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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이스탄불(Istanbul) 시가지 & 이스탄불공항에서 인천공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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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및산행

2018. 8. 10.









터키 이스탄불(Istanbul) 시가지 & 이스탄불공항에서 인천공항으로

(2018/6/12일~6/20일,7박9일)


하나투어에서 주관하는 터키/그리스/이집트 3국을 한번에 둘러보고자 하여
터키 이스탄불, 그리스 메테오라-아테네-에기나, 이집트 카이로-룩소-후루가다 등을
중점적으로 관광 하는 패케지 여행으로 2018년6월12일~6월20일(7박9일) 기간 동안
실시한 "[피라미드]이집트/터키/그리스 9일★돌마바흐체+5성3박+추가 10만마일리지"
여행 일정 중 구일째날 마지막날 일정으로 이집트 에서 항공편으로 터키 이스탄불
(Istanbul)에 오전에 도착, 가득찬 정원이란 뜻의 돌마바흐체 궁전과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위치한 보스포러스 해협 선상 관광 그리고 이스탄불의 상징, 성 소피아 성당(성 소피아
박물관) 등 시가지를 탐방하고 나서 이스탄불 공항에서 인천공항으로 귀국하다.

















터키 이스탄불(Istanbul) 시가지 와 보스포러스 해협 등 전경 입니다. 
























이번 터키/그리스/이집트 3국을 여행을 모두 마치고 이스탄불(Istanbul) 공항 에서 인천공항으로 귀국하다



























■터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터키 공화국(터키어: Türkiye Cumhuriyeti 튀르키예 줌후리예티[*]) 또는 단순히 터키(터키어: Türkiye 튀르키예[*], 문화어: 뛰르끼예, 떠끼)는 서남아시아의 아나톨리아와 유럽 남동부 발칸 반도의 동부 트라키아에 걸친 나라이다. 수도는 앙카라이며, 공용어는 터키어, 국교를 명시하지는 않고 있으나[1] 국민의 절대 다수가 이슬람교를 신봉한다.


●개요


터키는 여덟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 북서쪽으로는 불가리아, 서쪽으로는 그리스, 북동쪽으로는 조지아, 동쪽으로는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월경지인 나히체반 자치 공화국), 이란, 남동쪽으로는 이라크와 시리아가 있으며, 북쪽에는 흑해가 있다. 아나톨리아와 동트라키아 사이로는 마르마라 해와 다르다넬스 해협, 보스포루스 해협이 있는데, 이 바다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로 인식되어 터키는 두 대륙에 걸친 나라이므로[2] 지정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요지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3][4] 인종상 터키인이 국민 대다수를 이루며, 그 다음으로는 쿠르드인이 있다. 터키의 주요 종교는 이슬람교, 공용어는 터키어다.


터키는 오스만 제국의 후계 국가이다.[5]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고 1923년에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지도로 민주주의, 세속주의를 받아들인 입헌 공화국으로 변화하였다. 터키는 유럽 이사회, 북대서양 조약기구, OECD, WEOG, G20와 같은 국제기구에 가입하여 서방 세계와 점차 통합하고 있다. 터키는 1963년에 유럽 경제 공동체(EEC)의 준회원국이었으며 1995년에는 관세 동맹 협정을 맺었고, 2005년에는 유럽 연합의 정회원국 가입 협상을 시작하였다. 터키는 또 이슬람 회의 기구(OIC)와 경제 협력 기구(ECO)에 가입하여 중동과 중앙아시아를 위시한 동양과도 문화, 정치, 경제, 산업면에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미국 중앙정보국에서는 터키를 중진국으로 분류하며,[6] 세계의 정치학자와 경제학자들은 지역 강국으로 여기고 있다.[7][8]


