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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서안(西安) 법문사(法門寺)-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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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5. 24.

2.서안(西安) 법문사(法門寺)-법보신문

  • 김규보 기자
  • 승인 2015.10.05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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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과 어둠 속에서 솟구쳐 오른 실크로드의 빛

▲ 법문사 입구에서 바라본 합십사리탑. 부처님 지골사리가 발견된 뒤 중국정부는 우리 돈으로 4000억원을 들여 법문사 중창불사를 진행했다.


1987년 4월3일 서안(西安)에서 서쪽으로 110km 떨어진 법문사(法門寺). 8각 13층 진신보탑(眞身寶塔)을 보수하던 이들의 눈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바닥을 파내고 내려가자 온갖 진귀한 금은 동전들과 함께 조그마한 석문(石門)이 발견된 것이다. 그것은 법문사가 1000년 동안 숨겨왔던 지하궁전으로 들어가는 비밀의 문이었다. 석문 안에서 당나라 황실 유물 3000여 점이 쏟아져 나왔다. 실크로드를 지배하며 국력을 뻗어나갔던 당나라의 유물들은 그 방대한 양과 화려함으로 중국뿐 아니라 세상을 경악케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때까지 전설처럼 전해지던 부처님 지골사리(指骨舍利)의 발견이었다. 지하궁전에 봉안된 불지사리(佛脂舍利) 4과 가운데 세 번째로 발굴된 사리가 부처님 왼손 중지로 판명됐다. 곁에 놓인 진신지문비(眞身誌文碑)가 아쇼카왕에 의한 지골사리 이운을 증명하고 있었다. 당시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은 이를 두고 “천하의 천금과도 바꿀 수 없다”며 감탄했다. 일설에 따르면 장쩌민은 지골사리를 친견한 후 국가주석 자리에 올랐다고 한다.

후한 환제·영제 시대에 창건
부처님 지골사리 발견되면서
황실사찰로서 전성기 누려
한때 스님 5000명 머물기도

당나라 몰락과 더불어 쇄락
의종이 지하궁전 밀봉한 뒤
지골사리는 전설로만 남아

열흘 폭우로 진신보탑 함몰
복원공사 진행되던 1987년
지하궁전·지골사리 발굴돼

 

세상의 모든 금은보화를 가질 수 있다 해도 결코 내어줄 수 없는 보물. 불멸의 진리를 가리켰던 지고지순한 부처님 손을 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순례자의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더군다나 이곳은 실크로드의 출발점 아닌가. 비단 가득 실은 대상들의 행렬이 닻을 올렸던 곳, 저 멀리 희미하게 반짝이는 불법에 닿으려던 구법승들의 발걸음이 시작된 장소. 법문사와 지골사리는 역사적 의미를 뛰어넘는 상징으로서 구도자의 마음을 환희롭게 장엄하고 있다. 순례단의 첫 방문지가 법문사라는 점이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건 이러한 이유에서일 게다.

서안공항에 도착한 순례단은 가볍게 허기를 달랜 뒤 법문사로 향했다. 서안을 빠져나와 고속도로를 1시간30분 달려 법문사 톨게이트를 통과하니 너른 평원 끝에 점처럼 박혀있는 법문사가 보인다. 꽤 멀리 있는 것 같은데도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크기를 짐작해볼 수 있다. 실제로 입구인 불광문(佛光門)에서 마주한 법문사의 위용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지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하고 있다. 관광객들이 많이 보이지 않아 의아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제아무리 사람이 많아봤자 이 거대한 공간을 채우기는 역부족일 터.

불광문을 지나 반야문(般若門)에서 전동차를 탑승한다. 반야문에서 지골사리가 봉안된 합십사리탑(合十舍利塔)까지는 불광대도(佛光大道)가 놓여있다. 불광대도의 길이는 1.23km, 폭은 108m에 달한다. 걸어서 20분 넘는 거리다. 간혹 몇몇 관광객들이 이 길을 뚜벅뚜벅 걷기도 하는 것 같지만 대부분은 순례단처럼 전동차를 이용한다. 특히 오늘은 습도가 높아 땀이 줄줄 흘러내릴 지경이니 전동차의 존재가 고맙게 느껴진다.

불광대도 양옆으로 불보상들이 법문사를 호위하듯 서있다. 유심히 살펴보니 머리가 보통 사람 키보다 훨씬 크다. 그 규모에 또 한 번 감탄하면서도 거대한 공간의 거대한 것들이 선사하는 위압감에 서서히 잠식되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부처님 지골사리가 모셔졌다는 사실은 이미 불광문에 당도할 때 머릿속에서 지워져버렸다. 대신 중국정부가 국력을 과시하는 현장을 목도하고 있다는 당혹스러움이 마음을 어지럽힌다. 역사와 신심, 심지어는 부처님까지 뒤덮어버릴 정도의 힘과 욕망이 지금 법문사에 조악하게 나열돼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전동차는 어느새 합십사리탑에 도착했다. 합십사리탑의 높이는 148m로 50층 건물과 맞먹는다. 대만의 유명 건축가 이조원(李祖原)이 설계했으며 2009년 5월 완공했다. 중국정부는 합십사리탑을 포함, 법문사를 중창하는 데 우리 돈으로 4000억원을 투여했다. 합장하는 두 손을 형상화한 탑 중앙에는 부처님 지골사리가 모셔져 있다. 정기적으로 지골사리를 공개하고 있는데, 실망스럽게도 오늘은 친견할 수 있는 날이 아니었다. 아쉬운 마음 달래며 합십사리탑 안으로 이동한다.

▲ 합십사리탑 내 석가모니 부처님. 순례단이 예불을 올리고 있다.


