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수궁원 2010. 3. 23. 14:39

리영희프리즘인가요

이 책을 들면서 우선 생각나는 것이 이박사입니다.

절필선언이후 노구를 이끌고 이라크파병반대에 나서는 모습을 보면서

실패한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자라고 주장하여

과연 우리사회의 이념적 스펙트럼에서

그런 식의 규정이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상식적인 물음을 되묻게 한 것이 그 이박사였지요

해방정국에서 좌우논쟁이 어떤 함의가 있었는가 하는 문제에서

정상사회라고 할 수 있는 유럽사회의 논쟁이

이 질식할 것 같은 이념적 불구사회에서

오로지 진실만을 추구했던 그 사람 리영희를 바라볼 수 있겠는가 하는 역사의식 때문이었습니다.

 

국제정세에 대해 알고싶으면 리영희를 찾았던 김지하부터

시인 고은은

이 평안도 사내를 두고 표정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사실 평생을 두고 독불장군으로, 외로운 늑대처럼 소리 지르는 처지였어요.

북한에서 내려온 소학교 친구도 없고, 동향 사람도 없고, 중학교라는 것이 일제

말기 친구들과는 내가 가는 길이 전적으로 다르니까 어떤 교류가 없었어요. 해양

대학의 동창들은 다 바다로 나가 있는데 나는 육지에서 6.26전쟁 7년 동안 향로

봉 등에 있었으니까, 아니면 형무소 감방에 있거나 지하실 감방에 있거나. 그런

의미에서 난 참 외롭게 살아왔어요.”

 

이 글을 읽고, 뭉클해진 나는

길을 걸으며

‘창작과 비평’을 사고 들어온 날이기도 합니다.

이효석 문학상을 받은

젊은 작가 편혜영의 장편소설‘재와 빨강’에 대한 서평을

늦은 저녁에 읽으면서,

한 고독한 남자의 초상이 참으로 묘하게 겹쳐지는 것입니다.

서평자는,

카프카의 K만큼이나 고독한 주인공을 얻게 된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합니다.

 

“닿을 수 없는 먼 과거”를 등지고, “짐작할 수 없는 정도로 넓고 방대”한 현재속에서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인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남자가 이제 이국의 공중전화부스

안에 있다.

 

물론 ‘창비’를 손에 들고서

가장 눈에 간 것은,

아이 하나 둔

그리고 재개발에 밀려 어느 농촌 폐가에 둥지를 틀면서

결국

남편은 공사장 인부로 떠나고 자신에게는 업무방해죄로 소환장이 날아온 부분을 다룬

공선옥의 장편소설도 있었지만

백낙청의 글이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분단체제로서,

이 체제가 해체기로 접어들 정도로 우리 사회는 선진화되었지만

그것이 온전한 민주화를 이룰 정도로 ‘정상사회’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또한 비핵화 문제도

단순히 평화협정을 이루고, 북미수교와 대규모 경제원조가 이루어진다고 해서 해결되는 사회도 아니며

그 개혁 개방도 쉽게 이루어지기 어려운 사회이기에

유일한 해법은

‘남북연합’이라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2007년 대선은 진정한 보수파의 집권도 중도실용의 승리도 아니며,

본질상 그것은 1987년의 군사독재 종식과 2000년의 포용정책 출범 이래 분단체제 속의

특권적 위치가 크게 위협받고 다분히 위축되었던 수구세력이 반격의 총공세를 벌인 마당

입니다.

따라서

남북연합 건설작업에 역행하는 정권을 견제하며

당장에 2010년부터라도 국정운영체제에 본질적 개선을 이루어 현정권으로 하여금 진전된 프로그램을 개발하도록 견인하는 것이 일차적 과제이며,

민주화의 또 한차례 전진을 통해 국내에서는 말하자면 곧 3차 정권교체의 관문을 통과함을써 이제 생명력이 소진되어 말기적 혼란에 빠진 ‘87년체제’를 드디어 넘어서는 일이 다음 목표인 것입니다.

 

무언가

흔들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최군

소군

주담

‘지금 여기서’의 행복만큼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렇소

이 시대의 영민한 작가 김연수는,

“따라서

고통은,

그것을 이해받거나, 소멸시키거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껴안고,

데리고 다녀야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아니

리영희는,

편혜영은,

박완서는 “그래, 그때 내가 새대가리였구나”하는 후회의 말을 하면서,

 

   “주인 남자도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다 듣고는 분수에 넘치는 사치

를 한 것 같다고 고마워했다. 나에겐 그 소리가 박수보다 더 적절한 찬

사로 들렸다. 우리에게 시가 사치라면 우리가 누린 물질의 사치는 시

가 아니었을까. 그 암울하고 극빈하던 흉흉한 전시를 견디게 한 것은

내핍도 원한도 이념도 아니고 사치였다. 시였다.”

 

라고 고백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