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의 강의

수궁원 2008. 9. 1. 10:37

아는 것과 보는 것의 싸움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사회를 살아갑니다. 사회는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도리어 개인을 포섭하여 따르게 하는 구조입니다. 포섭과 학습, 그리고 제도와 문화에 의하여 부단히 재구축(再構築)되는 지속적 구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에게는 강제적 구조입니다. 사회가 개인을 포섭하는 기제는 먼저 사회의식을 통하여 작동됩니다. 일반적으로 특정 사회의 사회의식은 본질에 있어서 편견(偏見)입니다. 사회의식 일반의 논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편견에 관한 것입니다.
사회의식이 편견인 것은 그 사회의 언어와 문화가 편견인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언어와 문화는 자연에 대한 편견이며 동시에 다른 사회에 대한 편견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의식은 이처럼 특정한 사회, 특정한 문화, 특정한 역사적 편견으로 구성되고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특정사회의 문화와 의식은 이러한 일반적 편견에 더하여 계급적 편견을 내장(內藏)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정 사회의 지배적 사회의식은 그 사회의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 구성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개인이 최초로 대면하게 되는 사회의식은 여러 층위의 편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개인의 일차적 과제는 기존의 사회의식을 옳게 인식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회의식의 인식(認識)’이 일차적 과제가 됩니다.

인식은 아는 것과 보는 것의 싸움입니다.‘안다’는 것은 사회의 일반의 의식을 학습한 것이며,‘본다’는 것은 개인이 자기의 현실에서 구성하는 인식입니다. 대상에 대한 다양한 해석 가능성 중에서 하나의 해석을 선택하는 경우에도 선택은 일차적으로‘아는 것’을 기초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아는 것과 보는 것과의 갈등이 이 과정을 다시 조정합니다. 우리의 인식은 사회의식의 수용과 실천적 검증이라는 시행착오 과정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는 이론과 실천의 갈등구조입니다.
이론 역시 언어와 마찬가지로 편견입니다. 이 편견과 눈앞에서 우리와 대면하는 객관적 실체의 갈등구조가 우리의 인식지평이 됩니다. 이것은 아는 것과 보는 것의 싸움이며, 주어진 사회의식과 자기가 구성하는 사회인식의 갈등구조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인식은 사회의식의 일방적 수용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인식은 감각경험을 통해 받아들이는 자료들의 수동적 축적을 통한 귀납적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능동적으로 조사하고 비교하고 일반화시킴으로써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능동적으로 조사하고 비교한다는 것이 곧 관계의 건설입니다.
대상과 주체의 관계, 보는 것과 아는 것 사이의 관계, 구성요소들의 상호관계를 조직하는 것입니다. 인식은 관계를 조직하는 것이며 인식의 내용은 "관계"에 대한 인식을 본령으로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인식은 본질적으로 참여(參與)이며 그것은 수동적 수용이 아니라 적극적 조직(組織)입니다.
인식이 능동적 참여와 적극적 조직임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주어진 현실공간에서 이루어집니다. 당연히 참여와 조직의 능동성은 제한적입니다. 참여와 조직 역시 우리의 인식과 마찬가지로 사회가 용인하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집니다. 개인은 문화를 통하여 사회화됨으로써 이에 적응하고 문제를 제기함으로서 이에 저항합니다.
문화는 개인의 바깥으로부터 개인의 내부에 침투함으로써 완성되고 개인은 문제 상황의 인식과 문제제기와 문제해결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문화를 해체합니다. 사회에 있어서 개인은 능동적 주체로서 [I]이며 동시에 수동적 객체로서 [Me]입니다. [Me]와 [I]는 조화 충돌 모순 통일의 여러 측면을 구성합니다.

텍스트(Text)는 이러한 제한성을 뛰어 넘기 위한 디딤돌이 됩니다. 텍스트는 언제나 역사적 과정에 있습니다. 특정 시공(時空)의 특정 주체에 의하여 특정한 언어로 쓰여 진 것입니다. 상대적이고 조건적이고 우연적인 것입니다. 텍스트를 해석하고 있는 독자들도 그들 자신의 역사성에 발 딛고 있습니다. 텍스트의 역사성과 독자의 역사성 사이의 거리를 결합하는 것이 텍스트의 독법이 됩니다. 텍스트와 독자의 관점이 하나의 경험으로 융화되면서 각자의 역사성을 초월할 때 결합이 가능해집니다. 이 경우 거리는 장애가 아니라 둘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고 창조적 공간이 됩니다. 텍스트의 내용과 텍스트의 독법이 창조적으로 조직될 때 비로소 텍스트의 의미가 현실적으로 생환(生還)됩니다. 이 때 텍스트는 자신을 뛰어넘게 됩니다. 대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기존 이데올로기의 재생산 공간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뛰어 넘기 위한 공간입니다. 아는 것과 보는 것이 새롭게 조직될 때, 사회의식을 주체적으로 인식할 때 비로소 창조적 공간이 열립니다.

