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의 여행이야기

"백운"의 Daum Column입니다...

이집트 후르가다(Hurghada) 에서 항공편으로 터키 이스탄불공항 까지

댓글 0

여행및산행

2018. 8. 9.









이집트 후르가다(Hurghada) 에서 항공편으로 터키 이스탄불공항 까지

(2018/6/12일~6/20일,7박9일)


하나투어에서 주관하는 터키/그리스/이집트 3국을 한번에 둘러보고자 하여
터키 이스탄불, 그리스 메테오라-아테네-에기나, 이집트 카이로-룩소-후루가다 등을
중점적으로 관광 하는 패케지 여행으로 2018년6월12일~6월20일(7박9일) 기간 동안
실시한 "[피라미드]이집트/터키/그리스 9일★돌마바흐체+5성3박+추가 10만마일리지"
여행 일정 중 7일차 일정으로 당일 오전 일명 테베(Thebe)라 불리는 룩소(Luxor) 의
STEIGENBERGER NILE PALACE 을 출발 나일강 동쪽에 위치한 이 도시에서 최고로 섬겼던
아몬(Amun)신을 위해 지어진 카르낙 신전(Great Karnak Temple)과 룩소 신전을 오전에
둘러보고 난다음 나일강을 배를 타고 서쪽으로 건너서 신왕국 시대의 제18왕조에서
제20왕조까지의 왕들의 묘소 가있는 왕가의 계곡(The Valley of the Kings) 과
핫셉수트 여왕이 건축한 핫셉수트 장제전을 탐방후 룩소(Luxor)에서의 일정 마치고
버스로 약 350KM 4시간 소요되는 홍해 연안에 있는 휴양도시 후르가다 에 있는
DESERT ROSE RESORT에서 휴식을 취한후 다음날 새벽에 기상, 후르가다 공항 에서
터키 항공편으로 터키 이스탄불(Istanbul) 까지 가면서 둘러본 주변 풍경 입니다.

이스탄불(Istanbul)은 흑해 어귀에 있는 구릉성 3각형 반도의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양쪽에 걸쳐 있어서 유럽·아시아 양 대륙에 속한다. 비잔티움은
BC 8세기말경 그리스인들이 식민지로 건설한 곳으로서 BC 512년 페르시아 제국으로
넘어갔고, 그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되기도 했다. 로마 공화정 치하에서
자유도시였다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재위기간(69~79) 동안에는 로마의 직접 지배를
받았다. 324년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수도로 채택되면서 '신로마'(New Rome)로
개칭되었다. 330년에는 제국의 중심지가 되었고, 뒤에 콘스탄티노플로 다시 이름이
바뀌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치하에서 콘스탄티노플은 그리스도교 도시로 포고되었으며,
그리스도교 세계의 종교 중심지가 되었다.

6~13세기에는 페르시아인·아랍인·불가리아인·러시아인들에게 자주 포위당했다.
1203년 제4차 십자군에게 점령당해 이들에게 약탈당하고, 로마 가톨릭 지배하로 들어갔다.
1261년 다시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나 오스만 제국의 메메드 2세에게 또다시
넘어갔다. 메메드 2세 치하에서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고, 1453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그뒤 1922년까지 평화로운 번영의 시기가 지속되었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수도가 앙카라로 옮겨졌고, 콘스탄티노플은
1930년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개칭되었다. 







후르가다 DESERT ROSE RESORT에서 주변도 살펴 보고 휴식도 취하면서 ...





















다음날 새벽에 기상 터키 이스탄불(Istanbul)로 가기위해 후르가다 공항으로 이동하다. 








이집트에서 안내해준 한국말을 유창하게 잘하는 에즈딘 가이드와 작별하다. 














터키항공에 탑승 터키 이스탄불(Istanbul) 공항으로 출발.. 

















가다 보니 지중해상에서 먼동이 터옵니다. 























마침내 터키 이스탄불(Istanbul) 공항에 도착하다. 




■이스탄불Istanbul (이스탄불) - 나무위키


보스포루스 해협(Boğaziçi denizi)과 마르마라해(Marmara denizi), 할리치 만(Haliç) 사이에서 유럽 대륙과 아시아 대륙의 경계선(이 경우 아시아의 정의가 좀 애매하기는 하지만) 위에 위치한 터키의 도 및 그에 속한 동명의 도시. 도시가 두 대륙에 걸쳐 있다는 지리적 특이성으로도 유명하다.[9] 인구는 2014년 기준 14,377,018명. 과거 로마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수도였으며, 동로마 제국 시기인 중세 시절부터 지금까지 쭈욱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다. 물론 터키의 최대도시이기도 하다.


도시 주인이 "그리스 -> 로마 제국 -> 동로마 제국 -> 오스만 제국 -> 터키"순으로 바뀌었다. 도시 이름도 "비잔티온(비잔티움) ->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 -> 코스탄티니예 -> 이스탄불"순으로 바뀌었다.


●기후


지중해성 기후일것 같은 선입관과 달리 비도 많이 온다. 보스포루스 해협 때문에 오히려 음습한 기후[12]다.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유에 대한 우스갯소리로, 우중충하고 음습한 날씨의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삼아서 밝고 명랑한 그리스인들이 허약하고 비관적으로 변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 영국인들이 그러하듯이 현지인들은 우산을 쓰는 대신 레인코트나 모자를 쓰는 편. 이러다보니 우산을 쓰는 사람들은 대부분 외지인이나 관광객 들이다.


이즈미트 지진을 일으킨 북아나톨리아 단층이 근처에 존재하기 때문에 언제 대지진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터키의 지진 권위자가 경고한 바 있다.


●역사


도시의 이름이 총 네번 바뀌었는데, 비잔티온(Βυζάντιον)이란 그리스 이름으로 최초에 건립되었고 로마 치하에서 비잔티움(Byzantium)으로 바뀌었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며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 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이후 오스만 제국이 점령하게 되어 콘스탄티누스의 것이란 의미의 코스탄티니예(قسطنطينيه)가 되었으며, 현대 터키 공화국이 되며 이스탄불(Istanbul)이 되었다.


◈고대


신화에 따르면 메가라라고 불리는 도시에 비자스(Βύζας)라고 하는 왕자가 있었다. 그는 장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왕좌를 이어받지 못 하였다. 그래서 새로운 식민지 도시를 개척하고자 아폴론 신전의 여사제였던 델포이 신탁에게 자문을 구하였는데 그녀는 "눈 먼자의 도시의 반대 편에 도시를 세우라"라고 말하였다. 이 눈 먼자의 도시의 정체는 칼케돈(Χαλκηδών)이며 이 도시의 개척자가 장님이라고 알려졌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것.


여사제의 조언을 들은 비자스는 메가라의 개척자들과 함께 그 땅을 찾아 항해하였다. 목적지 근처에 다다른 비자스 왕자 일당들은 한 땅을 발견하였는데 그 땅은 북쪽으로는 금각만이 있고 동쪽으로 보스포루스 해협을 끼고 있어서 항구도시의 입지조건으로 매우 좋았다. 흑해 연안에 있는 도시들은 지중해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가야 하므로 이 지역의 중요성이 높다. 그래서 그들은 BC 667년 여기에 도시를 세웠고 사람들은 도시의 이름을 왕자의 이름을 따서 비잔티온(Βυζάντιον)으로 불렀다.


칼케돈의 개척자가 장님이라고 여겨지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칼케돈 또한 메가라 사람들에 의해 개척되었고 비잔티움 개척 이전인 BC 685년에 세워졌다. 그런데 그들은 금각만을 끼고 있어서 입지조건이 더 좋은 보스포루스 해협 서쪽에 개척하기 않고 해협 동쪽에 도시를 세웠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칼케돈을 세운 집단들이 도시를 해협 서쪽에 건립하는 것의 이점을 "보지 못하였다"고 판단하여서 개척자를 장님이라고 여기게 된 것. "이런 꿀 빠는 땅을 몰라보고 엉뚱한 데다 자리잡았네, 저 눈뜬 봉사들 ㅋㅋ" 정도의 뉘앙스?


그 후 이 도시는 바다와 바다를 낀 항구도시로 발전한다.그리스 상인을 위한 지역 거점의 역할을 하던 이 도시는 동시대 사람들한테는 그 방탕함과 해이함으로 악명이 높아 어느 여행자는 비진티움 사람들을 두고 "술독에 빠진 사람들"이라고 깠다고.

비잔티온은 BC 491년 다리우스 1세 치세의 페르시아가 점령하였으나 BC 477년 아테네를 위시로 한 델로스 동맹에게 다시 탈환되어 그리스계 도시로 쭉 남다가 AD 46년 로마 제국이 점령했으며 로마식 이름인 비잔티움(Byzantium)으로 불리게 되었다.


