(許奇)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아찬(阿粲 : 6두품)이란 벼슬을 지내고 있었다. 허기는 경덕왕 15년 왕명을 받고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당나라에 도착을 하고 보니, 마침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 당(塘) 현종(玄宗)은 촉(蜀)으로 피신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에 허기는 현종을 도와 무사히 촉까지 호종하는 공을 세웠다. 안록산이 죽고 나라가 안정되자 현종은 허기의 공을 높이 치하하여 황실의 성인 이씨의 성을 하사하였다. 따라서 ‘허’라는 성 앞에 ‘이’라는 성을 붙여 ‘이허’(李許)로 부르게 되어 허기가 이허기(李許奇)로 바뀐 것이다.

 

이허기가 사신의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자 신라 임금도 이허기의 벼슬을 높이고 소성백(邵城伯)에 봉하였다. 소성이란 지금의 인천 지역을 가리킨다.  세월이 흘러, 그의 10세손인 이허겸(李許謙)이란 인물이 고려 왕실에서 다시 내린 소성백이란 봉작을 받고 그 지역을 관향삼아 소성이씨로 살아가니 지금의 인천이씨 시조가 된 것이다.

 

 

▣ 인천이씨 주요 세계도 ▣

 

 

(시조)이허겸(李許謙) : 소성현개국후

( 2세-①)이 한(李 翰) : 상서좌복야, 문경공

 

 

■( 3세-①)이자연(李子淵) : 문하시중, 장화공, 경원군개국공, 고려 11대 문종의 국구<장녀 인예왕후(연덕궁주), 차녀 인경현비(수령궁주), 3녀 인절현비(숭경궁주)>, 고려 12대 순종, 13대 선종, 15대 숙종,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외조부,

 

 

▣( 4세-①)이 정(李 ?) : 지합문사, 정헌공, 경원백, 고려 13대 선종의 국구<원신궁주>

( 5세-③)이자효(李資孝) :

( 6세)이 식(李 軾) : 정정공

( 7세-①)이응구(李應球) : 판합문사

( 8세)이 경(李 儆) : 추밀원사

( 9세)이장용(李藏用) : 문하시중, 문진공

 

 

▣( 4세-③)이 석(李 碩) : 병부시랑, 고려 13대 선종의 국구<사숙왕후>, 고려 제14대 헌종의 외조부

 

 

▣( 4세-④)이 의(李 ?) : 문하시중

( 5세-②)이자덕(李資德) : 태자태보, 장의공

( 6세-②)이지화(李之和) : 상의봉어

( 7세)이유실(李惟實) : 중서사인

( 8세-①)이작신(李作臣) : 문하시중, 공민왕의 국구

 

 

▣( 4세-④)이 호(李 顥) 호부낭중, 고려 12대 순종의 국구<장경궁주, 폐출>

( 5세-①)이자겸(李資謙) : 중서령, 조선국개국공, 고려 16대 예종의 국구<차녀 순덕왕후>, 고려 17대 인종의 국구<3녀 폐비, 4녀 폐비>, 인종의 외조부이며 인종의 국구

 

 

■( 3세-②)이지상(李子祥) : 상서우복야

 

 

▣( 4세-①)이 예(李 預) : 중서시랑평장사, 문현공, 고려 13대 선종의 국구<정신현비>, 고려 16대 예종비<경화왕후>의 외조부

( 5세)이공수(李公壽) : 문하시중, 문충공

( 6세-①)이지저(李之?) : 참지정사, 문정공

( 7세)이세흥(李世興) : 한림원대제학

( 8세)이문연(李文淵) :

( 9세)이핵보(李核保) :

(10세)이유원(李油元) :

(11세-①)이 필(李 泌) :

(12세)이익세(李益歲) :

(13세-①)이 심(李 深) : 전공판서

(14세-①)이문화(李文和) : 참찬의정부사, 공도공

 

 

▣( 4세-②)이 오(李 ?) : 중서문하시랑평장사, 문간공

( 5세)이언림(李彦林) : 상서도성우복야, 흥양이씨 시조

( 6세-③)이백선(李伯仙) :

( 7세-①)이인로(李仁老) : 호-쌍명재, 좌간의대부, 시화집 <파한집>의 저자.

 

▶원인재(源仁齋)  상세설명

 

원인재는 고려 현종 15년(1024)에 소성현개국후로 추봉된 인천이씨의 시조 이허겸의 묘를 수호하고 제사를 받들기 위해 19세기 초[원인재기나 상량문을 보면 순조 7년(1807)이나 헌종 1년(1835)]에 건립되었다. 원래는 연수동 신지마을에 소재하였으나 1994년 택지개발로 해체되어 현재의 장소인 묘역 옆으로 옮겨져 복원 및 증축되었다.

 

원인재의 의미는 인천이씨의 근원지라는 뜻이며, 복원 및 증축은 인천이씨 일족의 헌신적인 성금과 인천시의 보조금에 의해 이루어졌다.

