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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도역에서 자전거타고 갯골생태공원 & 연꽃테마파크 관곡지 까지-(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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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및산행

2020. 7. 13.









오이도역에서 자전거타고 갯골생태공원 & 연꽃테마파크 관곡지 까지-(2/2)

(2020/07/12 현재)


전철 4호선 오이도역(烏耳島驛)에서 자전거를 타고 자전거 도로를 따라 시흥시
갯골생태공원을 들러 살펴 본 다음 다시 호조벌의 자전거 길을 따라 연꽃테마파크
관곡지 까지 가서 살펴본 연꽃 풍경 입니다.관곡지는 조선 전기의 관료이자 학자인
강희맹 선생이 세조9년(1463년) 사신으로 중국 남경을 다녀오면서 그 곳의 전당지에서
당시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재배되지 않았던 전당연의 씨앗을 갖고 들어와우리나라 최초로
시험재배에 성공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갯골생태공원은 1934~1936년에
조성되었던 이곳 시흥갯골 145만평 정도의 소래염전 지역을 2012년 2월 국가습지
보호구역으로지정하였고, 시에서는 이곳을 친환경적으로 개발한 생태공원 입니다. 



■ 관곡지

 

향토유적 : 제8호
향토유적 지정일 : 1986년3월
소재지 : 시흥시 하중동

 


관곡지는 조선 전기의 관료이자 학자인 강희맹 선생이 세조9년(1463년) 사신으로 중국 남경을 다녀오면서 그 곳의 전당지에서 당시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재배되지 않았던 전당연의 씨앗을 갖고 들어와 우리나라 최초로 시험재배에 성공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흥시에서는 관곡지가 갖는 상징성과 역사성을 기리기 위하여 시흥시 관내 논에 연꽃테마파크를 조성하여 다양한 연과 수생 식물을 볼 수 있도록 운영하고 있으며 재배단지 주위로 산책로와 자전거 도로를조성하여 시민들이 즐겨 찾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6월 하순 피기 시작하여 7월 중순부터 8월 하순경에 절정을 이루며, 10월 초순까지 감상이 가능합니다.

 

 

 ●시흥연꽃테마파크 (Siheung Lotus Flower Theme Park)


-소재지 : 시흥시 하중동 219번지 일원
-Location : 219 Hajung-dong, Siheung-si

 

시흥시에서는 관곡지가 갖는 상징성과 역사성을 기리기 위하여 관곡지 주변과 갯골생태공원, 물왕저수지 주변 18ha의 논에 연꽃테마파크를 조성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재배단지 주위로 산책로와 자전거 도로를 조성하여 시민들이 즐겨 찾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연꽃은 7월 초순부터 피기 시작하여 7월 말경에 절정을 이루며, 10월 초순까지 감상이 가능합니다.

 


■ 시흥갯골생태공원

 

이곳 소래염전 지역은 1934~1936년에 조성되었으며 갯골을 중심으로 145만평 정도가 펼쳐져 있습니다. 당시 이곳 소래염전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소금은 수인선과 경부선 열차로 부산항에 옮겨진 후, 일본으로 반출되었던 우리민족사의 아픔을 간직한 곳이기도 합니다.

 

 시흥갯골생태공원은 경기도 유일의 내만 갯골과 옛 염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칠면초, 나문재, 퉁퉁마디 등의 염생식물과 붉은발 농게, 방게 등 각종어류, 양서류가 서식하고 있어 자연 생태가 온전히 보존되어 있으며 시흥갯골은 2012년 2월 국가습지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시에서는 이곳을 친환경적 개발로 국가적 명소화, 세계적 관광지화를 목표로 공원조성을 완료할 계획이며 매년 ‘시흥갯골축제’가 열리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 호조벌


시흥시에는 미산동, 은행동, 매화동, 도창동, 포동, 물왕동, 광석동, 하상동, 하중동을 포괄하는 드넓은 농경지가 있는데, 이곳을 ‘호조벌’이라 부릅니다.