◈중세


본디 비잔티움이라는 이름의 고대 그리스 시절 건설된 로마 제국의 지방도시[13]였다. 비록 인구 100만의 수도 로마나 인구 50만의 제국 제2의 도시 알렉산드리아 수준으로 번영한 것은 아니었지만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거점이자 제국의 무역 도시 중 하나였는데 평범한 무역 도시였던 이 도시의 운명을 완전히 뒤바꾼 사람은 바로 콘스탄티누스 1세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사두정치 시절 서방 부제의 자리에 있었을 때부터 150여 년 간의 위기로 쇠락할 대로 쇠락하였으며 전통적인 다신교 문화와 공화주의적 정치 관례가 남아있던 로마를 대체할 제 2의 수도의 건설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가 생각한 조건은 이집트나 소아시아 등의 경제적 중심지와 문화적 중심지인 그리스를 포함하는 제국의 동방과 가까운 곳이며 당시 제국을 위협하던 가장 큰 세력인 다뉴브 강 이북의 이민족 및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국경과 가까워 이들의 침입 시 신속한 대응이 가능한 곳이었다. 본디 그는 새로운 수도를 건설할 자리로 모이시아 속주의 세르디카(Serdica)[14]를 생각하고 있었고 "세르디카는 짐의 로마가 될 것"이라는 말 또한 여러 번 언급했으나[15] 사두정치를 끝내기 위한 리키니우스와의 내전 도중 벌인 비잔티움 공성전을 통해 비잔티움이 자신의 이상을 구현할 최적의 장소라는 곳을 깨닫게 되었다.


324년 내전을 종결짓고 제국 유일의 황제 자리에 오르자마자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움을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선포하였고 곧바로 비잔티움을 제국의 수도에 걸맞는 도시로 바꾸는 대공사에 착수했다. 수도 완공식이 있었던 330년 5월 11일, 콘스탄티누스는 친히 이곳을 로마 노바(Roma Nova), 즉 '새로운 로마'라 명명하였으나,[16]좀 더 세세한 명칭은 로마 노바 콘스탄티노폴리타나(Roma Nova Constantinopolitana). '콘스탄티누스의 새로운 로마'라는 뜻이다.] 역사적으로는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의미의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η)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렸다.


일단 이름은 이렇게 붙었지만, 도시가 동로마 제국을 넘어서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유명한 도시가 되면서 점차 '도시 중의 여왕(바실리사 톤 폴레온/Βασιλὶς τῶν πόλεων)', 이걸 넘어서 더 흔하게는 그냥 도시(이 폴리/ η Πόλη)라고 불렀다. 즉, 제국 제2의 도시인 테살로니키마저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앞에선 '도시'가 아닌 마을로 불리고 시골 취급 당할 정도로, 도시라는 이름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의미로 널리 쓰였다. 마치 조선시대부터 한양이라는 자기만의 이름이 있었음에도 우리들은 그 도시를 죽 수도라는 의미의 '서울'로 불러온 것처럼. 그 뜻을 생각하면 나중에 나오는 터키어 명칭 '이스탄불'과도 상통하는 명칭이다.


일단 도시가 삼각형의 양변이 보스포루스 해협에 면해 있기에 육지의 한변만 방어하면 되는 천혜의 요지이다. 게다가 당대 어떠한 공성병기로도 뚫을 수 없다는 테오도시우스의 삼중 성벽의 위엄은 대단했다. 도시를 노리고 쳐들어 온 수많은 이민족들을 모조리 트라키아 땅의 양분으로 만들어 버렸다. 물론 4차 십자군 전쟁 당시엔 동맹걸고 들어온 십자군에게 털리긴 했지만.[17]

게다가 삼각형의 양변이 접한 바다가 단순히 외딴 곳이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보스포루스 해협이다 보니 전시가 아닌 평시상황에서는 지정학적인 이점을 살려 사통팔달의 교통의 요지가 될 수도 있는 땅이다.


콘스탄티누스 사후 제국이 콘스탄티누스의 자식들 및 조카들에 의해 나뉘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콘스탄티노플은 제국 동방, 즉 동로마 제국의 수도를 맡게 되었다. 중세 서양 세계의 강대국 중 하나였던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만큼 세계에서 가장 번영한 도시들 중 하나였으며[18] 특히 제국이 경제적으로 절정기에 달했던 콤니노스 왕조 마누엘 1세의 치세에는 총 인구 40만여 명 중 외국인 인구가 6만에서 8만에 달했을 정도로[19] 코스모폴리탄적인 도시로서 번영했다.


그러나 1204년 도시를 침략해온 4차 십자군에 의해 3일 동안 도시 전역이 약탈당하고 그들이 세운 괴뢰국, 라틴 제국의 수도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몰락하기 시작하고 1263년, 니케아 제국이 도시를 탈환하고 제국을 재건했으나 도시는 이미 활기를 잃은 지 오래, 그 뒤로 제국이 점차 쇠락하면서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당시에 도시 인구는 겨우 4만 밖에 남지 않았다. 결국 1453년, 도시를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기를 갈망한 메메드 2세의 오스만 제국에 의해 끝내 함락된다. 역사적으로 이 함락은 함대포를 끌고 와서 포격을 하고, 방어군의 10배가 넘는 정예 예니체리들의 돌격으로 무너졌다고 하지만, 야사에 따르면 성문 샛길을 잠그지 않아서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 사실 샛길을 잠그고 안 잠그고를 떠나서 이미 전황은 오스만 제국 쪽으로 압도적으로 기운 상태였고, 그보다 10만 공격군에 방어군이 7천 명밖에 없었으니(...) 그때까지 버틴 게 오히려 용하다.


◈ 근대


오스만 제국의 수도 시절에도 이스탄불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오스만 터키어로 음차한 코스탄티니예(قسطنطينية)[20]라고 부르며 제국의 수도로서 크게 번영했다. 코스탄티니예를 정복하고 오스만 술탄들은 카이세리 룸(Kayser-i-Rûm)[21]를 자칭하며 종교적 관용, 각종 면세 혜택, 급여 보장 등 다양한 당근과 유혹을 휘두르며 동로마 제국 말기 많이 인구가 빠져나가고 초췌해졌던 도시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며, 그 결과 덕분에 오스만의 정복 이후 한두세대 만에 코스탄티니예는 동로마의 전성기 시절 같은 번영과 중요성을 다시 누리게 됐다. 당시 이스탄불은 지금처럼 터키 끄트머리에 위치한 변경이 아니라 3대륙을 지배하는 제국의 한복판에 위치한 중심지였다. 술탄은 수도 이스탄불에서 제국 각지로 군사를 출병시켜 지배를 공고히 했고, 심지어 유럽 내륙의 오스트리아까지도 원정했다. 자세한 것은 빈 포위 항목 참조.


◈현대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 당시에 불가리아군이 차탈자(Çatalca)까지 내려와서 이스탄불을 위협한 적이 있었다. 더군다나 이 지역은 오늘날 이스탄불 광역시에 포함되어있을만큼 이스탄불과 지척에 있는 거리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코앞인 보스포루스 해협에 영국 함대가 몰려와 위협을 가한 바 있다.오스만 제국이 1차대전에서 패하자 세브르 조약으로 인해 제국은 사분오열될 위기에 처했고 그리스 왕국은 승전국이라고 신나서 이스탄불을 탈환하겠다고 터키로 진공했다. 그리스는 이스탄불을 탈환할 뻔했지만 무리한 진공으로 인해 아타튀르크에게 패퇴당했고, 이미 연합군(주로 영국군)측이 이스탄불을 접수한 상태로 그리스군이 코 앞까지 다가오자 영국이 개입한다. 영국은 에게 해의 섬과 코스탄티니예를 포함한 동트라키아 지방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압력을 넣었고 아타튀르크는 후자를 선택. 이로써 도시는 다시 터키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다.


1922년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고 터키 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수도의 지위는 상실하고, 아타튀르크를 수반으로 하는 신생 터키 정부는 오스만 왕가와 귀족들을 반역자로 규정하여 모두 추방시켰고 기존 세력들의 입지를 약화시키기 위해 수도를 아나톨리아 땅의 튀르크계의 발원지와 같은 척박한 땅 앙카라로 천도하였다. 이 때 도시 이름은 코스탄티니예에서 이스탄불(Istanbul)로 바뀌었고 이것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한때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만큼 그리스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1923년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 협정 당시에 이스탄불 전체 인구의 1/3이 그리스인인 현실을 고려해 이스탄불의 그리스인들은 추방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박해는 아타튀르크 사후 특히 1950년대 들어 키프로스 문제와 관련해 그리스와의 갈등이 심해지자 가속화되었으며 이 시기 터키 정부의 묵인 속에 이루어진 시민들의 조직적인 약탈과 폭행까지 행해져 1960년대를 기준으로 인구는 급감하게 된다. 1955년은 아직 영국 식민지였던 키프로스에서 키프로스는 그리스라며 그리스와 통합을 요구하는 시위와 폭력행위가 극에 달해있을 시절이다. 아테네에서도 반 터키 시위가 있었고, 특히 이스탄불과 마찬가지로 로잔 조약을 통해 추방에서 제외된 트라키아 서부 지방의 튀르크계 주민들에게도 박해가 벌어졌다. 그러자 터키에서도 반 그리스 여론이 치솟기 시작했고, 그게 폭력 사태로까지 번졌다.