텍스트가 역사적이라는 의미는 그것이 자족적이지 않다는 의미도 포함됩니다. 텍스트는 자유로운 합의의 결과물이거나 상호이해(相互理解)의 표현이 아니라 특정한 이데올로기이거나 강제의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텍스트뿐만 아니라 독자의 경우도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독자가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 있는 한 역사와의 대화 상황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참된 인식은 비판적 성찰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비판적 성찰은 일차적으로 인식주체들에 개입하는 이데올로기들을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비판하고 배제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런 점에서 주체적 인식의 모태는 성찰과 비판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성찰과 비판이 미흡한 경우를 특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찰과 비판은 인식과 실천이 사회적 제약 속에서 진행된다는 사실에 대한 승인을 포함합니다. 실천은 물론이며 실천의 결과인 인식도 당연히 사회 역사적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질적 제약과 정신적 제약 아래에 놓이게 됩니다. 성찰과 비판은 이처럼 텍스트와 그것을 읽는 독자, 나아가 이론과 실천의 제한성 그리고 사회의식과 사회인식에 대한 포괄적 관점을 갖게 하는 드높은 인식활동입니다.

부단한 성찰과 비판을 통하여 구성하여야 하는 것이 곧 법칙적 인식입니다. 법칙적 인식은 현상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구조에 대한 인식이며 외부보다는 내부에서 변화와 운동의 원인을 찾는 관점을 갖는 것입니다. 황소와 오리의 걸음걸이가 다른 것은 뼈대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내부는 외부를 통하여 나타나고 외부는 내부를 규정함으로써 서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구조와 내부가 현상과 외부에 비하여 주동적이며 전국면(全局面)에 관철됩니다. 사회인식의 요체는 부단한 성찰과 비판을 통한 법칙적 인식의 구성입니다. 법칙적(法則的) 인식은 동시에 구조적(構造的), 통합적(統合的), 이성적(理性的) 인식입니다. 법칙적 인식은 물(水)에서 산(山)을 보는 것입니다. 물에서 도(道)를 보는 것입니다. 바다의 맨 아래에 있는 「움직이지 않는 역사」를 깨닫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에 장기적으로, 반복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모두 "구조(構造)"입니다. 사회적 구조, 경제적인 구조, 문화적 구조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구조는 인식의 토대이자 동시에 장애물입니다. 장기지속(長期持續)의 완고한 지하 감옥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견고한 구조라 하더라도 시간의 마모(磨耗)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인간적 위상은 이러한 가능성 속에서 인간의 몫을 찾는데 있습니다. 완고한 감옥으로부터 해방되려고 노력하는 인간의 의지가 역사가 됩니다.

바로 이 점에서 감성은 인식의 적극적 구성요소입니다. 감성이 인식을 불안정하게 한다는 주장은 인식에 대한 그리고 진리에 대한 결정론적 관념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진리란 피안(彼岸)의 존재이며 차안(此岸)으로부터 도달하여야 할 궁극적 목표라는 관념이 결정론적 관념입니다. 감성이 인식을 불안정하게 한다는 주장은 진리라는 기존의 목표에 이르는 과정이 비합리적인 요소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는 결정론적 관념에서 연유합니다. 그러나 진리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하는 것이며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조직과 참여에 있어서  감성은 대상세계의 범위를 확장합니다. 우리가 포용할 수 있는 세계의 범위를 최대한으로 확장합니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사회인식의 요체는 주체의 구성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주체의 구성문제는 인식주체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고, 무엇을 위하여 살아갈 것인가 라는 가치판단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참여점(entry point)의 건설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참여점은 인식과 실천을 연결하는 <몸>의 문제이며, 몸의 중앙에 위치하는 <가슴, heart>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타자로부터의 해방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해방을 강조하는 것은 적극적 실천의지를 포기하고 개인적이고 윤리적인 영역으로 도피하는 것으로 비난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궁극적인 저항은 그 근본에 있어서 자기와의 관계에서부터 시작되는 정체성의 문제이며, 그것이 곧 주체구성의 문제라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됩니다.
도덕과 윤리는 정치의 포기가 아니라 정치와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온몸을 던짐으로써만 추구될 수 있는 최대한의 정치적 과제라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체의 구성은 인식의 전제일 뿐 아니라 인식의 궁극적 실체라는 사실 역시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체의 문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은 발견(發見)되는 것이 아니라 발명(發明)하는 것”이며 더구나 부단히 발명해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오늘날의 실천적 과제가 정치적 억압이나 경제적 착취로부터의 해방만이 아니라, 정체성의 예속에 대한 항거라는 점에서도 주체의 문제는 바로 해방의 문제와 직결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영복의 강의

