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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魯相칼럼]『500번 넘게 선 주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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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5. 29.

[柳魯相칼럼]
500번 넘게 선 주례 이야기

 

나는, 지금까지 혼인하는 사람들을 위한 예식장에서, 참으로 많은 주례를 맡았다. 198110월에 한국외환은행 차장에서 승진, 처음으로 지점장으로 발령을 받아 간 곳이, 부산 동래구연산동 로터리에 있는 동래지점(후일에 연산동지점으로 이름이 바뀜)이었다. 지점장으로 부임하자마자, 큰 예금을 하고 있는 거래처의 부탁을 받아, 42세 젊은 나이에 처음으로 주례를 맡게 되었다. 그때는, 주례의 역할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몰랐다. 주례석에 올라가니 벌벌 떨렸다. 혼례식을 그르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으로 주례를 시작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나는, 은행뿐만 아니라 은행을 떠나 10여년 제조업 몇 군데를 돌아다니면서도, 또 모든 일자리에서 벗어나, 은퇴한 후에도, 지금까지 간간이 주례를 맡고 있다.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선남선녀혼례의 주례를 섰다.

 

고객의 자녀, 외환은행 직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동기의 자녀들, 또 때에 따라서는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들까지도, 물론 내가 주례한 혼례는, 우리나라 전통혼례식이 아니고 현재 혼례식 대종을 이루고 있는 서양식으로 하는 소위 신식 결혼식이었다. 한 때는, 늦은 밤 자정 넘어 깊은 잠에 빠진 시간에 주례를 잘해 주신다는 소문 듣고 찾아왔다는 생면부지(生面不知)의 중년부부가, 내 집으로 불쑥 찾아왔다. 야밤에 자다 일어나, 집안으로 들어오라 할 수도 없어 대문밖 길에 서서 하소연을 들었다. 지금부터 몇 시간 후, , 오늘 오전에 자기 아들이 혼례를 올리는데 주례 서기로 한 사람이 펑크를 냈다고---. 신랑의 대학은사가 주례를 맡기로 했는데 미국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놓쳐 귀국을 못 한다고---. 오늘 아침 11시에 영등포 로터리에 있는 모예식장에서 아들 혼례식의 주례를 대신하여 서달라고 애원했다. 말하자면 땜빵주례를 서 달라는 것이다. 사정이 참 딱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거절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의 아들 혼례의 주례를 서 준 일이 있다. 이날의 주례사는 준비할 시간도 없었다. 마치 예식장전속의 직업주례가 하는 것처럼, 당사자의 개별사정에 맞추지 못하고 일반적 좋은 말만 들려주는 주례사로 대신했다.

 

10여년간, 아기를 둘이나 낳고 살면서도 신부에게 면사포를 씌워 주지 못하여 뒤늦게 가족끼리 모여 조촐하게 올리는 예식의 주례도 선 일이 있다. 혼인기념사진에 두 아이를 앞에 세워 놓았다. 호텔의 작은 홀에서 하는 재혼주례도 여러 번 섰다. 어떤 때는, 주말에 하루에 두 번을 서기도 하였다. 그렇게 선 주례가 지난 40여년간 횟수는 아마 족히 500번 내외는 될 것이다. 예식장에서 돈을 받고 신랑신부가 누군지도 모르고 하는 주례를, 직업적으로 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국내에서는 아마 내가 제일 많이 섰다는 생각이 든다. 제주도 도청소재지 빼고는 대체로 전국의 큰 도시는 주례한답시고 안 가본 곳이 없다.