●어원


'터키'의 터키어 표기인 '튀르키예'(Türkiye)에서 '투르크'(Türk)는 고대 튀르크어에서 '강한'을 뜻하는데 보통 터키인과 투르크 제국 사람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9] 후대의 변형인 '투-킨(tu-kin)'은 중국인들이 기원전 177년에 중앙아시아 알타이 산맥 남쪽에 살던 사람들에게 붙인 이름이었다.[10] 또 '튀르키예'의 접미사인 '-이예(-iye)'는 '주인' 또는 '~와 관계된'을 뜻하며 아랍어 접미사 '-이야(-iyya)'에서 파생된 접미사이다. 중세 라틴어 접미사 '-이아(-ia)'와 관련되어 '투르키아(Turchia)'라고 쓰이며 중세 그리스어 접미사 '이아(–ία)'가 붙어 '투르키아(Τουρκία)'라고 썼다. '튀르크' 또는 '튀뤼크(Türük)'가 지명으로 쓰인 최초의 기록은 중앙아시아 돌궐(괴크 튀르크)의 오르혼 비문(서기 8세기경)에 등장한다. 영어 '터키(Turkey)'는 중세 라틴어 '투르키아'에서 나온 말이다.(1369년경)[10]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이 영어식 국명이 사용되고 있으며 중국어 표기인 '투얼치(중국어: 土耳其, 토이기)' 역시 이 영어식 국명을 음역한 것이다.


<역사>


●고대


오늘날의 터키 영토 대부분을 이루는 아나톨리아 반도는 아시아와 유럽이 상호작용하는 장소로서 지구상에서 매우 오래전부터 인류가 거주하던 땅이었다. 차탈회윅(신석기 3기), 차외뉘(신석기 1기에서 신석기 3기), 네발리 코리(신석기 2기), 하클리아르(신석기 3기), 괴베클리 테페(신석기 2기), 메르신 등 초기 신석기 시대 거주지는 지구상 최초의 인류들이 살던 거주지로 여겨진다.[11] 트로이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 시대로, 철기 시대까지 취락이 지속되었다. 역사 시대로 접어들면 아나톨리아 사람들은 인도-유럽어, 셈어, 카르트벨리어를 비롯하여 기원이 불확실한 여러 언어를 썼다. 사실 고대 인도-유럽어인 히타이트어와 루위아어를 놓고 어떤 학자들은 아나톨리아가 인도-유럽어를 확산시킨 중심지라는 가설을 제시하기도 하였다.[12]

이 땅에 들어선 최초의 제국은 히타이트로 기원전 18세기에서 13세기까지 존속하였다. 그 다음은 인도-유럽 계통의 프뤼기아인들이 패권을 잡았으나, 기원전 7세기에 킴메르인의 침략으로 멸망한다.[13] 프뤼기아의 가장 강력했던 후계국가는 뤼디아, 카리아, 뤼키아였다. 뤼디아인과 뤼키아인은 인도-유럽어에 기원을 둔 언어를 구사했는데, 두 언어는 히타이트와 헬레니즘 시대 이전에 非인도-유럽어의 요소를 받아들였다.[출처 필요]


기원전 1200년경부터 아나톨리아 해안에는 아이올리스와 이오니아의 그리스인들이 정착하였다. 이 지역은 기원전 6~5세기에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에 정복되었으며, 이후 기원전 334년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지배를 받게 된다.[14] 헬레니즘 시대에 아나톨리아는 비튀니아, 카파도키아, 페르가몬, 폰토스 등 여러 헬레니즘계 소왕국으로 분열되었으며, 기원전 1세기 중엽에 모두 로마에 복속된다.[15] 기원후 330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뷔잔티온을 로마 제국의 새 수도로 삼아 노바 로마('새로운 로마', 나중에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이스탄불이 된다.)라고 개명하였다. 서로마 제국이 몰락한 후에도 이 도시는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의 수도로 번영했다.[16]



●튀르크인과 오스만 제국


크느크(Kınık) 오우즈 튀르크족은 10세기경 무슬림 세계의 변방이었던 카스피 해와 아랄 해 북쪽인 오우즈 연맹의 얍구 칸국 살던 사람들로, 셀주크 가문은 이들의 분파였다.[17] 11세기에 셀주크 일파는 조상 대대로 살던 땅을 떠나 아나톨리아 동부로 이주하였으며,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말라즈기르트)에서 승리하면서 이 땅은 오우즈 튀르크족의 새 터전이 되었다. 셀주크의 승리로 아나톨리아의 셀주크 술탄국이 부상하여, 중앙아시아 일부와 이란, 아나톨리아, 서남 아시아를 아우르던 셀주크 제국의 개별 분파로 성장하였다.[18]


1243년에 셀주크 군대는 몽골인들에게 패배하고, 제국의 패권은 점차 무너지게 된다. 이후 오스만 1세가 지배하던 일개 튀르크 공국이 200여년이 넘는 세월 간 발전하여 아나톨리아와 발칸 반도, 레반트를 아우르는 오스만 제국이 되었다.[19]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메흐메트 2세의 오스만 군대에 함락되어,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하였다.