 

 호조벌은 조선시대 안산군 초산면 돌장재(현 시흥시 하중동)와 인천부 신현면 포리(현 시흥시 포동 걸뚝) 사이에 둑을 쌓아 대규모 간척지를 조성한 것으로『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따르면

 

 경종1년(1721년)에 이미 완공되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쉽지 않은 간척사업을 이미 조선시대에 시행하여 농경지로 변모시킨 우리 조상들의 경험과 지혜가 호조벌의 드넓은 농경지에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위치>
시흥시 미산동, 은행동, 매화동, 도창동, 포동, 물왕동, 광석동, 하상동, 하중동 등의 농경지

 

 

 

■ 호조추야수(戶曹秋野穗)

 

<관광자료>


호조벌은 조선 경종 1년(1721) 무렵에 완공된 호조방죽으로 인하여 형성된 시흥시 중부의 넓은 벌판을 말한다. 간척사업으로 하중동과 포동에 방대한 농경지가 새로 조성되었고 이를 농민들에게 경작하게 하였다.

 

시흥의 곡창지대인 미산ㆍ 은행ㆍ 매화 ㆍ하중ㆍ하상ㆍ물왕ㆍ광석ㆍ도창ㆍ포동 등의 농경지 대부분이 이때 조성된 농경지인데 호조에서 막았다하여 호조벌 , 호조들, 호조방죽 이라고 부른다.

 

<문헌자료>


신천동에서 39번 국도를 따라 시청 쪽으로 오다 보면 미산동ㆍ포동을 지나며 왼쪽으로 드넓은 벌판이 펼쳐진다. 말 그대로 훤히 뚤린 평야인데, 이 곳을 이곳 주민들은 호조벌이라 부른다. 호조벌에서 ‘호조(戶曹)’란 조선시대 6부의 하나로서 국가의 경제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던 관청을 말하는데, 수도에서 떨어져 있는 이곳에 ‘호조’란 이름이 붙었으니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호조벌의 맞은 편으로는 포동ㆍ방산동과 장현동ㆍ장곡동 사이에 넓은 내만갯벌이 펼쳐져 있고, 1930년대에 만든 옛 소래염전이 그 위에 자리 잡고 있다. 1910년대에 만들어진 지형도를 보면 갯벌을 통해 바닷물이 들어오다 현재의 39번국도 앞에서 막힌 상태를 잘 볼 수 있는데, 이 바닷물을 막아서 생긴 것이 바로 호조벌이다.

 

간척사업하면 대개 20세기 이후, 특히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우리나라 간척사업의 역사는 그 뿌리가 아주 깊다. 멀리는 고려시대 몽골의 침략으로 인해 강화로 천도한 후 만든 좌둔전ㆍ우둔전에서부터 조선시대에도 여러 곳에서 농토를 확보하기 위한 간척사업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호조벌을 막은 둑을 ‘호조방죽’ 또는 ‘걸뚝’이라 하는데 지금까지는 대개 조선 정조때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에 행차하는데 따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전해져 왔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사실과 다르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등 관련기록을 검토해 보면 정조대가 아니라 1721년(경종 1년) 무렵에 호조벌이 완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갯벌을 경계로 포동쪽은 인천부에, 장현동 쪽은 안산군에 속했는데, 『승정원일기』경종1년 12월 6일에는 “안산과 인천 두 읍의 경계에 둑을 쌓아 논으로 만들만한 곳이 있는 까닭으로 따로 감관(監官)을 정하고 군정(軍丁)을 고용하여 일을 시작하여 지금 이미 완성하여 끝냈으니, 서울 근처에서 이렇게 수백석을 얻는 논을 얻었으니 진실로 다행한 일입니다” 라 기록되어 있고, 같은 책 경종 3년(1723) 5월 25일에는 인천과 안산 사이에 새로 쌓은 둑이 범람하여 큰 피해를 입어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기록도 있다.