 

미국인, 일본인과 결혼하는 국제결혼의 주례도 10번쯤 섰다. 나는 해방후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일제강점기 때는 서울에서 살았다. 유년기에 동네 아이들과 놀면서 부르던 일본어 동요 몇 가지는 어렴풋이 기억한다. 취직하여 은행의 조사부에서 일본책을 보아야 할 필요성 때문에, 일본어를 약간 배우기도 하였으나 자주 안 쓰니 지금은 겨우 일본어로 일상 인사나 하고, 돈 쓰는 물건사는 정도만 가능하다. 초급 수준도 못 된다. 그러니 일본어로 주례 스피치를 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외환은행 강남역 지점장을 떠나 본부로 전임될 무렵, 어느 여직원이 꼭 훗날 결혼을 하게 되면 주례를 해 주겠다고 약속을 해 달라고 조르기에 아주 쉽게 무심코 그렇게 하지!”라고 답해준 일이 있다. 본부에 부임하고 1주일도 안 되었을 때, 이제 혼인 날짜를 정하였느니 한 달 남짓 후에 강남의 모호텔에서 주례를 맡아 달라고 했다. 신랑이 일본동경은행 서울지점의 직원, 일본사람이다. 외환은행으로 연수와서 트레이닝을 했는데, 같은 부서에서 만나 알게 된 사람이라고 한다. 신랑 아버지는 일본명문 모대학의 국제정치학교수이고, 할아버지는 변호사로 일하신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하객들이 수십 명 오기로 되어 있다고 한다. 나는 단호히 이 혼례의 주례 맡을 능력이 없다. 내가 일본말을 잘 못 한다. 또 일본의 예식절차나 분위기도 모르는 내가 어찌 일본 명문집안의 혼례에 주례를 한다는 말이냐. 나는 못 한다고 단호히 거절하였다. 내 말에 이 여직원은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흐느껴 우는 게 아닌가. 여하간에 저에게 혼례주례를 해 주시기로 약속하였으니 주례를 서 달라고 떼를 쓰는 것이 아닌가. 아마 신랑 측에게 주례는 자기가 정하겠다고 큰소리쳐 놓은 모양이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예식은 전적으로 한국에서 행해지고 있는 서양식(西洋式) 예식으로 하는 조건으로 수락하였다. 주례사는 내가 하는 몇 가지 모델중에서 하나를 택하였다. 당시 일본문단에서도 활동하시고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도 이분의 시()가 올라 있을 정도로 한국과 일본문단의 중진으로서 알려진, 나와는 특별한 인연으로 가깝게 알고 지내는, 김모선생에게 번역을 부탁드렸다. 아주 간략하게 요약된 일본어 주례사를 확보하여 그것을 사전에 수십 번 읽어 단단히 준비했다. 예식장에는 일본에서 신랑 부모는 물론이고 할아버지도 오시고 아마 남녀 20~30명이 남자는 연미복을 입고, 여자는 일본 전통의상 기모노(着物:きもの)를 입고 앉아 있으니 韓日間국제웨딩분위기가 물씬 났다. 당일 주례는 한국어로 하고, 여기에는 일본에서 오신 신랑 가족이 상당수 계시니 주례인 내가 일본어는 서투르지만 일본어로 조금 말씀을 드리겠다고 양해를 구한 후, 일본어 요약본을 아주 천천히 또박또박 야무지게 진심을 담아 읽어내려갔다. 장내는 숙연한 엄숙함이 흘렀다. 바로 주례사가 끝나자마자, 한국어가 능통한 일본은행서울지점 대리라는 일본인 사회자가 하는 말이, ”주례 선생님이 일본어가 서투르다고 한 것은 거짓말입니다. 일본사람인 이 사회자도 듣기에도 어려운 수준 높은 고급 고어(古語)로 말씀하셨습니다라는 표현으로 나를 칭찬하는 게 아닌가. 내가 한 말이 고급 고어라고? 그 문장이 어떤 수준인지도 모르고 나는 써준 대로 읽었을 뿐이다. 주례사 요약본의 단어 하나하나 깊은 뜻도 모르고 읊어 댄 것뿐인데---. 나는 그날 예식 후 며칠이 지나, 주례사를 써주신 김모 선생에게 점심을 대접해드리는 자리에서, 그 주례사는 아마 일본사람이 들어도 고급스러운 고어를 좀 섞어 넣었다는 말씀을 듣고서, 그런 줄도 모른 채 일본사람들에게 주례사를 들려주었다고 생각하니 얼굴이 좀 달아올랐다.