1930-40년대까지만 해도 터키와 그리스 관계는 상당히 좋은 편이었지만, 동구권의 공산화로 인해 잔뜩 긴장한 양측 정부는 극단적인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강조하기 시작했고, 둘 다 제정신은 아니었다. 또 오스만 제국이 소멸되고 나서 오스만 제국 국적이 말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적을 터키 공화국으로 신청하지 않은 그리스계 무국적자들이 이스탄불에 상당히 많이 살고 있었는데, 그동안 이들은 외국인도 아니고 자국인도 아닌 상태로 거주허가증만으로 버티며 살아가고 있었지만, 이때의 키프로스의 반 튀르크 시위 이후 법적 이유를 들어 하나 둘 추방시킨다.[22] 백여 년이 지난 2015년 현재는 거주민의 겨우 0.01%만이 그리스계이다. 이들은 정교회를 믿는 인구만 한정한 것으로 마찬가지로 그리스 혈통이지만 19세기 말과 터키 독립전쟁 시기 그리스에서 추방된 무슬림인 기리틀리(Giritli)의 수는 훨씬 더 많으며, 오스만 제국 시절에 터키화된 그리스계 인구는 여전히 이스탄불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23]


●명칭


그리스인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이 폴리'라 하기도 하는데, 그리스어로 그 도시라는 뜻. 오스만 제국에게 함락당하기 이전,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였던 당시에 쓰이던 명칭이다. 별칭격인 '이 폴리'의 경우 정관사+'도시'인데... 직역하면 '그 도시'가 되기는 하지만, 영어의 관사 The와 마찬가지로 그냥 '도시'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할수도 있다. 이는 동로마 시기에 '도시' 라고 하면 당연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의미하던 것에서 기인한 호칭. 실제로 안나 콤네나의 알렉시아드를 보더라도 도시(The city - Η πολή)라면 당연히 콘스탄티노플이고(...) 제국 제 2의 도시인 테살로니키조차도 마을(town - η χώρα)로 표기함을 알 수 있다. 동로마 제국의 주도세력이었던 그리스인들은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 대한 애착이 무척 강해서, 그리스인 조르바에서도 아기를 축복하는 동네 아낙들이 "딸들은 저마다 길쌈에 익숙하게 하시고 아들들은 저마다 용감한 병사가 되어 왕들의 도시 콘스탄디누폴리를 되찾게 하옵소서" 라고 노래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터키 독립전쟁 당시 (영국의 간섭과 터키 본토를 향한 무리한 진격의 반작용으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그리스인 기준에서는 탈환)하지 못한것을 아직도 통한스럽게 여기는 이가 있을 정도다. 그런고로 그리스인들은 지금도 터키식 이름인 이스탄불보다는 그리스식 이름인 콘스탄티누폴리, 이 폴리 등을 훠얼~씬 선호한다.


오스만 제국에 점령당한 후 새로운 수도가 되면서 명칭에 혼선이 생기는데, 사실 오스만의 정복 이전부터 튀르크인들은 이 도시를 '이스탄불'이라 부르고 있었다. 이것은 10세기 무렵부터 아랍에서 쓰던 명칭이었다. 뜻은 '도시에서', '도시로' 정도로, 서쪽에서 번영하던 대도시라는 이미지를 통해 좀 막연하게 붙인 명칭이었다. 이 명칭의 기원에 대한 전설이 있다.


처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한 튀르크인 사절단이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어느 그리스인 어부에게 해협 건너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가리키며 도시의 이름을 물었는데, 튀르크인 통역자의 그리스어 발음이 영 좋지 않았는지 그리스인 어부는 질문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래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가리키며 "저 도시요?(Εις την πολίν;)" 라고 되물었고, 튀르크인 사절단은 이걸 도시 이름으로 알아듣고 그대로 떠나버렸다는 것이다.[24] 상기 그리스어발음은 '이스 띤 뽈린?'인데, 이 지방에서 쓰던 그리스어 방언으로는 "Εις ταν μπολί;(이스 딴 볼리?)"로 발음된다. 실제 있었던 에피소드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절묘한 전설이다. 이 전설은 그리스인이라면 거의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로 오늘날 그리스인들은 이 전설을 가지고 터키인을 비웃기도 하는데, "우리의 위대한 도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름도 제대로 못 부르는 터키 촌놈들에겐 어울리지 않지!(+고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우리 그리스인들의 품으로 돌아와야 마땅해.)"라는 식. 기회가 된다면 그리스인들에게 이 전설에 대해 물어보자.[25]


그 외에도 튀르크인들은 이 도시를 스탐불(ستامبول, Stambul), 이슬람불(اسلامبول, İslambul, 이슬람을 찾으라[26]), 파이타흐트(پایتخت, Pay-i taht, 옥좌[27]), 아시타네(آستانه, asitane, 술탄의 문지방), 다르사아데트(در سعادت, Dâr-ı saâdet, 행복의 집), 바브알리(باب العالی, Bâb-ı âli, 웅장한 문), 데르알리예(در عاليه, Der-ı âliyye, 위대한 집) 등으로 다양하게 불렀다. 동로마를 멸망시킨 메흐메트 2세가 친히 '이슬람볼' 이라는 명칭을 부여했다고도 하는데, 확증은 없다. 몇몇 역사가들의 기록에만 등장하는 내용인데,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 정복된 직후부터 이슬람볼이라는 이름이 보이므로, 개연성은 충분하다.


불가리아는 황제가 계시는 도시란 의미로 Цариград (차리그라드)라 부른다. 중세 불가리아 제국이 잘 나갈 때는 자신들 수도인 벨리코 타르노보도 짜르그라드라 불렀는데 이후에는 그냥 이스탄불만 그렇게 부른다. 중세부터 지금까지 사용되고 발칸반도 역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콘스탄티노플-소피아-베오그라드 간 도로도 짜리그라드 도로(불가리아어: Цариградски път)라고 부른다. 러시아어로도 한때에는 Царьградъ (차리그라드)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는 두 나라가 정교회 문화권으로 중세시기부터 동로마 제국과 활발한 교류를 가져왔고, 정교회 문화권의 문화적, 종교적, 경제적 중심지였던 콘스탄티노플을 '황제가 사는 도시' 라고 불렀던 데서 기인한다.(그렇다고 안 싸웠던 이야긴 아님. 특히 불가리아인들은 이 도시가 '황제의 도시' 니까 더 탐냈음.) 요즘이야 뭐 굳이 옛날 이름 쓰지 않고 그냥 이스탄불이라고 부른다.


오스만의 점령 이후로도 제국의 공문서에서는 '코스탄티니예(قسطنطينيه, Ḳosṭanṭīnīye)'를 더 선호했다. 아랍어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그리스어 "폴리스"를 빼고, "콘스탄티누스의 것"이라는 뜻의 "알 쿠스탄티니야"라고 쓴 것을 다시 터키식으로 읽은 것이다. 이미 현지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이라는 명칭이 이스탄불보다 이게 더 간지나서 워낙 뿌리깊게 박혔던 탓이다. 게다가 오스만 제국의 술탄 파디샤들 또한 종교는 이슬람이지만 로마와 동로마의 후계 국가를 자처했기 때문에 로마 제국과의 직접적인 연결성을 부여하는 저 이름을 딱히 거부할 이유도 없었고. 그러나 민족의식이 강해진 19세기에는 그리스식 명칭인 콘스탄티노플을 버리고 이스탄불로 굳어졌고, 구어적으로 사용되던 명칭은 완전히 대세가 되었다. 그리고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자 이스탄불을 제외한 이런저런 명칭들은 폐지하고 이스탄불로 완전히 공식화했다. 아예 터키 우편에서 이스탄불 말고 콘스탄티노플, 콘스탄티노폴리스, 코스탄티니예, 짜리그라드, 알 쿠스탄티니야 등등의 이름으로 적힌 우편은 무조건 취급하지 않겠다고 강경 엄포를 때릴 정도였다. 이후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그리스어 빼고 대부분의 언어에서 이스탄불 혹은 그 이름에서 나온 말로 불리고 있다.


●관광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성 소피아 성당(하기아 소피아)외에도 블루 모스크(술탄 아흐멧 모스크), 술레이마니예 모스크, 지하 저수조 등 엄청난 역사 유적이 많다. 요즘은 세계적인 패션 중심지로 부상했다지만, 확실히 서유럽의 도시보다 낙후되어 보이는 모습도 많이 볼 수 있다. 도로 체계가 근대화가 안 되어 벌어지는 엄청난 교통체증, 그리고 그 지역의 대기오염 등등. 유럽식으로 만들어진 깔끔한 버스 정류장에 들어오는 낡고 더러운 버스도 참 깨는 볼거리다. 요즘은 버스들이 리모델링을 해서 깨끗하다. 서울시 버스와 색깔톤과 구조가 비슷한데, 아무래도 한국 버스를 수입하지 않았나 싶다. 실제로 기아마크를 봤다는 사람도 있었다.


과거에는 민영버스(Halk otobüsü)라는게 있어서 이 버스에서는 악빌을 사용할 수 없고, 버스 안에 타고 있는 차장에게 직접 요금을 지불해야 하는 시스템을 갖고 있었는데, 2015년 기준으로 악빌은 사용중단되었지만, 모든 버스에서 이스탄불카르트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31] 그 대신 직접 돈을 주고 차를 타는게 금지되어 있으니, 만약 교통카드에 돈이 없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그 사람에게 돈을 주자. 현지인들도 그렇게 한다.


해협 양쪽으론 유럽과 전 세계의 부호들이 지어놓은 호화 별장들과 개인 선착장, 요트들이 즐비하며 많은 관광객들이 유람선을 타고 여기를 구경하며 찬탄한다.