16~17세기에 오스만 제국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대국이었으며, 발칸 반도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남부를 통해 중부 유럽으로 점차 진출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과 종종 충돌하였다.[20] 이에 맞서 지중해의 제해권을 지키고자 합스부르크 에스파냐, 베네치아 공화국, 성 요한 기사단이 신성 동맹을 결성하였다. 그런 가운데 동아시아와 서유럽 사이의 고대 해상로를 독점한 오스만 제국은 인도양에서 포르투갈과 자주 대립하였으며, 1488년 희망봉의 발견 이래 점차 타협이 이루어졌다.


이후 쇠퇴기에 접어든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1914년~1918년)에서 동맹국편으로 참전하여 결국 패배하였다. 세계 대전 당시 막대한 인명 희생을 부른 아르메니아 학살도 이때 일어났다.[21] 1918년 10월 30일 무드로스 정전 협정으로 승전국인 연합국은 1920년 세브르 조약을 통해 오스만 제국을 분리시키려 하였다.[19]



●공화정 시대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연합군이 이스탄불과 이즈미르를 점령하면서 터키의 민족 운동이 촉발되었다.[4] 갈리폴리 전투에서 공훈을 세운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장군의 주도로 세브르 조약 규정을 철회시키기 위한 터키 독립 전쟁이 일어났다.[22] 1922년 9월 18일, 점령군은 퇴각하였으며, 새로운 터키의 나라가 건국되었다. 11월 1일에 새로이 열린 의회는 공식적으로 술탄국의 폐지하여, 623년간 이어진 오스만 제국의 지배가 종식되었다. 1923년 7월 24일 로잔 조약에서 신생 터키 공화국은 오스만 제국의 후계 국가로서 그 주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으며, 1923년 10월 29일에 새 수도 앙카라에서 터키 공화국이 정식으로 건국을 선포하였다.[4]


무스타파 케말은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며, 옛 오스만의 잔재를 털어내고 새로운 세속 공화국의 건설을 목적으로 여러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4] 1924년에 그는 632년 이래 1300년 동안 이어져 오던 칼리프제를 폐지하였고, 터키 공화국의 기본 정신인 세속주의를 법으로 제정했다.


1925년에는 복장 개혁을 시행하여 여성들의 복장을 해방시키고, 과거에 금지되었던 여성의 교육권을 보장해 남녀평등교육을 시행하였으며, 이슬람력을 폐지하여 유럽식 그레고리력으로 대체했다. 1926년에는 민법을 개정해 일부다처제를 금지하고 일부일처제를 확립하였으며, 1928년에 터키어의 아랍 문자 표기법을 폐기하고 로마자 표기법으로 변경하였다. 1930년에는 여성에게도 선거권을 부여했다. '가족명에 관한 법'에 따라, 1934년에 터키 의회는 무스타파 케말에게 '아타튀르크'(아버지 터키인, 즉 '국부')라는 명예 성명을 부여하였다.[3]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중 대부분 터키는 중립을 취하였으나, 1945년 2월 23일에 의례적인 의미로 연합군측에 참전하였으며, 1945년 유엔의 창립 회원국이 되었다.[23] 소비에트 연방이 터키 해협에 군사 기지를 요구하는 가운데 옆 나라 그리스에서는 공산주의자와 내전을 벌이면서 위기 상황이 조성되자, 1947년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하게 된다. 이 독트린에서 미국은 터키와 그리스의 안보를 보장하기 위해 개입할 수 있음을 밝혔으며, 그 결과 미국이 대규모로 군사 및 경제 원조를 제공하게 되었다.[24]