 

주례를 시작한 초기에는 혼주가 주는 사례를 경황없이 여러 번 받았다. 그때는, 주례는 당연히 사례금이나 선물을 받아도 되는 줄로 알았다. 그것이 관행이라고 선배들이 말하였다. 혼주에 따라서는 큰 것을 주어 받기도 하였다. 주례인 나보다 혼주가 훨씬 나이 많은 혼주 어른이 주시는 것이라 새파란 젊은 주례인 나는 그것을 고맙게 받고 단호히 거절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주례를 시작한 후 10여년이 되는 내 나이 50이 될 무렵, 생각을 달리하게 된다. 내가 봉사하는 마음으로 젊은이들을 위하여 주례를 맡아 해 주는 것인데. 사례를 받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후 주례 관련 사례는, 엄히 사절하는 원칙을 세웠다. 그렇게 하니 마찰이 가끔 생겨난다. 내 나이 70이 넘어서 내가 거래하는 은행지점의 창구직원이 행내行內 혼인을 하는데 주례를 약속하였다. 예식 며칠 앞두고, 신랑신부 될 두 사람이 주례를 뵙고 혼례식 날 진행에 대하여 의논하자고 한다. 그런데 실은 주례 사례비를 전하려는 목적으로 만나는 것이다. 양가에서 준비한 것이라고 봉투를 내민다. 내가 단호히 거절하니 이러고 되돌아가면 부모님한테 야단맞는다고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닌가. 그래도 간신히 달래서 보냈다. 이 젊은이는 이제 두 아이의 엄마 아빠가 되었는데 내 생일을 기억하고 매년 생일 때 되면 카드도 보내온다. 올해는 80이 넘은 내가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라고 홍삼진액을 보내왔다. 요즘 젊은이들과는 아주 많이 다른 정을 느낀다.

 

우리는 남녀가 만나 부부가 되는 것을 혼인(婚姻)이라 한다. 일본은 남녀가 만나 부부가 되는 것을 결혼(結婚-けっこん)이라 한다. 結婚이라는 단어에는 남자가 장가든다는 뜻만 있고여자가 혼인한다는 개념이 없다. ’결혼이라는 어휘에는 남녀 사이의 평등이라는 개념이 없다. ’결혼하면 여자가 자기의 고유의 성씨(姓氏)를 버리고 남편의 성씨를 따르는문화적 전통에서, 우리와 다른, 일본의 여성에 대한 남녀간의 관계를 엿볼 수가 있다. 우리의 혼인은 남자가 장가를 가고, 여자가 시집을 간다는 뜻이다. 우리의 婚姻어휘에서 남녀평등의 우리나라의 문화적 전통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나라 헌법이나 민법에서도 결혼이라 하지 않고 혼인이라 한다. 우리 고유의 웨딩인 婚姻의 개념과는 다른 단어 結婚은 일제강점기 이후에 우리가 쓰기 시작하게 된다. 해방이 되고 75년이 지나고 있는 지금 우리나라에는 양식 웨딩을 婚姻禮式이라 하지 않고 結婚式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보편화 되어 있다. 서양의 웨딩은 여자를 존중의 대상으로 하고 있다. ’레이디 훠스트. 우리는 여자를 귀히 여기되 남자와 동격으로 여긴다. 지금 남녀간에는 차별이 없다. 혼례식에서도 서로 맞절을 한다. 말도 서로 존중하는 경어체(敬語體)를 쓰는 것이 우리의 전통이다. 조선왕조시대 서한문을 보면 남편이 부인에게 경어를 쓰고 있다.

 

여자를 귀히 여기는 우리의 혼인식 전통, 男東女西/男左女右의 전통은 어디에 묻혀 사라지는 줄도 모르게 <婚姻>이라는 단어가 <結婚>이라는 어휘로 덮여 씌워져 男西女東/男右女左로 고착되어 가고 있다. 왜 그런가? 이것이 오랫동안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유노상의 주례 이야기는 그래서 시작한다.<계속> 2020-05-28, 柳魯相 作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