◈구경거리


죽기 전 꼭 가봐야 할 도시 1위에 선정된 만큼 볼거리가 참 많다. 이스탄불은 크게 유럽 지구의 구시가지(남쪽)와 신시가지(북쪽), 그리고 아시아 지구로 이루어져 있는데, 구경거리는 주로 구시가지에 몰려있다. 신시가지에도 몇 개 구경거리는 있으니 낫지만, 아시아쪽 이스탄불은 위스퀴다르(Üsküdar) 지역을 제외하면 새롭다라고 할 한 것이 없는데다 아시아-유럽 이동이 결코 만만하지 않으므로 여러모로 주의할 것



•아야 소피아 박물관 (Ayasofya Müzesi, 성 소피아 성당)



이스탄불의 영원히 변치않을 랜드마크. 하기아 소피아라고도 하며, 전차정거장 술탄 아흐멧 역(Sultanahmet istasyonu) 또는 국철 잔쿠르타란역(Cankurtaran istasyonu) 앞, 어느 쪽에서 내리든 보인다. 술탄 아흐멧 자미 건너편에 있다. 입장료는 40리라 동로마 시절에 건축되어 오스만 제국이 개조해서 모스크로 써오다 지금은 박물관이 되었다. 오스만 시절 개조 당시 부숴버리는 선택 대신 덮어쓰기 스킬을 시전한 덕분에 콘스탄티노플 시절의 벽화들이 살아남아,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공존하는 웅장한 미로 유명한 관광지가 된 것은 이미 유명할대로 유명해진 사실이다. 큼지막한 원판에 아랍어로 쓰여있는 것은 알라와 무함마드, 정통 칼리프 네 명의 이름으로, 뭐라고 쓰여있는지 읽지는 못해도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큰 서예작품이라고 하니 눈여겨 볼 것. 월요일은 쉰다. 이 곳뿐만 아니라 터키의 거의 모든 박물관과 문화유적이 월요일에 쉰다. 그러므로 월요일은 닥치고 쇼핑, 클럽ㄱㄱ 참고로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도 있다! 30리라 (이는 현재 이스탄불 직항노선을 운항중인 아시아나항공에서 제작 지원한 것임.)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 (Sultan Ahmet Camii, 블루 모스크)


아야 소피아의 건너편에 자리한 라이벌 모스크[36]. 참고로 술탄 아흐멧과 아야 소피아 사이에 히포드롬 광장(Hippodrom, 마차경주가 열린 로마시대 경기장 유적터, 터키어로는 '말의 광장'이라는 뜻의 At maydanı라고 부른다)이 있다. 술탄 아흐멧은 오스만 시절에 만들어졌는지라 아야 소피아보다 좀 더 오스만 풍이 강하며 성원 내부의 푸른 빛의 타일은 특히 아침이나 저녁에 가면 햇빛에 빛나서 경탄스러울 정도로 아름답다. 다만 생각보다 푸르진 않은데, 이집트 바자르에 있는 뤼스템파샤 자미에 가면 성원 전체가 푸른 타일로 덮여있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참고로 여기는 지금도 예배가 이뤄지는 공공시설이라 입장료가 없지만, 나올 때 기부금을 넣는 곳이 있어 내고 싶은만큼 내면 된다. 남쪽에 모자이크 박물관이 있는데, 모자이크 박물관은 입장료 8리라 별도다.


•예레바탄 사라이 (Yerebatan Sarnıcı, 바실리카 시스턴)


아야 소피아 남서쪽 가까이에 있는 궁전(저수지). 터키어로 '사르느즈'도 단순한 저수지라는 뜻이다. 평범한 저수지 주제에 온갖 장식을 해놔서 궁전처럼 보여서 이런 명칭이 붙었다. 입장료는 20리라이며, 박물관이 아니기 때문에 뮤지엄 패스나 뮈제카르트는 통하지 않는다. 게다가 생각보다 볼 것도 별로 없다. 터키 학생증이 있다면 3리라에 뚫을 수 있지만 3리라의 가치가 있는지도 의문이다. 근처에 가장 오래되었다는 시스턴이 또 있는데 여기도 10리라라서 낚일 수 있지만 주의. 볼거리보다는 그냥 접견장소에 불과하다. 뭐,... 더위 피할 곳으로 쓰겠다면야. 그런데 사람은 많이 모인다. 정오가 가까우면 사람의 줄이 쫙 늘어선다. 특히 여름에. 안이 시원해서인듯.


•톱카프 사라이 (Topkapı Sarayı, 톱카프 궁전)


술탄 아흐메트 지구에서도 해안가 끝자락에 있다. 아야소피아에서 이동하려면 걸어서 5분정도만 가면 된다. 15세기~19세기동안 오스만 제국의 궁정의 역할을 한 곳이다. 오랜기간동안 술탄들이 자기 취향대로 증축을 하다보니 조잡스러워 보인다는 얘기도 있다. 입장료는 2018년 4월 기준 40리라이며, 하렘구역은 별도로 25리라 더 내야한다. 서쪽 역 근방에 귈하네 공원과 국립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이 있다. 건물 내부 전시관 대부분은 사진촬영 금지이다. 궁전 입구에는 성 이리니 성당(Aya İrini)이라는 조그만 동로마식 성당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은 소피아 성당 건립 이전에 동로마제국 기독교의 총본산이었던 나름 유서깊은 건물이지만 오스만제국 시절에는 무기고로 쓰였으며, 현재는 버려진 건물이다. 톱카프 궁전 내에서도 특히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보물관과 도자기관(궁전내 부엌건물을 개조해서 꾸몄다), 그리고 바닷가쪽에 있는 바다트 쾨슈크(Bağdat Köşk)이다. 종교유물을 전시한 관도 있는데 이곳에서는 무함마드의 수염과 모세의 지팡이, 요셉의 팔뼈 같은 이슬람 종교 유물들을 볼 수 있다[37].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İstanbul Arkeoloji Müzesi)


톱카프 궁전으로 가는 길목에서 발견할 수 있는 박물관. 19세기 말 오스만 함디 에펜디(Osman Hamdi Efendi)가 당시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략으로 위험을 겪고있던 이라크, 시리아의 메소포타미아, 헬레니즘 문명 유물들을 수집해 톱카프 궁전의 일부건물을 빌려 전시한것이 시초로 복도에다가도 유물을 쌓아놓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많은 전시물을 자랑하며 부속건물로 딸려있는 치닐리 쾨슈크(Çinili köşk - 도자기가 있는 정자)에는 완숙기의 이즈닉 도자기와 터키 도자기가 어떻게 중국에서 넘어왔고 제작기술이 발달해왔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풍부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입장료는 15리라.[38] 귈하네(Gülhane)역에서 가까우며, 근처의 귈하네 공원은 봄에 가면 흐드러지게 핀 장미꽃 때문에 매우 아름답다.


•파노라마 1453 (Panorama 1453 museum)


2009년에 문을 연 박물관.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있는 트램 톱카프 역 바로 앞에 있다. 1층에 이것저것 시각자료가 있으나 전부 터키어로 되어 있어서 패스(...) 포인트는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볼 수 있는 360도 파노라마로 된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재현도 인데, 실제 쓰였을 법한 물건들과 메흐테르, 대포 소리 등도 재현해 현장감이 상당하다. 현지에서 초등학생들 견학 필수코스라고 하며 이때문에 평일 오전이나 이른 오후에 갈 경우 헬게이트가 열릴 수도 있다(...)


•시르케지 역 (Sirkeci İstasyonu)


아가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탈 특급 살인사건의 배경이 되는 오리엔탈 특급의 유럽방면 종착역. 지금은 그냥 한가한 기차역 수준이며, 공사중. 2015년 현재 펜딕까지 뚫린 YHT(터키 고속철)이 하이다르파샤 역을 지나 해협을 건너 2016년, 이 역으로 연장될 예정이다. 톱카프 사라이 북쪽과 갈라타 다리 사이(그러니까 트램 1호선 시르케지 역 건녀편)에 있다. 배낭여행객이라면 이 주변과 술탄 아흐메트에 저렴한 숙소가 많아서 자주 들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시르케지 역 바로 앞에는 맥도날드와 버거킹과 터키 전통 과자들을 파는 상점이 많이 있다. 참고로 터키 대표 과자중 하나인 로쿰을 처음 발명한 가게가 이 역 근처에 있다. Ali Muhiddin Hacı Bekir라는 가게로 가게는 조그맣지만 1777년 개점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쳄베를리타쉬 하맘 (Cemberlitaş Hamamı, 터키탕)


구시가지(베야즈트) 카팔르 차르시(그랜드 바자르) 동쪽, 쳄베를리타시 역에 있다. 쳄베를리타쉬(Cemberlitaş)는 '고리가 있는 돌'이라는 뜻인데,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이곳에 수도를 건설하고나서 세운 구조물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이 구조물은 아직 남아있으며 이스탄불 행정당국에서 말끔하게 수리해서 공개하고 있다. 전차정거장 Çemberlitaş역에서 바로 볼 수 있다. 이스탄불에서도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 하나인데 450여년 전 미마르 시난(Mimar Sinan)[39]이 건축했다. 하맘(목욕탕) 중에선 가장 대표적인 장소라 그런지 가격이 상당히 센 편인데 입장료(셀프목욕)만 40리라, 터키식 때밀이를 체험하려면 20리라를 더 던져줘야 한다. 이곳 말고도 유명 하맘이 2군데(자이오울루 하맘, 슐레이마니예 하맘) 더 있긴 하나, 관광용이라 현지인은 그다지 잘 안 간다 카더라. 하맘을 좀 더 싸게 이용하고자 한다면 관광지가 아닌 지방도시나 아시아 구역으로 가야 한다. 이스탄불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하맘들도 곳곳에 숨어있는데, 이런곳도 저렴하다. 대표적으로 카라쾨이에서 갈라타 탑 올라가는 언덕을 등지고 우측 토프하네쪽으로 가면 보이는 동네인 추쿠르주마(Çukurcuma)에 위치한 하맘이 있다.