터키는 한국 전쟁에서 유엔군으로 참전하였으며, 1952년에는 북대서양 조약기구에 가입하여 지중해로 진출하려는 소련의 팽창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이후 키프로스에서 십여 년간 내전이 벌어졌고, 1974년 7월에 그리스인들의 군사 정변으로 마카리오스 3세 대통령이 실각하고 니코스 삼프손이 독재 정권을 세우자, 터키는 1974년에 키프로스 공화국을 침공하였다. 9년 뒤에 북키프로스 튀르크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 나라는 오직 터키의 승인만 받은 나라이다.[25]


1945년에 일당제 시대가 종식된 이후, 다당제 시대에는 수십여 년간 긴장을 초래하였으며, 1960년대에 1980년대 사이에 정치적 불안 상태가 계속되면서 1960년, 1971년, 1980년에 군사 정변이 일어났으며, 1997년에는 1997년 터키 군부 협정 시기이기도 하였다.[26] 한편 1980년대부터 터키 경제가 자유화되어 이 나라의 경관이 바뀌게 되며, 이후 수십 년 동안 높은 성장과 위기가 잇따랐다.[27]


●지리


터키는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있는 나라이다.[28] 아시아 쪽 터키 영토(주로 아나톨리아로 구성)는 국토의 97%를 차지하며, 보스포루스 해협, 마르마라 해, 다르다넬스 해협(흑해와 지중해를 이어준다.)을 끼고 있는 유럽 쪽 터키 영토는 국토의 3%에 불과하다.[29]


터키의 영토는 길이로는 1,600 km, 폭 800 km에 이르며, 대체로 직사각형 모양이다.[30] 호수를 포함한 터키의 육지 면적은 783,562 제곱킬로미터이며, 아시아 대륙에 속하는 영토는 755,688 제곱킬로미터이고, 유럽 대륙에 속한 영토는 23,764 제곱킬로미터이다.[31] 터키는 세계에서 37번째로 넓은 나라이며, 프랑스 본토와 영국 영토를 합친 것과 맞먹는다. 이 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 싸여있는데, 서쪽에는 에게 해, 북쪽에는 흑해, 남쪽에는 지중해가 있다. 또 북서쪽으로는 마르마라 해가 있다.[32]


터키의 유럽 영토인 동부 트라크야는 그리스와 불가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아시아 쪽 영토인 아나톨리아(소아시아)는 중앙에 고원 지대와 좁은 해안 평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사이로 북쪽에는 쾨로을루 산맥과 도우 산맥(폰토스 산맥)이, 남쪽에는 토로스 산맥(타우루스 산맥)이 뻗어 있다. 동부 터키는 산악 지형이 더욱 발달되어 있으며, 유프라테스 강, 티그리스 강, 아라스 강 등 여러 강의 수원지이고, 반 호와 터키 최고봉 아라라트 산(높이 5,165m)이 있다.[32][33]


터키는 7개의 인구 조사용 지역으로 나뉘는데 마르마라 지역, 에게 해 지역, 흑해 지역, 중앙아나톨리아 지역, 동아나톨리아 지역, 동남아나톨리아 지역, 지중해 지역이 바로 그것이다. 흑해 해안을 따라 길게 이어진 북부 아나톨리아의 울퉁불퉁한 지형은 길고 좁은 띠 모양이다. 이 지역은 터키 총 면적의 1/6을 이룬다. 일반적으로 아나톨리아 내륙 고원은 동쪽으로 갈수록 점점 지형이 험해진다.[32]


터키의 다양한 경관은 복잡한 지각 운동의 산물로, 오랜 세월동안 이 땅을 형성하였으며 상당히 잦은 지진과 이따금 일어나는 화산 분출은 지금도 일어나는 지각 운동의 좋은 증거이다.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은 오늘날의 흑해를 형성한 터키의 단층선 때문에 생겨났다. 국토 북쪽에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어진 지진 단층선 때문에 1999년에 대지진이 일어나기도 하였다.[34]