 

 한편 1750년대에 제작된 『해동지도(海東地圖)』인천부에는 ‘진청신언(賑恤廳新堰)’, 즉 ‘진휼청에서 새로 만든 둑’ 이라는 표기가 있는데 진휼청이 호조(戶曹)의 관할 아래 있었던 점을 보면, 주민들이 ‘호조벌’, ‘호조방죽’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 역사적 사실과 부합함을 알 수 있다. 바닷물을 막아 농토를 만드는 일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닌데, ‘호조방죽’을 쌓을 때도 마찬가지였는지 이와 관련한 애처로운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즉 둑을 쌓아도 곧 무너져 내려 몇 차례 실패를 거듭하였는데, 홀연히 나타난 스님 한 분이 산 사람을 둑에 묻어야 무너지지 않고 성공할 수 있다하여 고을 수령이 서울의 금부도사에게 편지를 보내 사형수 세 명을 데려왔고, 그들을 공사현장에서 사형집행하여 무사히 둑을 완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전하듯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자연 지형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농경지를 만들었던 우리 조상들의 경험은 그 뒤에도 계속되어 시흥 곳곳에 간척을 통한 대규모 토지를 만들어내게 된 것이다.


■ 관곡지연향(官谷池蓮香)

 

<관광자료>


조선전기의 명신이며 농학자로 이름이 높은 강희맹(1424-1483) 선생과 인연이 깊은 연못이다. 평소 농학 발전에 대해 깊은 연구와 관심을 기울였던 선생은 세조 9년(1463년)에 중추원 부사로 진헌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게 되었다. 중국에서 돌아올때 남경에 있는 전당지에서 연꽃 씨를 채취해 귀국한 후, 하중동 관곡에 있는 연못에 재배를 해본 결과 점차 널리 퍼질수 있었다.

 

매년 7월경 관곡지는 연꽃이 만발하여 아름다운 정경을 볼수 있다. 관곡지 주변에는 연꽃테마파크가 조성되어 있어 관곡지와 함께 아름다운 연꽃의 향연을 제공한다. 연꽃의 개화기간이 그리 길지 않기 때문에 시기를 잘 맞추어야 한다.

 

<문헌자료>


관곡지는 하중동 208번지에 위치한 작은 연못으로서 조선 전기의 유명한 관료인 강희맹 선생 이 명나라 남경(南京)에서 꽃은 흰데 끝부분만 옅은 붉은 빛을 띠는 전당강(錢塘江)의 연꽃씨를 가져다 심은 곳으로 유명하다. 이로 말미 암아 지역의 이름을 ‘연꽃고을(蓮城)’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니 시흥시의 역사를 설명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장소이다.

 

더구나 2004년에 관곡지 주변 논에 연꽃을 많이 심어 수도권의 많은 시민들이 찾는 곳이 되었으니, 역사적 유래와 함께 시흥을 홍보하는 좋은 사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으로부터 150여년 전인 1846년에 관곡지를 수리하고 쓴 책이 남아 있어 그 의의를 더하고 있다. 그 책이 바로『연지사적(蓮池事蹟)』이다. 『연지사적』의 저자는 당시 안산군수였던 권용정(權用正, 1844년 11월 6일~1848년 6월 25일 재임)이란 분인데, 이 분은 강희맹의 사위로서 관곡지를 소유하게 된 권만형(權曼衡)의 직계 후손이다.

 

 연성정수장을 지나 물왕저수지 쪽으로 가다보면, 비석 세개가 길가에서 있는데, 그중 1848년에 세워진 비석에 “군수권후용정영세불망비(郡守權侯用正永世不忘碑)”라 쓰여져 있다. 여기에 기록된 권용정이 바로 『연지사적』을 쓴 그 분이다. 권용정은 안산군수로 부임한 뒤, 조상의 사적이 깃든 연못(즉, 관곡지)이 제대로 관리되지 못해 잡풀이 무성하여 연꽃을 못 살게 하는 것을 보고 1845년 봄에 부역에 동원된 백성들을 시켜 연못을 수리하게 하였다. 수리하고 나니 그 해 여름에 다행히 강희맹 선생이 심은 것과 같은 전당홍(錢塘紅) 두 줄기가 자라났다 한다.