수궁원 2008. 9. 1. 10:36

수도꼭지의 경제학

C교도소 4동 상층의 세면장에는 수도꼭지가 8개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용할 수 있는 꼭지는 2개뿐이었습니다. 나머지 6개는 T자형의 손잡이를 뽑아버리고 스패너로 단단히 조아 놓았기 때문에 먹통이었습니다. 맨손으로는 그것을 풀 수가 없도록 해 놓았습니다. 물을 절약하기 위해서임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재소자는 너나없이“물 본 기러기”이기 때문입니다. 교도소에서 귀하기로 말할 것 같으면 밥과 맞먹는 것이 물입니다. 단 한 번도 물을 물 쓰듯 써보지 못한 우리들로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욕심입니다.
하루 세끼 설거지에서부터 세수 빨래는 물론이고 목욕은 감히 생심을 못한다 하더라도 냉수마찰은 어떻게든 하고 싶기도 합니다. 기회만 있으면 방에 있는 주전자나 물통은 물론이고 그릇이란 그릇마다 물을 채워놓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물을 많이 챙겨 놓은 날은 마음 흐뭇하기가 흡사 그득한 쌀뒤주를 바라보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만큼 물이 귀했습니다. 여름철은 말할 필요도 없고 겨울이라고 해서 찬물 목욕이나 담요빨래를 시켜만 준다면 마다할 사람이 없는 처지이고 보면 물을 가운데에 둔 관과 재소자의 줄다리기가 사철 팽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8개의 수도꼭지 중에서 2개만 남기고 나머지 6개를 먹통으로 잠가버리는 것은 어느 교도소건 관례가 되다시피 한 통상적인 통제의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은 이를테면 원천을 봉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방법이 언뜻 가장 완벽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어느새 엄청난 누수가 일어나고 마는 것입니다. 맨 먼저 일어난 사건은 성하게 남겨둔 수도꼭지의 손잡이가 분실되기 시작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처음 몇 번 동안은 관에서 없어진 손잡이를 다시 갖다가 꽂아 놓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꽂기가 무섭게 이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수도꼭지는 어느 것이나 마찬가지로 윗부분의 나사 한개만 풀면 손잡이가 쉽게 분해될 수 있는 얼개였으며, 손잡이만 가지면 먹통꼭지를 틀어서 얼마든지 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손잡이의 분실사건이 계속되자 이제는 아예 나머지 성한 꼭지의 손잡이마저 분리하여 담당교도관이 책상서랍에 보관하였습니다. 이제는 물을 합법적으로 쓰기 위해서도 절차를 밟아야 했습니다. 숨겨 둔 손잡이의 가치는 더욱 커졌습니다.
다른 출역사동의 세면장에 있는 수도꼭지의 손잡이가 분실되기 시작하였고 공장이건 목욕탕이건 심지어 직원 화장실에 이르기까지 수도꼭지가 분실되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우리 방에도 물론 비밀리에 입수하여 감추어 두고 사용하는 수도꼭지가 한 개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법 끗발이 센 K군이 자기 혼자만 사용하는 손잡이가 한 개 더 있었습니다. 4동 상층의 11개 사방 가운데 수도꼭지를 한두 개 감추어 두고 있지 않은 방은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잘 나가는 방’에는 두어 개씩 보유하고 있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2개 또는 3개씩의 개인용 꼭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혹시 분실할 수도 있고 검방이나 검신 때 발각되어 압수될 지도 모르기 때문에 여벌로 한두 개쯤 더 가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수도꼭지는 어느덧 친한 친구나 평소 신세를 진 사람에게 귀한 선물이 되기도 하였고 더러는 상품이 되어 다른 물건과 교환되기도 하였습니다. 수도꼭지는 이제 수도꼭지 이상의 가치를 갖게 되었습니다.