●기후


지중해와 접하고 있는 터키의 해안 지방은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를 보여 여름에는 고온 건조하고 겨울에는 한랭 습윤하고 온화한 기후를 보인다. 건조한 내륙 지역은 기후가 훨씬 혹독하다. 해안과 가까운 산맥 때문에 터키 내륙은 계절차가 대단히 큰 대륙성 기후가 나타난다. 고원의 겨울은 특히나 춥다. 동부의 산악 지방에서는 기온이 영하 30도에서 40도까지 내려가기도 하며, 연중 120일간 지표에 눈이 남기도 한다. 서부의 겨울 기온은 평균 영하 1도이다. 여름은 덥고 건조하며, 기온은 보통 낮에 30도 이상이다. 연중 강수량은 평균 400mm로, 고도에 따라 차이가 있다. 가장 건조한 지역은 코니아 평야와 말라티아 평야로, 이 곳의 연중 강우량은 대개 300mm 이하이다. 가장 습윤한 달은 5월이며, 가장 건조한 달은 7월과 8월이다.[35]


●정치


터키는 의회 제도를 채택한 대의 민주주의 국가이다. 1923년에 터키 공화국이 성립한 이래 터키는 강력한 세속주의 전통을 발전시켰다.[36] 터키 헌법은 이 나라 법의 근간이다. 헌법에서 정부의 주요 원칙을 밝혔으며, 터키를 단일 중앙 국가로 규정하였다.

국가 원수는 대통령이다. 대통령의 임기는 5년 중임으로, 직선제로 선출된다(2007년 이전에는 7년 단임에 간선제). 현직 대통령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으로, 압둘라 귈의 뒤를 이어 2014년 8월 10일에 국민에 의한 직선제로 선출되었다. 총리와 내각이 행사하며, 입법권은 단원제 의회인 터키 대국민의회의 몫이다. 사법부는 행정부 및 입법부와 독립되어 있으며, 헌법 재판소에서는 터키의 법률이 헌법에 일치하는지를 결정한다. 행정 법원은 행정 소송의 마지막 심급 재판소며, 대법원은 그 밖에 다른 소송을 맡는다.[37]


총리는 의회에서 정부의 신임을 묻는 투표를 통해 선출되며, 대개 원내 다수 의석을 차지한 정당의 당수가 선출된다. 터키의 현직 총리는 아흐메트 다부토글루이며, 여당인 정의개발당은 보수 정당으로 2001년 경제 위기 직후에 열린 2002년 터키 총선거에서 34%의 득표율로 원내 과반 의석을 확보하였다.[38] 2007년 총선에서 정의개발당은 46.6%를 득표하여, 원내 과반을 지킬 수 있었다.[39] 총리와 내각 국무위원은 의회 의원이 될 수 없으나, 대부분은 의원 출신이다. 2007년에 국가 세속주의와 입법부의 사법 기능을 놓고 일련의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대선에서는 과거에 이슬람 정당에 소속된 바 있던 압둘라 귈이 당선되어 논란이 있었으며,[40] 정부에서 대학교 내 두건 착용 금지를 철회하려는 개혁안을 놓고 헌법 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이 나기도 하였다.[41]

1933년부터 터키는 남녀 양성의 보통선거를 규정하고 있으며, 18세 이상의 모든 터키 시민은 투표권이 있다. 2004년 기준으로 터키에는 50개의 정당이 등록되어 있으며, 이들의 이념은 극좌에서 극우까지 다양하다.[42] 헌법 재판소는 반(反)세속주의나 분리주의를 추구하는 정당에 공적 자금 지원을 박탈하거나 아예 해산시킬 수 있다.[43][44]


터키 의회는 550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며, 임기가 4년인 이들은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로 81개의 행정 주를 대표하여 85개 선거구에서 선출된다. (이스탄불은 선거구가 셋으로 분리되며, 앙카라와 이즈미르는 각각 둘로 분리되는데, 이 도시들은 인구가 많기 때문이다.) 의회에 절대 다수당이 없고 군소 정당이 난립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최소 10%의 득표를 얻은 정당만 원내 대표자를 배출할 권리가 있다.[42] 이 제한선 때문에 2007년 선거에서 세 정당이 원내에 진입하였다. (2002년에는 두 정당만 진입)[45][46] 그러나 입후보자의 원내 교섭 단체 구성을 통해 현재 일곱 정당이 원내에 진입하고 있다. 그렇지만 무소속 후보자는 자신의 지역구에서 최소 10%의 표를 얻어야 의원에 선출될 수 있다.[42]


2007년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의 임기를 7년 단임에서 5년 중임으로 개정했으며, 선출 방식 또한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개정했다. 이에 따라 치러진 첫 대선(2014년 8월 10일)에서 정의개발당의 에르도안 전 총리가 당선되었는데, 그가 선거 운동 기간에 정부 형태를 내각제에서 대통령제로의 개헌 추진을 주장함에 따라, 대통령제로의 개헌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는 야당 일각에서 반민주적이라고 비판받는다.