 

권용정은 관곡지를 잘 관리하기 위해 다른 일체의 부역(賦役)없이 오직 관곡지만 관리하는 연지기 6명을 두도록 하고 이 사실을 경기도 관찰사에게 보고하여 허락을 받아냈다.『연지사적』에는 그 여섯 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도문(李道文), 황차돌(黃次乭), 김춘복(金春福)?황해금(黃海金)?김만돌(金萬乭)?김삼손(金三孫)이 그들이다. 이 여섯 명은 앞에서 말했듯이 일체의 부역은 물론 군역(軍役)과 환곡(還穀)도 면제받는 특혜를 받았고, 그것이 영구히 계속된다는 증명을 경기도 관찰사로부터 받을 정도로 관곡지 관리는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만약 연지기에 결원이 생기면 해당 마을인 하중리의 백성중에서 충원토록 하였는데, 이들에게도 역시 같은 혜택을 주었다. 또 연지기가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매를 쳤고(笞刑), 큰 죄를 지으면 쫓아내어 다른 사람으로 대신하도록 한 조항도 마련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처럼 특정한 곳을 관리하기 위해 지키는 사람을 두고, 혜택을 준예가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기 때문에 『연지사적』에 기록된 이러한 내용은 비단 시흥시의 역사를 설명하는데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를 쓰는 데도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한편 관곡지란 명칭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조선 후기의 각종 지리지 및 관곡지의 현 소유주인 안동권씨 화천군파의 족보에는 모두 이 지역을 직곶(職串)으로 기록하고 있고, 실제 주민들도 ‘베실구지’, 또는 ‘벼슬고지’로 부르고 있는데,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벼슬(베실)’에 해당하는 한자(漢字)를 ‘직(職)’에서 ‘관(官)’으로, ‘구지(고지)’에 해당하는 한자(漢字)는 ‘곶(串)’에서 ‘곡(谷)’으로 바꾸어 표기함에 따라 ‘관곡지(官谷池)’란 이름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관곡지를 잘 관리하고 보존하는 것 못지않게, 원래의 이름을 찾아 주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 염전허사계(鹽田墟四季)

 

<관광자료>


가을이면 염생식물의 붉은 융단을 깔아 놓은 듯한 모습, 겨울이면 고즈넉한 겨울 정취에 눈썰매 타는 아이들의 밝은 웃음을 만나며, 봄이면 만물이 소생하는 녹음의 아름다움, 여름이면 길게 패인 바다 향으로 갯골생태공원은 물이 든다.


45만평 넓디 넓어 그냥 서있기만 해도 시원한 바람 한점과 친구가 되어 외롭지 않다. 길목에서 반겨주는 보리의 생생함, 유채꽃의 화려함, 생기를 더하는 갯골의 아름다운 굴곡. 무엇하나 놓칠 것이 없다.


팔매질한 돌 날아가듯 염전 논두렁을 피해 낮게 날아가는 이름모를 작은 새 떼들의 모습은 원시 자연에 온 느낌이다.
경기도 유일의 내만갯벌이라는 점도 멋지다. 우리시만의 독특함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문헌자료>


포동 새우개와 신촌마을 앞으로 펼쳐져 있는 폐염전은 1934년에 일본인이 58만원을 투자하여 2년 뒤인 1936년에 완성하였다. 1996년 7월 31일에 폐쇄될 때까지 60년간 포동과 방산동 주민들의 생활 기반이자 삶의 터전이었다.

 

 폐쇄된 뒤 염전지대는 황폐해졌고 그 때문에 황량한 감이 없지 않으나, 자라나는 어린 세대들에게는 자연을 이용해 ‘소금’이란 것을 채취하던 조상들의 생활 방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좋은 학습장이며, 체험의 현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