탑 내부 역시 넓고 높으며 거대한 것은 마찬가지지만 분위기만큼은 바깥과 사뭇 다르다. 차분한 공기가 절로 마음을 경건하게 만들어주는 가운데 사람들이 모여 손을 모아 기도하고 있다. 사천왕과 포대화상을 지나 인자한 미소의 석가모니 부처님을 만난다. 가이드에 따르면 지골사리가 봉안된 탑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윗부분 외부에 조성됐다. 순례단 스님들이 예불을 올리며 삼귀의와 ‘반야심경’으로 지극한 마음을 표현한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던 중국인들도 합장하고 예불에 동참한다. 이 순간을 과연 어떤 언어로 그려낼 수 있을 것인가. 말로는 차마 담아낼 수 없는 감정의 물결이 순례단을 감싸 안는다. 찬란한 진리의 빛이 모든 존재들에 닿기를, 모두는 한 마음으로 서원하고 또 서원했다.

▲ 부처님 지골사리가 발견된 8각 13층 진신보탑.


예불을 마친 순례단은 합십사리탑을 빠져나와 한참을 걸은 뒤 왼편으로 방향을 꺾어 법문사 진신보탑에 이른다. 법문사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모조리 모여든 것처럼 시끌벅적하다. 비로소 부처님 지골사리가 발견된 역사적 현장에 당도한 것이다. 지골사리는 어떤 연유로 법문사 진신보탑에 봉안됐던 것일까.

법문사는 후한(後漢, 147~189년)의 환제(桓帝)·영제(靈帝) 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본래 이름은 아육왕사(阿育王寺, 아쇼카왕사)였다. 형제 99명을 살육하고 왕위에 오른 아쇼카는 뒤늦게 이를 참회하며 불교에 귀의한다. 제3차 결집을 후원하는 한편 부처님이 남긴 사리를 나라 안팎으로 보낸다. 포교를 위해서였다. 이때 석리방(釋利房) 등 18명의 스님들은 진신사리 19과를 가지고 험난한 파미르 고원을 넘어 중국으로 향했다. 목숨 건 여정 끝에 중국에 도착했지만 불법이 꽃필 수 있는 여건은 무르익지 않았다. 이들은 부처님 사리를 서안 인근의 성총에 묻었다.

부처님 사리가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은 인도 서북부 안식국(安息國)의 왕자 안세고(安世高)에 의해서였다. 왕위를 버리고 불문에 귀의했던 안세고는 역경승(譯經僧)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가 성총에 머무르던 어느 날 밤이었다. 대지에서 솟아오른 광채가 하늘을 가르며 북두칠성까지 이어졌다. 예사롭지 않게 여긴 안세고가 그곳을 파보니 산스크리트 문장이 쓰인 7개의 푸른 벽돌과 함께 진신사리가 있었다. 그 가운데 지골사리를 봉안해 조성한 사찰이 아육왕사, 오늘날의 법문사다.

이후 법문사는 당나라 황실사찰로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스님 5000명이 수행하며 부처님 법을 받들었다. 뿐만 아니라 30년에 한 번씩 봉행했던 공양의식은 황실이 주도하는 국가적 행사로서 법문사의 위상을 드높였다. 당나라 황실은 다른 사찰의 사리보다 법문사 사리를 중요시했다. 공양을 위해 법문사에서 서안으로 지골사리를 이운할 때면 백성들이 길을 가득 메웠으며 황제는 눈물 흘리며 절을 올렸다. 공양의식이 열리는 해는 어김없이 풍년이 들고 사람들은 화목했다고 전해진다.

▲ 진신보탑 내 지하궁전. 통로 끝으로 진신사리가 1000년 동안 잠들어있던 방이 보인다.


하지만 법문사는 당나라의 몰락과 더불어 쇄락하기 시작했다. 결국 9세기 후반, 당 의종(懿宗)은 진신보탑 지하궁전을 봉해버렸고 지골사리는 전설 속 존재로 남게 된다. 1568년과 1609년 대지진으로 무너지고 재건되기를 반복했던 진신보탑은 1976년 지진으로 또다시 기울어지는 참사를 겪었다. 1981년 8월에는 열흘 이상 격렬한 폭우가 휘몰아치면서 탑의 서남 측 대부분이 함몰됐다. 중국정부는 지역주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복원공사에 나섰다. 당 의종이 지하궁전을 밀봉한 후 전설이 됐던 지골사리가 사람들 눈앞에 홀연히 나타났던 것은 바로 그 과정에서였다.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탑돌이를 진행한 순례단은 계단을 따라 지하보궁으로 내려간다. 곧 금빛 불상들로 장엄된 벽면과 지골사리를 보관했던 사리함, 지하궁전으로 연결된 통로가 나타난다. 허리를 굽혀 지하궁전을 들여다본다. 그리 길지 않은 통로 끝에 자그마한 방이 자리 잡고 있다. 저곳에서 1000년을 계셨다. 적막과 어둠 속에서 1000년을…. 얼굴에 송골송골 맺혀있던 땀방울들이 눈물인양 뺨을 타고 미끄러진다. 예의 적막과 어둠이 장막을 쌓아올리며 지하궁전을 1000년의 고독으로 물들인다. 하지만 통로 끝 자그마한 방에서 불꽃처럼 타오르는 빛 하나. 그 광채가 대지를 뚫고 솟구쳐 올라 하늘을 가르며 북두칠성까지 이어진다. 지골사리는 친견하진 못했지만 이것으로 충분하다. 우리가 확인한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마음이었으니.

김규보 기자 kkb0202@beopbo.com


[1313호 / 2015년 10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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