2017년 개헌 국민투표를 통하여 94년만에 의원 내각제에서 대통령제로 변경되었다.



●문화


터키는 오우즈 튀르크, 아나톨리아인, 오스만 제국(이 나라 자체도 그리스-로마 문화와 이슬람 문화의 연장이다), 그리고 탄지마트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는 서구 문화와 전통이 혼합되어 다양한 문화를 창출하였다. 원래 이러한 문화 혼합은 터키인들이 중앙아시아에서 서쪽으로 이주할 때 여러 민족들과 접촉하면서 생겨났다.[96][97] 터키는 종교적인 옛 오스만 제국에서 강력한 정교 분리 정책을 견지한 근대 국가로 변모하였으며, 예술 표현의 방식 역시 다양해졌다. 공화정 초기에 터키 정부는 박물관, 극장, 오페라 공연장, 건축 등 순수 예술에 많은 자원을 투자하였다. 다양한 역사적 요소는 터키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 중요하다. 터키 문화는 "근대" 서구식 국가가 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전통 종교와 역사적 가치를 지키고 있다.[96]


터키 음악과 문학은 이러한 다양한 문화 혼합의 좋은 사례인데, 오스만 제국이 이슬람 세계 및 유럽 세계와 상호 작용하면서 오늘날 터키의 음악과 문학에 터키, 이슬람, 유럽이 섞였기 때문이다.[98] 터키 문학은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대개 페르시아 문학과 아랍 문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오스만 말기에 중 특히 탄지마트 이후에는 터키 민속 문화와 유럽 문예 전통이 점차 강해졌다. 가령 문화적 영향의 혼합은 "문화의 충돌과 뒤섞임의 새로운 상징"이라는 형태로 극화하여 200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오르한 파무크의 책과 같은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99]


터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건축 요소 역시 수백 년 간 이 지역에 영향을 끼친 여러 전통의 독특한 혼합을 보여준다. 전통적인 비잔티움 건축과 후대의 오스만 건축의 수많은 건축물들이 터키 도처에 남아있으며, 여기에 지역과 이슬람 전통이 절묘하게 섞여있다. 시난은 오스만 건축의 위대한 고전기 건축가로 널리 평가받는다. 18세기부터 터키 건축은 점차 서양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게 되어, 특히 이스탄불에서는 돌마바흐체 궁전이나 츠라안 궁전과 같은 건축물들이 수많은 현대식 마천루와 함께 하나의 도시 경관을 이루어 상이한 전통을 보여주고 있다.[100]


●종교


터키는 공식 국가 종교가 없는 세속 국가로, 터키의 헌법에서는 양심과 종교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다.[101][102] 세계 무슬림 인구에 관한 2009년 자료에 따르면, 터키에서 7,360만 명의 주민, 즉 전체 인구의 98%가 무슬림이라고 한다.[103] 2014년 현재 무슬림은 7,466만 명[104], 즉 전체 인구의 98.6%[105]이다. 이들 무슬림 대다수는 수니파(85~90%)이며, 그 외 주요 종파로 알레비파(10~15%), 시아파, 열두이맘파의 분파가 700~1,100만 명 있다고 한다.[103] 최상위 이슬람 종교 기관은 종무국(터키어: Diyanet İşleri Başkanlığı)으로, 하나피 법학파의 이론을 해석하고, 터키에 등록된 모스크 75,000여 곳 활동을 관할하며, 지역과 주의 이맘을 고용하는 일을 맡고 있다.[106] 그러나 2007년 전국적인 여론조사에 따르면, 터키 시민의 96.8%가 종교를 가지고 있으며, 무종교와 무신론자는 3.2%로 나타났다.[107] 다른 종교를 믿는 소수 민족은 100,000 명 이하로,[108] 주로 기독교인데 대부분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나 그리스 정교회(64,000명)이다. 유대교(주로 세파라드 유대인, 26,000여명)를 믿는 종교인들도 있다.[109][110] 퓨 연구 센터의 2002년 보고서에서 터키인 65%가 "종교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답하였으며,[111] 2005년 유로바로미터 여론 조사에 따르면 터키 시민 95%가 "신은 존재한다."고 믿는다고 응답하였다.[112] 사실상 이스탄불과 이즈미르, 마르마라 해 지방과 에게 해 지방 사람들은 그다지 종교적이지 않다. 무신론을 믿는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찾아 볼 수 있다.[113]