•카팔르 차르시 (Kapalı Çarşısı, 그랜드 바자르)


터키 재래시장의 대표이며 서울로 치면 남대문 시장같은 곳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이라는 말도 있다. 여기는 베야즈트에 있으며, 예레바탄 사라이의 서쪽에서 시내로 좀 들어간 곳에 있다. 전차를 이용할 경우 쳄베를리타쉬 역을 지나서 베야즈트-카팔르 차르시(Beyazıt-Kapalı çarşısı)에서 내리면 된다. 들어가면 구경거리가 많고 흥정도 잘 통한다고는 하나, 그래도 물가가 굉장히 비싸서 가볍게 시장볼만한 곳은 못된다.[40] 다만... 터키어를 할 줄 안다면 모든 상황이 다 바뀐다. 앞선 손님에게는 120리라에 팔던 카페트가 똑같은 크기에 똑같은 디자인인데도 흥정만 잘하면 70리라정도로 깎는건 일도 아니다. 예산문제와 실속적인 것을 원하는 위키러라면 그냥 기계로 짠 카펫을 사는것도 나쁘지 않다.


어차피 디자인은 터키에서만 사용되는 것들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혹은 손으로 짠 카펫을 구한다고 하더라도 오를론(orlon)이라는 화학섬유로 짠 것이나, 화학염료를 사용해서 염색한 실을 쓰는 카펫의 경우 천연염색 카펫의 2/3 수준밖에 안될정도로 가격이 떨어진다. 가령 작은 방에 깔 수 있는 킬림(여름철에 흔히 쓰는 얇은 카펫)의 경우 천연염색제품 가격은 최저 150리라인데 화학염색제품(둘다 수공예품)은 100리라 정도에도 구할 수 있다. 다른 물건들도 처음 부르는 값의 60%수준까지는 깎아볼 수 있다고 보면 된다. 애초에 상인들도 손님들이 가격투쟁(...)할 것을 알기때문에 비싸게 부른다. 여기에 낚이면 뭐... 여하튼 여기서 정말 제대로 된 전통 터키 카페트를 사려면 수표 다발이나 카드를 할부금으로 그을 생각하시길. 돈없어 보이는 사람이 수제 카펫 가게를 기웃거리면 저 가게 가면 기계제 판다고 쫓아내기까지 한다(!)


동양인 관광객이 엄청 많이 찾다 보니 돌아다니다 보면 니하오 어서오세요 곤니찌와를 엄청 들을 수 있다. 호객꾼들이 여성들 같은 경우엔 무시하고 가면 아줌마 아줌마 거리다가 그래도 반응이 없으면 할머니(...)라고 한다. 발끈해서 돌아볼때 주의를 끌수 있다나... 위에 적혀있듯이 세계적인 관광지다 보니 기본적으로 흥정을 하더라도 물건들이 싼편이 아니고, 중국산도 상당수 있다고 한다. 혹시 촛대나 집안 장식용품을 살 생각이 있으면 Paşabahçe(파샤바흐체)라는 인테리어 소품 체인점에서 동일한 물건을 거의 반 가격에 구매할 수 있으니 가 보는 것울 추천한다.


출입구가 몇십개도 넘기 때문에 길 잃어버리기 딱 좋으니 여기를 약속장소로 삼지는 말 것. 길을 찾기위해 힌트를 주자면, 트램이나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베야즈트문(Beyazıt Kapısı)가 어딘지를 물어서 가면 쉬울것이다. 일요일은 쉬며 평일에도 19시면 닫는다. 또한 카팔르차르시와 이어서 서술할 이집션 바자르 사이에도 시장들이 잔뜩 형성되어있는데, 터키어밖에 안통하고 현지인들을 위한 시장이지만 발품만 열심히 팔면 카팔르차르쉬 가격의 50%정도 가격에 물건을 구할 수도 있다. 혹시나 있을지 모르지만(...) 유학생들을 위해 조언을 주자면, 중고서적 혹은 터키어 사전을 구하고 싶다면 이곳 카팔르차르시 근처에 있는 'sahaflar çarşısı'에 가보기 바란다. 베야즈트문 바로 왼쪽에 빠지는 골목에서 왼쪽으로 가면 보이는 좁은 뜰같은 곳인데, 웬만한 책은 이곳에서 다 구할 수 있다. 다만 가격흥정 필수. 찾고 싶은 책이 있으면 책가게 주인에게 물어보면 바로바로 찾아준다. 책 외에 골동품, 오스만 제국시절 화폐같은것도 취급하는 가게들이 있다.


•이집션 바자르 (Mısır Çarşısı - 스파이스 바자르)


그랜드 바자르에서 북쪽으로 갈라타 다리 가는 길에 있다. 터키 재래시장 중 하나로, 오스만 제국 시기에 카팔르차르쉬의 공간이 부족해지자 확장된 시장이다. 왜 이집트 시장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1517년 이집트를 정복한 이후 이집트에서 이스탄불로 진상되는 공물들을 이곳에서 늘어놓고 팔았다는데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터키어로 옥수수를 의미하는 '므스르'[41]에서 비롯되었다는 두가지 설이 있다.


현지인을 대상으로 하는 식료품과 향신료 위주의 장이 열린다. 그랜드 바자르와는 달리 가격대가 낮기 때문에 음식하기를 좋아한다면 눈이 마구 돌아가는 장소.[42] 그랜드 바자르와는 달리 영어가 별로 통하지 않으므로 흥정시 유념할 것. 일요일 휴무. 주변에 슐레이마니에 자미(모스크)가 있다. 이곳에서도 관광기념품들을 구할 수 있는데 가게가 몇개 없다. 하지만 카팔르차르시보단 더 싼 가격을 부른다. 이집션 바자르 바로 근처에 위치한 뤼스템파샤 자미 인근에는 게임제품들을 파는 가게들이 몰려있는데, 이쪽에서는 진주자개 장식을 한 전통 체스판같은 것들을 시내값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싸게 구할 수 있다. 카팔르차르시나 므스르차르시 상인들도 이곳에서 물건을 떼와서 판다.


터키 전통 악기에 관심이 있다면, 이집션 바자르 앞에 있는 에미뇌뉘에서 15분정도 할리치를 따라 걸으면 나타나는 운카파느(Unkapanı)에 가면 된다. 이곳에 악기 도매상들이 널려있다. 터키어가 안된다면 갈라타탑 주변에도 악기상들이 있으니 그곳에 가면 된다. 다만 소매상인만큼 운카파느 가격보단 비싸다. 다르부카, 탬버린같은 악기는 연주하는 방법도 간단하므로 기념품으로 사가면 좋은 추억이 될 수 있을것이다.


•갈라타 다리 (Galata Köprüsü)


에미뇌뉘역 근방에 있으며, 유럽측 이스탄불의 남북을 이어주는 다리. 위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할 일없는 실직자와 니트와 소매치기가 모여 잔뜩 낚시질하고 있는 곳이다. 그러니 멀쩡히 트램도 다니고 있는데 굳이 어두울 때 걷는 일은 자제토록 하자. 주로 이곳을 걸어다니는 목적은 고등어 케밥이라 불리는 발륵 에크멕을 먹어보기 위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나마도 삐끼들이 너무 달라붙어서 짜증날 지경이다. 차라리 아시아쪽인 카드쾨이쪽이 발륵 에크멕 먹기에는 더 좋다. 값도 싸다. 사족인데, 가끔 갈라파라고 잘못 알고 있기도 한다.


•갈라타 탑 (Galata Kulesi)


갈라타 다리에서 탁심 광장으로 가는 길에 있다. 동로마 시대에는 (Ο μεγάλος πύργος, 메갈로스 피르고스)라고 불렸다. '큰 탑'이란 뜻. 목적이 감시용 및 등대역할을 위했던 것 만큼, 이스탄불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전망대 역할을 한다. 입장료는 2016년 9월 현재 25리라 (터키인은 15리라). 유명세와 허벌나게 비싼 입장료에 비해선 시설이 매우 열악하니 조금 고민할 필요가 있다.[43] 하지만 날씨 맑은날 일몰때 간다면 정말 환상적인 경치를 볼 수 있을것이다. 겨울철엔 안개낀날 가도 굉장히 분위기 있는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터키인들은 갈라타탑에 갈 때 동행자를 잘 골라서 데리고 가는데, 속설에 의하면 갈라타 탑에 같이 간 동반자와 결혼하게 된다고 한다.