수도꼭지는 물을 떠나서도 가치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4동 상층에 몰래 감추어 두고 사용하는 수도꼭지가 모두 몇 개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대충 계산해 보더라도 11개 방마다 한두 개씩 그리고 끗발 있는 재소자가 네댓 명이라 치면 거진 20여 개의 수도꼭지가 있는 셈이 됩니다.
세면장에 설치되어 있는 8개의 수도꼭지에 비하면 무려 두어 갑절이나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꼭지는 여전히 부족하였습니다. 우선 그 방에 몰래 감추어 두고 쓰는 것이기 때문에 그 꼭지의 관리자한테 일일이 허락을 받아야 하였고, 개인용을 빌리기도 한두 번이지 미안하고 속상하는 일이었습니다.
4동 상층의 1백여 명의 재소자가 불편이나 불평 없이 물을 쓸 수 있기 위해서는 대체 몇 개의 수도꼭지가 있어야 하는지 계산해 보았습니다. 1인당 1개에다 분실이나 압수에 대비한 여벌 1개씩 도합 2백여 개의 수도꼭지가 필요하다는 계산입니다. 8개의 수도꼭지에 비하여 무려 2, 30배의 수도꼭지가 필요한 셈입니다.
이처럼 많은 양이 있더라도 물의 사용은 일단은 불법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실제로 담당교도관에게 적발되어 수도꼭지를 압수당하고 경을 친 사람도 더러 있었습니다. 대개는 담당교도관에서 밉게 보인 사람이거나 만만하게 보인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재수 없어’걸렸다고 했습니다. 어쨌건 원천을 봉쇄하여 물을 통제하려던 애초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8개의 수도꼭지를 모두 열어놓는 것보다 더 많은 물이 누수 되고 있었습니다. 스패너로 단단히 묶어 둔 6개의 먹통 수도꼭지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맨손인 사람에게만 철벽일 뿐 수도꼭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한테는 수청기생처럼 쉽게 몸을 풀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수많은 수도꼭지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물은 여전히 부족하였고 불편하였습니다. 물의 필요는 수도꼭지에 대한 욕심으로 바뀌어 남들의 비난을 받았고 스스로도 부끄러웠습니다.
이 이야기는 물론 징역살이의 이야기이고 교도소에나 있는‘물 본 기러기’들의 물 욕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서울의 도처에서 문득문득 그 씁쓸한 수도꼭지의 기억을 상기하게 됩니다.
수많은 자동차들로 체증을 이룬 도로의 한복판에서 걷는 것보다 더 느리게 꿈틀거리는 버스 속에 앉아 있을 때, 나는 예의 그 수도꼭지를 생각합니다. 분양아파트의 모델하우스에 붐비는 인파 속에서 나는 먹통 수도꼭지 앞에서 마른 침을 삼키던 예의 그 갈증을 생각합니다. 8개의 수도꼭지로 될 일이 20개 30개의 수도꼭지로도 안 되는 일은 교도소가 아닌 바깥세상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자동차도 그렇고 아파트도 그렇고 땅도 그렇고 대학입시도 그렇고 화려한 백화점의 수많은 상품들도 그렇습니다.
나는 낯선 서울거리를 걸으며 버릇처럼 수도꼭지를 상기합니다. 맨손으로 수도꼭지를 비틀다가 하얗게 핏기가 가신 엄지와 검지의 통증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잘못된 소유(所有), 잘못된 사유(私有)가 한편으로 얼마나 엄청난 낭비를 가져오며, 다른 한편으로 얼마나 심한 궁핍을 가져오는가를 생각합니다. 망망대해 위를 날고 있는 목마른 기러기를 생각합니다.


 
 
 

신영복의 강의

수궁원 2008. 9. 1. 10:35

상품은 팔기 위한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사회입니다. 상품은 팔기 위한 것입니다. 상품이 팔기 위한 것인 한 그것은 당연히 가치를 갖습니다. 상품은 가치형태로 자신을 표현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것은 가치형태로 존재합니다. 재화와 노동력 그리고 우리자신까지도 가치형태로 존재합니다. 가장 간단한 가치표현 형태는 다음과 같은 등식입니다.  