●대외 관계


터키는 유엔(UN, 1945년),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1948년), 이슬람 회의 기구(OIC, 1969년), 유럽 안보 협력 기구(OSCE), 경제 협력 기구(ECO, 1985년), 흑해 경제 협력 기구(BSEC, 1992년), G20 공업화 국가(1999년)의 창립 회원국이다. 2008년 10월 17일, 터키는 2008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선거에서 151표를 얻어 서유럽과 여타 지역을 대표하여 오스트리아(132표)와 더불어 유엔 안보리의 비상임 이사국으로 선출되었다.[114] 터키의 안보리 비상임 이사국 지위는 2009년 1월 1일부터 발효하였다.[114] 터키는 1951년 ~ 1952년, 1954년 ~ 1955년, 1961년에도 안보리 이사국을 맡은 바 있다.[114]


터키는 전통적으로 서방 지향적인 노선을 견지하였으며, 터키 외교 정책에서 대유럽 관계는 늘 중요한 사안이었다. 터키는 1949년에 유럽 평의회에 창립 회원국으로 가입하였으며, 1963년에 유럽 경제 공동체(EEC, 유럽 연합의 전신)의 준회원국 지위를 신청하여 1963년에 앙카라 협정으로 준회원국 지위를 얻었다. 수십 년간 정치 교섭 끝에 터키는 1987년에 유럽 경제 공동체 정식 회원국 지위를 신청하여, 1992년에는 서유럽 연합의 준회원국이 되었고, 1995년에는 유럽 연합과 관세 동맹 협정을 맺었으며 2005년 10월 3일부터 공식적으로 유럽 연합과 정식 가입 협상에 돌입하였다.[115]


터키가 큰 나라인데다 특정 사안 때문에 유럽 연합 가입 절차는 최소 15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116] 특히 유럽 연합 회원국 일부가 가입에 반대하고 있는데, 이와 관련한 논란 가운데는 1974년 터키의 키프로스 침공을 둘러싸고 유럽 연합 회원국인 키프로스 공화국과 겪고 있는 분쟁도 있다. 1974년부터 터키는 키프로스 섬 북부에 북키프로스 튀르크 공화국을 수립하고 그리스계 키프로스인의 키프로스 공화국을 이 섬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북키프로스를 승인하고 지지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터키가 유일하다.[117]


북키프로스 문제는 터키가 10여 년이 넘도록 유럽연합의 공식가입 후보국인데도 가입을 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앙숙이었던 그리스로부터 유럽연합 가입 지지를 간신히 받았다지만 안 그래도 유럽연합 경제영향 축소를 우려한 독일과 프랑스의 가입반대에 어려운 상황인데 국제사회에서도 인정받지 못한 미승인국 때문에 더더욱 가입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렇기에 북키프로스가 존재하는 한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은 영영 불가능할 거란 견해도 존재한다.[출처 필요]


1991년 8월 25일 벨라루스가 독립하자, 터키는 1991년 12월 16일 세계 최초로 벨라루스를 승인하였다. 이어서 양국은 1992년 5월 25일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벨라루스는 앙카라에, 터키는 민스크에 각각 대사관을 두고 있다. 인도네시아와의 관계는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자바에 포르투갈이 식민지화를 시도하자 자바의 이슬람교 술탄은 이에 저항하며, 오스만 제국에 도움을 청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이에 대해 거대한 배와 병력을 파견하였고 이들은 이슬람 형제의 나라를 돕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로 인해 오늘날에도 양국은 긴밀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각각의 수도에 각각 대사관을 두고 있다.[118][119]

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ED%84%B0%ED%82%A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