•탁심 광장 (Taksim Meydanı)


이스탄불판 명동. 튀넬역(카라쾨이역 북쪽)에서 이스티클랄 거리를 통해 탁심역까지 트램이 다닌다. 이 주변에 술집이나 클럽이 산재해있어 젊은 사람들이 많이 다닌다. 하지만 뒷골목이 많아 치안이 좋지는 않으니 어두울때 뒷골목으로 가는 것만큼은 자제하자. 참고로 대중교통을 타고 탁심역으로 가거나 빠져나가려면 무조건 초단거리 전철(Füniküler)을 타야해서 제톤 1개(=3리라)를 더 쓰게 되어있다. 그렇다고 인근 역에서 걸어가겠다는 생각은 버리자. 길이 생각보다 복잡하고, 언덕 경사가 장난 아니다.


•돌마바흐체 궁전 (Dolmabahçe Sarayı)


서양덕후였던 술탄 압뒬메지트가 친유럽정책을 표방하며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세운 서양식 초호화 궁전으로 '정원으로 가득찬 궁전'이라는 뜻, 이걸 짓느라 돈을 다 탕진해버리는 바람에 당대 이름난 은행가집안인 로스차일드 가문으로부터 융자를 받은 적이 있다. 모티프는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이다. 여기에 들어간 대부분의 소품은 유럽에서 직수입해다 썼으며, 세계에서 가장 큰 크리스탈 샹들리에도 여기에 있다.[44] 접근하기는 좀 어려운데, 일단 일일 입장객이 3천명 선착순 한정이고, 단독행동은 안되고 일정인원이 모여 가이드를 따라야만 입장이 가능하며, 가는 방법도 유럽 지역의 트램 종착역(신시가지)인 카바타쉬에서 해안가를 따라 계속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입장료가 만만찮은데, 기본요금 40리라에 하렘 20리라 추가. 문화부 관할이 아니고, 터키 국회 관할이라 뮤지엄 패스도 통하지 않는다. 국제학생증이 있다면 5리라로 대폭 깎인다.[45] 그리고 월요일 휴무. 공화국 시기에는 아타튀르크가 이스탄불에 왔을때 궁전의 일부를 관저로 사용했는데, 이곳에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운명한 방도 보존되어있다. 때문에 아타튀르크의 기일이 가까워지면 수많은 참배객(?)들로 분주해진다.


•오르타쾨이 (Ortaköy)


이스탄불 시민들의 주말휴양처로 유명하다. 바로 위에 보아지치 대교가 지나가며, 전망좋은 카페에서 수다를 나누는게 현지인식 노는법. 주말마다 장도 서기때문에 이런저런 빈티지한 물건들을 구경하고 사는 재미도 쏠쏠하다. 오르타쾨이는 쿰피르(Kumpir)라는 구운감자에 여러가지 토핑을 얹어먹는 요리와 과일을 얹은 와플이 유명한데, 거의 모든 카페에서 이것들을 취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외국인이라는거 알면 삐끼도 정말 지겹게 달라붙는다.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버스타고 갈 수 있는 거리로, 돌마바흐체 궁전 본 김에 여기도 보고 가면 좋다.


•이을드즈 궁전 (Yıldız Sarayı)


베식타쉬의 바르바로스 거리에 맞닿아있는 궁전으로, 돌마바흐체 궁전에 질렸는지 압뒬하미트 2세가 세워서 주로 거주한 궁전이다. 크기도 작고 돌마바흐체에 밀려서 그런지 한산하지만 내부장식은 돌마바흐체보다도 더 화려하고 으리으리하다. 그 주변은 공원으로 이스탄불 시민들의 주말 휴식처로 사용되고 있다.


•루멜리 히사르 (Rumeli Hisar)


오스만 제국이 동로마의 콘스타티노플을 공략할때 4개월만에 급조한 석조 성채. 당시 술탄인 메흐메트 2세는 최대한 빨리 지으라고 명령을 내리며 여러 장군들에게 각자 성채를 나눠 짓게하며 가장 먼저 짓는 쪽은 담당한 장군에게 후한 보상을 내리겠다고 한다. 보스포러스 대교 앞에 있으며, 돌마바흐체 사라이에서 22번 버스로 들어가면 볼 수 있다. 별도로 철도가 다니지 않고, 유럽-아시아를 잇는 대교 바로 앞에 버젓이 있기 때문에 주말에 이곳을 들르려면 엄청난 교통체증을 감수해야 한다. 중심지에서 비교적 멀어서인지 잘 알려지지 않은 관광지인데, 보스포러스 대교의 전체를 구경하기엔 가장 좋은 곳이다. 요금은 5리라로 터키의 사적지 중에선 나름대로 저렴한 축에 속한다. 하지만 버스비가 3.5리라 들어가니 그게 그건가. 박물관같은 개념보다는 공원에 가깝다.


•크즈 쿨레시 (Kız Kulesi)


처녀(Kız)의 탑이라는 뜻인데, 옛날에 이 지역을 다스린 태수가 자신의 공주가 뱀에 물려 죽는다는 예언을 듣고 보호하기위해 가둬놨으나 하필이면 공주에게 위로로 보낸 과일바구니 속에 뱀이 있어서 결국 결혼도 못해보고 물려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원래는 동로마 제국 시대인 11세기경에 세관 및 감시초소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건물로 오늘날까지 당시의 건축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5세기경 이스탄불을 묘사한 그림지도에서도 갈라타탑과 함께 반드시 묘사되는 건물이다. 아시아쪽 이스탄불의 위스퀴다르 항구에 가까우며, 왕복페리 비용으로 10리라 정도, 낮에는 찻집, 저녁에는 식당으로 개조되어있다. 월요일 휴무. 다만 건물 안에까지 들어가는 관광객은 잘 없는듯.


•카리예 박물관 (Kariye Müzesi)


동로마 시절에는 '시골'(Η Χώρα)이라 불렸던 곳에 위치했던 작은 성당으로 오스만 시기에 모스크로 개조되었지만, 이곳은 성화들을 가려 놓았던 회칠을 완전히 제거해서 옛 동로마 성당의 면모를 완벽하게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크기는 아야소피아에 비해 작은편이지만, 후기 콤니노스 왕조와 팔레올로고스 왕조 시기의 동로마 이콘 화풍을 감상할 수 있어 역사적으로 가치가 높은 곳이다. 이스탄불 중심가에서는 조금 떨어져있으며 에미뇌뉘에서 버스를 타고 '에디르네카프'(Edirnekapı)에서 내리면 쉽게 갈 수 있다. 근처에 오스만 제국 술탄이 즉위할때 의식을 행하던 에위프 술탄 사원도 있으니 함께 가보자. 입장료는 15리라.


•에윕 술탄 사원 (Eyüp Sultan Camii)


역대 오스만 제국 파디샤들이 즉위의식을 하던 곳으로, 이스탄불 성벽을 나가서 조금 더 가야 나오는 곳이다. 성자 에윕(아랍어로는 '아이윱')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친우(Ensari)로 이슬람 교도들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을때 그곳에서 전사한 인물인데, 메흐메트 2세의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당시 그의 무덤이 발견되었고 그곳에 세운 사원이 바로 에윕 술탄 사원이다. 과거에는 메카로 향하던 순례자들이 고향에서 메카로 떠나기전에 우선 칼리프가 거주하는 이스탄불을 순례했는데, 당시 반드시 거쳐가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으며 오늘날에도 터키인들은 메카, 메디나, 예루살렘 다음가는 성지로 여기고있다. 근처에는 종교물품을 파는 시장들이 형성되어있으며, 에윕 술탄 사원에서 가까운 언덕에는 프랑스 작가 피에르 로티가 즐겨찾던 카페가 있다. 이곳에 서면 할리치를 중심으로 이스탄불의 경관이 아름답게 펼쳐지기 때문에 유명한 관광지로 꼽힌다. 입장료는 무료이며, 에미뇌뉘나 탁심에서 가는 버스가 있다. 피에르로티 카페를 가기 위해서는 에윕 술탄 사원 뒤편의 무덤들이 드글드글한(...) 언덕을 올라가거나, 해변으로 나와서 거기서 케이블카(Telefelik)을 타고 오르 내릴 수 있다. 케이블카는 악빌로 탈 수 있지만 환승은 안된다. 참고로 유명세탓인지 판매하고 있는 음료값은 아무리 이스탄불이 물가가 비싸다지만, 터무니없이 비싼 수준이니 참고할것.


•미니아튀르크 (Miniatürk)


이스탄불의 테마파크로 터키 전국에 분포한 주요 유적들을 미니어처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주요 관광지에서 좀 떨어져 있어서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데 1453번 버스가 에미뇌뉘와 (여름 한정) 술탄아흐멧을 지난다. 애초에 관광객용 노선이라 이 노선은 이스탄불의 주요 관광지를 거의 다 지난다. 혹은 에윕 술탄 사원이 위치한 곳에서 버스나 돌무쉬를 타도 간다. 입장료는 외국인은 10리라, 터키인은 5리라, (터키 내에서 유학중인) 학생은 3리라이다. 혹은 베식타쉬나 카바타쉬 항구에서 12, 14, 16시에 미니아튀르크를 종점으로 하는 배가 있으니 배를 타고 유유히 할리치를 구경하는 것도 좋다.