 

  원인재는 후문인 첨소문(瞻掃門)으로 들어가면 좌측에 연못이 있고, 우측에 강당인 돈인재(敦仁齋)가 있는데, 돈인재 현판은 1999년 당시 김종필(金鍾泌) 국무총리가 편액하였다. 그리고 동재인 승휴당(承休堂)과 서재인 율수실(聿脩室)이 있고 돈인재 맞은편에 정문인 경선문(景先門)이 있다. 그리고 승휴당 옆에는 재실인 원인재(源仁齋)가 있는데, 원인재는 자연석으로 기단을 쌓고 진흙기와를 사용한 반면 근래 다시 신축한 다른 건물들은 잘 다듬은 화강석 기단과 동(銅)기와를 사용한 점이 다르다. 원인재 옆에는 살림집인 명인당이 있다.

 

 

이허겸의 묘는 간치도(看雉島)란 섬에 조성하였다. 그래서 문학산에서 바라다보면 간치도의 이허겸 묘가 바다 한가운데 있어서 물위에 떠 있는 연꽃과 같다하여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자리로 유명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주변의 바다를 메워 아파트가 들어서고 묘역 주변은 공원으로 조성되었으며 후손들이 이허겸의 재실인 원인재(源仁齋)를 묘소 옆으로 이건 증축 하여 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인천 지하철 원인재 역 ①번 출구로 나오면 된다.

 

 

 ●이허겸-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허겸(李許謙, ? - ?)은 고려의 외척으로 고려 문종의 장인 이자연의 할아버지이다.

현종원성왕후(元成王后), 원혜왕후(元惠王后), 원평 왕후(元平王后)의 외할아버지이며 인예태후, 인경현비, 인절현비의 증조부이다. 김수로왕·허황옥의 후손이다. 비는 신라 경순왕의 아들인 신라 대안군 김은열의 딸이다. 이자연(李子淵)과 이자상(李子祥), 이자겸(李資謙) 등의 선조이다. 본관은 인천(仁川) 또는 경원(慶源,仁州).

 

생애

그의 선대는 본래 허씨(許氏)였으나 그의 선조 중에 허기(許奇)는 신라 경덕왕 때 병마사대광(兵馬使大匡)을 지내다가 당나라에 입조하여 관료생활을 하면서 당나라 현종 천보 14년 겨울에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이듬해 2월에 使臣의 명을 받들고 파촉(巴蜀)을 수행하자 당 현종은 노고(勞苦)를 가상히 여겨 그에게 오언절구 고시(古詩) 1편을 선물로 주고, 다음해 정유년에 당 현종을 따라 환도(還都)하자 현종은 그에게 자신의 성인 이씨(李氏) 성을 하사하여 이씨가 되었다. 그 후손들 중 일부는 이허(李許)의 복성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후 가계가 실전되었으며 이허기 이후 이검(儉), 이파(李波), 이귀(李貴), 이준(李浚)으로 이어지나 이들과의 관계는 실전되어 미상이다.

부모에 대한 기록 역시 미상이며 그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신라 경순왕의 손녀이자 대안군 김은열의 딸 경주 김씨와 결혼하였다.

아들은 이한으로 이자연의 아버지이고, 딸은 김은부에게 출가했는데, 외손녀 세 명이 현종의 비로 입궐하였다. 그 뒤 그의 증손녀 세명 역시 문종의 비로 입궐하게 된다.[1]

손자 이자연(李子淵)은 문하시중을 지냈고 문종의 장인이 되었으며, 손자 이자상(李子祥)의 아들 이예는 문하시중을 지냈으며 이예의 딸 정신현비 이씨선종의 비가 되었다. 고손자 이자겸의 둘째 딸은 예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연덕궁주(延德宮主)가 되었다가 아들 인종을 낳고 왕비로 책봉되었다. 뒤에 자신의 셋째, 넷째 딸을 인종의 비로 들이기도 했다.

 

이허겸 묘소

 

1022년 세 명의 외손녀 원성왕후(元成王后), 원혜왕후(元惠王后), 원평 왕후(元平王后)가 모두 고려 현종의 후비로 들어가면서 특별히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겸 상주국(上柱國)에 추증되었고 소성현개국후(邵城縣開國侯)의 봉작과 식읍(食邑) 1,500호(戶)가 추서되었다.

사후

19세기 초에 인천에 그의 사당이 마련되었다. 사당 원인재는 처음 연수동 신지마을에 건립되었으나 연수동 택지개발이 확정되면서 1994년 시공과 동시에 해체되어 이허겸의 묘역 옆으로 옮겨져 복원 증축되었다. 원인재는 후일 인천문화재자료 제5호로 지정되었다.

가계

주석

  1. 증손녀사위인 문종은 동시에 그의 외외증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