쌀  1가마 = 구두 1켤레

이 등식은 <쌀 1가마>는 <구두 1켤레>와 같은 가치를 갖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쌀이 상품인 한 그것은 가치형태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쌀은 스스로 가치를 드러내지 못하고 구두의 도움을 빌어 상대적으로 자기의 가치를 표현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쌀은 상대적 가치형태(相對的 價値形態)에 있다고 합니다.
반대로 구두는 쌀의 가치를 표현하는 소재일 뿐입니다. 자기가 쌀과 동등한 가치를 가졌다는 것을 증명할 뿐입니다. 따라서 구두는 등가형태(等價形態)에 있다고 합니다. 이 교환등식에 있어서 우리가 주목하여야 하는 것은 좌항과 우항은 자신의 본질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쌀은 밥과 관계가 없고, 구두는 발과 관계가 없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상품에는 자신의 본질 즉 정체성이 소멸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통일이라고 하지만 본질은 교환가치입니다. 설령 사용가치를 갖는 경우조차도 그것은 하위개념으로서 교환가치의 구성요소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충격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사람도 상품인 한 교환관계에 놓이게 되고 당연히 상대적 가치로서 존재하게 됩니다. 위의 등식에서 쌀에 사람을 대입하면 그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1사람 = 구두 1켤레

이 등식의 의미가 매우 비인간적이란 것은 누구나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인격이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1사람 = 구두 10켤레>라 하더라도 인격이 배려된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등가물이 구두10켤레가 아니라 <연봉 1억>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십중팔구 이 등식의 비인간적 의미를 읽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사람을 읽는 일반적 관점이 되고 있습니다.

상품의 가치표현 형태는 역사적으로 ‘등가물’→‘일반적 등가물’→‘화폐’라는 발전과정을 거쳐 왔습니다. 구두라는 등가물이 화폐로 바뀌는 경우 이 좌우항의 권력은 역전됩니다. 화폐가 출현하면 상품사회의 문화와 의식구조는 상품구조로부터 화폐구조로 전환됩니다. 화폐는 상품의 아들이었으나 상품으로부터 독립하여 그것을 지배하는‘상품의 주인’으로 군림합니다.
가치의 화폐적 표현은 좌우항(左右項)의 불가역적(不可逆的) 관계의 선언이며 화폐권력의 선언입니다. 생산물뿐만 아니라 생산적 활동 그 자체에 대하여도 화폐가 권력을 행사합니다. 화폐화(貨幣化)될 수 없는 생산물이 그랬던 것처럼 화폐화되기 어려운 생산 활동은 점차 소멸됩니다. 자신의 능력을 화폐화할 수 없는 사람은 도태됩니다. 생산능력보다는  생산물을 화폐화하는 능력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지적(知的) 활동보다 그것을 파는 정치적 활동이 중요해지고 예술적 활동보다는 그것을 비싼 값에 화폐화할 수 있는 경영능력이 중요해집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상품사회라고 하는 것은 결국 화폐권력이 군림하는 사회라는 의미와 다름이 없습니다.
근대사회 역시 이러한 화폐권력을 기본 구조로 하고 있습니다.  홉스의 사회 계약론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국가권력과 인민이 맺고 있는 근대사회의 기본구조는 초월적 권력을 갖는 화폐에 의해 상품세계 전체가 하나로 통합되고 가치론적 질서를 획득하게 되는 화폐권력 구조와 다름이 없습니다. 아담 스미스의‘보이지 않는 손’역시 자유방임의 손이 아니라 화폐의 손입니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조화와 질서는 화폐권력이 지배하는 질서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것은 자유주의가 아니라 화폐권력에 의하여 자동화된 강제와 폭력의 개입 메커니즘입니다. 자유방임(Lesses faire)의 요구라든가 시장에 맡기라는 주장은 화폐권력에 일임하라는 요구와 같은 것입니다.
경제 불황과 공황이라는 충격적 경제현상 역시 이러한 화폐질서의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화폐의 승인을 받지 못한 가치, 다시 말하자면 팔리지 못하는 상품의 가치가 무효화되는 과정입니다. 그것은 화폐권력이 승인할 수 있는 크기로 가치가 재평가되거나 폐기되는 폭력적 과정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건은 상품이 지배하며, 상품은 화폐가 지배합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상품사회이고 상품의 최고형태가 자본이기 때문입니다. 상품은 물론 팔기 위한 것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윤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상품의 최고 형태인 화폐는 그런 의미에서 필연적으로 자기증식을 본질로 하는 자본이 됩니다. 상품에서 화폐로, 화폐에서 자본으로, 그리고 자본으로부터 자본축적 개념으로 나아가는 필연적 경로가 바로 자본주의 사회의 법칙적 운동구조입니다.