•아나돌루 지역(Anadolu Yakası)


이스탄불의 아나돌루 지역[46]은 편입된지 오래되지 않은 곳이라 이렇다 할 사적지는 없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관광객이 적어서 사실 그대로의 터키 일상을 구경하고자 한다면 가장 적절한 지역이다. 구시가지에서 이동한다면 에미뇌뉘에서 하이다르파샤나 쿠즈군주크까지 페리로 이동하는데 하이다르파샤는 남쪽으로 가는 단거리 이동이고, 쿠즈군주크가 보스포러스 다리(Boğaziçi Köprüsü)의 바로 앞이다. 여기서 한 정거장 더 가면 다리 밑을 통과해 베이레르베이[47]로 간다. 신시가지에서 이동하는 경우는 카바타쉬에서 카드쾨이로 이동하는 것이 보통이다. 제톤 1개로 해결가능한 대중교통용 페리(단거리)가 있고 별도 요금이 있는(10~30리라) 유람선 페리(장거리)가 있다. 또한 위스퀴다르(Üsküdar) 뒷골목은 100년 이상된 오래된 집들이 많이 보존되어있는데 사진찍기엔 매우 좋은 그림이 나온다. 찍덕들이라면 한번쯤 가보는것도 나쁘지 않을듯 하다.


•아나돌루 카와으(Anadolu Kavağı)


이스탄불 아나돌루지역 북쪽 끝에 위치한 작은 어촌으로, 굉장히 소박한 이스탄불의 옛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카바타쉬 항구에서 배를 타고 1시간 반쯤 가면 갈 수 있고, 혹은 카드쾨이에서도 가는 버스가 있다. 어떤식으로 가든 상당히 멀다. 아나돌루 카바으에는 요로스 성(Yoros Kalesi)라는 동로마 시절 성채가 있으며, 그곳 위에 올라가면 마르마라해와 흑해가 만나는 경치를 볼 수 있다.


•고양이


이스탄불은 고양이들의 도시다. 항구 도시이기 때문인지 옛날부터 고양이가 많았고, 지금도 많다. [48] 이들 고양이들은 집에서 기르는 애완 고양이가 아니라 그냥 길에서 사는데, 그렇다고 우리나라의 길고양이들처럼 불쌍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스탄불 시민들이 모두 공동으로 돌봐주는 고양이들이라고 보면 된다. 때문에 이스탄불 고양이들은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오기도 하며 사람을 보고 도망치는 일도 없다. 이스탄불을 구경하다 지치면 길거리 카페에 앉아서 고양이들을 구경하는 것도 좋을지도. 심지어 하기아 소피아 안에서도 돌아다니는 여러마리의 고양이를 볼 수 있을 정도.


참고로, 이스탄불 사람들은 이스탄불 고양이들을 매우 사랑한다. 혹시라도 우리나라에서처럼 길고양이를 으르대고 쫓아내다가는 이스탄불 사람에게 얻어맞을 수도 있음을 알아두자.


●교통지옥


도시 자체가 보스포루스 해협을 끼고 아시아와 유럽 두 구간으로 갈라져 있으며, 성 소피아 성당과 여러 유적들이 남은 구시가는 유럽 쪽에 있고 현대화된 신시가는 아시아 쪽에 지어지고 있다. 그래서 구시가 쪽에 사는 많은 터키 샐러리맨들이 아침에 다리를 건너 유럽에서 아시아로 건너가 일하고 저녁에는 유럽으로 돌아온다. 사실상 위스퀴다르 너머 아시아지역에 산업시설들이 밀집해있고, 베이오울루 북쪽으로 상업시설들이 밀집해있기 때문에 두 지역은 오래 전부터 동일생활권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교통은 상당히 불편하다. 바다를 사이로 다리가 두 개밖에 없기 때문에[56] 출퇴근시간마다 극심한 정체가 이어지며, 항구들을 잇는 터키어로 바푸르(Vapur)라고 불리는 배가 여전히 주된 교통수단 노릇을 하지만 느리다. 에미뇌뉘 항구에서 하렘, 위스퀴다르 등 아시아 지역으로 이동할 경우 항해에만 15~20분 가까이가 걸리며, 거기서 버스로 연결되는 교통수단도 빈약한 편이다. 에미뇌뉘 항 바로 앞에는 서울역 환승센터 저리가라 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버스정거장이 있지만 평상시에도 혼잡하다. 가뜩이나 혼잡한 거리에 터키 국가대표팀이나 갈라타사라이(이 지역을 연고로 하는 축구팀)가 원정경기를 나가 우승하기라도 한다면...


도시 한 가운데에 국제공항이 두 개나 있다. 보스포로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서쪽의 아타튀르크 국제공항(İstanbul Uluslararası Atatürk Havalimanı)과 동쪽의 사비하 괵첸 국제공항(Sabiha Gökçen Uluslararası Havaalanı)이 있는데, 두 공항 사이의 교통은 정말 정말 불편하다.[57] 사비하 괵첸 공항은 국내선 노선도 함께 취급하기 때문에 이스탄불에 도착하자마자 다른 지역으로 가는 사람이라면 그때마다 애로사항이 꽃필 것이다. 보통 한국에서 출발하면 아타튀르크 공항에 도착하게 되는데[58], 이곳에서 도심 (관광지가 많은 술탄아흐메트, 파티흐, 베이오울루 등등)에 가려면 하바쉬(Havaş)라고 부르는 공항버스(요금 15TL.)나 택시(도심까지 약 100~120TL.), 혹은 경전철(Hafif metro, 3TL.)을 타야한다. 단 경전철을 타려면 제이틴부르누(Zeytinburnu)역에서 내려 전차로 갈아타야하고, 위스퀴다르 등등 아시아 지역으로 건너가려면 에미뇌뉘(Eminönü)에서 내려 또 배로 갈아타야 한다.[59] 물론 그때마다 요금 2리라가 추가된다. 악빌(Akbil)이라는 교통카드 시스템이 있기는 한데, 우리나라와 달리 고작 환승시 일부 할인이라는 메리트 밖에 없다.[60] 이스탄불에 1주일 이상 머물지 않는이상 쓸 일은 없을듯 싶다. 악빌을 살때 보증금 명목으로 6리라를 추가로 내야 하기 때문이다.(물론 반납하면 보증금을 돌려주지만, 악빌 창구직원은 99.9% 영어를 못한다. 원래 내국인용이라...) 그러나 이스탄불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할 생각이라면 3~4일 이상을 머무를땐(패키지의 코스의 기본이 3일부터 시작) 만드는 것이 경제적으로 유리하고 무엇보다 편하다. 이스탄불 교통 시스템 특성상 여러 종류의 탈것들을 번갈아 타야되는데 그때마다 티켓을 끊으려면 여간 귀찮고 힘든 것이 아니다.

<출처: https://namu.wiki/w/%EC%9D%B4%EC%8A%A4%ED%83%84%EB%B6%88


 
■터키(Turkey)- 다음백과


터키 자연환경


아시아 터키에는 평균높이 1,100m의 청년기 산지들이 북쪽과 남쪽에 우뚝 솟아 중앙 아나톨리아 고원을 둘러싸고 있다

고원 북쪽의 폰투스 산맥과 남쪽의 토로스(타우르스) 산맥이 대체로 동서방향으로 뻗어있어 고원과 좁은 해안저지대를 구분하고 있다. 타우루스 산맥 동부에 있는 질로다이(4,116m)가 이 지역에서 가장 높다. 중앙 아나톨리아는 여러 개의 분지로 이루어진 반건조기후의 단층지괴(斷層地塊)이며, 동부 아나톨리아는 높은 산맥들과 터키의 최고봉(5,137m)인 아리다이(아라라트 산)처럼 최근에 생성된 화구구들로 이루어져 있다.


서부 아나톨리아에는 산맥이 함몰된 곡상들에 의해 곳곳에서 끊어지면서 길게 이어져 있다. 이스탄불을 둘러싼 고원은 터키 북서부의 보스포루스와 다르다넬스 해협이 점하고 있는 것과 같은 계곡들에 의해 깊이 개석되어 있다. 대서양 유역과 인도양 유역의 분수계는 동부 아나톨리아를 비스듬히 가로지르고 있다. 주분수계(主分水界)의 서쪽과 북쪽 지역은 키질·사카리아 강을 통해 북쪽으로 흘러 흑해로 배수되며, 터키 서부지역은 마르마라 해로 배수된다. 지중해로 흐르는 주요하천은 괵수·세얀·오론테스 강의 하류이다. 동부 산지에서 발원하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은 남동쪽으로 흘러 페르시아 만과 인도양으로 빠진다. 터키에서 가장 큰 반 호(湖)는 커다란 염호로 크기가 자주 바뀌며, 배수구가 없다.


터키는 다양한 토양 유형을 가지고 있으며, 북쪽과 남쪽의 습한 변방지역을 따라 적색과 적갈색 포드졸토 지대로 둘러 싸여 있다. 건조한 북서부 일대는 약산성의 황색 및 황갈색 포드졸토로 덮여 있다. 터키는 기후상으로 4개 지역으로 나뉘는데, 바다와 산맥에 크게 영향 받아 내륙과 해안 지방이 서로 대조적인 기후를 보인다.


●터키 국민


터키는 선사시대초부터 인종과 문화가 다른 많은 집단이 모여 있다.이러한 현상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동쪽으로부터의 투르크족의 침입이었다. 그들이 11세기부터 이 지역에 들어오면서 이 나라의 인종 구성에서 지중해인종과 몽골인종의 혼혈로 이루어진 새로운 인종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수적으로 가장 우세한 인종은 지중해-터키 인종인 것으로 보이며, 서해안과 남해안에서는 지중해인종이 우세하다.


내륙과 동부 지방에는 고산족이 다수 섞여 있다. 인구의 90% 이상이 터키어를 모국어로 사용한다. 주요 소수 언어집단은 쿠르드족과 아랍인이다. 인구의 7% 가량이 사용하는 쿠르드어는 시골 및 동부와 남부의 이주민들 사이에서 폭넓게 쓰이며, 인구의 약 1%가 사용하는 아랍어는 주로 남동부 아나톨리아에서 쓰인다.


그리스어·아르메니아어·이디시어는 이스탄불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극소수의 주민들이 사용한다. 거의 모든 투르크인들이 이슬람교를 신봉하며, 수니파가 지배적이다. 소수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도들은 주로 이스탄불·앙카라·이즈미르 등지에 거주한다. 터키 인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히 증가했으나 20세기말에 오면서 성장률이 감소했다.



●터키 정치와 사회


터키는 오스만 제국이 몰락한 이후 1923년에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세운 공화국으로서 1946년까지 1당 국가체제를 유지했다. 이후 여러 정당들이 집권 경쟁을 벌였고 대부분 기간 문민 의회정치로 운영되었다.


1987년과 1995년 2차례 개정된 1982년 신헌법은 의회민주정치체제에 대해 규정하고 있었으며 헌법상 국가원수인 대통령은 터키대의회(국회)에 의해 7년 단임으로 선출되고, 550명의 국회의원은 직접보통선거에 의해 5년 임기로 선출되도록 했다. 2007년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의 임기를 7년 단임에서 5년 중임으로 개정하고, 선출 방식도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변경했다.


2017년에 국민투표를 통해 다시 헌법을 개정했는데, 주요 골자는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중심제로의 변경이었다. 이 헌법에서는 대통령의 임기를 5년으로 정하고 중임이 가능하도록 했으나, 중임 임기중에 대통령이 조기선거를 통해 다시 당선되면 5년의 추가 임기를 재임할 수 있도록 했다. 이 헌법에서는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여, 대통령이 사법 체계에 개입할 수 있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있으며, 의회의 견제 없이 공직자를 바로 임명할 수 있도록 했다.


터키 공화국 성립시에는 인구의 10% 정도만이 글을 읽을 줄 알았으나 아타튀르크의 국민교육 강조 정책에 힘입어 20세기말에 오면서 문자해득률이 성인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국가 교육 체계는 초등교육에 한해 5년간의 무료의무교육을 제공하며 중등교육과정은 6년이다. 대학교 수준의 고등교육 기관이 20개 정도 있다. 정부는 보건복지정책을 관리하고 많은 병원과 진료소를 운영하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료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 평균수명은 71세까지 증가했다.


●터키 역사


BC 7000년 이전에 정착민들이 자리잡았던 아나톨리아는 BC 1900년경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히타이트인들에 의해 점령되었다.


그들은 강성한 국가를 세우고 번성하다가 BC 1200년경에 무너졌다. 그후 프리지아인과 리디아인에게 점령되었으나 동부지역은 토착왕조인 우라르투(아르메니아) 왕국 통치 아래 남아 있었다. 페르시아 제국이 BC 6세기에 이 지역을 차지했으며, 그 이후 그리스 헬레니즘 세력권 안에 들어갔다가 BC 1세기경에 로마에 넘어갔다. 아르메니아 왕국은 양대 세력인 로마 제국(뒤의 비잔틴 제국)과 동쪽의 파르티아 제국(뒤의 사산 제국) 사이의 완충국으로 남아 있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을 수도로 삼으면서 비잔틴 제국의 영향권 안에 들어갔다.

11세기에 투르크 유목민의 한 집단인 오구즈족이 동쪽으로부터 침입해 들어왔다. 12세기에는 오구즈족의 일파인 카이족이 아나톨리아의 동부와 중부를 차지하고, 카이족의 오스만 1세가 오스만 왕조를 세웠다. 그들이 영토를 확장하는 초기 단계에 오스만 일족이 투르크족의 가지스(ghazis:비잔틴 제국에 대항해 싸우는 이슬람교 전사들)를 지도했다.


13~14세기 오스만족은 마침내 서부 아나톨리아와 남동부 유럽의 비잔틴 영토를 차지하고 그리스도교를 신봉하는 발칸 국가들을 속국으로 삼았으며, 동부 아나톨리아의 투르크멘 공국을 점령했다. 15세기에는 더 나아가 발칸 속국들을 직접 통치하고,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여 유프라테스 강(동쪽)과 헝가리(서쪽)까지 영토를 넓혔다. 16세기말경에는 그 세력이 절정에 달해 발칸 제국과 중부 유럽의 헝가리,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 대부분을 포함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오스만 제국은 술탄 쉴레이만 1세(1494~1566)의 통치 이후로는 정치적·행정적·재정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1718년경 오스트리아가 헝가리에서 투르크족을 축출했으며, 러시아는 1783년에 크리미아를 합병했다.


오스만 제국은 19세기에 발칸 제국 대부분과 이집트의 통치권을 잃었다. 19세기말에는 소수 민족과 소수 종교분파에게 지방자치를 용인했던 밀레트(비이슬람 종교자치제) 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하여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조직적인 박해가 시작되었고 결국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라는 비극을 낳았다. 1908년에 젊은 투르크인들이 혁명으로 제국을 되살리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발칸 제국에서의 군대와 영토 상실로 인한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중 터키는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편에 가담했다. 전후 아라비아의 여러 속주와 일부 지역을 잃었지만 격렬한 시민전쟁과 그리스와의 전쟁 결과 1923년 로잔 조약으로 지금의 국경선이 생겼고, 케말 아타튀르크를 대통령으로 한 터키 공화국이 탄생했다. 술탄제와 칼리프제는 폐지되고 아타튀르크의 지도 아래 현대화가 시작되었다.아타튀르크는 터키의 정치·경제·사회체제 전반에 대한 급진적 개혁을 시도했다.


그는 이슬람의 지배적 역할을 축소하고, 터키어를 아랍 문자 대신 라틴 문자로 쓰도록 하므로써 터키 사회에서 종교의 영향을 축소시켰다. 또한 이후 오랫동안 영향력이 지속된 국가통제 방식의 경제발전 정책을 마련했다. 1938년 아타튀르크 사망 후 불안정한 기간과 짧은 군부 통치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의회정치 및 다당제가 정착될 수 있었다.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중립을 지켰으나, 전후 서유럽과 제휴하고 미국의 군사·경제 원조를 받았다.


1952년에는 NATO에 가입했으며, 1953년에는 발칸 협정의 조인국이 되었고, 바그다드 조약(1955, 후에 CENTO로 이름이 바뀜)과 유럽 경제협력기구(OEEC) 및 유럽 의회에 가입했다. 1959년에는 그리스와의 3년에 걸친 키프로스 분쟁을 잠정적으로 해소했다. 1961년 터키 제2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새 헌법이 채택되었으며, 1963년에 유럽 공동시장의 준회원국이 되었다.

1963년말 키프로스에 거주하는 그리스인과 터키인들 사이의 분쟁으로 키프로스에서 내란이 일어나자 그리스와 터키 양국 관계가 급속히 냉각되어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으나 국제연합(UN)의 압력으로 전쟁이 억제되었다.


1987년과 1996년에는 영토분쟁으로 재차 갈등이 빚어졌다. 1974년 키프로스에서 그리스 군사정부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에 맞서 터키군은 북(北)키프로스를 점령했다. 그후 국내정세 불안과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면서 1980년 군부가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계엄령을 선포했다. 2년 후 새 헌법이 대다수 유권자들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1983년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계엄령은 점차 해제되었다. 1983년 과격한 쿠르드족 분리주의 운동의 출현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지속적인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터키는 조국당의 투르구트 외잘 총리 재임기간(1983~89)중에 비교적 정치적인 안정과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1990년대 들어서는 친이슬람계 복지당에 대한 유권자들의 지지가 증가하는 가운데 중도파 정당들이 집권했다.

1982년 이래 내각책임제에 의해 정부가 운영되어 왔으며 대통령은 7년 임기의 간선제였으나, 2007년 개헌을 통해 대통령의 임기를 5년으로 하고 중임이 가능하도록 했으며 직선에 의해 선출되도록 했다. 이 헌법에 의해 2003년부터 총리로 재임했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 2014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대통령이 된 뒤에 대통령 중심제 개헌안을 추진했는데, 2017년 개헌 국민투표에서 결국 개헌안이 통과되었다. 이 개헌안은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중심제의 변경과 대통령의 임기를 5년 중임으로 하되, 중임 임기중에 대통령이 조기선거를 단행하여 당선되면 다시 5년의 임기 수행이 가능하도록 했다.

이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와 총선거가 2018년 6월 24일에 실시되었고, 개표 결과 현 대통령인 에르도안 대통령의 당선이 발표되었다. 헌법에 의하면 에르도안 대통령은 최장 2033년까지 집권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날 개표 결과에 따르면 에르도안 대통령이 주도하는 정의개발당이 42.68%, 민족주의행동당이 11.28%, 쿠르드계 소수당인 인민민주당이 10.94%를 획득 원내 진출이 가능해졌다. 터키 헌법에 의하면, 의회는 정당별 비례대표로 구성되며, 소수당의 난립을 방지하기 위해 10%이상 득표한 정당에서만 원내에 진출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